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53
능운비의 명령에 서하채가 천천히 움직여 육지에 닿았다.
이내 일행들이 짐을 챙겨 배에서 내리자, 웅표도 물고기 잡을 준비를 시작했다.
“너도 가려고?”
“예?”
“넌 안 되지. 한 번 도망치려 했던 놈이 두 번은 못 칠까?”
“……”
“애들 보내.”
“눼.”
웅표의 입이 댓 발이나 밀려 나온 것을 보니, 도망칠 궁리를 하긴 했었던 모양이다.
실망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수하들을 보낸 웅표를 향해 능운비가 물었다.
“참, 지금 연락을 보내면 총채주는 언제 오냐?”
“글쎄요. 가까운 곳에 계신다면 얼마 걸리지 않겠지만……. 최대 사나흘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그렇게나?”
“그분의 발걸음은 황하의 전역에 닿아 있으니까요.”
“?. 어쩔 수 없지. 서하채에 마교의 삼공자가 찾아와 총채주를 만나 뵙고자 한다고 전해.”
“예.”
능운비는 웅표가 작성한 전서를 꼼꼼히 읽었다.
이놈이 무슨 내용을 어떻게 적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렇게 전서를 보낸 뒤, 능운비는 탐탁지 않은 듯 입맛을 다시며 강을 바라봤다.
연락까지 보내 놓고 나니…… 할 일이 없다.
수적들이랑 농담이나 주고받을 수도 없는 일이고.
“……아!”
능운비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왕천을 쳐다봤다.
“왕천.”
“예?”
“이놈 못 도망가게 잘 지켜.”
“어디 가시게요?”
혹시나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 봐 걱정된 왕천이 못마땅하게 쳐다보자 능운비가 씩 하고 웃었다.
“수련.”
“수……련을 하신다구요?”
“기다리는 동안 할 일도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잘 지키고 있어. 혹시나 총채주가 도착하면 곧바로 알리고.”
능운비가 피풍의와 윗옷을 벗어 맨살을 드러내자, 왕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하시려고?
그런데 수련을 한다던 능운비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강이었다.
잠수 능력이야 인정하지만, 딱히 수공을 익히신 것도 아닌데 물은 왜?
“호오? 그런 건가?”
“……예?”
능운비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향이가 묘한 표정으로 웃자, 왕천이 홱 하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뭐가 그렇다는 거지?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왕천을 향해 향이가 말했다.
“음, 넌 말해도 모를 거야. 가서 수적들이 마시는 술이나 좀 찾아 와. 식량 창고에 있는 고기도 좀 구워 오고.”
“……”
그 무시 가득한 말에, 왕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가 고수면 고수지…….
“안 가?”
“벌써 몸돌려 걷고 있네요.”
하지만 생각과 달리 왕천의 육체는 본능에 충실했다.
그녀가 어디 보통 고수던가?
무려 시비님이다.
주군도 어쩌지 못하는 시비 중의 시비, 씨비님.
……반드시 그녀보다 강해지고 말겠다. 설산장의 명예를 걸고.
왕천이 땅을 꾹꾹 눌러 밟아 가며 식량 창고로 향하는 동안, 향이는 물속으로 들어가는 능운비를 쳐다보았다.
좋은 판단이다. 자신이 실마리를 던져 주지 않았음에도, 이젠 스스로 깨달아 가고 있다.
그는 지금 시각과 청각의 다음으로 촉각을 단련하려는 것이다.
촉각이란 건 고작 손과 발로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몸을 덮고 있는 피부. 그 전체로 주변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기의 흐름을 읽어 낸다.
그리되면 눈을 감고도, 귀를 막고도 주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 범위가 넓어지면 칠흑 같은 어듬 속에서도 주위를 볼 수 있는 제 삼의 눈이 개안하는것이다.
하나, 처음부터 공기의 흐름을 느낀다는 것이 어디 쉬운가?
해서 능운비의 선택은 칭찬할 만한일이었다.
공기가 아닌 물. 무게감이 다르기에 더욱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에 익숙해지고 나면,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건 한층 쉬워질 것이다.
문득, 자신의 할머니인 화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담운천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는 재주를 가졌다. 그것이 바로 그를 절대의 길로 인도한 재능이지.
-하늘 아래 그런 재능을 가진 자는 오직 그놈뿐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여기 또 있네요, 할머니.”
