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58
00957 If You Change, One. =========================================================================
쾅!
가장 먼저 발생한 현상은 땅을 쪼갤 듯이 내리꽂힌 빛의 기둥이었다.
“무슨…!”
충격에 덜컹 흔들리는 단상 위에서 김수현이 경악성을 내지른다. 한껏 치켜 올라간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왜냐면 차츰차츰 천사의 형상으로 변하는 빛의 기둥은 하나의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광휘의 사제 최후의 권능, 기적이 발동됐다.
웅웅웅웅웅웅웅웅!
다음 순간 타나토스의 주변으로 떨어진 상자들이 일제히 희멀건 한 빛을 뿜었다. 웅혼한 진동음을 동반한 눈부신 빛깔을 뿌리는 마법 진들이 공중으로 우후죽순 솟구친다. 그 수만 해도 무려 수십 개. 내리쬐는 빛살이 어찌나 강렬한지 일대가 삽시간에 광(光)으로 채색된다. 아차 하는 찰나 일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하얗게 일색 된 세상에 간절히 바라는 듯한 외침이 하늘에서 아스라하게 울려 퍼졌다.
여기까지 한 십 초는 걸렸을까. 그야말로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다. 거기다 전장에 뿌리 내린 빛무리는 코앞의 상대가 가려질 정도로 휘황찬란해 저절로 행동을 멈추고 위로 시선을 빼앗긴다. 심지어 타나토스조차도.
여전히 희기만 한 시야 속에서 에르윈은 간신히 시력을 높여 하늘을 노려봤다. 그리고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불꽃을 튀기며 힘차게 회전하는 마법 진들. 예전 루시퍼와 같이 영상을 구경했을 때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천사가 등장한 것과 마법 진을 구성하는 형식이 제멋대로 변화하는 것까지는 같다. 그러나 빙그르르 돌아가는 수십의 진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진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현상은 에르윈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잠시 후, 광활한 하늘을 뒤덮는 방대한 원진이 또 한 번 찬란한 빛을 토해냈다. 안 그래도 희미하던 시야에 한층 강한 광파가 번쩍이자, 죽어라 쏘아보던 에르윈도 결국 견디지 못해 눈을 감는다.
그와 동시에 장내는 시야도 소리도 아득하게 멀어져, 오직 기이한 공명만이 흐르는 기괴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 상태로 약 삼십 초쯤 지났을 무렵, 새로이 배열된 마법 진이 차곡차곡 응축해온 기운을 일거에 터뜨렸다.
꿍!
천지가 비명을 질렀다. 와르르 흔들리는 땅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깡그리 넘어진다. 약속의 신전도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이 건물 전체가 진동한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던 무시무시한 존재의 소환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미증유의 기운이 해일처럼 사방을 휩쓸기 시작한다.
꿍!
이윽고 한 번 더 굉음이 울리는 찰나.
“……!”
전장에 존재하는 전원의 뇌리로 공통된 감각이 스쳤다.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정확히는 쉴 틈 없이 몰아치던 현상이 갑작스레 가라앉았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던 강력한 변동이 단 한 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아…. 하아….”
그저 버티기만 했을 뿐인데 호흡이 한껏 거칠어져 있다. 숨소리는 귀가 아니라 몸 안에서 울리는 것 같다.
안솔은 입 밖으로 역류하려는 침을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겨우 정신을 추스르며 힘겹게 고개를 젖혔다. 시야가 가물거리는 건 아직 빛의 여파가 남아서일까, 아니면 눈이 적응하지 못해서일까. 여하튼 무언가 작달막한 형상이 흐릿한 잔상이 스민 하늘 사이로 하강하는 것이 눈에 밟힌다.
그 순간 안솔은 불현듯 의문을 느꼈다. 마구잡이로 던지기는 했으나 개봉한 ‘괴물 소환 상자 4’의 수는 적어도 수십 개에 달한다. 한데 어째서 보이는 건 하나뿐일까.
