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172
“주군, 승산입니다.”
정무맹을 떠나 한참을 달리던 중 왕천이 멀리 보이는 산을 가리켰다.
하남성 등봉현 승산, 소림을 품고 있는 곳.
“왕천.”
“예! 주군.”
능운비의 부름에, 왕천이 뒤따르는 삭월대를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모두 멈춰라! 여기서부터 관도를 따라 걷는다!”
“예!”
왕천의 외침에 활짝 펼쳐져 숲을 내달리던 삭월대 무인들이 하나둘 능운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정무맹을 나설 때 기어이 쫓아 나온 황병찬이 말을 준비하겠다 했지만……말은 무슨?
감시자를 붙이려는 속셈을 누가 모를 줄아나? 어림도 없지.
산? 절벽? 계곡?
길 따윈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다.
내가 가면 그곳이 길이지.
그 탓에 자신을 뒤쫓아 오는 삭월대가 조금 지치긴 했지만.
가쁘게 뛰어온 삭월대 무인들이 숨을 고르는 동안, 능운비는 눈앞에 장대한 모습을 드러 낸 산을 바라봤다.
높게 뻗어 고고하게 선 세 개의 봉우리. 태실, 준극, 소실.
그 아래 수없는 봉우리가 모여 하나의 산이 된다.
“숭산……”
나지막이 중얼거린 능운비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참 인연이 많은 곳이다.
태실봉에 숨었다가 정화를 만났던가?
그는 참 희한한 중놈이었다.
맨 처음 자신을 찾아와서 한 말이…….
-그 고기 나눠 먹자.
……였나?
그를 떠을린 능운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친 중놈이었다. 술에 고기에, 땡중도 그런 땡중이 없다.
와중에 사자후를 익힌 놈이라 목소리는 얼마나 컸던가? 살업을 멈추라며 설교하는 내내 귀가 먹먹했었다.
뿐인가?
외공을 수련한다고 시도 때도 없이 절벽에 몸을 때려 박던 것도 기억이 났다. 그래서인지 몸에 칼도 안 박히는 통에 어찌나 상대하기 까다롭던지.
“잘 있는지 모르겠군.”
“……예? 누가요?”
능운비가 숭산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왕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아…… 교주님?”
“전 또 뭐라고. 교주님이야 잘 계시겠죠. 어디 편찮으신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지.”
대충 얼버무린 능운비는 정화에 대한 회상을 정리했다.
뭐, 어떤 모습이든 지금은 많이 늙었을 테지.
어쨌든 이제 숭산으로 향해야 한다.
정확히는 숭산의 세 봉우리 중 서쪽에 솟아 있는 소실봉.
그 아래 소림이 있다.
천축국의 신승 발타가 중원에 흘러와 창건한 이래, 달마가 깨달음을 얻고 그것이 다시 혜가에 전해지며 수많은 제자에게로 가르침이 이어진 곳.
소림은 그때부터 같은 자리를 지키며 천 년에 달하는 유구한 역사를 천하와 함께 흘러왔다.
비록 속세를 떠났으나 때로는 민중의 편에서 불의에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또 때로는 외침(外侵)에 대항해 나라를 지켰다.
그럼에도 대가를 바라지 아니하고 환란이 끝나면 다시금 수양의 자리로 돌아가니, 그들을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파의 모든 문파가 지도자를 잘못만나 부패한 경험이 한 번쯤은 있었음에도 소림만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정사마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고 고결함을 지켜 온 존재, 그것이 바로 소림이었다.
하여 관도, 무림도 소림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중원의 세력들은 항시 그들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큰일에 앞서 자문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능운비는 지금 소림으로 향하는 것이다.
모두가 존경하는 소림에 들어가는 순간 세상과 분리된다. 소림에 머무는 동안에는, 정무맹은 절대로 자신의 행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해 보지 않았던가?
설사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라 해도, 소림에 숨어 버리면 그가 스스로 나오기 전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능운비의 가벼운 발걸음이 소실봉으로 향하자, 왕천과 주승, 삭월대가 그 뒤를 따랐다.
승산으로 뻗은 관도 위를 걷는 그들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이내 곳곳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마교의 상징인 일월기를 세워 든 채 검은 피풍의를 휘날리며 걷고 있으니 당연한일이었다.
마교의 공식적인 소림 방문이라니, 이제껏 누구도 보지 못한 생소한 광경일 테지.
한참을 걸어 도착한 소실봉 앞에는 무수히 많은 행렬이 이어져 있었다.
예불을 올리러 가는 이들이다.
능운비는 그들을 방해치 않으려 한참을 돌아 소림의 산문으로 향했다.
“주군, 소림승입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왕천이 멀리 일주문 근처에 모여 있는 소림승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소림이 처음이라 그럴 것이다.
자신이 그렇듯, 왕천 또한 마교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아니, 왕천뿐 아니라 주승과 삭월대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마교인들과 달리 설산장에서 살아온 그들의 적은 항상 천산북쪽에 있었으니까.
어쩌면 다들 승려를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일지도 몰랐다. 중원에 나와서도 절간에 들렀던 적은 없지 않던가?
어쨌든 저리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마 정무맹으로부터 마교의 방문을 미리 전해 들었기 때문이리라.
“이쪽으로 오는데요?”
왕천은 침까지 삼키며 긴장했고, 삭월대는 아예 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싸우러 왔냐?”
“예?”
“그냥 통상적인 방문이야. 긴장들 풀어.”
“하지만…… 마기가 통 진정이 되질 않는데요.”
“……”
하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불가의 근처라 그런지, 몸속의 마기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처럼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이럴 땐…….
“진정이 안 되면 항마주라도 외워. 괜히 마기를 드러내서 소림이 경계심을 품게 하지말고.”
“알겠습니다.”
