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52
“천하라고? 마교를 넘어 중원 무림을 손에 넣겠다는 뜻인가?”
“맞아.”
“허!”
당차게 포부를 밝히는 능운비의 모습에 화영은 헛숨을 내쉬고 말았다.
황당하지 않은가?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한 약관의 청년이 천하 군림을 말하다니.
너무나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좀 전에 보았던 그의 기세가 예상외로 매섭긴 했으나, 아직은 어리고 부족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었구나. 네가 그런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니.”
“뭐?”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렇게 될 작정이야. 죽을힘을 다해서.”
“……”
“교주님께서 그러셨거든, 다가와 보라고. 그래서 다가갈 생각이야, 아니, 이참에 아예 뛰어넘어드릴 생각이야.”
그 자신감 가득한 모습을, 화영은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저토록 진심이라고?
미친 것이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다.
그런 계획에 동참했다가는 겨우 이어 온 성화곡의 명맥이 하루아침에 끊겨 버릴 게 분명했다.
“허허, 이것 참. 포부가 너무 커서 감히 따라갈 엄두조차 못 내겠구나.”
“……”
“그만 돌아가거라. 비밀을 위해 너를 죽여야 마땅하나, 이번만큼은 예외로 두마.”
“거절인 거야?”
“당연한 소릴! 나는 성화곡을 지킬 의무를 지녔다. 설마하니 너의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휘둘릴 것 같으냐?”
“음…… 좋아. 그럼 그렇게 해. 나도 해보지도 않고 겁먹어서 꼬리 내린 이들은 필요 없으니까.”
화영의 단호한 거절에, 능운비가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비록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오히려 속이 시원한 느낌이었다.
더는 미련이 남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은 도산검림(刀山劍林)을 맨몸으로 지나는 것과 다름없다.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신이야 이제 뒷일 따위는 걱정하지 않는 처지였으나, 다른 이들은 다르다.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자들은 분명 후회할 것이다. 원망할 것이고…….
그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또 어떤가?
그저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이 조금 더 힘들어질 뿐이다.
능운비가 숨을 한 차례 길게 내쉬고는 화영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이전과 달리 담담했고, 옅은 미소를 띤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옷매무새를 고친 능운비가 화영을 향해 포권하며 공손하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
“조금 전 내가 한 말은 전부 잊어 주시오. 예가 없었던 것도 부디 탓하지 말아 주시오. 아직 어린지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런 것이니…….”
다시 고개를 들고 화영을 바라보는 능운비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내 충산을 향해서도 살짝 고개를 숙인 능운비가 향이를 바라보았다.
“부탁,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으음.”
“너도 이제 그만 따라다녀. 네가 할일은 끝났으니까. 만약 내가 진짜로 교주가 된다면, 그때 다시 찾아와. 물론 쉽게 목을 내어 주진 않겠지만.”
“……”
“고마웠다, 향아.”
이별을 고하는 능운비의 말에 향이의 얼굴에 착잡함이 어렸다.
그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준 능운비는 밖으로 나가려다 문득 전각의 한쪽 벽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름하기만 한 다른 곳과는 달리 고급스러운 붉은 천을 깔아 둔 단상.
그 위에 놓인 향로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뭐지? 왜자꾸 눈에 밟히지?
특별히 대단한 문양이 새겨진 것도 아니고, 그리 귀해 보이지도 않는 낡은 향로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향로를 가만히 응시하던 능운비는 문득 스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익숙하다.
대다수의 문파가 저런 식으로 위령을 하지 않던가?
어쩌면 저것도…….
비록 목상이나 영정은 없었으나, 성화곡의 초대 교주나 신녀를 모시는 제단일 것이다.
어쩌면 참변을 당해 죽은 성화곡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래, 이왕지사 온 김에 죽은 이들의 넋이라도 위로하고 가자.
