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54
00953 If You Change, One. =========================================================================
한편, 같은 시각.
요정 진영은 약속의 신전을 기준으로 우측에 편재된 상태였다. 에르윈의 지휘 아래, 전령이 오는 즉시 적의 측면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요정 장로는 맹세의 검이 발동하기 전까지 차분히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웅성웅성.
맹세의 검 발동 전후로 요정 진영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저, 저분은…?”
“말도 안 돼….”
전운으로 긴장된 분위기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요정들의 시선은 모조리 한 곳으로 쏠렸으며, 얼굴빛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심지어 어느 요정은 땅에 털썩 주저앉더니 멍하니 입을 벌리기까지 했다.
“……!”
깜짝 놀라 달려오는 장로도 마찬가지. 약 십 미터 밖으로 자신들을 지그시 응시하는 요정을 보자마자 동작이 우뚝 멎으며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이게…. 무슨…?”
황망해 함은 물론, 목소리조차 떨려 나온다. 순간적으로 무릎이 꺾였으나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장로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느 요정보다 지고지순했던 마르가리타의 기운을.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가 자신들이 여태껏 그토록 찾아 헤매왔던 전대 요정 여왕의 적통이라는 사실을.
“아니야….”
단지.
“이럴 리 없어…. 분명히 니뮤에가 억류돼 있다고….”
너무나 갑작스럽게 맞이한 사태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
“쯧.”
그 순간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귓전을 예리하게 찔러와 장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윽고 마르가 무섭게 노려보며 한 걸음 내디디니 요정 전원이 동시에 한 걸음 물러난다.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떠는 요정도 하나둘 생겨났다. 상대가 뿌리는 기운은 친숙하게 느껴지는 한편, 온몸을 짓누르듯 강하게 압박해오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고개 처박고 빌빌 기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는 요정이라는 종족이 원래 갖는 본성에 기인한다.
요정에게 있어 여왕이라 함은, 태어날 때부터 공경하며 두려워하는 무조건적인 경외의 대상이다. 그리고 마르는 더 이상 천진난만한 아이가 아니다. 가시나무 관의 통과의례를 거친 이후, 그녀는 더없이 확실한 요정의 여왕으로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지금 마르의 정수리에 얹힌 가시나무 관이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여왕을 찾겠다는 일념은 이해하나…. 설마 수백 년이 넘게 매달리는 동안 진실의 눈마저 가려졌을 줄은. 니뮤에한테 조금 듣기는 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실로 안타까워요.”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만남이 이루어졌으나 마르의 음성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하기야 아무리 같은 종족이며 앞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처지라손 쳐도, 마르의 눈에 저들이 곱게 보일 리가 만무하다. 왜냐면 사랑해 마지 않는 아빠가 붙잡힌 것에는 요정들도 커다랗게 일조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에요! 에르윈도 그랬고, 저도 몇 번이나 확인했다는 말이에요! 분명히…!”
허겁지겁 말을 잇던 장로가 돌연 아연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왜 필사적으로 변명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인즉 코앞에서 보고 있으나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미, 믿을 수 없어요. 그래요. 어쩌면 당신이 가시나무 관을 강제로 빼앗았을 수도….”
스스로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장로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안간힘을 다해 부인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일 년도 아니고 십 년도 아니다. 자그마치 팔백 년이 넘는다. 한데, 그토록 찾았던 여왕이 이런 장소에서 갑자기 떡하고 나타나면 과연 누가 ‘아. 그렇구나.’ 하고 바로 믿을 수 있을까.
허나 애초 첫 만남부터 단단히 어긋난 상태였다. 저번 전쟁이 끝난 후, 동족이 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까닭 모를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마르로서는, 그런 사정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왕이고 뭐고 깡그리 때려 치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정말 한심해요. 생각하는 수준이 그 정도니 자기들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지요.”
마르치고는 드물게도 독설이 튀어나왔다. 이어서 두 눈동자에 진한 실망의 빛이 어리자, 장로는 갑작스레 가슴이 심히 미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 잠시만요! 잠시만 제 말을 들어주세요!”
장로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으나,
“아니요. 더는 듣지 않겠어요. 현재의 당신들은….”
마르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여왕을 모실 자격조차 없는 이들이에요.”
그러더니 하늘로 오연히 오른팔 뻗는다.
“신격, 루미너스의 절대자.”
화아아악!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비치더니 마르가 서 있는 장소를 환히 물들였다.
“일체화.”
또 한 번 곧바로 말을 잇자마자,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마르의 전신을 나선으로 휘감아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이윽고 휘몰아치는 빛의 소용돌이는 엄청난 속도로 마르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에 따라 마르의 모습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얼굴, 양팔, 몸, 두 다리 등이 모조리 하얀색으로 채색되는 동시에 온몸이 기하급수로 자라나기 시작한다.
흡사 거인, 아니 그 이상으로 커지는 마르의 형상에 요정들은 물론, 맹세의 검으로 몰렸던 전장의 시선이 모조리 하늘로 올라갔다.
“아…. 아아….”
장로는 순식간에 십 미터 이상으로 거대화된 존재를 앞에 두고 망연한 침음만 흘리다가, 종래에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비단 장로뿐만 아니라 오래 산 요정들은 대부분이 비슷한 반응이었다. 왜냐면 서서히 제대로 된 형상을 갖춰가는 빛무리를 보며 누군가의 모습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저 모습을 어찌 모를 수 있으랴.
빛과 어둠의 정령 신, 루미너스(Luminous).
그리고 그 루미너스와의 일체화.
아득한 옛날, 역대 최고라 칭송받은 초대 여왕만이 가능했던. 그러나 그나마도 스스로 침식을 이기지 못해 꽁꽁 봉인하고 말았다는 능력.
