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12
“됐다!”
감숙의 남부를 지나 한참을 서북으로 올라온 종리강이 주변을 획휙 돌아보고는 기쁨이 가득한 탄성을 내질렀다.
그런데 뭐가 됐다는 거지?
능운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종리강이 설명해 주려는 듯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저기, 곰바위가 보이느냐?”
“곰바위요?”
“아차차, 넌 모르겠구나. 저기 저게 곰바위다. 곰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모양의 바위.”
설명을 들으니 그리 보이는 듯했다.
“핫핫, 저게 보인다면, 이제 사파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아!”
“정파 놈들이 죄다 북쪽의 봉쇄선으로 몰려가긴 했지만, 개방 놈들이 여기저기 깔려 있을 테니 조심해야겠지. 다만, 그래도 여기서부터는 사파의 영역이니, 조금은 안심해도 된다는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사파에서는 좀 먹히잖냐.”
자랑스러운 듯 우쭐거리는 종리강의 모습에, 능운비가 픽 하고 웃어 버렸다.
정말이지 긍정이 몸에 익은 사람이다.
같이 다녀 보니 알겠다.
종리강은 간간이 화를 내긴 했어도, 좀처럼 짜증을 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윤안로는 어렵게 여기면서도 종리강은 서슴없이 대했다.
“어이구 삭신이야. 늙어서 그런지, 산길로만 다녔더니 팔다리가 안 쑤시는 곳이 없네. 아니 그렇소, 윤 단주?”
“죄송합니다. 괜히 저희 때문에……”
“에헤이, 또 웃자고 한 소릴 진심으로 받는다. 거 좀 편안하게, 응?”
“아, 죄송합니다.”
“에잉, 됐소. 사람이 항시 그리 진지하니 말 붙이는 재미가 없네.”
종리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능운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어색할 만도 하다. 윤안로도 종리강도, 전혀 다른 성격이었으니까.
“윤 단주님, 힘들진 않으십니까?”
“아, 괜찮습니다.”
“상처는 어떻습니까? 자주 살펴야 하는데……”
“아닙니다, 구해 주신 것도 모자라 이리 신경을 써 주시니,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
“……”
어색하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뭐, 언젠간 차차 나아지겠지. 그땐 자신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으로선 일단 마교까지 가야 한다. 그곳에 도착할 때까진 마음을 조금도 놓을 수가 없었다.
“아! 운비야!”
“예?”
종리강이 무언가 생각난 듯 능운비를 불렀다.
이젠 대놓고 이름을 부르는 그였지만, 능운비는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왕천과 주승도 그 부분을 딱히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 아니던가?
“모처럼 사파의 영역에 들어왔는데, 객점에 가서 좀 쉬자꾸나.”
“객점요?”
“그래.”
“하지만 개방의 눈이 이곳저곳에 깔려 있을 텐데……”
“설마 내가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
“걱정 말거라. 우리 사파인들만 아는 객점이 있다. 찾는 놈들이 전부 죄짓고 숨어든 놈들이라, 정파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곳이야.”
“아……”
그 말에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야숙만 벌써 며칠 째란 말인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앞으로는 지금껏 도망쳐 온 길보다 훨씬 더 힘들지도 모른다. 정파의 봉쇄선을 뚫어야만 하니까.
그러니 잠시 쉬며 체력을 회복하는 편이 좋다.
미안함에 말은 못 하고 있었을 터이나, 윤안로 등도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핫핫! 나만 믿게!
종리강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길안내를 자처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능운비는 문득 피식 웃고 말았다.
남들에겐 손가락질받는 산적의 수괴.
하지만 동료인 지금…… 그는 꽤 믿음직한 등을 가지고 있었다.
* * *
감숙의 중부 지역 북쪽, 거기서도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마을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곳에 사는 이들이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살인, 방화, 납치 등. 세상이 규정한 모든 범죄를 짓고 숨어든 자들.
그렇기에 밤이 깊어도 불을 밝히지 않고,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는 제각기 긴장을 곤두세우며 긴장한다.
하물며 서른이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찾아오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런 범죄자 중에서도 최악으로 평가받고 있는 종리강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괜히 천하 삼대 재앙 중 하나겠는가?
“아니, 녹림왕이 아니십니까?”