마교로 인해 죽어 간 자들이다. 그들에게 닿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참회가 조금이라도 그들의 넋을 위로해 줄수 있기를…….
혹시 또 아는가? 제를 지낸 자신에게 귀신들이 도움을 줄지?
홀린 듯한 표정의 능운비가 갑자기 어딘가로 뚜벅뚜벅 걸어가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던 화영이 화들짝 놀랐다.
“삼공자, 입구는 이쪽…… 어? 삼공자!”
화영뿐만이 아니었다.
화로를 향해 다가가는 능운비의 모습에 충산과 향이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 삼공자, 그곳은……”
“뭐야? 재뿐이네? 다들 바빴던 모양이지? 향은 없어?”
“……!”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능운비가 차갑게 식은 재를 어루만졌다.
그 모습에 화영은 물론이고 충산의 눈동자에도 짙은 살기가 떠올랐다.
그 향로는 성화곡의 신물이었다. 특히나 그 안에 담긴 재는 부정한 손길로 만져서는 절대 안 되는 물건이었다.
“이놈…… 곱게 보내 주려 했더니!”
화가 잔뜩 난 화영의 몸에서 거친 살기가 피어오르고, 충산의 검이 어느새 검집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런데 그들이 능운비를 향해 몸을 날리려는 순간.
탁, 타닥.
향로 안의 재가 별안간 발갛게 불씨를 피워올렸다.
“앗 뜨거!”
손으로 재를 만지던 능운비가 뜨끈한 열기에 깜짝 놀라며 물러났다. 조금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재에 손을 데어버린것이다.
손바닥에 남은 벌건 상처에 능운비가 얼굴을 찡그렸다.
“어? 뭐야? 재 속에 불씨가 남아 있었던 거…….”
화르르르.
하지만 능운비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불씨가 아니라 숫제 불이 아닌가?
“향아, 이거 왜…….”
능운비가 어리등절한 표정으로 향이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던 향로에서 불씨가 생겨나더니, 이내 누군가 마른 장작이라도 던져 넣은 것처럼 활활 타오른다.
스스로 타오르는 불이라니?
이런 기사(奇事)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어째 향이의 표정이 이상했다. 아니, 그녀뿐아니라 다들 이상했다.
충산은 이마를 땅에 처박고 절을 올리고 있었고.
“아아…….”
화영의 노안에는 눈물이 방울져 뚝뚝 흘러내렸다.
대체 왜…….
능운비가 황당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이던 그때.
향이가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성화가…… 다시 피어올랐군요.”
“응? 성화? 이게?”
그 말에 능운비가 홱 하니 고개를 돌려 향로를 바라보았다.
화르르르.
여전히 불타고 있다. 파르스름한 빛을 내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홀로 피어나 힘차게 불타고 있었다.
이게 일월신교의 성화라고?
얼떨떨한 눈으로 성화를 쳐다보던 능운비가 문득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손에 새겨진 화인(火印)을 쓰다듬었다.
젠장, 분위기가 이러니 쓰라리다고할수도 없고…….
그런데 잠깐만!
이게 성화라면?
그리고 화영과 충산의 반응이 이런식이라면?
능운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째 이거 제대로 얻어걸린 느낌인데?
* * *
마교의 본성 가장 높은 곳에 붉은 깃발이 걸렸다. 깃발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금실로 수놓아진 일월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깃발 아래에는 대고(大鼓)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우람한 역사가 커다란 채를 들고 서 있었다.
두우응!
역사가 채를 힘껏 휘두르자 북소리가 커다란 울림을 만들며 퍼져 나갔다.
두우웅!
역사는 쉬지 않고 북을 쳤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북소리가 마교 전역에 퍼져 나갈 때까지.
이어 북소리가 전해진 모든 곳에서 붉은 깃발이 솟구쳤다.
깃발들은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높이 내걸려 펄럭였다. 마치 봉화가 피어오른 것처럼, 마교 전역이 붉은 깃발로 물들었다.
