MEMORIZE RAW novel - Chapter 947
00946 If You Change, One. =========================================================================
철그렁, 철그렁!
격렬한 움직임 덕분인지 사슬이 맞부딪쳐 울리는 소음이 조용하던 공간을 왕왕 울렸다. 듣기 싫어도 귀를 긁는 철성에 한소영은 핏물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짓씹는다.
여태껏 사내의 신음은 단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음이라고는 쉴 틈 없이 부딪치는 사슬 소리와 간헐적으로 흐느끼는 여인의 신음뿐.
기실 거슬리는 기분에 초점을 맞추자면 사슬보다는 앓는 소리가 더 신경 쓰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소영은 눈을 뜨지 않는다.
왜냐면 사내가 보지 말아 달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어떤 기분으로 그 말을 했는지 절절히 느꼈으니까.
사실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달려가서 사내를 꼭 안고 괜찮다고, 무리하지 말라고 속삭이고 싶었다.
하지만 두 손목이 둘둘 묶인 채로는 그럴 수조차 없다. 그리고 멋대로 나서봤자 리리스가 반응할지도 의문이며, 까닥 잘못하면 사내의 희생이 물거품이 돼버릴 수도 있으니.
결국, 한소영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다. 마음 같아서는 눈만이 아니라 귀도 막고,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차단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초감각은 필요 이상이라 생각될 정도로 성실하게, 계속 정보를 전해주는 중이다.
결국에는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긴 시간 동안 홀로 방치된 채 이를 악물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어엉…. 어어어엉….”
좀 전까지만 해도 훌쩍거리는 듯했던 신음이 갑작스레 우는 소리로 변했다.
철그렁, 철그렁!
사슬 소리 또한 계속된다.
소음은 점차 잦아들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여인의 소리는 시끄러운 사슬에 곧 묻혔으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가히 좋지 않은, 아니 몹시 불길하기까지 한 기분.
잠시 갈등하기는 했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한소영은 눈에 살짝 힘을 주고 천천히 눈을 떴다.
“…….”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약 일 미터 앞으로 거무스름한 형상이 엎드려 있는 광경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눈을 감았는지 시야가 어렴풋하기 짝이 없다.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흐르고 진한 밤꽃 냄새가 풍기는 가운데, 한소영은 시야를 회복하려 애썼다. 그러자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변이 차츰차츰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잠시 후, 마침내 형상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한소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그것이 리리스라고 확신하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왜냐면 스스로 밤의 여왕이라며 자신만만해하던 대 악마는 온데간데없고, 눈물과 콧물, 그리고 정액으로 범벅이 된 가련한 여인만이 보였기 때문이다.
두 눈은 완전히 까뒤집어져 어디를 보는지도 모르고, 사지는 실 끊긴 듯한 인형처럼 덜컥덜컥 흔들리고 있다. 흡사 만취한 사람을 보는 듯하지만, 가끔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그만하라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 들어왔을 때를 상기하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리리스의 위로, 누군가가 등을 돌린 채 기계적으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
마침내 김수현까지 확인한 찰나, 한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터뜨리고 말았다.
머리를 푹 숙인 김수현은 쓰러진 리리스를 압박하듯이 깔아 짓뭉개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완전히 몰두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겉보기에는 그렇다.
“머, 머셔너리….”
그러나 한소영은, 한소영만큼은 다르다.
두 남녀의 관계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질투 따위가 아니었다. 심지어 안쓰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눈앞의 광경은 더 이상 섹스라고 보기도 어렵다. 리리스는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김수현에 한해서는 그랬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소영의 낯빛에 거미줄처럼 번지는 감정은 오히려 두려움에 가까웠다.
무어라 해야 할까.
슬픔은 괴로움으로,
괴로움은 체념으로,
체념은 비관으로,
비관은 자기혐오로,
자기혐오는 절망으로,
절망은 광기로,
그리고,
광기는 허무로….
온갖 마이너스한 감정이 김수현의 내부에서 넘쳐 흐르고 있다. 까닭 모를 눈물이 왈칵 터질 것만 같은 이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바닷속에서, 한소영은 불현듯 김수현의 붕괴를 직감했다. 여태껏 간신히 버텨왔던 무언가가 시시각각 스러져가고 있었다. 너무도, 한없이 허무하게.