피식 웃은 향이의 눈매가 게슴츠레해졌다.
아마 능운비는 머지않아 강기의 경지에 들 것이다.
시각, 청각에 이어 촉각까지 초월하고 나면.
기실, 굳이 미각과 후각마저 초월할 필요는 없다. 두 개의 감각은 강의 경지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지,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었으니까.
시, 청, 촉의 세 가지 감각을 초월하면, 자신 주위의 공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닿을 것이다.
오직 강의 경지를 깨달은 인간에게만 보이는 세상에.
또한 그리되면 지금까지 향이가 가지고 있었던 의문의 일부가 풀릴 것이다.
어째서 그가 자신이 잡술이라 말한 것들을 익히고자 그리도 애를 쓰는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는 교주가 되어야만 하니까.
자신과 약속한 두 가지 부탁을 위해서라도.
“문제는 너무 빠르게 성장한 탓에 내실이 튼튼하지 못하다는 건가?”
향이가 머리끝까지 강물 속에 잠긴 능운비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관시에 든 것도 그러했고, 또한 하늘이 허락한 자만이 경험한다는 무아의 상태도 그러 했다.
“젠장, 머리만 복잡해졌네.”
물론 뭐든 상관없었다. 자신은 그저 그를 멀쩡한 모습으로 데리고 돌아가 교주에게 인계하기만 하면 된다.
뭐, 교주가 되도록 살짝 도와줘도 좋고…….
다른 네 명의 제자보다는 그가 더 익숙하니까.
그리고…… 일이 잘못되어 죽이게된다고 해도, 그를 위해 울어 줄 이는 설산장과 그 휘하의 무인 몇몇이 전부니까.
향이의 눈동자에서 퍼런빛이 일렁이다 사라졌다.
* * *
섬서와 하남의 경계, 삼문협 물길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갈대밭.
사락, 사라락.
한 사내가 사람의 어깨높이만큼이나 솟은 갈대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발소리는 갈수록 가벼워졌고, 갈대를 좌우로 가르는 손길은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다.
이내 갈대밭이 끝나고 드러난 강가.
사내의 눈에 허름한 챙뿐인 모자를 쓰고 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이 보였다.
사내는 멀찍하게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춘 채, 노인이 먼저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이미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나 저리도 집중하고 있는 것은, 팽팽히 당겨진 낚싯줄 때문일 터다.
이내 잡으려는 자와 도주하려는 것의 싸움이 시작됐다.
부욱!
그 힘이 충돌해 대나무 낚싯대가 부러질 듯 크게 휘자, 노인이 벌떡 일어나 용을 썼다.
하나 낚싯줄에 걸린 놈도 만만치 않은 듯, 물 위로 소용돌이까지 만들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네놈이구나!”
별안간 노인의 목소리에 희열이 어렸다.
펄떡거리며 몸부림치는 탓에 간간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굵직한 비늘, 아는 놈이었다. 아니, 수년째 소망해 온 놈이었다.
놈이 나타날 만한 장소를 찾아 얼마나 헤매었던가?
그간 놈과 몇 차례 마주쳤음도 번번이 잡기에 실패했다.
터전이 강인 만큼 오랜 시간 노려 왔으나 여태 잡지 못한 황룡어(黃龍魚).
설마하니 고기 주제에 용이기야 하겠느냐마는 노인은 놈에게 그런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황하의 어부들까지도 그리 불렀다.
하나 누구도 놈을 잡지 않았다.
설사 그물에 걸려도 놓아 주었다.
고기의 이름이 황룡어였기에 용의 진노를 받을까 봐 두려워서?
아니다.
어부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황룡어를 자신의 목표로 점찍어 둔 노인의 진노였다.
막청주. 노인의 이름이었고, 천하 모든 강을 자신의 영역이라 호언하며 천하 수적들을 발아래 놓고 군림하는 인물이다.
용왕은 전설 속에 존재하지만, 그는 현실 속에 재앙으로서 군림했다. 장강과 황하에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이라면, 그 누구도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런 그가 ‘황룡어는 내 거다!’라고 말했는데, 어떤 놈이 감히 토를 달겠는가?
와중에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며 황하 전역을 싸돌아다니고 있었고, 지금의 갈대밭은 그가 최근에 머무는 낚시터인 셈이었다.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찌이익!