등룡제.
바야흐로 권좌를 향해 도전장을 내민 다섯 용의 피 튀기는 제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내, 본성의 성문이 굳게 닫혔다.
끼이익, 쿵!
문이 닫힌 성은 고요한 침묵에 잠겼다.
기다리는 것이다.
본성을 제외한 모든 곳을 자신의 발아래 꿀린 도전자가 권좌를 향해 다가올때까지.
그리고 본성 중심에 위치한 광천탑의 꼭대기.
거대한 설표 가죽으로 치장된 의자에 앉은 담운천이 창밖으로 힘차게 나부끼는 붉은 깃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군.”
“일 호냐?”
“예.”
늘 그랬듯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일호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어쩐 일이냐?
“악령곡의 안개가 사라졌습니다.”
“……”
그 말에도 담운천은 여전히 창밖만을 응시 했다.
하지만 그 손은 팔걸이를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악령곡의 안개는 그 주위에 펼쳐진 진법이 만들어 낸 현상이다.
진법의 목적은 외인의 출입을 막는것.
한데 그것이 사라졌다면?
“살펴보았느냐?”
“예. 공터는 있으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없어졌습니다.”
“그래, 알겠다. 그만 물러가거라.”
“예.”
나지막한 말에 일 호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바람에 흩날리듯 모습을 감추었다.
“주군. 삼공자가……”
“허허, 그런 모양이구나.”
양선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음에도 담운천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일말의 고민조차 느껴지지 않는 속 시원한 웃음이었다.
악령곡에 사람이 사라지고 모든 흔적이 지워졌다면, 이미 선택은 끝난 것이다. 능운비가 그들을 설득한 것이 분명했다.
“녀석, 무슨 말로 그들을 꼬드겼을꼬?”
“글쎄요. 원래 입담이 좋지 않았습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녀석이란 말이야. 매번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어.”
“그러게요.”
양선의 목소리는 가벼웠고,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런 양선의 모습을, 담운천이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째려보았다.
“좋으냐?”
“예?”
“표정이며 목소리가 아주 희희낙락인데?”
“그, 그럴 리가요. 잘못 보고, 잘못들으신 겁니다.”
“잘못 들은 건 그렇다 치고, 쭉 찢어진 네 입은 어떻게 설명할 참이냐?”
“제, 제가요? 당치 않습니다.”
양선이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 끝을 의식해 내렸다.
“됐다, 이 녀석아.”
“주, 주군.”
“하여간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너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삼공자의 처지가 워낙 딱하였던지라……”
“딱해? 네가 언제부터 제자들 사정에 그리 관심을 가졌더냐?”
담운천의 핀잔에 양선이 울상을 지으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주군. 제가 그만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을 보였습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암! 벌을 줘야지. 대호법이라는 놈이 제 주군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놈을 응원했으니까.”
고개 숙인 양선을 내려다보며 짐짓 화난 목소리를 내던 담운천이 이내 빙그레 웃었다.
“하나, 오늘만큼은 나도 기분이 좋구나.”
“……”
“어쩌면, 녀석이 다시 올 때는 마교가 아닐는지도 모르겠어.”
“예?”
“혹시 또 아느냐? 그 녀석이 일월신교를 내세우며 나에게 도전해 올지.”
“그런……”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
“주군.”
“허허, 잘된 게지. 잘된 게야. 만약 그리된다면, 나 또한 걱정 없이 발 뻗고잘수 있을테니까말이다.”
담운천의 웃음소리에 양선은 괜스레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끝을 예상하는 사람 같지 않은가?
“선아.”
“예, 주군.”
“폐관에 들어야겠다.”
“폐관요?”
“그래. 어떤 놈이 올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맞아 줘야 하지 않겠느냐?”
“……”
“제천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그 말을 끝으로 담운천이 창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문 닫힌 마교의 본성, 고요함만이 가득한 그곳에 담운천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