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93
섬서 북방, 감숙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감천.
능운비가 상단과 함께 머무는 객점이 위치한 그곳은 정파의 세가 강한 곳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 섬서라는 곳 자체가 정파의 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산(華山)과 종남(綜南), 그 두개의 문파가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파를 떠받치는 기둥이라 불리는 구파에 속한 두 문파의 명성으로 인해 사파가 함부로 자리 잡을 수 없었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인 서안과 멀리 떨어진 북쪽에서 이름이나 이어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여 섬서에 자리 잡은 문파는 화산과 종남과 연이 있거나 그들의 속가가 세운 곳이 대부분이었다.
감천의 선천방(先天房)도 그러한 곳 중 하나였다.
오래전 종남파의 속가가 세운 문파.
비록 종남산에서 수백 리 떨어져 있는 터라 연에 한 번 종남 속가 회합에 참여하는 그들이었지만, 종남의 명성에 누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어려운 이들을 보면 돕기를 자처하고, 불의를 보면 절대 외면치 않았다.
그러한 노력에 감천의 치안은 섬서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안정화되어 있었고, 정파로서 선천방의 명성은 제법 높은 편에 속했다.
“휴, 가뭄이 길어져서 큰일이구나.”
선천방 순찰당주 정익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거리를 순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삼 년의 가뭄으로 인해 찾아온 대기근.
그로 인해 감천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은 지나는 이들에게 비럭질하기 일쑤였고, 가시지않는 배고픔에 집집마다 허기진 울음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밤이면 고성방가를 일삼던 취객들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힘겨운 나날에 주머니 사정조차 여유롭지 못하니, 외지인을 제외하고는 행인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미 선천방주가 곳간을 열어 구휼미를 아낌없이 내주었지만, 기근이 길어져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당주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곧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럴까? 곧 겨울이을 것인데……”
“듣기론, 관에서 요청한 곡물 상단이 오고 있다고 하던데요?”
“나도 들었다. 하나, 오는 이들 또한 상인이 아니더냐? 무상으로 지급하는 것이 아니니, 기근이 오래되어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의 사정이 쉬이 나아지진 않을 게다.”
“……”
“보거라. 부족한 식량을 사느라 사람들이 가재도구까지 팔고 있지 않으냐?”
“그야……”
정익수의 말에 휘하 무인, 안평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다 고개를 숙였다.
사실이 그랬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가구와 집기들을 내다 팔고 있다. 하지만 다들 비슷한 사정이라 팔리지는 않고 쌓이기만 한다.
구휼미도 한계가 있는지라, 아껴 먹은 자들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와중에 선천방과 함께 선의로써 돕던 이들도 하나둘씩 곳간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기근이 길어지다 보니 자신들의 생계조차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도시의 중심보다 외곽으로 갈수록 더욱 심각해졌다.
주로 최하층민들이 살고 있는 민촌엔 아예 길거리에 나앉은 이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하아…… 비라도 흠뻑 내려주면 좋으련만. 밤하늘마저 이리 맑으니……”
정익수가 답답한 마음에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휘익.
“……?”
무엇일까?
올려다본 하늘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획 하니 스치더니, 순식간에 감천 외곽의 민촌으로 사라졌다.
뭐지?
달빛에 비친 새의 그림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지 않았던가?
“설마?”
순간 무슨 생각에선지 정익수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도둑…….
원래 세상인심이라는 것이 그런 법이다. 풍족할 때보다 부족할 때 더 많은 도적이 들끓는다.
나눔 받지 못하니 빼앗는 것이다. 너무 어려워서…….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다 같이 어려운 상황에 다른 이의 것을 빼앗아 제 배를 불리려 하다니, 절대 두고 볼수 없었다.
“찢어 죽일 놈들! 이 시국에 도적질을 해?”
“……?”
하늘을 을려다보던 정익수가 별안간 화를 내자 안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평!”
“……예?”
“이곳으로 순찰조를 은밀히 불러 모으거라.”
“그게 무슨?”
