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64
00963 If You Change, One. =========================================================================
아래가 아니라 왼쪽으로.
왜냐면 옥신각신하는 틈을 타, 누군가 모종의 행동을 하려는 낌새를 느꼈다고 화정이 말해줬기 때문이다.
그 찰나의 순간.
쯔우우웅!
난 속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냥 단순히 칼을 힘껏 휘둘렀을 뿐이다. 한데 대기를 가르는 느낌부터가 달라졌다. 흡사 가위 안쪽으로 종이를 자르듯 썩썩한 감각이 손을 시원하게 스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현듯 정체 모를 반발력에 손아귀가 한층 묵직해지더니 칼이 소리 없이 폭발하는 감각이 전해졌다. 불쑥 뽑힌 불그스름한 빛을 띤 거대한 검기가 스리슬쩍 몸을 일으키는 누군가를 향해 거침없이 쇄도한다.
무언가 이상한 감을 느낀 걸까. 뒷걸음질을 치던 리리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입을 벌리는 것과 방출한 기운이 명중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화르르르르르르르!
그 다음에 발생한 현상은.
“……!”
스스로 해놓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악적이었다.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불길은 적중한 부분으로부터 단숨에 리리스의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더니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삽시간에 시뻘겋게 물들였다.
그게 끝이었다.
활활 타오르던 불이 사그라졌을 때 남은 건 허공에 흩날리는 한 줌의 재뿐이었다. 본 그대로 찍소리도 못하고 깡그리 녹아내린 것이다.
“…….”
방금 장면은 아마 평소 출력의 일곱 배인 마력과 엑스칼리버의 기운, 그리고 해방된 화정의 힘이 섞여 이루어낸 광경일 터.
이성은 그렇게 분석해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그저 그런 마족도 아니고 악마, 대 악마 리리스를 한 방에 소멸시켰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손을 움켰다. 내 힘에 굉장히 놀란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기분도 없잖아 있었다. 딴 놈은 몰라도 적어도 리리스는 진심으로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했는데….
“김수혀어어언!”
그때 분노에 찬 괴성이 들리며 한 기척이 갑작스럽게 가까워졌다. 몸을 한껏 굽힌 채 돌진해오는 이는 바로 아스타로트였다.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흑염에 휩싸인 주먹을 필사적으로 뻗는다.
그러나 시야에 포착하는 순간 왜인지 상대의 동작이 파노라마 흐르듯 한없이 느릿하게 보였다. 하여 머리를 젖혀 얼굴을 노리는 공격을 스치게 한 후, 아스타로트가 들어오는 때에 맞춰 왼 주먹을 마주 뻗었다.
이윽고 주먹이 상대의 가슴에 정확하게 꽂히는 찰나였다.
뻥!
처음 느낀 감각은 물이 가득 찬 풍선을 힘껏 쳐서 터뜨리는 듯한 감촉이었다. 푹 퍼진 시커먼 핏물이 폭풍 같은 바람에 동반돼 낯에 힘차게 부딪친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검은 줄기가 흘러내리는 시야로 허공을 훨훨 나는 아스타로트의 시체가 밟혔다.
…아니, 나도 모르게 시체라 표현하고 말았다. 왜냐면 가슴부터 복부까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으니까. 심지어 장기째로 터져 폭발했는지 구멍 건너편으로 허공이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끄르르르!”
잠시 후, 땅으로 털썩 떨어진 아스타로트의 몸이 펄떡펄떡 떨리기 시작했다. 두 눈은 한껏 까뒤집혔고 입은 거품을 토한다. 목숨은 용케 붙어 있는 것 같으나 저 상태로 살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간헐적으로 경련하던 아스타로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일 회차 때 죽기 직전까지 온갖 저주를 퍼붓던 과거와 비교하면 상당히 허망하고 비참한 최후였다.
혹시 하나 남은 목숨으로 부활할지도 몰라 바로 확인 사살을 준비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미처 기운을 쏘기도 전 아스타로트의 시체는 좀 전의 리리스처럼 한 줌의 재로 화해버렸으니까. 남은 건 대지에 고인 시커먼 핏물뿐이었다.
그렇게 확실히 소멸을 확인하는 순간 난 이번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황스럽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안이 벙벙하다고 해야 하나. 단순한 주먹질 한 번에 아스타로트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건 그냥 강해졌다는 한 마디로 설명이 되지 않는 기상천외한 무력이 아닌가.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1. 이름(Name) : 김수현(5년 차)
2. 클래스(Class) : 검의 군주(Arousal Secret, Sovereign Of Sword, Master)
3. 소속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S Zero)
5. 진명 • 국적 : 1. 정상(頂上) 2. 검의 군주(君主) 3. 마성(魔性)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29)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중용 • 혼돈(Moderation • Chaos)
사용자 정보, 특히 근력 능력치는 몇 번을 확인해도 받아들이기 자못 생소하다.
