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65
00964 If You Change, One. =========================================================================
엑스칼리버의 칼끝이 에르윈의 목을 단숨에 찔렀다. 난 바로 뽑지 않고 강하게 비틀어 돌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화정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악마의 목숨이 두 개임을 고려해 한 번에 끝내기 위함이었다.
목젖이 꿰뚫렸음에도 에르윈은 몸부림은커녕 한 마디 입을 열지 않았다. 신음도 새지 않았다. 단지 두 눈을 크게 뜨며 부르르 경련했을 뿐.
이윽고 에르윈의 전신이 맑은 불길에 휩싸이더니 한 줌의 재가 되어 푹 흩날린다. 난 핏물조차 떨어지지 않는 칼을 들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
사실 여전히 멍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한 번에 너무 큰 힘을 얻었다. 적응 문제라기보다는 아마 허탈하다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온갖 고난을 거치며 간신히 오른 무대의 막이 너무 쉽게 내린 느낌이었다.
…스무 살 즈음인가. 영장을 받고 입대했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군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상상. 어서 나가고 싶다. 이년 후 전역하면 기분이 어떨까.
홀 플레인에 들어오고 나서도 비슷했다. 한 시라도 빨리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고 편안해지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순간이 찾아온 지금.
“…하.”
모르겠다. 전역하고 부대를 나올 때는 그냥 붕 뜬 것 같았는데 그때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알겠다.
마침내.
“끝난 건가.”
쾅!
라고 말하는 찰나, 느닷없이 커다란 폭음이 귀를 때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시커먼 기운이 연기처럼 뭉게뭉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왜냐면 연기 속에서 뒤로 쭉 밀려나는 이가 바로 게헨나였기 때문이다. 타나토스는 심히 비틀거리면서도 뒷걸음질 치는 게헨나를 불침 맞은 멧돼지처럼 뒤쫓는 중이다.
말도 안 돼. 게헨나가 밀리고 있다고?
“게헨나!”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외치는 순간, 난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날 흘끗 흘긴 게헨나의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을.
꽝!
다음 순간 타나토스의 공격이 또 한 번 적중했다. 게헨나의 복부가 반으로 접히더니 하늘을 훨훨 날아 땅을 구른다. 거기까지 확인했을 때 내 몸은 이미 그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게헨나?”
“읔. 그, 그대여….”
게헨나는 간신히 상반신만 들더니 분한 기색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더니 돌연 한없이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기다렸다는 듯이 얻어맞은 복부를 가리켰다.
“쟤, 쟤가 날 때렸다.”
“…응?”
“타나토스가 날 막 때렸느니라. 난 계속 당하기만 했다.”
“…….”
그런 것치고 상처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게 좀 이상하다. 어쨌든 방금 밀리는 광경은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뒤를 돌아본 나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겠다는 분노가 단박에 가라앉는 걸 느꼈다. 왜냐면 가까이서 본 타나토스의 상태가 굉장히 끔찍했기 때문이다.
우와, 심하다. 팔 하나는 뜯겼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고, 온몸에는 구멍이 뻥뻥 뚫린 게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 거기다 겁화에 심하게 당했는지 살은 녹아 흐르다 못해 흉하게 짓무르기까지 했다.
이건 어딜 봐도 타나토스가 죽기 일보 직전의 모습이잖아. 실제로 기운도 극도로 약해져 있고. 아마 방금 장면은 젖 먹던 힘까지 뽑은 최후의 공격이 아니었을까.
“검둥이 씨. 저 문득 궁금한 게 생겼어요.”
“네. 말씀하시지요. 메르세데스.”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가까운 곳에서 남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웬 메이드 여인과 베히모스가 사이좋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이상하다. 게헨나가 밀리고 있었다면 왜 도와주지 않은 거지?
“좀 전까지 게헨나는 저 개새끼 년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았나요?”
“몰아붙였다기보다는 가지고 놀았다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사료됩니다.”