만약 지금 하는 행위가 끝나고, 내부를 채우고 있는 감정이 빠져나가면, 그때 김수현은 어떻게 될까.
거기까지 인지한 순간,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은 처음으로 본능을 앞세워 소리 질렀다. 다른 것보다는, 오직 멈춰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머셔너리 로드! 머셔너리 로드!”
“사용자, 사용자 김수현!”
“김수혀언!”
“…야!”
워낙 급한 마음에 얼떨결에 반말이 나왔다.
허나 그런 만큼 효과는 있었던 걸까.
몇 번이나 부르고 부른 끝에, 겨우 외침이 닿았다. 끊임없이 움직이던 허리가 움찔 멈췄다는 게 그 방증이었다.
그러나 지성은 이미 저편으로 날아갔는지, 김수현은 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동자는 보는 이가 오싹해질 만치 시린 냉기를 풀풀 날리고 있다.
“그만…. 이제 그만하세요…. 제발….”
그러나 숫제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자, 언뜻 얼떨떨한 빛이 스쳤다. 그리고 비로소 한소영을 돌아본 순간, 홀린 듯한 멍한 얼굴에서 반쯤은 얼이 빠졌다. 벼랑 끝으로 치달리기 직전, 한순간이나마 이성이 돌아온 것이다.
“이, 이스탄텔….”
흡사 자기 자신도 뭘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한 반문.
그러나 한소영은 이해 따위는 집어 던지고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무엇보다, 두 번째로 보는 한소영의 그렁그렁한 눈물은 김수현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흐에…. 흐에에에….”
그렇게 김수현이 충격에서 헤어나오는 동안, 리리스는 정신없이 꺽꺽거리는 와중에도 본능에 따라 손을 허우적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겨우겨우 상반신만 들더니 엉금엉금 도망치기 시작한다. 김수현의 행위가 멈추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더 버틸 수 없으니 도망치라고.
가는 도중 몇 번이나 힘없이 비틀거리고, 또 음부에서 흘러나오는 정액 뭉치가 바닥에 실 가락처럼 수놓아지는 광경은 몹시 비참하다. 그래도 살고자 하는 의지는 남아 있었는지 리리스는 필사적으로 기어나가 기어코 자취를 감췄다.
그리하여 다시 둘만 남게 되고, 철그렁거리던 소음도 사라지자, 공간은 다시금 적막을 되찾았다.
한소영은 힘껏 숨을 들이켜 속을 추슬렀다.
“머셔너리 로드.”
그리고 거친 숨을 뱉어내며 말한 후,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얼굴로 김수현을 응시했다.
“저, 저는….”
김수현이 말을 더듬거렸다.
“괜찮아요. 다 끝났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한소영은 진정하라는 듯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으나, 김수현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마치 이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처럼.
사실 그것은 한소영도 매 한 가지였다. 단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이끌려 말할 뿐.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그냥 나오는 대로 입을 열었다.
“저한테…. 저한테 가까이 와주시겠어요?”
“예, 예?”
“이쪽으로 와주세요. 제발.”
“…….”
김수현은 흠칫 떨며 그답지 않게 불안해했으나, 한소영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절박함이 실려 있었다.
아직 김수현의 사지에는 사슬이 묶여 있었으나, 처음과 달리 상당히 느슨해진 상태였다. 관계를 수월하게 맺기 위해 리리스가 꽤 길게 늘인 탓이다. 물론 공간을 왕복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한소영에게 닿기까지는 충분한 거리였다.
결국에는 주춤주춤하면서 조심스레 다가가자, 한소영은 이곳에 누우라는 듯 얼른 양 무릎을 모았다.
그러자 이왕 내친 김이었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아직도 정신이 없었던 걸까. 혹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던 걸까. 잠깐 멈칫하기는 했지만, 김수현은 순순히 한소영의 허벅지에 머리를 뉘였다. 그리고 참았던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만약 김수현이 리리스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면, 자기가 당할 수도 있었다는 것쯤은 한소영도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 인사였으나, 김수현의 대답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한소영의 허벅지를 베고 웅크린 채 조용히 눈만 감고 있을 뿐.
딱 하나 달라지는 점이 있다면,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빛무리를 발하던 반지의 빛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한소영은 수도 없이 입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원망했다. 무어라 위로의 말이라도 하고 싶어 애는 타는데, 머릿속이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다. 하기야 지금껏 위로라고는 제대로 해본 적도 없으니 말문이 열리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꼭 안아줄 수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클랜 로드.”
