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10
“이제 곧 감숙일세.”
“예.”
땀으로 흠뻑 젖은 능운비가 종리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산 아래 펼쳐진 평야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힘든 도주로였다. 녹림왕의 수하인 것처럼 산적으로 위장했음에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길을 헤치고 강가의 갈대에 숨어 이동했다.
하지만 지나온 모든 길에서 본 이들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만약 막청주가 선단을 이끌고 북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사방에 깔린 경계를 뚫고 삼문협에서 감숙의 경계까지 빠져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종리강이 안내해 준 길.
그곳은 관과 무림으로부터 숨어 다니던 녹림인들만이 알고 있는 길이었다.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원 사람도…… 이미 감사를 몇 번이나 하고선.”
하지만 여러 번 들었음에도 능운비의 감사 인사가 싫지 않은지, 종리강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데, 대체 저들과는 어떤 인연인가?”
“……”
종리강의 시선에 능운비가 윤안로등을 쳐다봤다.
하긴, 궁금하긴 할 터다. 마교의 제자인 자신이, 어째서 목숨까지 걸며 그들을 구하려 하는 것인지.
하나 떨어져 있다고 해도 모두가 듣고 있는데,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과의 관계도, 자신의 진짜 정체도.
그리고 되살아났다는 것까지.
어느 하나 설명되지 않는 일들뿐이지 않은가?
능운비가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약간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듯한 표현이었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척월린이 살아온 시간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허…… 그런 이유라면 마교와 바꾸어서라도 반드시 구해야 했겠구만?”
“예.”
이해가 되지 않을 텐데도 종리강은 더 묻지 않고 이해해 주는 듯했다. 그 배려가 능운비는 너무도 고마웠다.
“후우, 그나저나 이제부터가 문제일세.”
“예?”
“실은, 더는 우리 쪽에서만 알고 있는 길이 없네.”
“아……”
“감숙은 원래가 그래. 정사마의 균형이 딱 맞춰져 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굳이 지름길을 이용하지 않았어.”
“그렇군요.”
능운비도 그 말을 대충 이해할 것 같았다.
중원의 모든 곳에 정사마가 공존하고 있긴 하지만, 감숙은 조금 특별한 곳이다. 말하자면 중립 지역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 감숙에서 만큼은 누가 더 영향력이 크다고 말할 수 없다. 유일하게 정사마의 균형이 유지되는 곳이 바로 감숙인 것이다.
그러니 종리강의 말처럼 굳이 녹림이 숨어 다닐 길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득세하는 지역으로 숨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한데, 전과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서 문제일세.”
“음…….”
“마교와의 일전을 각오한 정무맹 놈들이 봉쇄선을 펼쳐 둔 상황일세. 마교와 관련된 일인지라, 이번만큼은 사파쪽에서도 그들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어. 특히나 지금부터 뚫고 가야 할 감숙의 남부는 정파쪽 세력이 많아서……”
“명분의 문제로군요.”
“그래. 아무리 정사가 양립해 온 중원이지만, 마교는 오랫동안 공동의 적이었으니까.”
종리강의 눈빛에 어린 난감함을 알아챈 능운비가 웃음을 머금었다.
신경 쓰이는 것이다.
막청주는 미끼가 되었지만, 정무맹과 척을 질 상황은 아니다. 그는 예하선단을 움직였을 뿐이니까.
되레 그들을 뒤쫓아가 막으려 한다면, 정무맹이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이다. 막청주가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딱 잡아떼면, 이유 없이 무례를 범한 것에 대해 온 사파가 반발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집안의 어른이 모욕을 당했는데, 누가 참고 있겠는가?
하지만 녹림왕의 입장은 다르다. 자신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게 되면, 정무맹의 공세를 피할 수 없다.
또한, 사파에서도 그를 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막청주와 같은 사파의 맹주 중 한 명이라고 해도, 마교와 공조한 셈이 되니까.
“어르신.”
