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06
능운비의 서슬 퍼런 기세에 황 대인은 사지만 달달 떨 뿐 입도 벙긋거리지 못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능운비는 자신의 농도 짙은 마기를 자제할 수가 없었고, 그 힘의 여파가 오롯이 황 대인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객점 주인은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라 여겼다.
하필이면 마교인에게, 그것도 그 괴물들의 우두머리에게 부탁을 해서 이 사달을 낸 것이 아닌가?
막아야만 했다.
이러다 황 대인이 죽으면 그 식솔들을 볼 낯이 없었다.
“사, 삼공자님, 어찌 이러십니까? 제발 황 대인을 살려 주십시오.”
“……예?”
“이러다 죽습니다요.”
객점 주인이 납작 엎드려 비는 모습에, 능운비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어이쿠! 이런!”
재빨리 기세를 풀자, 황 대인이 막혔던 숨을 힘겹게 토해 냈다.
“푸허……”
“미, 미안하오. 내 태백주라는 말에 너무 흥분해서 그만……”
능운비가 서둘러 기혈을 뚫어 주자, 겨우 숨통이 트인 황 대인이 숨을 몰아쉬었다.
능운비와 같은 고강한 무인의 내력을 황 대인 같은 노인이 어찌 감당할까.
호흡은 돌아왔으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큰 실수를 했군요. 이걸 어찌해야 할지……”
“……”
“일단 편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객점주, 혹 쉴 만한 곳이 없겠소?”
“예?”
“황 대인께서 많이 놀라셨을거요.”
능운비의 말에 객점 주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 서두릅시다. 내 황 대인을 모실테니 어서 안내해 주시오.”
“예? 아, 알겠습니다.”
능운비가 열심히 일하던 삭월대의 무인까지 불러서 황 대인을 부축하게했다.
귀하신 분이니 이동 시에 미동조차 없어야 할 것이라 엄포까지 놓으면서.
……누구 때문인데?
조금 전만 해도 사람 하나 소리 소문도 없이 죽일 듯한 기세더니, 이제는 또 저리 살갑게 군다.
과연 마교인가?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되새긴 객점 주인이었다.
잠시 후.
인근 상가로 이동한 능운비가 세심한 손길로 황 대인을 살폈다.
“사, 삼공자님. 이제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노령에 자칫 몸이 상하셨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긴장하지 마시고 제게 맡기십시오. 전보다 훨씬 더 활기차게 생활하실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
능운비가 몸 이곳저곳을 살피자, 황대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객점 주인을 쳐다봤다.
하지만…… 뭘할수 있겠는가?
수틀리면 사람 목을 개미 모가지 따듯 하는 마교라지 않던가?
황 대인은 어쩔 수 없이 능운비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길 수밖에…… 어? 어어?
희한한 느낌이었다. 관절 곳곳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시든 꽃 같았던 육신에 힘이 넘치기 시작했다.
“휴우…… 좀어떠십니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보았습니다만.”
“예?”
“무릎 연골이 많이 상하신 모양입니다. 임시방편으로 손을 써 두기는 하였지만, 조속히 치료를 받으셔야 지팡이는 짚지 않을 수 있으실 겁니다.”
“……”
지팡이는 원래 자주 짚고 다녔다. 비가 오면 더욱 쑤시는 통에, 교자(가마)가 없으면 운신조차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웬걸?
능운비의 손길이 닿고 나서는 당장 나가서 띔박질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대체……?”
“헛헛, 기운으로 잠시 보한 것뿐입니다.”
“기운이라면……?”
“무인들이 가진 기운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공이지요, 내공.”
“내, 내공을 쓰셨다구요? 그 귀한 것을요?”
“귀하긴요? 말했듯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능운비가 환히 웃자 황 대인이 눈만 끔벅거렸다.
놀랄 만도 하다. 정말 성심을 다했으니까.
무인들 대부분이 기초 의술 정도는 익히고 있다.
하다못해 낭인들만 해도 상처를 지혈하고 덧나지 않게 하는 방법 정도는 안다.
일종의 생존술이랄까?
그리고 무의 경지가 깊어지면 자연히 의학적 지식도 체득하기 마련이다.
내공법이니, 점혈법이니 하는 것도 전부 의술에 기초하는 방법이다.
즉, 인간의 신체 구조를 모르고서는 절대로 상승무공을 익힐 수 없으니, 자연히 고수들은 웬만한 의원 뺨치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
해서 완치면 모를까 노인성 관절염을 잠시 호전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걸 알 리 없는 황 대인은 놀랄 수 밖에 없었고, 덕분에 호감 어린 눈빛을 받게 된 능운비는 흐뭇할 따름이었다.