혹시 다른 곳에 소환된 건가 싶어 곳곳으로 시선을 뿌릴 무렵, 강제로 소환된 존재가 땅으로 사뿐 안착한다. 에르윈과 안솔은 동시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아!”
안솔은 순간 허망하기 그지없는 기색을 비쳤다.
“하…?”
에르윈은 약간 어이없다는 듯 두 눈을 조용히 치떴다.
분명한 건 수십 개의 상자를 투자해 소환된 존재는 단 하나. 그 실체는 오벨로 기사단이 아니다. 심지어 게헨나도 아니었다.
이제 갓 서너 살, 아니 너덧 살은 됐을까. 양 갈래로 예쁘게 묶어 정리한 용암 색 머리카락. 피보다 더욱 진한 빛을 발하는 동그란 두 눈동자. 고사리 같은 검지는 작고 도톰한 아랫입술에 살짝 얹혀 있다.
“어, 어라?”
약간 멍멍한 기색으로 고개를 휘휘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는 존재는 유치원생보다 어려 보이는 굉장히 어여쁜 여아였다.
“하…. 하하….”
안솔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반쯤 일으켰던 몸이 도로 풀썩 주저앉는다.
기적, Blue Dahlia, 바라는 대로를 모조리 동원한 상자 동시 개봉은 대 타나토스 용으로 생각한 비장의 수였다.
할 수만 있다면 지옥의 마수 군단을 모조리 소환해달라고 빌었을 터였다. 최소한 그 많은 상자 중 하나 정도는 저번처럼 게헨나를 소환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가 고작 처음 보는 여아 한 명이라니. 힘이 빠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안솔의 사고는 상대의 정보를 손톱만큼도 모르고 있기에 나온 생각이다.
실제로 여아가 지옥의 여덟 구간을 관할하는 절대자라는 걸.
홀 플레인 최강이라는 게헨나조차도 고개를 조아리는 존재라는 걸.
손가락 한 번 튕김으로써 게헨나뿐만이 아니라 육십육 마수 군단 전부를 소환할 수 있다는 걸.
그러므로 바람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진배없다는 사실을 안솔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야?”
그러거나 말거나 여아는 이미 한창 스스로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으응. 정말 이상하네…. 에, 그러니까…. 베히모스는 보고가 끝나자마자 다시 소환됐고…. 게헨나한테 아빠한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 지시하는 중이었는데….”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자못 황망해 마지않던 눈동자는,
“…어? 너희는….”
안솔과 머셔너리 클랜이 있는 곳을 보자마자 휘둥그레졌다.
“으응? 너희도?”
어느새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아라냐와 임프리손도 발견했다. 이어서 인근에서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딱딱히 굳은 베히모스까지 확인한 순간이었다.
“아!”
돌연 여아의 눈이 번쩍 떠지더니 자그맣게 주먹 쥔 손을 손바닥에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부딪쳤다. 그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뉘 집 딸이길래 이리 똑똑한지 벌써 상황 파악을 끝낸 듯싶다.
“우와 신기해. 나 정도가 강제로 소환되는 경우가 있기는 있구나…. 아차!”
그러다 문득 미소를 싹 지우고 짐짓 근엄 표정을 짓는다. 한껏 무게를 잡으며 적막해진 공간을 위엄 넘치게 가로지르더니(사실 아장아장 걸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주저앉은 안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좀 전까지 핏물이 튀기던 전장이다. 한데 조금도 개의치 않고 걸은 걸 보면 확실히 여간내기는 아닌 듯하다.
그리하여 전장의 시선이 모조리 쏠리는 가운데.
“흠!”
앙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여아가 어울리지 않는 헛기침을 하며 양손을 옆구리에 척 짚는다. 한껏 눈을 내리뜨는 모양새가 퍽 거만해 보인다. 그러니 안솔의 정수리로 오랜만에 물음표가 동동 떠오르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잠시 후, 여아는 자못 오연한 음성으로, 그러나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낯설지 않은 낯짝이로다. 아무튼, 네놈이 날 소환한 장본인인가?”