“민촌에 도둑이 든 모양이다.”
“도둑이요? 어떤 놈들이!”
“세상이 어려워 그런 게다.”
“……”
“일단은 내가 먼저 살펴볼 테니, 순찰조를 불러 민촌 외곽에 대기토록 하고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나서지 말거라.”
“예, 당주님.”
안평이 답하고 물러난 뒤, 정익수는 서둘러 인근에서 가장 높은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용마루의 그늘에 숨어 고개만 빼꼼히 내민 채 근방을 세밀하게 살폈다.
조금 전 머리 위를 지나갔으니 멀리가지 못했을 것이다.
가까운 곳부터 세심히 살피던 정익수의 눈에, 민가의 흐릿한 불빛에서 움직이는 그림자 하나가 잡혔다.
숨어든 그림자 하나가 어느 집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지 살피는듯했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면 집을 털려는 생각이 분명하다.
빌어먹을 도둑놈,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타인의 물건을 훔치려 하다니?
내 당장에 잡아다가…… 응?
치미는 짜증에 도적을 추포하려 일어나던 정익수가 순간 멈칫했다.
인기척을 살피던 도적의 행동이 뭔가 이상했다.
조심스럽게 문 앞에 접근하더니, 품에서 꺼낸 것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 마치 집주인을 깨우려는 듯이 문을 치고는 곧장 다른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 일련의 움직임이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났다.
그 존재를 알고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정익수의 능력으로는 찾을 수조차 없었을것이다.
“뉘요?”
집주인인 듯한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답이 있을 리 없다. 도적으로 의심했던 이는 벌써 다른 곳으로 사라졌으니까.
“뉘냐니까!”
대답이 없어 화가 난 것인지 집주인이 문을 벌컥 열었다.
“이런 썅! 안 그래도 배고파 죽겠는데 누가 이런 장난을 치고 있어! 어떤개…… 어?”
허기로 지친 터라 신경이 날카로운 주인이 화를 내다가 발에 챈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은 종이 같은 보자기를 펼치는 순간.
“어헉!”
“……?”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고는 고개를 휙획 돌렸다.
“여보! 여보! 빨리 나와 보게.”
그러곤 대뜸 안에다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것이 느껴졌다.
대체 뭘 보았길래?
“아니, 뭘 그리 소리를 질러요? 배고파서 움직일 힘도 없는데……”
“이, 이거 보게.”
“그게 뭔…… 어헉!”
부인인 듯한 이의 반응도 같았다.
아니, 한술 더 떠서 아예 입까지 틀어막으며 주변을 휙획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내 황급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체 뭘까?
용마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익수는 궁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적인 줄 알았던 자가 무엇을 두고갔길래 저들이 저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정익수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했고, 곧바로 뛰어 내려가 불의한 짓임을 알면서도 지켜보던 집의 문을 벌컥 열었다.
“뉘, 뉘시오?”
“밤중에 갑자기 찾아와 미안하네. 나는 선천방의 순찰당주, 정익수라는 사람일세.”
“……아, 나리.”
감천에서는 원체 유명한 곳이기에, 이름만 듣고도 집주인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한데 그 물건은……”
정익수가 집주인의 손에 들린 물건을 응시하며 물었다.
“이, 이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뒤로 감추는 집주인의 모습에 정익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내 잠시 보겠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집주인이었지만, 정익수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반항하듯 휘둘러진 집주인의 손을 피한 정익수가 순식간에 물건을 낚아챘다.
“이, 이건?”
전낭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번쩍이는 은자가 세 개나 들어 있었다.
“이게……”
“후, 훔친 게 아닙니다.”
“……”
집주인 부부가 억울한 표정으로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알고 있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어째서 그 도적놈이 은자가 든 전낭을 놓고 갔느냐였다.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누가 집 앞에 놓고 갔길래 그냥 주워 온 것뿐입니다.”
“……”
일단 부부를 안심시켜야 할 것 같았다.
“알고 있네. 누가 놓고 가는 것을 보았고, 빼앗을 생각도 없으니까.”
