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96
00995 Omnibus – Seraph. =========================================================================
2. 세라프는 여고생?
『오늘 식사 중 김수현의 공개 처형이 있었다.
제갈 해솔의 ‘당신은 누구 가슴이 제일 좋아요?’ 라는, 매우 뜬금없는 질문이 그 시작이었다.
한참 고민하던 김수현이 말했다.
‘통통 튀는 탄력으로는 고연주를 따라올 자가 없고, 우유 같은 상냥한 부드러움과 말랑말랑함으로는 임한나를 따라올 자가 없다. 한소영의 가슴은 상기의 요소를 모두 갖췄으며, 메르세데스(만년설)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옛날에는 이 네 여인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역시 천외 천(天外 天)은 있더라. …그래, 그녀의 가슴은 흰 가루가 쌓여 봉우리를 이룬 듯한, 흡사 순도 100%의 백색 마약 같은….’
이 말을 한 김수현은 분노한 여러 아내의 손에 끌려가 버렸고, 이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은 없다.
어쨌든 상기의 대화로 추측하건대, 김수현은 여성의 젖가슴을 성적 취향의 우선순위로 둔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이다.(김항별처럼 다른 부위로 어필해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여기서는 예외로 하자.)
중요한 건 스스로 밝혔듯 천외 천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중간에 끊겨 이름은 듣지 못했으나 단서는 있다.
군신(軍神)이 밝힌 백색 마약 가슴의 소유자는, 아마….』
– 애틀랜타 머셔너리 캐슬 중앙 도서관 『군신(軍神)의 전설』 中
*
“수현의 아기를 낳고 싶기 때문입니다.”
거품과 기름을 깨끗이 제거한, 실로 세라프다운 솔직하고 담백한 말이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폭탄선언과도 진배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게 세라프의 진심인걸.
일촉즉발이던 식당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좌우서 어이없다는 반응이 터지고, 엑스칼리버는 살짝 미끄러져 바닥에 땡강 부딪치더니 웅웅 울기 시작했다.
약간 화난 듯한 울림이었다.
김유현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찢어지라 커진 두 눈동자에는 당황한 빛이 가득하다.
아마 원래대로였다면 크게 화를 내야 정상일 터.
그러나 결점 없는 사람은 없다고, 뇌제도 단점이 있다.
“수현의….”
김수현이 관련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게 김유현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하기야 오죽했으면 진명이 ‘동생 바보’이겠느냐마는.
“아기…?”
“네. 수현의 아기요.”
“조카…?”
“Yes. 수현을 닮은 귀여운 아기 말입니다.”
어느새 김유현의 두 눈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김유현은 이미 조카를 본 적이 있다.
김수현과 고연주를 적절히 닮은 딸이었는데 굉장히 귀여워했었다.
둘이서 긴 고민 끝에 첫 애는 오롯이 현대에서 기르기로 결정했을 때, 얼마나 반대하고 아쉬워했던가.
그때가 새록새록 기억나는지 김유현은 끊임없이 ‘귀여운 조카…?’ 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심지어 책을 꼭 껴안고 표지를 살살 쓰다듬기까지.
좀 있으면 어부바라도 할 기세였다.
그러다 아차 정신을 차리더니 탕, 식탁을 강하게 쳤다.
“아니! 벌써 아기 생각부터 하다니! 굉장히 기특하지만,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마침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우리 수현이가 어떤 애인지 알기나 해요?”
“세이 경청하겠습니다.”
“아니, 경청이 문제가 아니라…. 아직 서로 잘 알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궁금하신 게 있다면 하나도 거짓없이 성심껏 말씀드리겠습니다.”
열변을 토하는 김유현을 보며 고연주는 고개를 떨궜다.
믿었던 아주버님이 패배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세라프는 ‘조카’라는 키워드로 정곡을 찔렀다.
저렇게 된 김유현은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그렇게 고연주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는 동안, 이야기는 어느새 호구 조사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나이 개념보다는, 천신의 은혜로 탄생한 지 올해로 일백칠십사 년째 됩니다.”
“일백칠십사….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인간의 나이로 따지면 몇 살 정도입니까? 대강이라도.”
“약 열일곱에서 열아홉 사이로 보시면 됩니다.”
“그럼 여고생…. 흠. 하기야 종족이 다르니 뭐…. 그나저나 아까 말한 천신이라는 건 부모 비슷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가문도 괜찮은 것 같고…. 아, 혹시 진짜 이름은 없습니까? 세라프는 뭔가 좀 이명 같은 느낌이라서.”
“세라프가 제 이름입니다. 구품 천사 중 가장 높은 천사에게 부여되는 일종의 칭호로….”
“가장 높은? 잠깐만요. 그럼 학교 비슷한 거 다닐 때 공부 같은 거 잘했나 봐요?”
“아…. 스스로 밝히기 부끄럽지만…. 성적은 수석이었습니다.”
“오…. 그래요?”
감탄하는 목소리는 어느새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나이도 적당하고, 가문도 괜찮고, 머리도 좋다.