잠든 줄만 알았던 김수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네.”
한소영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하나는 안도감. 들려오는 음성은 아까보다 확연히 가라앉아 조금이나마 흥분을 진정한 듯하다.
한데, 한편으로는 묘한 기시감도 느껴졌다. 항상 이스탄텔 로우 로드라고 불렀는데 갑자기 클랜 로드라고 부르니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인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한 번 겪어본 것 같았다.
“아주 예전에 말입니다.”
그러나 김수현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눈을 감은 채로 말을 이었다.
“옛날…. 아마 약 십오 년 전의 일일 겁니다.”
“십오 년 전이요?”
“예. 제가 현재 오 년 차니까, 아마 그쯤 됐을 겁니다.”
“…….”
그 순간 한소영은 조용히 침묵했다.
“현대에서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 사내는 군인이었죠. 이 년 동안의 군 생활을 끝내고, 전역 신고도 마치고, 붕 뜬 기분으로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약간 뜬금없는 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일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아까 하려다가 만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스쳤다.
홀가분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전날 과음을 한 탓일까요. 그때는 제가 술이 엄청나게 약했거든요.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주제에, 전역하는 날 새벽에 행보관의 부름을 받고, 둘이서 치킨이랑 맥주를 양껏 먹고 마셨지요. 그래서인지 좌석에 앉자마자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기분 좋게 자고 눈을 떠보니…. 서울역이 아니라, 소환의 방이라는 웬 이상한 공간에 누워 있더군요.”
“……!”
*
한편, 북 대륙에서는….
동이 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청명했으나, 아틀란타는 무슨 일인이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어젯밤까지만 해도 축 처져 있던 도시의 분위기가, 하룻밤 새 완전히 달라졌다. 물론 밝고 희망차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활기라고 부를만한 기운은 분명히 돌고 있었다.
“이 방법은…. 진짜 기발한 데요.”
그때 소란의 근원지를 지그시 응시하던 고연주가 어이없다는 듯이 감탄을 터뜨렸다.
“나도 나도. 그동안 워낙 심하게 금기로 여겨지다 보니,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어.”
옆에 서 있던 이유정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아주 살짝 걸려 있다.
거듭 말하지만,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과연 어떻게 이렇게 하루 만에 분위기가 반전한 걸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두 여인의 감탄에 사내의 낮은 음성이 회답한다. 김유현의 목소리였다. 곧 어딘가로 떠나려는 사람처럼 로브에 꿰인 끈을 질끈 묶으며 담담히 말을 잇는다.
“제가 한 건 계획을 내세운 것뿐. 사용자 이유정은 계획을 한층 보강해줬고, 사용자 고연주는 솔선수범으로 계획의 실현을 이끌어줬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감사해야 할 건 저겠지요.”
이어지는 칭찬에 놀랍게도 이유정이 몸을 배배 꼰다.
“아, 아니…. 저는 그냥…. 예전에 했던 일이 생각나서 말씀드린 것뿐인데….”
고연주도 빙그레 미소 지으며 눈을 찡긋한다.
“호호. 저뿐만이 아니죠. 다은이와 마르도 동참해줬는데요.”
가벼운 너스레에 김유현도 싱겁게 웃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 이제 곧….’
그렇게 한동안 먼 곳을 응시했다가, 다시 두 여인을 바라봤다.
“그럼…. 나머지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고연주는 살짝 주먹을 쥐었다.
“네. 남은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돌아오실 즈음이면 전부 준비돼 있을 거니까.”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는 대답에 김유현을 차분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신속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강철 산맥으로.
============================ 작품 후기 ============================
참…. 오늘 하루 굉장히 바빴습니다.
설상가상이라고, 일이 하나 터지니까 연달아서 뻥뻥 터지네요.
이번 주는 잘못하면 내내 바쁠 것 같아요.
좀 빨리 처리되면 좋을 텐데…. ^^;
아, 그리고 김수현과 화정의 일러스트가 점차 완성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아마 머지 않아 보여드릴 수 있을 듯해요.
화정도 무척 예쁘지만, 개인적으로는 김수현이 더 마음에 듭니다.
굉장히 잘생기게(?) 나왔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