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78
00977 Code Name, Zero. =========================================================================
툭….
새벽.
툭…, 툭툭!
밤하늘에 잔뜩 끼어 한참 동안 무게만 잡던 먹구름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비를 조금씩 떨구기 시작한다.
아틀란타가 발견된 이후 대다수 사용자가 빠져나간 구 북 대륙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은 한때 안정화로 첫손에 꼽히던 남부 소 도시 모니카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아, 땅에 간신히 점을 남기는 가냘픈 빗줄기라도 확실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하다.
그리하여 밤이 깊어질수록 조용한 도시는 점점 거세져 가는 빗소리로 가득히 채워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쾅!
문득 아직 환한 빛을 발하는 어느 건물의 사 층 창문에서 세찬 울림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요!”
갑작스러운 소음의 주인공은 안현. 전원 앉아 있는 장소에서 오직 홀로 일어나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양손은 탁상을 부술 듯이 짚은 채로.
잠깐의 소란 이후, 회의실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 폭탄 같은 적막이 흘렀다. 일부는 갑자기 튀어나온 안현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멍하니 탁상을 내려다보거나 정신이 나간 것처럼 허공만 응시한다.
“저는 인정 못 합니다. 아니,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잠시 후, 안현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를 악물 듯 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건…. 그건 아니잖아요….”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눈치만 보던 이유정이 재빠르게 나섰다.
“저도 오빠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너무 잔혹하잖아요.”
“…….”
“오빠는 언제나 오빠니까. 아니,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그냥 이대로 있어요. 네? 그렇게 힘들면 우리가 옆에서 오빠를 도와주면 되니까…!”
“그렇게 힘들면?”
혼잣말 같은 김유현의 반문에 횡설수설하던 이유정은 양손을 꽉 맞잡는다. 하기야 정신없을 만도 하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흔들리는 두 눈동자는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니. 기실 김수현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터.
“수현이를, 도와준다고요.”
나직한 음성이 뚝뚝 끊어 회답한다. 진실의 수정인 이미 시간이 흘러 한 줌의 재로 화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제 진실 여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자리에는 김유현 말고도 진실을 알고 있는 존재가 둘이나 있었다.
“수현이는 좋은 동생들을 뒀군요. 이해하고, 도와준다. 형으로서 고마운 말입니다. 하하.”
김유현은 빙긋 웃더니 천천히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그럼 여담이기는 하지만, 잠시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아, 이건 수현이 포함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어요. 별로 길지도 않고요. 분명히 들을만할 겁니다.”
그리고 억지 부리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제가 어릴 적…. 아마 초등학생 때였을 겁니다. 학교가 일찍 끝나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냉장고에 있는 간식을 꺼내먹고 실컷 놀다가 방 침대에 엎어져 잠이 들었죠.
한데 한창 달게 자는 도중 거실을 돌아다니는 발소리가 꿈결에 들리더군요. 혹시 동생이 왔을까, 저는 반가운 마음에 일어나 슬쩍 내다보았죠. 정말 동생이라면 몰래 놀래줄 생각을 하면서.”
뜬금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가벼운 이야기치곤 상당히 낮고 진중한 음성이라 안현과 이유정은 물론, 전원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거실에 있던 건 동생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의 뒷모습이었습니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검정 잠바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한 손에는 칼을 든…. 네. 강도였습니다.”
김유현이 지그시 눈을 감는다.
“사실 그 당시 제 대응이 좋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본능적으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방 안으로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그리고 혹여 강도가 들을세라 살그머니 문을 닫았습니다. 딸칵, 문 잠그는 소리가 날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지요.
전화기는 거실에 있었고 휴대폰은 없었습니다. 그냥 작은 방에 갇혀 있는 수밖에 없었어요. 이를 악물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방문에 등을 기대는 찰나.”
“…….”
“똑똑. …하고 등으로 감각이 전해지더군요. 당연히 외부에서 전해진 진동이었습니다. 즉 강도는 제가 문을 닫은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일부러 노크를 했다는 겁니다.”
“…….”
김유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 똑똑…. 똑똑…. 똑똑…. 강도는 한동안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간간이 낄낄거리는 웃는 소리만 내면서요.
…흔히들 그러지요? 혼이 빠진다고. 그때 제 심정이 딱 그랬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와 두려움.
아, 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왜 노크를 하는 걸까. 혹시 부모님 아는 사람은 아닐까. 아니, 그럴 리 없어.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아차, 곧 수현이도 집에 올 텐데 어떡하지….”