“맞아요. 사실 우리보고 끼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한 것도, 금방 끝낼 수 있는 전투를 질질 끄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방금은 일부러 당하기까지 했네요?”
“아, 그건 말입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 가로되, 아마 부왕을 의식해서인 듯싶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실은 게헨나 님께 예전에 있었던 부왕과의 재회를 몇 번 언급하신 적이 있거든요. 그 뭐라더라. 고대 악신? 여하튼 그때도 일부러 당한 척했다는데, 부왕께서 자기를 위해 진노하는 모습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하십디다. 말인즉…. 억!”
“어머! 게헨나? 이게 무슨 짓이죠?”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으나 한순간 베히모스가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등 뒤로 갑작스레 어마어마한 살기가 느껴졌다. 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 난 투구가 찌그러진 채 기절한 베히모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 돌아보면 게헨나한테 까닭 없이 살해당할 것 같으니까.
그래. 지금은 타나토스를 처리하는데 신경을 쏟자.
“?”
그러나 타나토스는 어느새 아까 봤던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언제 끌려왔는지, 코앞 허공으로 올라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마치 멱살을 잡혀 끌려 올라간 것처럼 말이다. 누구한테 잡혔는지는 안 봐도 훤하다.
“야, 다시 말해봐.”
낮지만 분노로 끓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짝!
이어서 살 부딪치는 차진 소리가 울렸다. 붉은 염화를 머금은 손바닥이 상대의 뺨을 세차게 갈긴 것이다. 얼마나 강하게 후렸으면 타나토스의 턱이 휙 돌아갈 정도였다.
“그때처럼 말해보라니까?”
짝!
이게 원조 불꽃 싸대기인가.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뭐? 꼴 좋다고?”
짝!
뜨거운 불똥이 흩날리는 가운에, 가녀린 고개가 부러질 기세로 연달아 돌아간다.
타나토스는 반항은커녕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기실 몸이 축 늘어져 있는 게 이미 죽은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마 내가 풀려나는 동안 게헨나가 그만큼 심하게 족쳤다는 방증이리라.
“너도 한 번 봉인된 기분을 맛보라고?”
짝!
그렇지. 아무렴. 게헨나가 질 리가 없지. 더욱이 타나토스는 제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나저나 신은 원래 이렇게 싸우는 건가? 아니면 이 상황이 특별한 건가?
“하! 죽음의 신께서 왜 꼬리를 마셨어? 그때 당당한 기세는 어디 가고…. …어, 뭐야?”
불현듯 화정이 당황하는 음성이 들린다. 타나토스의 몸이 힘없이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 목을 붙잡고 흔드는 듯싶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주, 죽었네?”
뭐?
“죽었다고?”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느닷없이 타나토스가 휙 던져졌다. 그러더니 화정이 다시금 내 머리를 붙잡아 아래로 고정한다.
그리고 잠시 후, 화정의 것이라 추정되는 불길이 타나토스를 차츰차츰 살라 먹는걸 보며 난 속으로 땅을 치고 후회했다. 화정을 볼 절호의 기회를 날렸기 때문이요, 타나토스가 너무 허무하게 소멸했기 때문이다.
그렇잖은가. 극적으로 구출 받았고 모처럼 어마어마한 힘도 얻었건만.
물론 짠하고 멋들어지게 등장하는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왜인지 제대로 복수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허탈한 느낌이다. 적어도 타나토스라면 치열하게 싸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놀고 있네. 그럼 내가 괜히 누누이 체력 올리라고 조언했겠어? 다 일이 쉬워지니까 그러라고 한 거 아냐.”
내 생각을 읽었는지 화정이 핀잔 조로 말했다.
“그리고…. 나, 나도 타나토스가 이렇게 쉽게 죽을 줄은 몰랐어. 그냥 원한 좀 풀 겸 몇 대 친 건데 완전히 빈사 상태였다고. 그러니까 전부 게헨나 탓이야.”
