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20
“현아, 이 녀석아. 내 누차 말했건만…… 이리 먼지를 피워 대면 어쩌자는 것이냐?”
“……”
노인, 진산의 말에 거구의 사내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얼굴에 잔주름이 더욱 깊어지도록 웃은 진산이 대치의 중심을 향해 걸어들어왔다.
능운비가 그 둘레를 포위하고 있던 삭월대를 향해 눈짓하자, 삭월대가 일사불란하게 양쪽으로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어차피 상대가 안 된다. 만약 그의 성격이 과거 그대로라면, 괜히 검을 겨누었다간 제명까지 못 살 것이 틀림없었다.
“원, 예의도 바르지. 알아서 길을 내주어 고맙네.”
비켜난 삭월대원 한 명에게 눈인사를 한 진산이 장일산에게 다가갔다.
“대사부님.”
“어디 보자, 네 이름이……”
“일산입니다. 장일산.
“오, 그래. 그렇지. 지가 놈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던 장일산. 내 너를 기억 하느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동문 제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
“그나저나, 내 장문인께 검을 뽑을 때는 항시 세 번을 생각하라 가르치도록 일러두었는데…… 어찌 이리 가벼이 놀렸단 말이냐?”
“그, 그건 마교가……”
“마교가 왜?”
“예?”
“허허, 이런 아둔한 녀석. 저들이 봐주었음을 모르는 게야?”
“예? 그게 무슨?”
“진심으로 너희와 싸울 생각이었다면, 네가 검을 뽑기도 전에 목이 떨어졌을 게다.”
“예?”
진산의 말에 장일산이 거듭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아이야, 내 말이 틀렸더냐?”
“……”
진산이 바라보며 웃는 이는 능운비가 아니었다.
그 옆에 있는 시비 향이.
“하긴…… 제 주인 된 녀석이 막지 않았다면, 벌써 목부터 잘라 버렸을지도 모르겠군.”
떼어진 시선이 그제야 능운비를 향했다.
“사정을 봐주어 고맙네.”
“……부정친 않겠습니다.”
“그렇지. 그런 게지.”
능운비의 대답에 진산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에겐 하대였지만, 능운비에겐 반존대였다. 그 신분을 인정해 준 것이다.
반말을 한다 하여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나름 배려한 것이다.
“일산아, 그만 검을 넣거라.”
“대사부님, 하지만……”
“허허, 녀석. 내 채신머리없이 남들 다 보는 곳에서 사정을 해야 할까?”
“예? 아, 아닙니다.”
짓궂은 표정을 짓는 진산의 말에 장일산이 화들짝 놀라 검을 집어넣었다.
“그래, 그럼 되는 게지. 자네들도 이만 검을 넣어 주지 않겠는가? 늙으니 흉흉함이 그리 좋지 않아서 말일세.”
“……”
진산의 청에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였고, 종남을 포위했던 이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물론 경계심 가득한 눈빛은 그대로였고, 앞을 막진 않았으나 마치 능운비를 호위하듯 진을 이루었다.
갑자기 나타난 고수. 혹여 그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능운비를 지키기 위해.
“허허. 자네, 좋은 수하들을 두었네 그려.”
“……그저 잔소리꾼들입니다.”
“충(忠)의 마음이 없으면 잔소리도 하지 않는 법이라네.”
“그런가요?”
“그런 게지.”
“한데, 한때 대검호라 불리셨던 종남의 고인께서 이곳엔 어인 행차이십니까?”
“……”
능운비의 물음에 진산이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허허, 대검호라…… 나도 잊은 이름이거늘, 자네가 꽤 옛날 일을 들어 본 모양일세.”
“귀는 열려 있으니까요.”
“지금은 그저 종남의 뒷방을 지키는 늙은이라네. 가끔씩 이리 산하로 나들이나 다니고 있지.”
“……저를 찾아오신 걸음이 아니란 소리십니까?”
“아무렴. 그저 그리운 술맛이 떠올라 잠시 들렀는데, 때마침 사달이 난 것을 보았지 뭔가?”
“우연이란 말씀이시군요.”
“당연한 소릴. 일선에서 물러난 뒷방 늙은이가 개입해서 좋을 것이 뭐 있겠는가?”
“……”
능글맞게 웃어 대는 진산을 바라보던 능운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거짓부렁을…….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이 괜히 있을까?