안솔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리자 여아가 지엄한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실로 어이가 없도다! 겨우 시간을 내 한가로운 때를 보내는 중이었건만…. 감이 이 몸을 소환한 죄는 천 번 만 번 죽어 마땅하다!”
아니. 새빨간 거짓말이다. 한가로운 때는커녕, 베히모스의 보고를 받고 아빠가 어떻게 될까 봐 시시각각 초조해 하는 중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타나토스와 악마라는 종족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아까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게헨나더러 방법을 총동원해 중간 세계로 가는 방법을 찾으라 했다고.
“…허나! 어쨌든 한두 번 본 정리도 있는 만큼 말을 들어볼 여지는 있을 터. 아뢰어 보아라! 우선 들어보고 판단하겠다.”
“?”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자꾸 요망한 갈고리 표시만 띄우는 것이냐? 그니까 울 아빠 어디쪄…. 아니! 한 번 들어보고, 까짓거 힘을 빌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는 뜻이다!”
“?”
정리해보면 아빠가 어디 있는지 빨리 뱉으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안솔은 전혀 이해 못 했다는 얼굴로 물음표 공세만 펼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하지만….”
“흥. 죄송이라.”
“누구세요?”
“그래, 당연히 죄송해…. 으, 응?”
여아의 얼굴에 순간 떨떠름한 빛이 스쳤다. 하지만 영리하기 그지없는 머리는 ‘나는 상대를 알고 있으나 상대는 나를 모르고 있다.’ 는 사실을 금세 인지했다. 이윽고 여아의 통통한 볼이 발그스름해지더니 순간 팍 인상을 쓴다.
“이이이익!”
그 순간 몇몇 클랜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전매특허인 이익이익을 듣자 떠오르는 아기가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어? 잠깐만!”
말인즉 비로소 여아의 정체가 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 혹시…?”
“이 바보들아! 나야 나! 나잖아! 고작 얼마 지났다고 벌써 잊어버린 거야?”
앙증맞게도 소리 지르더니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쏘아본다.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수치심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기실 아기 때보다 몸이 자란 이면에는, 수나가 김수현의 기록 구슬을 받고 분노를 거둔 후, 게헨나의 가르침 아래 진정한 왕으로서 일 차 각성을 완료했다는 점이 숨어 있었다. 이러니 한 번에 못 알아보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그때였다.
“꼬맹이 아가씨? 잠깐만?”
불현듯 낮은 음성이 들리며 누군가 수나의 아담한 어깨를 짚는다.
“아까부터 뭘 혼자서 쫑알거리는지는 모르겠는데….”
어깨너머로 살금살금 얼굴을 들이미는 여인은 다름 아닌 타나토스였다.
“언니가 슬슬 기분이 더러워지려고 하거든? 여기는요. 네 놀이터가 아니에요.”
얼굴은 웃고 있고 목소리도 상냥하지만 왜인지 암암리에 살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제 좀 신 나게 날뛰려고 하는데, 자꾸 이상한 일이 터져 전장이 멈추니 자못 기분이 거슬린 탓이다.
그러나.
“…이 덜떨어진 멍청이는 또 뭐야? 안 그래도 기분 나빠 죽겠는데.”
아무리 격 높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라도.
“그리고 어깨에 손 치워! 너 따위가 어디서 감히 손을 올리는 거야?”
“…뭐?”
단언컨대, 이번만큼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 작품 후기 ============================
월요일 휴재의 유혹을 뿌리치고 어찌어찌 연재에 성공했습니다….
월요병을 이겨냈어요. 뿌듯하네요.
…가 아니라, 휴재는 8월 12일(수요일)에 하겠습니다. 실은 그때 중요한 약속이 하나 생겨서요. ^^;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활기찬 월요일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