오직 전설로만 내려왔던 기록 속의 한 구절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재현된 것이다.
“여왕이시여어어어!”
마침내 장로가 애달프게 부르짖으며 털썩 무릎 꿇어 엎드렸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망연히 올려다보던 모든 요정이 일제히 무릎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새로운 여왕의 탄생과 신의 강림, 그리고 요정의 경배를 받는 광경은 절경이라 봐도 좋을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하다.
그때.
우우우웅!
불현듯 강대하기 그지없는 마력이 천지를 울리며 흐르자, 땅을 쳐다보고 있던 장로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마르는 분명히 ‘여왕을 모실 자격이 없다.’ 고 말했다. 즉 저 기운이 누구를 향하는지 안 봐도 훤하다.
“여왕이시여!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결국, 장로는 목이 터지라 외치며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루미너스의 재현까지 확인한 이상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부디, 부디 분노를 거두어주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의 회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기운은 한층 거대해져만 가자, 숫제 이마를 쿵 찧으면서까지 외쳤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종족을 잘못 이끌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오직 저를 따른 죄밖에 없으니, 제발…!”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로는 순간 전신의 털끝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이어서 주변 풍경마저 가릴 정도의 찬란한 빛이 부지불식간에 드리워지자, 장로는 더 말할 생각도 못 한 채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긴 탓이다.
이제야 겨우 여왕님을 만났건만, 한순간의 실수로 팔백 년의 꿈이 물거품이 돼버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 제 아버지는….
홀연 웅혼한 음성이 귓전을 부드러이 울리는 동시.
“…아?”
장로가 의아한 탄식을 질렀다.
꼼짝없이 빛에 삼켜져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기는커녕, 어머니의 손길 같은 무언가가 온몸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었으니.
–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면 가장 먼저, 언제나 앞장서서 그 일을 해결하시고는 하셨어요. 분노하시거나 처벌하시는 건 항상 그 다음이었죠.
이어지는 음성에 스리슬쩍 눈을 뜬 요정들은, 순간 깜짝 놀라 탄성을 질렀다. 왜냐면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온몸에 은은한 빛깔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겉보기만 변한 게 아니다.
다음 순간, 왜인지 요정들이 아연한 얼굴을 하면서도 하나같이 두 눈을 더듬거리기 시작한다.
–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고 싶나요?
그때였다.
번쩍!
찰나의 순간, 공포로 얼룩져 있던 요정들의 눈동자가 선명한 색을 뿜는다.
요정의 동태가 이상하다는 소식을 접한 에르윈이 도착한 것도 바로 그 즈음이었다.
– 그렇다면, 고개를 들어요.
들려오는 것은 세상에 강림한 신의 음성뿐.
이상한 일이었다.
좀 점까지만 해도 어수선하던 일대가, 한순간 보고만 있음에도 숨이 턱 막혀올 만큼 적막해졌다. 심지어 괴괴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무거운 분위기가 흐른다.
– 자리에서 일어나, 진실을 추구하는 눈으로 직시하세요.
단지, 에르윈은 거의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
– 그리고 깨달으세요.
다음 순간, 요정 전원이 무언가에 홀린 듯 하나씩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선연히 빛나는 눈동자로 상대를 응시한다.
이윽고 뜻 모를 묵직함마저 느껴지는 수천 쌍의 눈초리와 마주하는 순간.
“……!”
신화 속의 거주민들이 등장했을 때도 이성을 잃지 않았던 에르윈은, 태어나 처음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단단한 망치로 뒤통수를 수십 번이나 후려 맞으면 이럴까. 설마 요정 여왕이 출현한 줄 몰랐던 사탄으로서는 그야말로 꿈에도 꾸지 못한 상황이다.
하다못해 알고 있기라도 했으면 사전에 대비책이라도 마련해 놨을 터.
동 대륙 전투 도중, 안솔이 기를 쓰고 숨겼던 마르의 존재가 드디어 빛을 발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시작되었다.
– 그대들의, 우리의 적은 바로 저기 있어요.
여왕의 힘으로 새로이 각성한 요정 일천 명과, 소환 정령들.
– 적이었단 상대를 아군으로 만든다…. 그것도 전장에서. 훌륭하군요.
은인과의 약속을 지키러 달려온 영웅들의 영혼, 육천.
크롸롸롸롸롸롸롸!
거인 멸망 후 강철 산맥의 지배자가 된 괴조 군단, 구백 마리.
“하! 이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소원으로 되살아난 구 북 대륙 정예 사용자, 삼천 명.
“…….”
현 북 대륙 정예 사용자 사천오백 명.
그리하여.
“…전군.”
최후의 전쟁에 앞서,
“전투 준비.”
악마 연합군에 대항하는, 사상 초유의 북 대륙 연합군이 마침내 탄생했다.
============================ 작품 후기 ============================
몇몇 독자 분들이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아, 바로 알려드리고자 후기를 빌립니다.
839회부터 시작해서, 현재 진행 중인 에피소드의 구분은 오름차순이 아니라 내림차순으로 가는 중입니다. 즉 앞선 에피소드 8 ~ 2까지는 이미 전부 나왔다는 뜻이지요.(소제목을 보시면 아실 듯합니다.)
즉.
에피소드 8 : 839회 ~ 845회
에피소드 7 : 846회 ~ 853회
에피소드 6 : 854회 ~ 860회
에피소드 5 : 861회 ~ 866회
에피소드 4 : 867회 ~ 881회
에피소드 3 : 882회 ~ 911회
에피소드 2 : 912회 ~ 937회(919회 외전 제외)
에피소드 1 : 938회 ~ 현재 연재 중.
이렇게 가고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에피소드 1도 아마 다음 주 안으로 끝날 것 같고요. 그래서 어제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부디 충분한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