종남의 문제인 이상 못 본 체하지는 않을 터.
그가 개입한다면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었다.
대검호 진산. 한때의 그는 동배의 누구보다 강했으니까.
저 팔만 멀쩡했다면 검으로 그보다 높은 곳에 이름이 걸린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가? 보아하니, 신평장이 자네의 허락 없이는 술을 내어 주지 않을성 싶은데……”
“……어, 어르신 어찌 그런 말씀을.”
안면이 있었던 신평장주가 난감해하며 진산과 능운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역시…… 개입할 줄 알았다.
굳이 자신을 거론한다는 것은, 일단 대화로 풀어 보자는 말일 것이다. 여차하면 싸울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공연히 관계없는 이를 괴롭히려 하십니까?”
“괴롭히다니? 누가 보면 내가 윽박이라도 지른 줄 알겠네.”
“아니었습니까?”
“생각하기 나름일 테지. 어떤가? 술 한잔 내어 주겠는가?”
“글쎄요. 제가 대접하는 술이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원, 사람…… 생각하기 나름이라니까.”
“재미있는 말이군요. 생각보단 말이 먼저였고, 그보다 검이 훨씬 더 먼저였던 분이 아니었습니까?”
“호오? 이거 원, 과거의 나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아는구만. 누군가? 자네에게 내 성격까지 알려 준 이가? 혹 담운천 그분인가?”
“……”
교주가 아닌 담운천 그분.
그리 친밀하게 부르는 것을 보면, 정파인 주제에 마교의 교주와 적잖이 친분을 가진 듯했다. 진산의 나이가 훨씬 더 많을 텐데도 분이라 존대하는 것을 보면 꽤 인정하는 모양이다.
“또 누가 있겠습니까?”
“핫핫! 그랬구만. 하긴 그분께서 나를 기억해 주다니, 참으로 기쁜 일일세.”
“한데 교주에게 분이라니…… 정파의 명숙이신 분께서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나이도 더 많으시면서.”
“엥? 내가 자네 스승을 높여 부르는 것이 마뜩잖은 건가?”
“……”
“이 사람아, 정마의 구분이 무슨 소용인가? 나이의 많고 적음은 또 무슨 상관이야? 존경받아 마땅한 자에겐 존경을 표해야 하는 법일세.”
“그랬던가요? 정파가?”
“흐음, 자네는 정파에 좋지 않은 기억이 많은가 보군.”
“마교인인 제게 좋은 기억이 있는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능운비가 종남의 제자들을 힐끗거리자, 진산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네.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닌 터라. 하지만 저들의 입장도 이해해 주게. 상황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게야.”
“……”
“어쨌든 담운천 그분은 참으로 대단한 분이야. 어찌 보면 그가 있어서 무림이 이리도 평화로운 게지.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함부로 쓰지 않으니…….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무섭다는 것을 아는것이지.”
“그런가요? 저는 넣어 두면 녹만 슬뿐, 뽑았을 때 그 효용이 있다고 배웠습니다만.”
“저런…… 누가 그러던가? 담운천 그분이 그러시던가?”
“……”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까지 짓는 모습에 능운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잡담일 뿐이다.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 참, 성격도 급하지.”
능운비가 더는 대화치 않겠다는 듯 딱 잘라 묻자, 진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칼을 굳이 뽑지 않고 넣어 둔 채로도 해결할 방법은 충분하단 말일세.”
“어떻게요?”
“음, 일단 들어가세. 멀리서도 신평장의 주향이 코를 찔러 와서 참을수가 없구만.”
“……”
늙은 생강 같으니.
안 본 사이에 말이 많이 늘었다. 기어이 안으로 들어와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겠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종남에서 가장 큰 어른이고 만인의 존경을 받는 자다.
그의 뜻이 곧 종남의 뜻일 터.
“좋습니다. 안으로 드시죠.”
“역시! 자넨 담운천 그분을 많이 닮았어. 객을 대접할 줄 알아.”
대접은 무슨, 본인이 그렇게 유도했으면서…….
“한데, 재들도 같이 들어가면 안 될까?”
“……”
“내버려 두면 내내 저기 서서 있을 아이들이라서.”
“데리고 들어오세요.”
“핫핫! 고맙네.
“대신!”
“……?”
“청운목향도 함께.”
“청운목향도?”
“예.”
슬쩍 뒤를 돌아본 진산이 피식 웃었다.