하기야 그렇기는 하다. 내가 봐도 타나토스의 상태는 심각했으니까. 아마 게헨나는 딱 한 대만 정통으로 꽂으면 죽일 수 있는 수준까지 몰아붙인 후, 일부러 농락하지 않았으려나. 애초 다 이긴 전쟁이기도 했고.
어쩌면 직접 마무리를 지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지도.
“잠깐! 왜 내 핑계를 대는 거지?”
책임을 돌리는 말에 발끈했는지 게헨나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아니라고?”
“그렇다. 내가 보기에는 네 무식한 공격에….”
“뭐야? 무식? 연극도 제대로 못 하는 게…!”
“무어라?”
…아니. 둘이 싸우는 건 좋아. 한데 왜 관자놀이의 압박이 한층 강해지는 거냐. 내 머리에 화풀이하지 말라고.
뭐, 아무튼.
“그럼….”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
“수현아.”
그렇게 생각한 찰나,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겨우 시선을 돌리니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날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이는 바로 형이었다.
“자, 돌려주러 왔다.”
형은 날 보자마자 손을 쑥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푸른빛을 흘리는 작은 구슬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제로 코드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제로 코드를 손에 쥐었다. 왜인지 손아귀가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기분은 어때?”
멍하니 쳐다보는 동안 나직한 음성이 귓전에 흘렀다. 형의 부드러운 눈빛과 마주하자 돌연 몸이 굳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굳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말문이 막혔다고 하겠다.
형은 한참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날 끌어안았다.
“혀, 형.”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 좀 안아보자.”
결국에는 핏물 젖은 팔이 내 목을 휘감았다. 어찌나 강하게 조이는지 호흡이 약간 곤란할 정도였다. 캑캑거릴 즈음에야 은근슬쩍 놓아준 형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내 어깨를 토닥토닥 쓸었다.
“난 이 정도로 봐주겠지만, 나머지는 모른다?”
이윽고 영문 모를 말을 하더니 한 걸음 살짝 비켜선 순간이었다. 난 화들짝 놀라 머리를 뒤로 뺐다. 형이 빠진 자리로 누군가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며 다짜고짜 따귀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 못된…?”
손이 하릴없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자, 고연주가 크게 휘청거리며 얼떨떨하게 바라본다. 나도 당황스럽다.
“왜, 왜 피해요?”
“왜, 왜 때립니까?”
똑같이 반문하자 고연주는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하더니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린다.
“그냥…. 왠지 이 상황에서는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말도 안 됩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잠시만요. 지금 어디서 잘했다고 목소리 높여요? 아까 단상에서 전 신경도 안 쓰고 그냥 갔죠? 그리고 거짓말도 했잖아! 뭐? 클랜원만 구출하고 바로 돌아오겠다고?”
“…어.”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이 없어졌다. 고연주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더니 독기 찬 눈으로 손을 요리조리 돌렸다. 마치 꼭 한 대는 때려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이.
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내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떨어져 있는 동안 상당히 건방져진 것 같다. 돌아가는 대로 저 되바라진 가슴 좀 혼내야겠다고 다짐하며 양팔을 살며시 벌렸다.
“그보다는…. 차라리 안기는 건 어떻습니까?”
“뭐, 뭐요?”
“그게 상황상 더 어울릴 듯한데요?”
“…….”
눈을 찡긋하며 천연덕스레 말하자 고연주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 순간이었다.
“오라버니!”
앳된 음성과 함께 익숙한 형상이 고연주의 옆을 스쳐 신속하게 쇄도해온다. 두 팔을 활짝 펼친 안솔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훌륭한 기습이다.
그리하여 약 일 미터쯤 남았을 즈음.
“야! 감히 누구한테…!”
공중에서 웬 작달막한 덩어리가 사이로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수나였다.
퍽!
“오뿝!”
