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31
이레로 잡혀 있던 축제는 사흘을 더 이어지다 끝을 맺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에 단연 최고로 각인된 것은 위지혁과 능운비의 비무였다.
마교의 미래.
그들의 선전은 마교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제각기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기득권을 유지해 온 이들에게는 언짢음이었고, 인맥이 없던 이들에게는 묘한 희망과 기대였다.
특히나 능운비에 대한 이야기는 술자리마다 회자되었다. 폐인에서 유망주로, 또는 후계 다툼에 제대로 발을들인 막강한 도전자로.
축제의 마지막 날에 작별을 고하고자 설산장을 찾는 이들이 대거 늘어난 것이 그런 분위기를 방증(傍證)했다.
그리고 이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때였다.
먼 곳에서 온 이들을 시작으로, 길고긴 행렬이 새벽부터 이어지며 마교의 본성이 비워져 갔다.
그리고 그 행렬 안에, 새로운 움직임이 싹트고 있었다.
“이럇!”
힘차게 내리친 채찍에 놀란 말이 앞발을 높이 들었다가 성 내듯 땅을 차 내며 질주한다.
두두두두!
주화입마에서 벗어난 뒤 비로소 첫 임무에 나서는 삼공자 능운비와 왕천, 그리고 삭월대.
서른 남짓의 인마가 멀리까지 이어진 행렬을 관통하듯 내달렸다.
그들이 남긴 자욱한 먼지구름이 일대를 뒤덮었다가 흩어진다.
쪼르륵.
본성에서 가장 높은 광천탑의 창가.
창밖을 바라보며 시비가 따라 준 차향을 음미하던 담운천이 미소를 머금었다.
“……교주님.”
“……?”
미동조차 하지 않고 서 있던 양선이 웬일로 먼저 담운천에게 말을 걸어 왔다.
평소 성격상 먼저 입을 떼는 일이 없던 그였기에, 얼굴에 고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인가?”
“설산장이 어떻게든 도우려 하겠지만,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아네.”
“그런데 어찌 그러셨습니까? 각 가문에서 어떻게든 삼공자의 목숨을 취하려 할 텐데요? 중원에 청부를 맡길수도 있는 일이구요.”
“그럴 테지.”
담운천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어째서……”
“셋째를 내보냈느냐고?”
“죄송합니다. 제 부족한 식견으로는 도무지 주군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여……”
“자네와 나 사이에 죄송은 무슨?”
“……”
“아마도 꽤 고생할 테지.”
“그리 무덤덤하실 일입니까?”
“크게 신경 쓸 일도 아니지.”
“무책임하기까지 하시군요. 당사자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보내신분께서…….자칫……”
양선은 차마 ‘죽을 수도 있다’ 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큭, 자네도 나이가 든 모양일세. 내가 아닌 다른 이를 걱정할줄도 알고.”
“……”
“운비가 그리 마음에 들었던가?”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제 질문이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담운천이 짓궂은 표정으로 농을 던졌지만, 양선은 그저 담담히 사죄의 말을 올릴 뿐이었다.
“원 사람, 발끈도 안 하나?”
“……다음부턴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게. 놀리는 사람의 정성도 생각해 줘야지. 사람 무안하게 말이야.”
“……”
약 올리기에 흥미를 잃어버린 담운천이 창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나는 이미 저 녀석에게 많이 주었어. 다른 아이들에겐 미안할 정도로……. 여주린의 말처럼 형평성은 진작에 무너졌지. 그러니 더는 안 돼. 반발이 생기면 나도 골치가 아프거든.”
“하나 삼공자가 교주님의 뜻을 이어주리라 믿고 계시기에 그러신 것 아닙니까? 애당초 그 때문에 데려오신 거고요.”
“그래. 녀석도 그러겠노라 했지. 한데 요즘은 잘 모르겠네.”
“……”
“왠지 내가 알던 그 녀석이 아닌 것 같더라고.”
“주화입마 이후를 말씀하시는군요.”
“맞아.”