사람들의 경계심 어린 눈을 피해 마을의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서자, 거적을 깔고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던 노인이 아는 체를 해 왔다.
그 모습에 종리강이 반색하며 다가갔다.
“오! 천노! 자네가 직접 나오다니, 이거 영광일세.”
“날이 좋아 잠깐 나들이를 온 것이니 호들갑 떨지 마십시오.”
“나들이? 자네가 그런 것도 하는가? 여태 살아 있는 것도 용하구만.”
“살기는 녹림왕보다 제가 더 오래살겁니다.”
“큭, 입심하곤.”
천노(賤老), 즉 비천한 노인이다.
하지만 그리 불렸음에도 노인의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 하나 없었다. 되레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음을 만난 듯 반가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꽤 오랜만입니다?”
“그리되었지. 문주께선 잘 지내고 계시지?”
“글쎄요? 요새 중원이 시끌시끌하지 않습니까? 뒤에 계신분들 때문에…….”
천노가 웃으며 종리강의 뒤를 힐끗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능운비가 윤안로의 앞을 막아서며 날카로운 눈매로 천노를 노려봤다.
뭐지 이 노인은?
어째서 자신들을 알고 있는 거지?
능운비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자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늘해졌고, 삭월대의 무인들이 곧바로 천노의 퇴로를 차단했다.
“어허, 이 사람들! 다들 진정하시게.”
종리강이 황급히 손을 들어 막았지만, 삭월대는 물론 향이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들…… 검에서 손 떼고 물러나라.”
능운비가 나서고 나서야 무인들이 겨우 물러났다. 하나 모두가 천노를 예의 주시하며, 언제든 대처가 가능할 곳에 멈춰 섰다.
능운비로서도 그것마저 말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다. 자신의 임무를 옳게 수행하고 있는 자들을 어찌 야단치겠는가?
결국 능운비는 긴장했던 표정을 풀고 먼저 천노의 앞으로 다가갔다.
종리강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노인인만큼, 필시 보통의 인물은 아닐 것이다.
또한, 종리강이 미리 연통을 보냈을 리 없음에도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딱 한 군데 짚이는 곳이 있었다.
앞서 녹림왕이 ‘문주’를 언급하지 않았는가?
“노인께선…… 하오문이시군요.”
“호오?”
능운비의 담담한 말에 모두가 깜짝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천노의 눈동자에는 이채가 흐르고 있었다.
역시…….
천노의 정체는 하오문도임이 분명하다.
개방과 더불어 중원의 모든 정보를 쥐고 흔드는 곳.
있으나 없고, 없으나 있다.
하오문이 은밀하고 또 은밀하여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에 생긴 말이었다.
나아가 능운비는, 천노의 나이나 녹림왕을 대하는 모습에서 그가 하오문 내에서도 신분이 낮지 않음을 직감했다.
이럴 땐 두말없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신분이고 이름이고, 그딴 걸 내세워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애초에 나이도 훨씬 많으신 분인데…….
“소생은 마교의 능운비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먼저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를 낮추어 인사하는 능운비의 모습에, 천노가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 참, 능 공자께선 듣던 것과는 무척이나 다르시군요.”
“듣던 말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뭐 달리 무슨 말이 나돌겠습니까? 악종 중의 악종이라든지, 세상에 다시 없을 재앙이라든지……. 근래에는 뱀보다 교활한 독종이라는 별명도 붙었습니다.”
“세인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은지 꽤 되었습니다. 어떤 분께 배움을 얻은 터라.”
능운비의 말에 옆에 있던 종리강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긴, 세인들의 말과 같은 분이라면 어찌 창랑이나 녹림왕께서 돕고 있을까요? 아무 이득도 되지 않을 텐데. 두 분께서 능공자를 돕는 것만 봐도, 능공자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가 잘못 되었음을 알 법하지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혹여 노야께 제 첫인상이 좋지 않게 보였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헛헛.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저흰 무언가를 판단치 않습니다. 그저 바라볼 뿐이고, 원하는 대상에게 전할 뿐이지요. 값이 맞으면…….”
천노의 말에 능운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값이 맞으면…….
정사마의 구분 없이 어떠한 곳에도 정보를 팔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주께서 이번 일에는 티끌만큼도 관여치 말라 하셨습니다.”
“예?”
