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72
00971 Code Name, Zero. =========================================================================
–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
첨벙!
“흐으으으….”
김이 피어오르는 욕조에 안착하자 저절로 신음이 새나왔다. 안 그래도 한가득 받아져 있던 물은 몸이 들어가자마자 급격히 올라와 밖으로 흘러넘쳤다.
난 물 흐르는 욕조에 양팔을 걸치고 천천히 뒷머리를 뉘었다. 펄펄 끓는 늪지대에 온몸이 조용히 가라앉는 것 같은 감각. 시시각각 살이 뜨거워지는 이 형언할 수 없는….
“하하.”
…기분에 취하는 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투명하던 물에 거뭇한 액체가 검정 물감처럼 섞여 번지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자세히 보니 피부의 땟국이 장난이 아니었다. 고온의 물에 반응해 이럴 정도라면 얼마나 꾀죄죄했다는 걸까.
하기야 몇 날 며칠을 갇혀 있다가 처음 씻는 거니 더러운 것도 당연하겠지. 우선은 제대로 씻자. 푸석하고 떡 진 머리도 감고, 때도 박박 밀고, 구석구석 비누칠도 하고, 새 물을 받아서 꼼꼼히 끼얹고….
장장 두 시간이나 투자한 목욕을 끝내자 심신이 보송보송해졌다. 욕실 밖으로 나가니 햇살이 비치는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지경이랄까. 마침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임한나가 밟혀 난 태초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걸었다.
그러나 이미 몇 번 당해본 장난이라 내성이 생겼는지 옛날처럼 귀여운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쓰게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큰 수건을 펼쳐 내 전신을 휙 감아버렸다. 졸지에 미라가 돼버린 난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까르르 웃은 임한나는 온몸을 세심히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전신의 물기를 제거했는지 임한나가 날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난 죽은 듯이 누워 계속 못 들은 척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씻고. 거기다 나긋나긋한 손길까지 더해지니 심신이 기분 좋게 노곤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임한나를 껴안고 그녀의 품에서 푹 잠들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정말, 가끔 이렇게 어리광부릴 때가 있다니까.”
약간의 실랑이가 이어졌으나 결국 항복한 건 임한나였다. 긴 한숨을 흘리더니 옷과 장비를 가져와 손수 입혀주기 시작했으니. 후후. 임한나는 훗날 참 좋은 부인이 될 거야.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옷은 입히기 쉽다손 쳐도 장비를 입히는 건 어려울 법도 한데, 임한나는 단 한 번의 끙끙거림 없이 능숙하게 손을 놀렸다. 조용히 옷을 입히던 임한나가 말문을 연 건 갑옷 속으로 날 쑥 집어넣었을 때였다.
“참. 그러고 보니 오늘 언제쯤 돌아와?”
“오늘? 왜?”
“오늘 저녁에 축제가 있거든. 너 돌아온 거 축하도 하고 겸사겸사 여러 이야기도 좀 하고…. 시간이 되나 해서.”
“…….”
상냥한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운 기색이 없잖아 있었다. 이제 막 기억난 듯 말하기는 했으나 어색한 어조는 숨기지 못했다. 아까 식당에서 일부러 무겁고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저러는 거겠지.
그 순간 느닷없이 은근슬쩍 장난기가 일어 난 목에 힘을 빼고 최대한 씁쓸히 말을 흘렸다.
“그렇구나….”
“응?”
“그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뭐, 뭐야. 왜 그래. 응?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니?”
끊임없이 이어지던 손길이 뚝 멎는다. 이어서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 날 응시했지만 애타던 두 눈매는 곧 몹시 노려보는 모양으로 변했다. 목소리와는 달리 빙글빙글 웃고 있는 내 표정을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응. 알았어. 일찍 올게.”
“못됐어. 정말.”
곱게 눈을 흘긴 임한나는 내 볼을 한 번 꾹 찌르고 몸을 돌렸다. 난 껄껄 웃으며 일어나 왼손에는 제로 코드를 오른손에는 엑스칼리버를 부여잡고 집무실을 나섰다.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뜻하다. 정원은 유니콘을 타고 깔깔 웃는 수나로 시끄러웠고, 도시는 돌아온 사용자 그리고 되살아난 사용자로 북적거렸다. 그야말로 아무 걱정도 느껴지지 않는 활기찬 일상의 장면이었다.
그러나.
“…….”
어째서일까. 신전으로 가는 동안 오묘한 위화감이 날 감싸서인가. 좀 전까지 임한나와 장난까지 칠 정도로 행복함을 느꼈을 터인데.
한데 제로 코드를 들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니. 끝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을 직시하자마자 들떴던 기분이 착 가라앉는 걸 느꼈다.
모르겠다.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니다. 어떻게 딱 집어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무언가 오랫동안 쫓기던 처지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담담하다. 이래서야 그때와 그날과 똑같지 않은가.