“저도 묘하긴 했습니다. 한때는 교주님을 도와 중원 일통을 하겠다며 다짐했었지요.”
“그랬지.”
담운천이 양선이 말한 때를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그렇기에 녀석이라면 이루어 줄 거라 생각했지. 내가 끝까지 이루지 못한것을……”
“자책하십니까?”
“글쎄…….”
“교주께선 지금도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그래, 많이 변했지. 하지만 고작 한대(代)에 불과해.”
“……교주님.”
“사람은 언젠가 죽어. 내가 죽고 나면, 마교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겠지.”
한탄과도 같은 담운천의 넋두리에 양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니 강해져서 돌아와 주어야지. 세가원과 원로원에 맞서서 후계가 되려면, 그리고 나를 피해서 숨어 버린 배후의 괴물들과 싸우려면. 천산 북쪽에 있는 놈들도 그렇고.”
“……”
“놈이 그리된 후에야 마음 편히 권좌를 물려줄 수 있을 듯하네.”
“삼공자의 성취는 저도 보았지만, 정말로 그리되겠습니까? 그가 정말 교주님을 뛰어넘어서……”
“한때는 믿어 의심치 않았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여전히 기대는 하고 있어.”
“……”
“뛰어난 무재를 지녀 주화입마를 스스로 이겨 냈네. 빠른 회복을 위해 마령신단을 녹여 주었다곤 하지만, 의기라는 경지를 스스로 깨우쳤지. 와중에 중원으로 나가 보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첫째와 붙여 봤네. 운 좋게 무승부나 하면 어떻게든 들어줄 작정이었단말일세.”
“……그렇습니다.”
“한데 이겨 버리더군. 그놈 참……”
“보았습니다. 꽤 놀랍더군요. 벌써 그런 경지에 올랐을 줄은 몰랐습니다. 삼공자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듯하군요.”
무심코 고개를 주억거리는 양선을, 담운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응? 뭐?”
“삼공자가 비무 때 보여 준 관시와 내력을 알 수 없던 그 보법을 말씀하신것 아닙니까?”
“……”
정확히 봤다.
담운천은 위지혁과 능운비가 비무를 벌이던 순간을 떠을렸다.
비등한 실력.
그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이었다.
자신조차도 누가 이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
승부의 향방을 갈라 버린 찰나의 변화.
담운천은 그때 능운비의 확장된 동공을 똑똑히 보았다. 그건 분명 통찰의 눈이라 불리는 관시였다.
생각지도 못한 성취였다.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타고나야 한다.
근골이 그러하고, 재능이 그러하다.
그러한 것들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녀석들이 각고의 노력을 거치면, 능히 의기의 경지까지 오를수 있다.
하지만 절대라는 경지에 오르는 것이 어디 재능만으로 가능하겠는가?
후천적인 노력, 그것도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어야만 했다. 좀 더 본질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한 몸부림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 노력한다고 다 가능한 게 아니다. 대부분의 무인이 그 깨달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한다. 하여 이 무림에 절대라는 이름으로 군림하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한데 능운비는 벌써 그 벽 앞에 서있다.
그것은 바로 눈. 다시 말해 보는 것이다.
보면 읽을 수 있고, 읽으면 파훼할수 있다.
말은 쉽지만 행하기는 그 무엇보다어렵다.
다만, 그 하나만으로 격이 달라진다.
같은 의기의 고수라도 강기로 가는 첫걸음을 딛고 말고에 따라 실력이 천양지차다. 그것이 능운비가 승리한 이유였다.
물론 그 뒤에 보여 준 기묘한 보법도 놀라웠지만.
“이거 원, 자네도 보았을 줄은 몰랐군.”
“아마 소설옥수도 보았을 것입니다.”
“으응?”
“그리고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였을 겁니다.”
“……?”
“저와 소설옥수를 제외한 모두가 대공자의 선전을 기대하며 편향된 시선으로 비무를 보았을 테니까요.”
“헛헛헛! 그렇구만.”