대체로 가만히 듣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머리 회전이 빠른 몇 명은 조금씩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김유현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뭐 결과적으로 강도는 어느 순간 사라졌고, 저는 무사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때 천 년 같다고 생각했던 강도와 제가 문 하나를 두고 있던 시간은, 나중에 알고 보니 고작 십오 분에 불과했죠.
겨우 십오 분만으로도 저는 성인이 된 지금도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사실 요즘도 아주 가끔 식은땀에 흠뻑 젖어서 잠에서 깨고는 합니다. 하하.”
여기까지 말한 김유현은 싱겁게 웃으며 깍지를 풀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서서히 눈을 뜨며 아직도 서 있는 안현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정을 직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와서 어리광부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두 남녀의 눈이 화들짝 치떠졌다.
바로 그 순간.
“너희가 뭘 알아.”
봄바람 같던 김유현의 얼굴빛이 순간적으로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었다.
“항상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왔던, 언제나 수현이 뒤만 졸졸 쫓아갔던 너희가 뭘 아냐는 말이다.”
그와 동시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싹 걷히며 느닷없는 긴장이 치솟는다.
“십오 분. 어린 나이이기는 했지만, 단지 십오 분에 불과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난 억겁을 느꼈고, 미쳐버릴 것 같은 정신적인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형형한 두 눈과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낮디낮은 음성에 두 명의 몸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수현이는…. 십오 분도 아니야. 무려 십오 년이다. 이 못난 형과 사용자 한소영을 거주민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괴로움에 절어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움켜쥐고, 안간힘을 기울여, 수십 수백 수천 번을 부딪치고 헤쳐서 여기까지 온 거라는 말이다. 나 따위는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그런 고통 속에서.”
김유현의 말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런데 인정하지 못한다? 그렇게나 힘들면 이해하고, 도와주겠다? 너희가? 하! 그냥 너희가 기억하는 수현이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냥 좋을 대로 생각하는 주제에…. 어떻게 이미 꺼져버린 불을 붙이겠다는 거지? 자신 있나? 정말로?”
김유현의 숨은 한껏 거칠어져 있었다. 흡사 씹어먹을 듯 노려보는 눈초리에 넋을 잃은 얼굴로 서 있던 안현은 머리를 떨궜다. 이유정은 차오르는 울음을 참는지 그렁그렁한 눈을 하면서도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어느새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한동안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릴 뿐.
불현듯 얼마 전 집으로 돌아가고 싶으냐는 김수현의 물음이 뇌리를 스쳤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공간에서 이유정은 어깨를 떨며 주변을 돌아봤다. 이곳 또한 김수현과의 추억이 묻혀 있는 장소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고작 몇 년 전의 일에 불과하다. 모니카에 터를 잡은 머셔너리 클랜은 이곳을 중심으로 세를 키웠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김수현이 있었다. 클랜 로드라는 이름 아래 언제나 선두에 서서 클랜원들을 이끌었다.
통과의례부터 함께 해오면서 누구보다 가까이서 봐왔었기에. 그렇기에 이유정은 최근의 김수현이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과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김유현은 느릿하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미안합니다. 조금, 아니 많이 흥분했습니다.”
“…뭐, 됐어. 네가 어떤 놈인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화정은 약간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골이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잇는다.
“그래서, 이미 꺼진 불씨는 살리기 어려우니 결국 새 불을 피우겠다는 건가?”
김유현은 침착히 끄덕거렸다. 화정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뭐, 확실히 방법은 될 수 있겠네. 성공 여부를 떠나서. …그런데.”
잠깐 말을 끊은 화정은,
“후회할 거야.”
날카롭게 김유현을 응시했다.
“장담하는데 분명히 후회할 거야. 나도, 너도, 여기 있는 모두가.”
“예. 아마 그러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이해를 구한다고 한 겁니다.”
김유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결연히 대답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창문을 응시했다.
어느새 해가 떴는지 창문에 묻은 물방울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며 회의실을 비추고 있었다.
“단지.”
김유현이 입을 열었다.
“단지….”
그러나 말은 단 한 마디를 끝맺지 못하고 아스라이 흐려졌다.
“…….”
강한 햇살 때문인지 두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동이 트고 비가 그쳐 잠잠해진 하늘을, 그저 가없이,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 작품 후기 ============================
저…. 어제 후기 끝에 분명히 아니라고 써놨는데…. ;;;;
제가 예상한 반응과 너무 다르니 심히 당황스럽네요.
그냥 좀 울컥해서 멋대로 휘갈겼을 뿐인데, 정말 믿으시면 곤란해요. 하하. ^^;;;;
아무튼,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요.
이로써 에피소드 0이 7회째인가요?
아마 맥시멈으로 예상했던 10회에 딱 맞게 떨어져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에필로그까지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