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39
“……”
눈을 뜨는 것이 힘들다.
용력을 타고난 천하장사도 눈꺼풀의 무게는 이기기 힘들다고 하더니, 잠깐 잠이 들었던…….
“……!”
순간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잠일 리가 없지!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두 번, 아니 세 번?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처박혔던 것 같다.
몇 번인지 잘 기억도 안 날 만큼.
망할노인네. 죽이려다 살리려다, 대체 뭔 놈의 변덕이 그렇게나 심하단 말인가?
벌써 노망이…… 들 만한 나이로 보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살려 주려면 곱게 살려 줄 것이지, 허공답보씩이나 할 줄 알면서 사람을 그리 암벽에 패대기를 쳐?
“이런 씨아……앙, 아이구 머리통이야.”
화가 치미는 통에 상체를 벌떡 일으키던 능운비가 제 뒤통수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얼굴을 찡그렸다.
주먹만 한 혹이 만져졌다.
와중에 머리에서 시작된 통증이 목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얼마나 거세게 때려 박혔는지, 온몸이 욱신거려 왔다.
어디 한 군데 박살 난 건 아닌가 싶어 조심스레 손가락도 움직여 보고, 발가락도…….
욱신거리긴 했지만, 팔다리가 멀쩡한 것을 보니 뼈가 부러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겨우 살았다.
천만다행이다. 다시 사는 목숨이라 이리도 쉽게 잃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몸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다음에 떠오른 것은…….
“이 망할 노인네!”
“나 말이냐?”
“……”
홧김에 버럭 토해 낸 고함에 대한 답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홱 돌린 능운비는 무심하게 쳐다보는 노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산발이 되어 아무렇게나 늘어진 머리카락, 처음 보았던 그대로 정광이 가득한 눈빛.
그 얼굴만 봐도 화가 치밀었다.
객으로 초대해 놓고 다짜고짜 공격을 해?
이게 이름 높은 화산의 법도냐? 그러고도 당신이 선도를 닦아 등선을 꿈꾸는 화산의 도사야?
하지만 그러한 생각과는 달리 능운비가 외부적으로 드러낸 표정은 무척이나 간사할 따름이었다.
“아, 어르신! 옆에 계셨군요? 핫핫, 제가 정신을 너무 오래 놓고 있었지요?”
“……”
능운비가 노인을 향해 눈까지 휘어가며 해맑게 웃었다.
어쩌라고?
딱 봐도 전대 기인이다. 심지어 허공답보까지 쓰시는 그런 엄청난 분이시고…….
“꽤 오래 정신을 잃고 있기는 했지. 한데, 아까 뭐라고 했더냐? 망할……노인네?”
“예? 누가요? 제가요? 그럴 리가요? 아마 잘못 들으셨겠지요, 핫핫.”
“글쎄, 아직 가는귀가 먹진 않았다만?”
노인의 눈매가 게슴츠레해지자 능운비가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
“당연히 어르신께서 잘못 들으셨을리가 없지요. 이리 정정하신데 가는귀가 먹었을라구요?”
“……”
“이래서 마공이 문제라니까요? 마기가 골수까지 스미어 가끔 정신을 잃었다가 깰 때면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 나온다니까요? 가끔 잠꼬대로 교주님 욕도 한다고 하더라구요.”
급기야 있지도 않은 사실까지 주절거리며 노인을 달래 보는 능운비였다.
“큭, 맹랑한 놈. 거짓부렁이 아주 입에 달렸구나?”
샐쭉한 표정으로 째려보는 노인이었지만, 능운비는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까처럼 다짜고짜 공격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 노인은 대체 누구지?
화산에 청진 말고도 이런 실력자가 있었나?
전설상의 허공답보를 실제로 보여줄수 있는 사람이…….
능운비는 삼십 년도 더 된 과거의 기억까지 되짚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한데, 마교가 화산엔 어쩐 일이더냐? 내 지금 생각해 보니 숨어든 것 같지도 않고…… 또, 일행이 있는 것으로 보이던데?”
“아, 모르고 계셨습니까?”
“뭐를 말이냐?”
노인의 눈동자에 어리둥절함이 떠오르자 능운비가 무릎을 탁 쳤다.
“여윽시, 그런 줄알았습니다.”
“그런 줄 알았다?”
“예. 그 명성이 천하에 자자한 화산이, 설마하니 객에게 함부로 살수를 펼치기야 하겠습니까?”
“……객이라고? 마교가 화산의?”
노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자, 능운비가 황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최대한 공손하게.
“실은 얼마 전에 정마 협약이 체결되었지 뭡니까?”
“뭣이! 정마 협약이라니? 정파가 마교와 협상을 했단 말이냐!”