“응?”
“이해합니다. 여기까지 도와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어찌 더 폐를 끼치겠습니까?”
“음…….”
“굳이 위험을 자초하지 마십시오. 이미 구명지은은 충분히 입었습니다.”
능운비의 말에 종리강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혹 마교에 연락을 보낼 방도는 없는가?”
“마교요?”
“자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
“안 올겁니다.”
“응?”
교주는 애초에 자신이 중원에서 무슨 일을 벌이든 관여치 않겠다고 했고, 반대파들은 자신이 벌인 일로 지금쯤 난리가 났을 터다.
일단 정무맹을 피해 마교로 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뒤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 왜?”
“마교에도 사정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음…….”
“걱정 마십시오. 창랑 어른께서 미끼가 되어 주신 터라 정무맹의 관심이 모조리 북쪽으로 쏠렸으니, 봉쇄선까지는 괜찮을 겁니다. 여기까지만 도와주셔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종리강은 웃고 있는 능운비의 얼굴이 되레 더욱 신경 쓰였다.
“젠장, 어쩔 수 없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세.”
“예?”
“기왕지사 돕기로 한 거, 끝까지 도와야지.”
“어르신, 자칫 녹림이 위기에 처할수도 있습니다.”
“까짓거 언제는 안 그랬나? 우리 녹림이야 항상 쫓겨 다니는 팔자 아니겠는가?”
너털웃음까지 터트리는 종리강의 모습에 능운비의 미간이 좁혀졌다.
“굳이 왜 이렇게까지…….”
“전에 말하지 않았나?”
“예?”
“나는 말일세. 누가 뭐라 하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사람일세.”
“……”
“세인들의 평가? 그딴 건 개나 줘 버리라지. 나는 그저 자네라는 이를 나의 관점에서 보고 있을 뿐이네. 그리고 계속 보고 싶기도 해. 이후의 자네 모습이.”
얼핏 굳은 결심까지 내비치는 듯한 종리강의 표정에, 능운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뭐라고…….
나중에 이들의 도움을 대체 어찌 갚는단 말인가?
“자자, 괜한 소리는 잊어버리고 서둘러 출발하세. 일단 남부 지역을 벗어나면 사파의 영역이니, 그곳에서 쉬도록 하자고.”
“……예.”
다시금 도주가 시작되었다.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우회하고, 인적 없는 산속을 헤쳐 나가면서…….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 능운비 일행이 떠난 자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넝마 옷을 입은 개방의 흑견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푸른 학창의 차림의 사내.
정무맹을 떠나 쉬지 않고 달려 검제와 합류한 제갈민이었다.
“녹림이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인원은 대략 서른에서 마흔 사이군요.”
“서른에서 마흔?”
“예. 정확하진 않습니다.”
“흐흠…… 녹림왕을 제외하면 윤안로 일행이 셋, 능운비와 삭월대라는 자들이 서른을 조금 넘으니 일단 숫자는 비슷하군.”
제갈민의 웃음에, 흑견들의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린 검제 남궁무위가 물었다.
“하면…… 종리강이 능운비라는 놈을 데리고 있는 것이 확실하단 뜻이냐?”
“아닙니다. 확신은 가지고 있으나, 확실하진 않습니다.”
“뭐라?”
제갈민의 공손한 대답에 남궁무위가 얼굴을 찡그렸다.
능운비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남궁무위는 곧장 북쪽으로 움직이려 했다. 제 아들을 죽인 놈의 목숨을 타인에게 넘길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때마침 제갈민이 서신을 내밀었다. 제갈천우가 보낸 것이었다.
처음엔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제갈가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버린 그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어쩌면 능운비는 녹림왕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설득당해 부랴부랴 뒤쫓아 온 참이었다.
그런데 확신하면서도 확실치 않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네놈이 지금 나를 희롱하려는 것이냐?”
“설마하니 제가 검제 어르신을 희롱하겠습니까?”