“예……?”
“자, 여기 받게.”
“……”
정익수가 전낭을 돌려주자 부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혹 다른 건 없던가?”
“다른 것이라 하시면…… 아! 이게 있었습니다.”
“……?”
집주인이 내민 것은 전낭을 싸고 있던 보자기였다.
활짝 펼쳐 보니, 그 안에 글귀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묵비(默秘).
비밀로 하고 말하지 말 것.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을 막고 있는 그림.
그 역시 같은 뜻이다.
혹여 글을 읽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봐 그림까지 그려 두는 친절함을 보인것이다.
한데 어째서?
순간, 전래동화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다.
어려운 이들의 집 앞에 재화를 두고 간다는 의적…….
그런 자였다고?
확인해야 했다.
“보았으나 모르는 체할 것이네. 자네들도 함구토록 하게. 알겠는가?”
“예? 예……”
집주인에게 대답을 들은 정익수는 곧바로 집을 빠져나와 아까 그 도둑으로 보이는 자를 찾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그 정도 경공을 가진 놈이 고작 은자 몇 개 주자고 이곳에 숨어들진 않았을 것이다. 필시 다른 집에도 들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근처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면?
정익수는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팍!
감천현은 자신의 앞마당 같은 곳이 아닌가?
민촌의 모든 곳을 내려다보며 살필수 있는 곳은 딱 한 곳뿐이다.
근처 성곽의 망루 지붕.
관군이 순찰하는 곳이라 접근이 통제되지만, 지금 그딴 게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이 시간엔 관군들도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딱히 외적의 침입이 있는 것도 아니니, 술이나 퍼마시다 잠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순식간에 성곽으로 달려간 정익수는 예상대로 졸고 있는 관군을 지나 망루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공력으로 안력까지 끌어 올리고 민촌을 살폈다.
어디냐? 어디에 있는 것이냐?
경공술이 뛰어난 놈이었다. 익숙한듯 어둠 속에 숨어 다니는 것을 보면 은신술도 못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필시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민가에 돈을 두고 가는 그 순간, 그때를 노려야 했다.
정익수가 온 정신을 집중한 지 일각여가 지났을 무렵.
“놈! 찾았다.”
정익수는 드디어 목표물을 발견했고, 곧장 몸을 날렸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바로 잠영보(潛影步).
종남에서 흘러온 경공이다.
비록 본산 무인들이 익히는 무영공공보에 비하면 다소 떨어지는 경공술이나, 정익수는 은신자가 절대로 자신을 발견치 못할 것이라 자신했다.
물론 가까이는 가지 않았다. 종적을 찾았으니, 주의 깊게 살피고 흔적을 놓치지만 않으면 쫓을 수 있을 테니까.
뭐 하는 놈인지 알아내야 하나, 아직은 아니다. 놈이 모든 것을 끝내고 민촌을 떠나는 순간을 노려야 했다.
혹여 동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행히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놈은 계속해서 의로운 행동(?)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한데 정말 대단한 자다.
조금 전 순찰조가 대기하는 곳을 지나갔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하긴, 자신조차 좇는 것이 힘들 만큼 기민한 자가 아닌가?
의행을 하는 도적을 쫓던 중 정익수가 남긴 전음에, 순찰조와 함께 대기하던 안평이 놀라서 고개를 휙휙 돌렸다.
[설명해 줄 시간 없다. 표식을 남겨놓을 테니 곧장 쫓거라. 순찰조에겐 섣불리 나서지 말고 대기하라 이르고.]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해 답을 하진 않았지만, 안평은 고개를 끄덕여 이해했음을 표시했다.
이걸로 되었다.
정익수는 곧장 민촌을 벗어나 달리는 의인을 뒤쫓으며, 지풍을 날려 담벼락에 표시를 남겼다.
그렇게 얼마나 쫓아왔을까?
도심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의인이 별안간 어느 객점의 담을 넘었다.
“……청아 객점?”
감천에서 제법 유명한 객점의 후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