원래 내 순수 근력 능력치는 구십칠 포인트. 여기서 TOPG로 이 포인트, 수라마창으로 육 포인트, 엑스칼리버로 육 포인트. 총합 십사 포인트 상승으로 백십일 포인트를 찍었다. 백일 포인트만 넘어도 인간을 초월하는 영역으로 알고 있는데….
백십일 포인트는 십오 년 동안 사용자로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능력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이 두려워질 정도의 힘이다.
그때 정수리를 톡 건드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흥. 내가 봐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고. 방금 자칫 잘못했으면 저놈뿐만이 아니라 아군까지 죽을 뻔했으니까.”
…뭐라고? 즉 방금 일격은 화정이 개입해서 딱 아스타로트만 죽일 정도로 힘을 조절해줬다는 건가? 그럼 전력으로 하면 어느 정도라는 거지?
“생각해봐. 단순 수치로만 따져서, 저 애도 행운이라는 능력치로 차원 법칙을 극복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고 있잖아.”
흠. 안솔의 행운 능력치가 백오 포인트였던가?
“능력치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넌 무려 백십일 포인트라고. 이쯤 되면 차원 법칙을 극복하는 정도가 아니야.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지. 그러니 이런 놈들 따위는 애초…? 야. 이게 어디서 은근슬쩍 눈을 들어?”
깜짝 놀란 척하며 위를 올려다보려는 찰나, 화정이 가하는 관자놀이의 압박이 가일층 강해졌다. 아쉽다.
“진짜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아무튼, 넌 아직 네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감도 못 잡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더니 내 머리를 움켜잡고 강제로 시선을 돌린다.
“우선 저놈들은 어떻게 할 거야?”
화정이 보게 한 곳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정확히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날 보고 있는 서, 남 대륙 사용자들.
뭐 물어볼 것까지 있나. 내 처지에서는 저들도 공범이나 마찬가지다. 저놈들만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터.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살려줄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그리고 저들도 여기서 죽는 게 차라리 깔끔할 수도 있다. 설령 항복해서 목숨은 건진다손 쳐도 이후 남은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
“좋아. 그럼….”
그 순간 손목부터 팔뚝까지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기운이 얹혔다. 생각을 읽었는지 화정이 내 팔을 들어 정면을 겨누게 한 것이다.
난 그제야 화정의 신체 중 일부를 볼 수 있었다. 그래 봤자 팔 한쪽에 불과했지만, 맑은 불빛이 흐르는 고운 선은 왜인지 여성스러운 매력을 물씬 풍긴다.
“…집중해.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기본적인 원리는 신화계 권능과 똑같아. 네가 해야 할 건 의지만 담는 것뿐이야. 나머지는 내가 해. 무슨 말인지 알지?”
화정이 중얼거리는 가운에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간단한 말이다. 신화계 권능의 가장 큰 특징은 사용자가 어떤 식으로 힘을 발동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권한이 넓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같은 범위 내에 공격한다고 해도 아군과 적군을 따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 등등.
“좋아. 그렇게만 하면 돼. 그대로. 좀 더. 옳지, 옳지….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손끝으로부터 불 줄기가 무음으로 두 갈래 튀어나왔다. 각각 좌우로 쭉 뻗어 나가더니 일대를 빛살처럼 가로지르며 둥근 둘레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내 빙그르르 회전을 시작하자 적들도 현재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겨우 깨달은 듯싶었다.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불 줄기는 이미 장내를 고리 형태로 에워싼 채 무섭게 선회하고 있었다. 눈 깜짝하는 틈에 가속하며 차츰차츰 원의 범위를 좁혀간다. 이대로라면 저 불길의 원 안에 갇힌 적은 한 명도 남김없이 소멸할 것이다.
“아…!”
공교롭게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바로 아래서 엘도라의 탄식이 터졌다. 이어서 내 발목을 붙잡고 처절하게 늘어지기까지.
“안 돼! 그만둬! 저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잖아! 제발, 제발…!”