지금부터 목적에 충실하게 행동해야하니까.
“몰래 듣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태백주를 주조하신다구요?”
“예?”
“……아닌가요?”
“아, 그게……”
황 대인이 우물쭈물하자 옆에 있던 객점 주인이 눈치 빠르게 대신 답했다.
“맞습니다. 황 대인께선 태백주를 주조할 줄 아십니다. 그냥도 아니고, 무려 삼십이 대 전승자가 바로 황 대인이십니다.”
“사, 삼십…… 전승자요?”
“그렇습니다. 본시 태백주의 주조법이 동쪽 땅에서 흘러온 것인데……”
객점 주인은 멀리 동쪽 나라에서 발원했다는 태백주의 역사에 대해 한바탕 연설을 늘어놓았고, 무척이나 흥미가 동했던 능운비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거렸다.
“오오오! 정말 대단한 분이셨군요! 그런 귀한 명주의 전승자시라니!”
“아, 그리 대단할 것까지는……”
“아닙니다. 이건 정말로 대단한 기예입니다. 말하자면 소림의 칠십이종예와 같은 것을 대대로 이어 오신 것이 아닙니까?”
“예에? 소, 소림이요? 칠십…… 예?”
급기야 능운비가 소림까지 끌어들이며 칭찬을 쏟아 내자, 황 대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고작 주조 기술이 아닌가?
아는 이들만 아는 그것을 어찌 이리도 높이 평가한단 말인가?
대체 이 사람은…… 엄청난 애주가였던 건가?
황 대인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객점 주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데 지난밤 별안간 주조장이 내려 앉아서……”
“저런! 그 귀한 곳이!”
물론 능운비는 연신 맞장구를 쳐 대고 있었다.
태백주, 반드시 얻어야 한다.
향이가 태백주를 사 주는 날에 다음단계로 가는 도움을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까울 게 없다. 간이고 쓸개고, 태백주를 위해 희생하리라.
“난감하게 되었군요. 그 귀한 술을 만들어 내는 주조장이 무너졌다니.”
“이를 말입니까? 그간 저희 같은 객점이 황 대인의 주조장에서 나온 술만을 취급했는데…… 한동안 팔지도 못하게 생겼습니다.”
“그럼 안 되지요! 암, 그렇고 말구요! 객점에 술이 없다니!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맞습니다, 삼공자님. 해서 제가 어려운 부탁인 줄 알면서도……”
“그랬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무림의 이해만을 내세워 도움을 주길 거절했으니……”
“하면 도와주시는 겁니까?”
“두말하면 턱 나갑니다.”
“예?”
“아, 제 호위장이 자주 쓰는 말인데, 도와드리겠다는 뜻이지요.”
“아! 정말이십니까?”
“암요.”
“하면 언제부터……?”
“지금! 당장! 바로!”
“오오오오!”
능운비의 시원시원한 답변에 객점주인이 연이어 탄성을 질러 댔다.
황 대인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능운비와 객점 주인이 주고받는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단! 부탁이 있습니다.”
“예? 부탁이요?”
능운비가 갑자기 조건을 달자, 황 대인과 객점 주인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백주 한 병!”
“예? 태백주…… 한 병요?”
황 대인이 눈을 부릅뜨며 놀라자, 호기롭게 외쳤던 능운비가 둘의 반응에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렇게 비쌉니까?”
그런 뜻이 아니었다.
태백주 한 병이라니? 그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주조장을 보수하는 일에 그동안 거래해 왔던 청운목향이 요구한 금액은 무려 은 한 관이었다.
태백주가 아무리 명주요, 귀한 술이라고 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 리가…….
“그럼 돈은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돈이요? 돈은 왜요?”
“아니, 고작 태백주 한 병에 주조장 보수를 맡아 주시 겠다구요?”
“……”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대화에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은 능운비가 얼굴을 붉히며 크게 웃었다.
“핫핫! 이런, 난 또 태백주가 엄청나게 비싼줄 알았지 뭡니까?”
“아무리 비싸 봐야 술인데…… 공사 대금을 말씀하시면 제가 맞춰 보겠습니다.”
황 대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능운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습니다. 태백주 한 병이면 충분합니다.”
“예? 저, 정말로요?”
“암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면 무상으로 해 주시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무상이라니요?”
“……”
“황 대인.”
“예?”
“물(物)이라는 것의 가치는 파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매기는 법입니다.”