낚싯대 끝이 파들거리며 떨렸고 잔뜩 휘어진 대가 부러질 듯 위태로웠지만, 막청주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지난번 싸움에서는 줄이 끊어졌고, 그 전의 싸움에서는 대가 부러졌다.
하지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는 법.
줄은 몇 배로 굵어졌고, 대도 질기디질긴 놈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이놈! 이번에야말로 네놈을 잡고 말겠다!”
막청주가 회심의 미소를 머금은 채 있는 힘껏 낚싯대를 당겼다.
어르고 달래 기를 반복하는 막청주의 싸움이 한참을 이어지던 그때.
핑!
“……헛!”
막청주와 황룡어.
둘의 싸움에서 가장 먼저 패배한 것은 낚싯줄이었다. 굵은 줄로 바꾸었건만, 허망하고 허망하게도 오랜 팽팽함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져 버린 것이다.
바늘도 없이 허공에 흩날리는 낚싯줄을 아쉽게 바라보던 막청주의 눈에, 황룡어가 물 위로 풀쩍 뛰었다가 쏜살처럼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저 빌어먹을 놈이…… 약을 올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래도 오늘은 어복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아……. 천휴, 무슨 일이냐?”
어느새 잔잔해진 수면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막청주가 묻자 사내, 천휴가 그제야 다가섰다.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줄만 끊어지지 않았어도 거의 잡을뻔했는데.”
“잡을 뻔만 했지. 아무래도 저놈을 잡자면 어디서 천잠사(天蠶絲)라도 구해 와야 할 모양이다.”
툴툴거리는 그 말에 천휴가 빙긋이 웃었다.
천잠사. 사람이 갈 수 없는 고산에서 특수한 영기를 머금은 채 서식한다는 천잠이 뽑아내는 그 실은 가히 천금의 보배와도 같았다.
옷을 짜면 갑옷보다 튼튼하고, 병기로 사용하면 보검보다 날카롭다는 그것을 낚싯줄로 삼을 생각을 하는 게 막청주다웠다.
누가 뭐라 할까?
사파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절대자인데…….
“내공으로 잡으시면 될 일을 어찌 이리 어렵게 가십니까?”
“어허, 그럼 의미가 없지. 내공을 쓰면 무인으로서 잡는 것이지, 낚시꾼으로서 잡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명색이 황하의 수장인데 어찌 꼼수를 부려? 두고 봐라. 내 반드시 정면 승부로 놈을 잡고 말 테니까.”
실로 낚시꾼다운 모습으로 열의를 불태우는 그 모습에 천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긴, 그의 무료한 삶에 이만한 사건이 어디 있을까?
그의 친우인 녹림왕을 찾아가 술판을 벌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나저나 무슨 일이냐? 낚시 중에는 방해치 말라 했는데?”
“그것이……”
천휴가 조심스레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수채들끼리 연락할 때 사용하는 전서였다.
한데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자신에게 전서가 올 리가 없는데?
또한 낚시 중인 줄 알면서도 다가왔다면, 보통 일은 아닐 듯했다.
막청주가 의아한 얼굴로 전서를 펼치자, 그 안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적혀 있었다.
“호오? 마교의 삼공자가 나를 만나려고 서하채를 찾아왔다?”
“그렇습니다.”
막청주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아무리 마교의 삼공자라곤 하지만 서하채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들을 공손히 안내할 리는 없으니…….
“강제로 점령했다는 뜻인데…… 나를 왜 만나자고 했지?”
“그건 저도 모르죠.”
“흠…….”
천휴가 어망과 낚싯대를 챙기며 고개를 저었다.
“능운비라……”
문득, 얼마 전 들은 소문이 떠올랐다.
녹림왕의 패배.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녹림왕 그놈이 어떤 놈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낸 편지에는 능운비에 대한 칭찬만이 가득 담겨 돌아왔다.
그 역시 소문을 들었을 것이 분명한데 칭찬을 하다니?
그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여 자신도 그 능운비란 놈에게 호기심이 동하긴 했더랬다.
한데 놈이 먼저 자신을 찾아오다니?
무료한 일상에서 새로운 사건을 마주한 막청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큭큭, 좋아. 기껏 찾아왔다는데 한번 만나 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