그가 어찌 능운비의 뜻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 사람, 보기보다 통이 크구만! 좋네, 그리하세.”
“예.”
진산의 결정에 염성인의 얼굴이 똥씹은 듯 구겨지자, 능운비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널 그냥 보낼 순 없지.
상황을 보니 내게 누명을 씌우고 종남을 끌어들인 것이 분명한데, 자유롭게 내버려 두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아?
향이도 참 큰일이었다.
사람 모가지가 그리 우습나? 어째 뻑 하면 목 딴다는 소릴 그리 쉽게 하는건지…….
능운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으로 들어갔고, 진산을 비롯한 나머지가 따라 들어왔다.
“대사부님, 저는……”
“사람 참,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나는 자네 눈을 믿네. 저 아이에게서 무언가를 본 게지. 걱정 말게. 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자네가 마교를 선택한 것에 토 다는 이는 없을것이네.”
“……예.”
평소 안면이 있었던 것인지, 황자성과 진산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진산의 생각은 능운비와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인이란 본시 이해에 따라 선택을 하기 마련인 것을…….
칼 찬 것이 벼슬인 줄 아는 무인 놈들만 괜히 편을 갈라 애꿎은 이들에게 지랄들이지.
* * *
신평장 안쪽에 마련된 연회장.
황자성이 제법 신경을 쓴 것인지 자리가 잘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안부들을 물으며 분위기가 제법 괜찮았던 것도 잠시, 조사를 누가 주관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아니 될 말입니다! 마교 단독 조사라니요! 저들을 어찌 믿고 맡긴답니까!”
“흥, 그럼 난 그대들을 어찌 믿고 참관만 한다는 거지?”
“뭐요? 우리 종남을 어찌 보고! 우리가 은폐나 조작이라도 할 거라고 여기는 것인가!”
“그대가 마교를 보는 것과 똑같이 본다, 왜!”
“……”
장일산과 능운비는 한 치의 밀림 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종남의 무인들과 마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목소리만 내지 않았지, 양쪽으로 나누어진 채 술자리 내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허 참…… 술 마시면서 대화하면 접점이 생길 줄 알았더니, 싸움만 격화되는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말이죠.”
진산의 말에 능운비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려 버리자, 장일산이 그걸 또 고깝게 여겼다.
“보십시오, 대사부님. 어른에 대한 예의도 모르는 자입니다! 저런 자를 어찌 믿겠습니까?”
“어른에 대한 예의? 착각하지 마라, 종남의 제자.”
“뭐라?”
“앞서 말했듯, 조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상나는 교주님의 대리 신분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진산 어른과 같은 배분으로 서있단 뜻이야.”
“이자가!”
능운비의 비웃음에 장일산이 연신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둘 다 그만들 하게. 이젠 한 지붕을 놓고 머물게된 사이에, 어찌 좋은 술을 앞에 두고서도 그리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
“흠, 어쩐다? 내 일선에 물러난지 오래라 참견을 할 수도 없고…… 안 하자니 또 싸울듯하고……”
진산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능운비를 향해 말했다.
“자넨 꼭 직접 조사를 해야겠지?”
“당연합니다.
“일산이 너는 절대로 마교에 조사를 맡길 수 없고?”
“그렇습니다, 대사부님!”
“음……”
다시 고민을 시작한 진산의 입이 한참 만에야 떨어졌다.
“그럼 이렇게 하지.”
“……?”
“마교에 조사를 맡기겠네.”
“대사부님!
“일단 내 말부터 듣거라.”
“……”
“마교가 조사를 하되, 내가 직접 참관하겠다.”
“예?”
“하지만 장문인이 아닌 내가 그러한 결정을 내리자면, 모두가 합당하다 여길 만한 명분이 필요할 터.”
진산이 능운비를 쳐다봤다.
“해서 어떤가? 자네가 그 명분을 만들어 보는 것이?”
“예? 그게 무슨?”
“우리가 누군가? 정파니 마교니 하지만…… 결국엔 무인이지 않은가.”
“그래서요?”
“무인 사이에 문답은 무용한 법이네.”
“……”
진산의 말에 능운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문답이 무용하다. 즉, 힘으로 하자는 소리다.
그런데 너랑 나랑?
“……”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진산을 바라보는 능운비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이런 썅!
그게 말이 돼? 난 제자고, 당신은 종남 대사분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