일말의 의심은 뒷전으로 밀린 지 이미 오래였고, 김유현의 머릿속은 온통 조카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여담이지만, 김유현은 유전자설을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
“설마 설마 했는데, 아주버님이 그러실 줄 몰랐네요. 진짜 실망했어.”
일 층 라운지.
푹신한 소파에 앉아 부른 배를 쓰다듬던 김한별이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잖니. 설마 무적의 조카 카드를 꺼낼 줄 누가 알았겠어.”
고연주도 폭 한숨을 쉬더니 입맛을 다시며 말을 잇는다.
“사실 내가 진짜 노린 건 호구 조사였거든. 거기서 기 좀 죽일 생각이었는데….”
“보기 좋게 통과했죠. 저는 보면서 옛날 생각나던데요?”
정하연이 싱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반대로 김한별은 아랫입술이 삐쭉해졌다.
호구 조사에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걸까?
“뻥 아닐까요? 어쩌면 지어냈을 수도 있고. 솔직히 우리 중에 아주버님 호구 조사 통과한 거 하연 언니밖에 없잖아요.”
“아니야. 난 그냥 그럭저럭 만족하신 정도고, 진짜 제대로 통과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을걸?”
“누구요?”
“소영 씨. 통과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주버님 입을 다물게 했다고 하더라고.”
“하기야 그 언니 정도면….” 김한별이 끄덕끄덕하는 동안, 고연주는 계속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림자 여왕 특유의 감이 앞으로 세라프가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흘끗 눈을 돌리자, 김한별과 정하연은 한창 이야기 중이었고, 임한나는 여전히 통신 구슬 삼매경이었다.
“한나야?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라고 말하려던 고연주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낯에 차갑게 흐르는 싸늘한 기색을 봤기 때문이다.
심지어 임한나가 앉은 소파 옆에 비스듬히 세워진 엑스칼리버도 칼등을 부르르 떨며 분노하는 중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스파이가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언뜻 스쳤지만, 여하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냥하기 그지없는 임한나가 저런 얼굴을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윽고 살그머니 통신 구슬을 확인한 고연주는 곧 같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김한별도, 정하연도.
영상의 집무실 안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코르셋 복장을 한 깔끔한 단발의 메이드로, 지그시 감은 눈과 작은 눈물점이 인상적이다.
겉으로는 정숙한 메이드처럼 보이지만, 퇴폐적인 색기를 은근히 풍기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김수현은 단추를 살짝 끄르면 당장에라도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농익은 젖가슴에 코를 처박고 있었다.
난처해 하며 머리를 빼려고 할 때마다, 여인은 괜찮다는 듯 사내의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러이 미소 짓는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얼굴을 살짝 붉히기까지.
“…누구?”
“만년설…. 정도로 알고 있어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물론 길지 않은 정적이었다.
“내가 솔직히 세라프까지는 이해하려 했거든?”
“저도요.”
“그렇지?” 라고 말한 고연주는 조용히 소파에서 일어섰다.
이럴 때마다 화내는 것도 지치고, 자기 손을 더럽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무엇보다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처리해주는, 김수현이 두려워해 마지않는 질투의 화신은 따로 있었다.
공교롭게도 저 멀리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여인을 확인한 고연주는 손을 번쩍 들었다.
“한소영 씨! 마침 잘 왔어요!”
“?”
“그이가 애타게 찾던데, 얼른 집무실로 올라가 보세요! 빨리!”
“!”
안 그래도 보고 싶어서 찾아온 참이라, 한소영은 금세 나는 듯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엑스칼리버가 저절로 허공을 가로질러 한소영의 손에 착 잡혔다.
자기가 필요할 거라는 듯이.
============================ 작품 후기 ============================
2016년 1월 1일이네요.
돌이켜보니 2015년은 정말 금방 지나간 것 같은데….
저한테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한 해였네요.
ㅜ.ㅠ
아, 독자님들.
메모라이즈 비주얼 노벨 1화가 공개됐습니다.
www.hallplain.com에 접속하시면 이전에 공개됐던 트레일러 동영상은 물론, 새로운 오프닝 영상과 비주얼 노벨 1화까지 감상 및 플레이하실 수 있습니다.
한 번 보시고 간단하게나마 평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_)_
덧붙여 이벤트도 두 개 진행 중이오니 참가해보셔도 좋을 듯해요.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잘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림도 괜찮고(저는 김한별, 안솔, 이유정이 예쁘게 나와서 만족만족.), 특히 시나리오 각색을 맡은 작가 분께서 정말 세심하게 신경 써 주셨습니다.
제가 보강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모조리, 빠짐없이 보완하셨더라고요.
사실 좀 놀랐습니다. ㄷㄷㄷㄷ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는 내용도 있지만, 아예 새롭게 진행되는 내용과 새 캐릭터도 등장하오니 기대해주셔도 좋으리라 생각해요.
그럼 비주얼 노벨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저는 새해를 맞아 느슨해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PS. www.hallplain.com 사이트에 금지어라는 시스템이 있는데, 제가 ‘로유미’라는 단어를 금지어 목록에 넣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어요.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 후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