“……”
“남들은 하찮게 여기는 것일지라도 내게 천금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천금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태백주가…… 그만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좀……”
“제겐 그렇습니다. 제겐 그 태백주 한 병이, 일성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물건입니다.”
“……”
진심이다.
태백주 한 병에 무의 경지가 달라지게 생겼으니까.
어차피 힘 남는 애들 데려다가 일 시키는 건데…….
하지만 능운비의 마음과 달리, 황 대인과 객점 주인은 오해를 쌓아 가고 있었다.
마교의 삼공자, 그는 진짜로 엄청난 애주가일 것이라고…….
“자, 그럼 일단 현장부터 확인하러 갈까요?”
“예? 바로요?”
“머뭇거릴 시간이 어디 있답니까? 서둘러 주조장을 복원해야지요. 나갑시다.”
능운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당히 걷자, 황 대인과 객점 주인이 어리둥절해하며 뒤따랐다.
그리고 막 상가를 나서던 중 마주친 한사람.
“어? 넌 왜 왔어?”
“……못 들었을까 봐요?”
향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연신 침을 삼키는 꼴을 보니, 좀 전의 대화를 전부 들은 모양이었다.
하여간 귀도 밝지.
하지만 뭔 상관인가? 어차피 태백주는 그녀를 위한 공물(?)인 것을…….
“가자! 향아! 태백주니라!”
“오오오오!”
“……”
보무도 당당한 둘을 보며, 황 대인과 객점 주인은 나란히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저 여인, 아니 어린 여인도 애주가인 모양이라고…….
* * *
신평장(新坪場).
황 대인, 황자성이 운영 중인 양조장이었다.
“우아아…… 저, 저게 다 술이야?”
근처에서부터 쉴 새 없이 코를 벌름거리던 향이가 말릴 새 도 없이 남의집 대문을 벌컥 열면서 감탄했다.
하여간 버릇이 없다.
하지만 놀라긴 능운비도 마찬가지인지라 뭐라할말이 없었다.
담 위에 지붕을 둘러 그늘지게 만든 곳마다 쌓인 술독이 족히 수백, 아니 수천개는 되어 보였다.
와중에 양조장의 규모가 일전에 본 천주문에 버금간다.
화, 황 대인 이 사람. 그냥 촌에서 술이나 빚는 노인인 줄 알았더니, 어마어마한 부자였잖아?
“아직 덜 익은 녀석들입니다. 제대로 맛을 내려면 몇 년은 더 익혀야 합니다.”
“며, 몇 년이나요?”
“암요.”
능운비는 술의 숙성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무너진 주조장으로 향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지금은 감탄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공사를 마치고 태백주를 받아야 하니까.
황자성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드디어 갑자기 무너져 버렸다는 주조장이 보였다.
“정말 폭삭 내려앉았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도통 무슨 영문인지……”
“헛헛! 걱정 마십시오. 제가 순식간에 복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살펴보고 계십시오. 저는 저장고에 있는 태백주를 꺼내 오도록 하겠습니다.”
“태, 태백…… 음, 아닙니다.”
“예?”
“일부터 마치고 보상을 받아야지요.”
능운비가 고개를 가로젓자, 향이가 발끈하며 그를 째려봤다.
쯧쯧…… 그저 술맛을 보고 싶어서는…….
하지만 그건 안 되지. 너도 같이 일해야 하는데, 술 처먹고 입 닦아 버리면 곤란하잖냐.
“향아.”
“왜요!”
“가서 왕천이랑 주승 찾아서 이쪽으로 오라고 해. 객점 공사도 내버려 둘순 없으니, 인원을 좀 나눠야겠다.”
“이런 씨…… 그냥 태백주 받고 하면 될걸.”
“어허! 순서가 그렇지 않아.”
“순서는 무슨!”
“빨리 안 가?”
“알았어요, 알았어! 몰래 혼자 먹기만 해 봐라.”
향이가 짜증을 부리며 홱 하니 몸을 돌렸다.
성질머리하곤…….
그런데 떠나기 전, 그녀가 능운비에게 알 수 없는 전음 하나를 남겼다.
능운비가 곧바로 되물으려 했지만, 향이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허억!”
“……”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놀랄 수밖에.
“굉장한 분이시군요? 조금 전까지 옆에 계셨는데.”
“아, 뭐……”
이내 진정이 된 듯 가슴을 쓸어내린 황 대인이 혀를 내두르자, 능운비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누군가 일부러 무너뜨렸다는 건 무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