“그럼 뭐냐?”
“녹림왕이 함께 있으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 지요.”
“흥! 녹림왕 따윈 상관없다. 그놈이 만약 능운비와 붙어먹었다면, 내 당장에 목을 벨 것이다.”
“압니다.”
“……”
“녹림왕 하나라면 그럴 테지요.”
“그게 무슨소리지?”
남궁무위의 눈초리가 대번에 솟구쳤지만, 제갈민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이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능운비의 곁에는 마교의 고수가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
“로하구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말을 종합해 봤을 때, 고수의 실력은 녹림왕 종리강에 버금갈 정도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본 적은 없이 들은 바만으로 유추한 것이니까요.”
“……”
“하지만 검제 어른께서 홀로 상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뭐?”
“녹림왕, 그에 버금가는 마교의 고수와 능운비, 그리고 마교의 정예들까지 말입니다.”
“이놈이!”
남궁무위가 노성을 토해 내며 검을 움켜쥐었지만, 차마 뽑지는 못했다. 제갈민의 말이 옳다는 걸 그도 아는 것이다.
“설사 이긴다고 해도, 검제께서 녹림왕을 상대하는 사이 놈들이 도주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끄응.”
“일단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이 계략은 저들의 정체에 확신을 가지기 위함도 있으나,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제갈민의 차분한 설득에, 남궁무위가 겨우 화를 가라앉혔다.
“좋다. 한 번 더 믿어 주마. 이제 어찌하면 되겠느냐?”
남궁무위가 관심을 드러내자, 제갈민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녹림왕은 의리가 대단한 인물입니다.”
“산적 놈이 의리는 무슨!”
남궁무위가 코웃음을 쳤지만, 제갈민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종리강의 의리는 피보다 진하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녹림이 목숨 걸고 그를 따르는 이유지요.”
“본론을 말하거라.”
“예. 어쨌든 그런 성격 탓에 종리강은 형제들이 사고를 당하면 누구보다 빨리 달려가곤 합니다. 일전에 종리강이 능운비를 만나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능운비가 청화산채를 공격해서.”
“능운비가 청화산채를 공격했었다고?”
“예.”
“그런데도 잘도 붙어먹었군.”
“사람 일이라는 건 알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대기 중인 남궁가의 창천검수대를 이용해서 감숙에 위치한 산채 하나를 공격해 주십시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남궁무위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별안간 녹림 산채를 공격해 달라니?”
“말씀드렸듯, 녹림왕의 의리를 이용하는것입니다.”
“……”
“산채가 공격받은 사실을 알게 되면 화가 잔뜩 난 녹림왕이 곧바로 달려갈 것입니다. 하나 만약 움직이는 것이 녹림왕만이라면, 남아 있는 이들을 확인해 봐야겠지요.”
“녹림왕이 따로 행동할 것이라고 어찌 자신하느냐? 종리강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놈들이다. 아무리 마교라고 해도…….”
“아니지요. 구명지은을 입었기에 절대로 함께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제가 파악한 능운비의 성격이라면 그럴 겁니다. 감숙 북부에는 이미 마교를 봉쇄하기 위해 많은 무인이 몰려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녹림왕이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그 즉시 녹림 전체가 위험해지리란 걸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음…….”
확신에 차 있는 제갈민의 얼굴에 남궁무위가 잠시 고민했다.
“좋다. 네 말대로 해 주지. 하나, 너의 생각이 틀렸을 때는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이 좋을 게다.”
“당연합니다. 제가 틀렸다면, 그땐 제목을 베십시오.”
제갈민이 서슴없이 목을 걸자, 남궁무위도 확신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백!”
“예.”
“창천검수대에게 전해라. 지금 즉시 감숙에 있는 녹림의 산채를 찾아 토벌한다.”
“예!”
명을 내린 남궁무위가 제갈민을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네 말이 맞길 빌어야 할 게다.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찢겨 죽고 싶지 않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