“녹림왕과 창랑께서 나중에 보복이라도 하시면 골치가 아플 게 뻔하거든요. 두분다 뒤끝이 상당하신터라……”
천노가 눈을 찡긋거리며 하는 말에 능운비가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지었다.
“누가! 누가 뒤끝이 상당해!?”
“아는 사람은 다 알겠죠.”
“야!”
종리강이 눈을 치켜뜨며 소리를 질렸지만, 천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능운비를 이끌었다.
“자, 들어가십시다. 밖에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것이 있겠습니까? 녹림왕께서 이곳을 찾아오신 것을 보면, 남들눈에 띄지 않고 쉬려는 목적이실 테니.”
“예.”
천노의 안내에 능운비가 윤안로 등을 모시고 뒤따랐다.
“야! 누가 뒤끝이 상당하냐고!”
물론 종리강은 뒤끝 있게 끝까지 물었다.
천노의 뒤에 바짝 붙어서…….
“말해 봐. 누가 뒤끝이 있어? 응? 창랑 그놈은 그럴지 몰라도 난 아니야.”
“예, 압니다.”
“아는 게 아닌데? 어? 아니라고 해. 어서. 운비가 오해하잖아!”
“……하아.”
종리강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담담하기만 하던 천노조차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한숨 쉬었어? 남들 앞이라고 대접해 주려고 했더니만, 이 자식이 진짜! 빨리 말해! 뒤끝 있는 놈은 창랑뿐이라고! 어서!”
“예, 예.”
“야이씨!”
쉼 없이 투덜거리는 종리강을 무시하고 걷던 천노가 일행을 데려간 곳은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취객들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곳을 지나 작은 문을 통과하자, 외부와는 완벽하게 단절된 공간이 드러났다.
“자, 이쪽입니다.”
“……”
천노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장소를 둘러본 능운비는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해 둔 것처럼 인원수에 딱 맞게 놓인 의자와 탁자가득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그들을 반겼던 것이다.
“눈을 피해야 했기에 따로 객방은 준비치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동안 야숙을 했던것에 비하면, 이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호사입니다.”
능운비의 말에 천노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모쪼록 편히 쉬도록 하십시오. 다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저희는 능 공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해야 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자신들의 정보가 정파 쪽에 넘어가지 않을 거란 말이니까.
“감사합니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그저…… 이분이나 떼 주시면 좋겠는데……”
천노가 여전히 옆에 딱 달라붙어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종리강을 힐끗거리자, 능운비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르신.”
“자넨 관여치 말게. 내 이놈을 그냥! 대체 누가 뒤끝이 있다는 거지? 정말이지 난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네?”
“……”
지금의 그 행동과 말 전부, 누가 봐도 뒤끝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덕택에 능운비 일행은 잠시 나마 웃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런 행동조차 종리강의 배려는 아니었을까?
“어르신, 그러지 말고 저랑 술이나 한잔하시죠.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음, 그럼 그럴까?”
종리강이 여전히 앙금이 남은 것인지 천노를 슬쩍 째려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나 뒤끝 없어.”
“압니다.”
“쳇!”
짜증을 부린 종리강이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혹시 정파가 어찌 움직이는지 아는거 있나?”
“어느 곳의 정파를 말씀하시는지?”
“그…… 북쪽.”
그 말에 천노가 빙긋이 웃었다.
정파의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기 위해 움직인 창랑이 걱정된 것이리라.
“알아보겠습니다. 다른 건 없으십니까?”
“뭐, 이쪽 동향도 겸사겸사 알아봐주면 좋고.”
“그러죠. 확인하고 아이들에게 전해드리라 하겠습니다.”
답을 마친 천노가 모습을 감추고, 이내 편안한 술자리가 이어졌다.
능운비가 돌아가며 술을 권하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삭월대의 무인들이 그제야 경계심을 풀었다.
길지 않은 휴식일 것이다. 꿀맛 같은 휴식 뒤에는 정파의 봉쇄선을 뚫어야만 하니까.
그렇기에 시간이 허락하는 동안만큼은 최대한 몸을 회복해 두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남궁가의 무인들이 황등산으로 움직였습니다!”
“……!?”
수하를 시켜 전하겠다던 천노가 황급히 뛰어와 외친 말에 종리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