수나는 뒷발 차기로 안솔의 얼굴을 절묘하게 밀어냈고, 그 반발력을 이용해 붕 날아온다. 한데 왜 날 보자마자 팍 인상을 쓰는 걸까.
“누, 누구야! 감히 누가 날 밀었어!”
…설마 내가 정말로 못 봤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나는 정말 안기기 싫지만, 누가 밀었기 때문에 정말 어쩔 수 없다.’ 고 말하는 듯한 얼굴빛은 또 뭔데. 기다렸다는 듯 양팔을 활짝 벌리며 날아오는 주제에 저러면 설득력도 없다.
그때였다.
“어딜!”
우우우웅!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갑자기 게헨나의 수호 요새가 발동됐다. 정확히 수나가 내 품에 안기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텅!
당연히 수나는 장막에 부딪혀 주르륵 떨어졌고, 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봤다.
“후유…. 으, 응?”
돌아본 곳에는 입꼬리를 씩 올린 게헨나가 내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손을 숨기더니 짐짓 엄한 얼굴로 먼 산을 응시한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
어느 순간 에워싸였다.
하나 궁금한 건, 왜 남자는 한 명도 없고 전부 여성이냐는 거다.
게헨나, 수나, 고연주, 안솔, 화정은 그렇다 치고.
“후후후후. 후후후후.”
생글생글 웃으며 활에 화살을 재는 임한나.
“…….”
말없이 고개를 꺾는 남다은.
“자. 이걸로 치면 그래도 꽤 아플 거예요.”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소환해 누군가에게 쥐여주는 정하연.
“뭐, 하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 드는 비비앙.
게다가 단검을 꺼내 돌리는 이유정, 차분히 보석을 고르는 김한별, 그리고 약간 화난 듯한 기색의 한소영…. 아니 한소영은 또 왜?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전원 얼굴이 진심이다. 어느새 형은 멀찍이 물러났고, 안현은 진수현과 짝을 이뤄 “팝콘 팔아요!” 라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담담히 서 있던 선유운은 날 보더니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머리를 숙인다.
뭐냐. 이건 또 무슨 전쟁이냐.
“나 참. 정말 웃기지도 않아서.”
그때 화정의 어이가 없다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이어서 내 옆으로 살짝 스치는 듯한 기색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드디어 모습을 보여줄 자신이 섰나?
그 순간 따뜻한 기운이 갑작스레 얼굴 옆으로 가까워졌다.
“김수현. 너 잘 들어.”
몹시 낮은 음성. 스리슬쩍 눈알을 굴리자, 흰 눈을 연상케 하는 새하얀 뺨과 가지런하게 흘러내린 긴 생머리가 보였다. 예쁜 다홍색이다.
“그, 그러니까.”
왜인지 굉장히 진중한 음성이라 나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도 화정은 한참을 주저하더니,
“…거야.”
내 귀에 조용히 속닥거렸다. 너무 작은 소리라 미처 잘 듣지 못했다.
“뭐?”
“죽일 거라고.”
“너도 뜬금없이 뭔 소리야. 날 왜 죽여?”
“아 그러니까!”
화정은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더니 다시 내 귀에다 입을 착 붙였다. 부르르 떨리는 감촉이 전해졌다.
그리고.
“가, 가슴 작다고 놀리면 죽일 거야! 기필코!”
예상치도 못한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푸!”
문득 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정체 모를 느낌이 탁 풀리는 걸 느끼는 동시에.
“하하…. 하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화정이 무어라 화내는 소리가 들렸으나, 사방에서 이상한 눈초리가 느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그 한 마디에 비로소 전쟁이 끝났다는 걸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난 멈추지 않고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는 조용한 주변으로 기분 좋게 울려 퍼져, 살며시 드리워지는 햇살을 따라 여운처럼 퍼져나가는 듯했다.
============================ 작품 후기 ============================
김수현 & 화정 일러스트 업데이트했습니다.
후기를 빌어 몇 주 동안 수고해주신 일러스트레이터 실베스타 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