곧바로 화를 내는 노인의 모습에 능운비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 이놈의 노인네.
도를 닦았으면 마음이 명경지수와도 같아야지, 감정 기복이 왜 이렇게 심해? 이러니까 부동심하면 소림이란 소리가 나오지.
“그 말을 믿으란 것이냐! 마공이나 익히는 흉악한 놈의 말을!”
노인이 당장에라도 손을 쓸 듯이 선기를 마구 피워 냈다.
옆에 있기만 해도 청량감이 느껴진다는 선기가 뭐 이리 흉흉한 것인지.
“어르신, 일단 진정해 주십시오. 화를 내시더라도 제 말부터 들으신 뒤에 내셔도 늦지 않습니다.”
“크음……. 좋다! 하나 날 속일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 것이다. 네놈의 말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내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노인은 씩씩거리며 능운비를 노려봤지만, 일단은 들어 보려는 듯 전신 가득 피워 올리던 선기를 거두었다.
“실은 얼마 전 감숙성에 위치한 천주문이라는 곳에서 큰일이 있었습니다.”
능운비는 정마 협약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을 사실에 입각해 전달했다. 다만 자신에게 매우 유리한 방향으로, 누가 봐도 마교가 잘했다는 느낌이 들게끔 정성들여 각색해서.
“뭣이? 천주문이라는 곳이 그따위짓을 벌였다고?”
“예. 정말이지 인면수심이 따로 없었습니다.”
“음…….”
“그리고 그 이후로 제가 본 중원은 정말로 듣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더군요.”
“……”
이미 천주문 얘기에서부터 일그러져있던 노인의 얼굴은 이후로도 펴질 줄을 몰랐다.
능운비는 그 위로 사실을 조금씩 얹었다.
산채를 털어 불우이웃을 돕고, 종남과 연을 맺고 있던 청운목향의 더러운짓거리를 밝히는 등등…….
말하는 내내 노인은 능운비를 노려보았다.
하나 잔잔한 수면처럼 고요한 능운비의 눈동자에서 그 모든 이야기가 진실이었다.
그럼 정말로 정파의 허울을 쓴 자들이 그따위 짓거리를 했단 말인가?
도리어 마교의 탈을 쓴 자가 사람들을 도왔고?
“허, 무량수불, 무량수불…… 어찌 그 같은 일들이 벌어졌단 말인가?”
노인은 급기야 도호를 되뇌며 마음을 다스렸다.
“……해서 객으로 초대를 받았던 겁니다. 화산에게.”
“음.”
능운비의 말이 끝났고, 노인은 눈을감은 채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노인이 다시 눈을 떴다.
어느새 흉흉하던 기세는 사라지고, 전대 기인이자 평생을 수양해 온 도사의 눈빛이 능운비를 직시했다.
“능운비라 하였던가?.”
“예?”
“내 자네에게 큰 결례를 범했네.”
“예?”
산발이 되었던 머리를 단정히 묶고 옷매무새를 고친 노인이 별안간 능운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능운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스러워했다.
감정 변화가 뭐 이리 심하단 말인가? 죽이려다가, 살려 주었다가, 화냈다가 이제는 또 사과를 해?
설마 노망이 든 건 아니겠지?
“어, 어르신!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비록 자네의 입에서 나온 말이나 그 고함에 거짓이 느껴지지 않으니, 확인하지 않았다 하여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어, 어르신……”
“상황을 알지 못하고 무리하게 손부터 쓴 것을 사과하네.”
“사과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어르신에 비해 한참이나 어립니다. 또한 마교인인 제게 어찌 무릎을……”
“무량수불. 사과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며, 정마의 구분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예?”
“응당 잘못한 것이 있으면 사과부터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 게지.”
“……”
“평생을 도를 수련했다는 자가 일순간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손부터 썼으니, 이처럼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어르신.”
“더욱이 하마터면 자네를 죽음에 이르게 할 뻔하였으니, 이는 크나큰 죄인셈일세. 부디 이 어리석은 늙은이의 행동을 용서하시게나.”
고개까지 숙인 노인을 차마 일으켜 세우지 못한 능운비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다.
평생을 마와 싸우며 살아온 도사가 제 집안에서 마를 보았으니 어찌 참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다행히 노망이 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앎과 행동함의 차이.
안다 해서 모두가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행한다하여 아는 것이 아니다.
노인은 알게 된 순간 행하였고, 그 행함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비록 그것이 당연하다 여겨질 만한 일이나, 세상에는 그 당연한 것을 행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더욱이, 노인의 나이쯤 되면 쓸데없는 고집이 세지는 법이다. 또한 그 체면으로 인해 지위와 신분을 내세워 타인에게 지은 잘못을 무마하려 하기 일쑤다.