능운비의 말에 일행이 제각기 열심히 항마주를 외우기 시작했다.
“뇌공이시여……”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들에 능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전엔 마교가 무슨 항마주냐며 발끈하더니, 이젠 다들 제법 능숙하게 구절을 왼다. 아마 항마주를 외우는 최초의 마교인들일 것이다.
다행히 다들 한결 편해진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소림승들이 일행의 앞까지 다가왔다.
“아미타불, 빈승은 소림의 공문입니다.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림승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능운비를 향해 차분히 반장했다.
설중단비(雪中斷臂). 그 옛날 달마에게 깨달음을 구하려 한쪽 팔을 잘라 붉은 눈이 내린 것처럼 만들었다는 혜가의 고사.
그 때문에 소림은 반장을 한다.
“마교의 능운비가 소림의 공문 선사를 뵙습니다.”
능운비가 합장하여 예에 답하자, 공문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마교인이 합장이라니? 더욱이 교주의 제자가 아닌가?
당당히 가슴을 펴고 이름을 밝힐 것이라 생각했는데, 불가의 예법에 따라 화답해 오니 조금 의외였다.
“어찌 놀라십니까?”
“정무맹에서 전하길 객으로 찾아온다고 하였는데, 참말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설마 불가에 다른 목적이야 있으려구요?”
“……”
“특별히 소림과 척질 일도 없으니, 너무 경계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마교가 백주에 당당히 걸어 소림을 찾아온것은 처음인지라……. 지레 편견부터 가진 제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미타불.”
말은 사과였지만, 공문의 얼굴은 차분하기만 했다. 부동심 좀 닦으신 게 틀림없었다.
하면 필시 이름 없는 제자는 아닐 터이고…….
능운비가 세심한 눈으로 공문을 살폈다.
대략 사십 대 중반. 장로는 아닐 것이고, 나이 많은 일대제자쯤 되어 보였다.
또한 황색이 아닌 회색 장삼에 붉은가사를 걸쳤으니 무승이 분명하다.
하지만 대표로 나섰음에도 이마에 계인을 찍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본시 승려들은 불문에 귀의하며 하나의 계인을 가지게 되고, 덕망과 불심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계인을 찍는다. 일종의 계급 같은 것이다.
한데 뒤에 따르고 있는 이들에게도 하나 이상의 계인이 있는데, 대표자로 나선 이가 계인이 없다?
말이 안 된다.
하물며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불기가 뒤에 선 이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마교에게나 상극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편안함을 느끼게 하니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터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자신을 바라보는 잔잔한 눈빛에선 동요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모로 보나 제법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그에게 계인이 없다면…….
계로부터 자유로운 자.
문득, 오래전 정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림이라 하여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소림도 조직인데 운영하는 이들이 매번 용서만 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형벌을 내려야한다.
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소림의 형벌자였다.
그제야 공문의 정체를 알아챈 능운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선자불래, 내자불선이라 했던가요?”
“예?”
“저는 목적 없이 찾아왔으나, 소림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
선문답 같은 말이었지만, 단번에 알아들은 공문의 눈가가 움찔 거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를 마중 나오신 분이 지객승이 아니라 십계승(十戒僧)의 한 분이신 것을 보면……. 여차하면 살생도 불사하겠다는 뜻인가요?”
“……!”
능운비의 말에 공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교의 제자가 어찌 정파에서도 잘 알지 못하는 소림의 십계승에 대해 안단 말인가?
나한이나 사대금강은 원체 유명하다지만, 십계승은 소림을 벗어난 적이 극히 드물지 않았던가?
능운비의 말대로 공문은 십계승 중 한사람이었다.
계를 어긴 자를 벌하는 승려, 즉 율법을지키는 자다.
하여 싸워도 되고, 나아가 죽임까지도 허락되는 것이 그들이다. 말하자면, 소림의 어두운 면이라 할 수 있었다.
더하여 소림이 나한이나 사대금강을 내보내지 않고 십계승의 한사람인 공문을 보낸 것은, 능운비의 말대로 혹여 불의한 뜻을 보이면 머뭇거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소림이 아무리 오가는 걸음을 막지 않는다고 해도, 상대는 마교가 아니던가?
또한 이리 대놓고 찾아온 것도 처음이었고…….
“……아미타불.”
공문은 살짝 굳은 얼굴로 반장하며 불호만 외웠다.
능운비의 물음에 대한 긍정인 것이다. 또한 사과였고, 속을 들킨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이런, 소림이 어린 저를 두고 이리 걱정하시니…… 일주문을 지나자면 안심부터 시켜 드려야겠네요.”
“예?”
능운비의 너스레에 공문이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왕천.”
“예!”
“삭월대와 함께 인근의 등봉현에 숙소를 잡고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이미 언질을 주었기에 왕천이 별다른 반문 없이 곧장 대답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당황한 공문이 서둘러 능운비를 만류했다.
소림이 마교에 지레 겁을 먹고 객을 내쫓은 꼴이지 않은가?
“능 시주,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아닙니다.”
“……”
“여럿이 가면 긴장감이 커지는 법이지요. 또한, 마교가 왔는데 어찌 불가의 밤이 편하겠습니까? 염려가 많으실테니, 살피는 이가 적을수록좋지 않겠습니까?”
“아, 아미타불.”
그 말에 공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능운비가 소림의 심중을 알아채다 못해 정확히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위에서는 마교가 머물 숙소를 어찌 살필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지 않았던가?
공문은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능운비는 소림의 심중까지 읽으면서도 대범하였으나, 소림은 옹졸하게 속졸이고 있었으니…….
“자, 그럼 가실까요?”
“아미타불, 뫼시겠습니다.”
공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일주문쪽으로 앞서자, 능운비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이걸로…… 잠시 속세에서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