처절하리만치 울부짖었으나 이미 한참 늦었다. 불의 움직임은 거친 회전에 비해 몹시 고요하고 조용했다. 가장 외곽에 있던 사용자에 회전하는 불길이 스치는 순간 남는 것은 붉디붉은 안개뿐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전신으로 불이 옮아 붙는 동시에 몸이 녹으며 연기를 뿜는 것이지만, 일련의 과정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빨랐다. 한 명에서 두 명, 두 명에서 네 명, 네 명에서 열여섯 명, 열여섯 명에서 이백오십육 명….
“그, 그만두라고! 차라리 날 죽여! 이 악마 같은 자식아아아아!”
엘도라의 절규와 적들의 비명이 묘하게 어우러져 하모니를 울린다. 하지만 그 시끄러운 합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끊겼다. 소용돌이처럼 휘돌던 불의 고리는 원점에 닿은 순간 세찬 불꽃을 튀기며 사라졌으니까.
잠시 후.
시야로 보이는 건 얼떨떨한 얼굴로 휑한 전장을 돌아보는 아군뿐이었다. 여기까지 이르는 시간은 실제로 십 초도 걸리지 않았으나 체감상 몇 시간은 걸린 것 같았다.
“하….”
그냥 헛웃음만 나온다. 수천에 이르는 병력이 한순간 불에 녹아 소멸했다. 동시에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을 편집한다.’ 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우리엘이 왜 그토록 내 체력 상승을 두려워하고 반대했는지.
화정이 설정을 벗고 해방된 이상 천사나 악마 따위는 더 이상 상대도 되지 못한다. 이건 사기라고 말해도 부족할 정도다. 허탈할 정도로 쉽지 않은가.
…여하튼 마족 군단은 수나가 전멸시켰고 대 악마도 대부분 처리했다. 서, 남 대륙도 방금 소멸시켰고.
그럼 이제….
“아아아아아아아악!”
단말마처럼 들리는 괴성. 난 애타게 부르짖는 엘도라를 그대로 지나쳤다. 어차피 가만히 놔둬도 죽음은 기정사실이니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어 걸음은 스무 발자국이 되기 전에 멈췄다.
“…….”
에르윈은 아까 단상에서 떨어진 그대로 땅에 드러누워 있었다. 대자로 누운 채 한가로이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은 여유롭다기보다는 이미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보자 흐릿한 두 눈동자가 느릿하게 날 마주한다.
순간 기분이 어떠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고 어느새 느슨해진 칼자루를 꽉 쥐었다.
“죽기 전에….”
그때 에르윈이 입을 열었다.
“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난 대답 대신 에르윈의 목젖에 엑스칼리버를 겨눴다. 돌연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가슴은 아까부터 고동치고 있었으나 머릿속은 소름 끼칠 만큼 차분하다. 아랫배가 찡한 것 같기도 하다.
마침내 기대하고 기대하던 시간이 왔다. 얼마나 이 순간을 그려왔는가. 얼마나.
“글쎄. 난 너랑 별로 할 말이 없는데.”
내가 말하기는 했지만 몹시 차가운 음성이었다.
“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날 짜증 나게 했거든. …이번에도 그랬고.”
“……?”
“과거에도.”
“……!”
마지막 말은 누구도 들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에르윈은 순간적으로 흠칫 떨더니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마 사탄이라면 얼추 짐작은 하겠지. 나름의 배려라면 배려였다.
“…하.”
문득 사탄이 팔뚝을 교차해 얼굴을 가린다. 곧바로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흐흐…. 흐하하하….”
낮게 흐르는 소리. 양팔을 얼굴에 얹은 터라 어떤 표정인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웃음인지 울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랬군…. 그런 거였어….”
“뭐가 그렇게 웃기지?”
“응? 아아…. 실은 아까까지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거든. 다 끝났는데 이상할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
“방금 말을 듣자마자 그건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하하하.”
“…뭐 글쎄. 어차피 그때나 지금이나 결과는 똑같아서.”
그렇게 말한 나는
“그러니까.”
엑스칼리버를 하늘 높이 들며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끝내자. 이제 지긋지긋할 정도로 지겨우니까.”
그 순간 끊임없이 이어지던 사탄의 웃음이 뚝 멎었다. 얼굴은 여전히 두 팔로 가려져 있었다.
“피차일반이다. 사용자 김수현.”
결국,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건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였다.
그렇게 에르윈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난 엑스칼리버를 내리쳤다. 눈 부신 햇살을 반사하는 엑스칼리버는 공기를 가르며 힘차게 목으로 내려꽂혔다.
종막에 어울릴만한, 스스로 생각해도 매우 깔끔하고 멋진 일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