담운천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양선의 말이 옳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능운비를 세심히 바라본 것은 소설옥수와 양선, 그리고 자신뿐이었을테니.
“참 대단한 녀석이란 말이지. 그건 또 대체 언제 깨달았을꼬?”
“……”
“크흐흐, 정말이지 키우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란 말이야.”
담운천이 흡족한 듯 웃자 양선이 빙긋이 따라 웃었다.
“어쩌면…… 금단의 마공서를 익혔던 것이 오히려 기회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어. 아니면 죽음에서 살아난 경험에서 무언가를 얻어 낸 것인지도 모르고.”
“예.”
양선은 담운천의 말을 십분 이해했다.
하지만 속단하긴 이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오감을 완전히 사용하는 법을 깨닫고 한계를 넘어서야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다. 그때 문득 깨달아질 것이다.
능운비는 고작 첫걸음을 내디몄을 뿐이다. 그 뒤의 성취를 얻는 것은 오로지 그의 노력에 달려 있다.
“음, 그렇군요. 이제야 교주님의 뜻을알겠습니다.”
양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의 뜻. 그것은 곧 어미 독수리와도 같았다.
독수리는 나는 법을 가르치려 새끼를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린다. 날개를 펼쳐 깨우치면 창공을 노닐 것이고, 펴지 못한 채 위축되거나 어미가 제대로 받아 주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다.
대신 스스로 나는 법을 익힌 독수리는 하늘의 제왕이 된다.
잔인하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이런, 이야기가 새 버렸구만. 아까 뭐랬지? 어째서 내보냈냐 물었지? 위험할걸 알면서도?”
“굳이 답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군.”
“아닐세. 그게 뭐 어려운일이라고……. 그저 녀석 홀로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네. 처음부터 도와줄 생각은 없었어.”
“예?”
“그들의 말이 맞아.”
“……”
“내 역할은 여기까지만이야. 지금부터는 녀석이 직접 하는 수밖에 없어. 내가 돕는 순간 사람들은 생각할 거야. 여주린의 말처럼, 나의 후광을 등에 업고 얻은 성취라고. 그건 두고두고 흠집이 될 테지.”
“마치 교주님처럼 될 거라 여기시는군요?”
“아니.”
담운천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만 큰다면 나보다 나을 게야. 지금만 해도 그 나이 때의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나니까.”
“……”
그럴지도 모른다. 제대로 자라 준다면 말이다.
하지만…….
“무공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강기를 깨닫는다고 해도……”
“물론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담운천이 문득 자신의 의자에 깔린 설표의 가죽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거, 좋아 보이지 않는가?”
“예?”
“털이 어찌나 보드라운지 잠이 솔솔오는 게, 소설옥수가 제법 신경을 쓴 모양이야.”
“……”
“내가 구해 달랄 때는 그리 못 들은체하더니, 운비를 위해서는 잘도 이런걸 구했어. 중립이 어쩌고 하더니…… 아니 그런가?”
“무슨 말씀이신지?”
“운비가 그녀를 움직였단 말이야.”
“……”
“마음을 얻기 시작했단 말일세, 그 꽉 막혔던 녀석이. 그건 절대고수가 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지.”
“교주님.”
“이번 중원행은 분명 득이 될 게야. 나는 그리 믿네.”
“……”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걸세. 어쩌면 중원지부를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올지도 모르지.”
담운천이 창밖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양선은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향이가 보이질 않는군요.”
“……”
담운천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향이는 교주전에 머무는 시비였다.
오직 그들만이 알고 있는 목적 때문에 항시 말없이 담운천의 찻잔을 채워주는.
“따로 어디 보내기라도 하신 모양입니다.”
“……크흠!”
이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회피한다.
“혹시?”
“……설표 가죽이 참 좋아. 앉기만하면 내내 졸리다니까? 그만 나가 보게. 한숨 자야겠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유까지.
창밖을 바라보다 눈을 감는 담운천의 모습에, 양선의 입가에 열은 미소가어렸다.
안 어울리게 부끄러움은 많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