하지만 노인은 행하였다.
그 작은 차이가 그의 품성을 내보이는것이다.
하긴, 청진 그놈도 그랬었지.
문득 과거의 어느 때가 떠오른 능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화산은 화산인 건가? 비록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만.
“어르신, 그만 일어나시지요. 민망합니다.”
“음…….”
“어서요.”
능운비의 거듭된 재촉에 노인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굳은 얼굴은 여전했으나, 능운비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앉으세요.”
“음.”
권한 자리에 앉은 노인 앞에 마주 앉은 능운비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산임이 분명하나 그 정체를 알 수없는 노인.
그가 화를 낸 것은 자신에게서 마향을 감지했을 때부터 였으나, 폭발한 것은 담운천의 제자임을 알게 되었을 때 부터였다.
아마도 그와 은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만 오랜 기억을 더듬어 봐도 화산에 이 같은 고수가 있었다는 건 떠오르지 않으니, 결국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한데 어르신께선 뉘십니까?”
“나는…… 독고성이라 하네.”
“독고……성이요?”
노인의 답에 능운비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화산의 도사인데, 도명이 아니라 본명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하면, 화산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머무르긴 했었지.”
“……?”
“사문의 이름을 더럽혀 파문당하였으니 어찌 화산의 이름을 쓰겠는가?”
파문(破門). 쫓겨났다는 소리다.
통상 도가의 파문이란 함부로 행해지지 않는다.
특히나 노인의 말처럼 사문의 이름을 더럽힌 죄를 지었다면, 응당 그에 따른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즉, 화산이 준 것을 화산에게 반납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내력을 잃고 사지근맥이 잘린다든가하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노인의 상태가 너무 멀쩡하지 않은가?
더욱이 허공답보까지 쓰는 노인네가 파문이라니…….
“하면, 파문 전의 도명은 어찌 되십니까?”
“현천이라 하네.”
“……현자 배시라구요?”
“그렇네.”
노인의 담담한 말에 능운비가 눈을 부릅뜨고 놀랐다.
화산의 현자 배.
척월린의 기억을 들추어도 그 도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도 원로였던 이들이 바로 현자 배의 도사였지 않은가.
하지만 무려 삼십 년 전이다.
그 세월이 지나도록 여태 살아 있다고?
“허, 허면…… 대체 연세가 어찌 되시는 겁니까?”
“글쎄, 너무 오랜 시간 면벽했더니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구만.”
“……”
희미하게 웃으며 하는 그 말에, 능운비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과거의 어느 때 만났던 청진의 나이가 마흔. 그리고 삼십 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칠십이 되었을 터다.
그럼 그 윗대인 노인의 나이는……배, 백 세 이상?
잘게 떨리는 눈동자로 노인을 바라보던 능운비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도, 동안이셨군요?”
“동안은 무슨? 산속에서 세월을 잊고 살았더니 조금 덜 늙었을 뿐일세.”
할 말이 없었다. 청진의 동기들도 대부분 등선했을 것인데…….
이건 뭐, 숫제 신선이나 다름없는 노인이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저어,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까 파문을 당하셨다는 게 무슨 뜻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파문이 파문이지, 무슨 다른 뜻이 있겠는가?”
“그렇기엔 너무 멀쩡하지 않으십니까?”
“허허,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독고성의 눈빛에 회한이 어렸다.
“스스로 근맥을 자르려 했으나, 제자 녀석이 하도 간곡하게 애원하는 통에 그러하지 못하였네.”
“……”
그럴 만하다. 허공답보가 무슨 아장아장 걸음마도 아니니…….
그 전설적인 경공마저 해내는 양반을 어찌 내칠 수가 있었겠는가?
그를 내쳤다면 화산의 크나큰 손실이었을 것이다. 제자는 물론이거니와 화산 전체가 두 손 두 발 들고 말려야했을 일이다.
“제자 되시는 분께서 화산을 위해 정말 큰일을 하셨군요.”
“못난 스승을 둔 덕에 고생만 한 녀석이지.”
“설마 어르신을 못났다고 여기기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화산 전체가 그에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
능운비가 가슴을 쓸어내리자 독고성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일까? 어찌하여 마공을 수련한 이가 이토록 친근하게 느껴지는가?
그의 말과 행동…… 과장됨이 분명히 있으나, 가식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치 그를 보는 것만 같았다.
마도인이나 마도인 같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자신에게 치욕을 안겼으나 내심 원망이 들지 않았던.
담운천, 그의 모습이 이 능운비란 청년에게서 아련히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