그때였다. 멍하니 움직이던 발끝으로 갑자기 단단한 것이 툭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부츠는 어느새 흰 계단에 닿아 있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드는 순간 느닷없이 환몽이 날 사로잡았다.
‘축하해야 할지, 아니면 애도해야 할지.’
이윽고 환청이 들리는 동시에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올라가는 사내가 눈에 밟혔다. 그 사내는 다름 아닌 나였다. 지금처럼 멋들어진 갑옷도 망토도 없고 오히려 전쟁터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듯한 비루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으나 저 사내는 분명히 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나라고 해야 할까. 왜냐면 한 손에 제로 코드를 꼭 쥐고 있었으니까.
‘네 끝이 어떨지 나도 자못 궁금해졌거든.’
또다시 환청이 들린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했더니 제로 코드의 음성이었다. 접때 한 번 들은 게 전부였지만 워낙 특이한 톤이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가라, 마주쳐라, 부딪쳐라. 그리고….’
그렇다면. 굳이 이 과거를 보여주는 목적은 무엇일까. 어서 매듭을 지으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모종의 이유가 있는가.
‘내게, 너의 끝을 보여라.’
어느 순간 과거의 난 신전 안으로 사라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환몽도 사라졌다. 한참 동안 눈앞의 신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 복도를 걸어, 포탈로 몸을 묻는다.
그리하여.
“사용자 김수현.”
십오 년. 이 긴 세월 동안 그토록 열망하고 꿈꿨던 바를 이루고 마침내 이 자리에 서게 됐다.
“어서 오십시오. 사용자 김수현.”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멍하니 왼손에 쥔 작은 구슬을 굴려본다.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소환의 방.
“사용자 김수현에게 묻겠습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음성이 귓전에 울린다. 끌리듯 눈을 올리자 잿빛 벽돌로 이루어진 바닥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서른 평에 달하는 공간을 시야에 담았을 즈음 비로소 시선의 움직임이 멈췄다.
“세라프.”
방의 중앙 직사각형의 제단에는 등 뒤로 반투명한 날개를 일렁이는 천사가 앉아 있다. 언제나처럼 공손히 모은 양손과 살짝 열린 입술.
“사용자 김수현은 이번에도 홀 플레인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까?”
이윽고 눈을 보려는 찰나 갑작스러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 탓에 얼굴로 올라가던 시선이 입에서 멈췄다.
“너.”
너. 이 단 한 마디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 스스로 생각해도 성에 있을 때와 지금 여기 서 있는 날 동일하게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세라프의 말이 이어졌다.
“사용자 김수현은 홀 플레인의 정상을 거머쥔 사용자입니다.”
“…그런데.”
그리고 엉겁결에 반문한 순간.
“그런데…. 가 아닙니다.”
깨달았다. 아까 오면서 느꼈던 감정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말이다.
“그렇게나 열망하던 제로 코드를 획득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자격이 있습니다. 그 자격이 허락하는 한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위화감이 아니었다. 기시감…. 아니. 어쩌면 데자뷔라고 해야 할지도. 아, 둘 다 같은 말인가?
“지구로의 귀환? 좋습니다. 그 길을 선택하신다면 현재의 사용자 정보를 유지한 채 지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괜찮네.”
“홀 플레인에 남는다? 좋습니다. 제로 코드만 있다면 전 대륙을 다스리는 왕…. 아니. 현재의 사용자 김수현이라면 그 이상의 존재도 될 수 있습니다.”
“나쁘지 않아.”
어느새 세라프의 말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그래. 그때도 이랬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난 이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면 가부 여부를 떠나서 선택권 자체가 없었으니까. 힘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힘도 생겼다.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 이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할 말은.”
비록 그때와 상황은 달라졌을지라도.
“그게 끝인가?”
나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두 팔을 정면으로 느릿하게 들어 올린다. 왼손에는 제로 코드. 오른손에는 엑스칼리버. 그중 칼자루를 바스러지도록 말아 쥐었다. 회로를 따라 흐르는 강대한 마력을 일으킨다.
무섭게 용솟음치는 기운을 느꼈는지 조용히 이어지던 음성이 뚝 끊기는 찰나.
“그럼…. 그 두 개가 아니라면.”
세라프의 목소리가 잠깐의 텀을 두고 재차 귀를 찔렀다. 뜻밖에도 매우 담담한 음성이었다.
“사용자 김수현은 천사의 멸절을 원하는 겁니까?”
그 순간이었다.
문득.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아무 까닭도 이유도 없는 웃음이었다.
난 한동안 소리 없이 웃었다.
============================ 작품 후기 ============================
9월 1일부로 연재 재개합니다.
덕분에 사흘 동안 잘 쉬다 왔습니다.
기다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완결까지 휴재 없이 꾸준하게 달리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