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96
“허억, 허억……”
운학이 손을 멈추었을 때, 그 주위에는 수많은 이들이 쓰러져 있었다.
선천방 순찰당주 정익수 이하 순찰조 십오 명 전원 실신.
손이 너무 과했다. 하지만 시기적절하게 나선 덕에 마교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담벼락위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안쪽을 살펴보니, 술자리가 한창이었다.
“휴우……”
운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무시무시한 고수인 시비……님의 방해로 녹림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었지만, 정파와의 마찰만은 막을 수가 있었다.
이로써 중원의 평화는 지켜냈다.
모두가 선천방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일이었다.
“끄으으…… 말코 놈……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
쓰러져 있던 무인 중 하나, 안평이 꿈틀거리며 운학을 욕했다.
빗맞은 모양이다.
낙화추영을 완벽하게 펼치지 못했다니, 나는 아직 멀었구나……가 아니라 원체 정신이 없었고, 상황이 급박했으니…….
“괜찮소?”
“……!”
운학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자, 꿈틀거리던 안평이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나 힘이 없으니 도망치지는 못하고, 조금 활달하게 꿈틀거린 것이 고작이다.
“이런, 내 상황은 나중에 전부 설명하리다. 일단 정신부터 좀 차리시오.”
조금 전까지 무자비하게 패던 도사가 갑자기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손목을 잡자 안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 이런 미친 도사 놈이 있단 말인가?
지가 패고는 안부를 묻다니?
와중에 이건……?
스아아아!
청량한 기운이 손목을 타고 흘러들어오자, 안평의 눈이 부릅떠졌다.
본시 도가의 선기(仙氣)란 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수양하듯 닦은 기운인지라, 심마를 잠재우고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지는 법이다.
거기다 상쾌함까지…….
“좀 웬찮소?”
“……?”
“그런 눈으로 보아도 내 무어라 할말이 없구려.”
“……”
“하나, 그대들이 중원의 평화를 지켰다는 것만 알아 두시오.”
“주, 중원의 평화?”
“그렇소. 일단 부상자들부터 살핍시다. 내 선천방주님을 찾아뵙고 지금의 오해를 전부 설명하리다.”
“……”
오해라니? 사람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팬 도사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이해를 못 해도 상관없소. 나를 그리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아도 할 말이 없소. 다만 거듭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대들의 희생으로 중원의 평화가 지켜졌다는 것이오. 무량수불……”
“……”
병 주고 약 주는 듯한 운학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당장에 무슨 힘이 있겠는가?
흐렸던 정신이 점차 맑아지고 몸도 움직일 수 있었지만, 뼛속까지 파고든 고통은 그대로였다.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운학이 쓰러진 이들을 살펴 정신을 차릴 만한 이들을 돌봤다.
“으, 으헉!”
“헙!
“아, 악마 같은 놈!”
“……”
그의 선기에 정신을 차린 이들이 내뱉은 말과 반응은 한결같았다.
눈을 뜸과 동시에 놀란 표정이었고, 전부 욕설을 토해낸다.
하지만 운학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듯했다. 하나하나 살펴 기운을 불어넣고 상처를 살피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순찰조 무인 중 일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일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이자는……”
“본방 순찰당주님이신 정익수 님이시다.”
“음…… 그랬구려.”
운학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들이 청아 객점에 머무는 능운비 일행의 정체를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정익수는 그저 자신의 직함에 충실했던 것이다.
순찰당주라는 게 그렇다.
중원으로 따지자면 개방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야 하나?
영역 내를 지나는 이들을 확인하고 감찰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니, 일행을 살피고자 한 게 분명하다.
몰래 살핀 것이 문제지만.
“빈도는 화산의 운학이라고 하오.”
“운학…… 운학?! 화산검룡?”
신분을 밝히자 그 이름을 되뇌던 안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소. 이것이 내 신분을 증명하는 옥패요.”
“……”
운학이 품에서 옥패를 꺼내 내밀자, 안평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화산의 옥패가 분명하다.
물론 순찰조에 속해 있다고 하여 중원 모든 곳의 신분 패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천은 섬서가 아닌가?
화산과 종남이 주름잡고 있는 정파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그 두 곳의 신분 패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명망 높은 화산 도사가 어째서 자신들을 팬 거지?
심지어 그냥 도사도 아니고, 그 이름이 중원 전역에 알려진 화산검룡이?
선천방이 종남의 문하임을 모르지않을 것인데…….
“의문이 많은 줄 아오. 하나, 자세한것은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 설명해 주도록 하겠소. 객점 안에 있는 이들이 들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 무량수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전히 원한이 가득한 눈빛이었으나, 운학의 신분을 확인했기에 말투는 많이 누그러진 안평이었다.
“정 당주는 내가 부축할 테니……나머지를 부탁해도 되겠소?”
“……?”
자신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운학이었지만, 안평은 일단 시키는 대로 할수밖에 없었다.
이름값이라는 것이 괜히 있던가?
때론 그 이름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한 이름을 가진 자가 이유 없이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믿음이다.
설마하니, 그 화산검룡이 악의적인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하였겠는가?
“자, 선천방으로 갑시다. 가면서 내 모든 것을 설명해 드리리다. 무량수불, 그대들이 중원 평화에 이바지했음은 확실하오. 분명 큰 상을 받을 거요.”
“……”
정익수를 들쳐 메고 걷는 운학은 도호와 함께 그 말만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하지만 안평은 큰 상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자신들이 무엇을 했기에 상을 받는단 말인가?
그냥 순찰당주의 명을 듣고 흔적을 쫓아왔다가 처맞은 것이 전부인데?
하지만 무려 화산검룡이 이리도 확신하고 있으니, 왠지 가슴이 뿌듯해졌다.
다만, 그건 그거고 몸이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염병할…… 중원의 평화를 지키기가 이리도 힘들어서야.
아이구, 삭신이야.
안평과 순찰조 무인들이 선기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무인들을 부축해 쩔뚝거리며 운학의 뒤를 따랐다.
* * *
운학이 담벼락 밖의 사람들과 떠났다는 왕천의 보고에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가 볼까요?”
“뭐 하러?”
“혹시나……”
“됐어, 그냥 놔둬라. 괜히 정파 쪽 사달에 마교가 끼어들었다가 일이 생기면 골치 아프다.”
“예.”
능운비의 손사래에 왕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저 도사도 악독하네요. 정파에 제법 이름이 자자한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뭔 소리야?”
“거의 죽일 듯이 팰 땐 언제고, 치료가 웬 말입니까? 그러곤 다 데려가는걸 보니, 필시 그 근거지마저 박살 내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왕천의 말이 일견 타당성이 있다.
하긴, 화산 도사라고 전부 자신이 기억하는 청진과 비슷할 리는 없다.
속세에 물든 놈도 있겠지.
와중에 운학은 정파의 밀명까지 받고 자신과 함께하는 놈이 아닌가?
뭐, 어차피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괜히 신경 쓰기도 귀찮다.
어쨌든 술자리가 어정쩡해진 김에, 능운비는 사람들을 물리고 향이를 불렸다.
어차피 수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고…….
사실 마교인 중에 강해지고 싶지 않은 자들이 누가 있겠는가?
강한 힘을 가지는 것은 모든 마교인들이 열망하는 일이다.
그런 이들에게 있어 향이와 같은 절대 고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기연이요, 축복이다.
자신과는 조금 다른 이유였지만, 어쨌든 왕천과 주승에게는 놓치기 힘든 기회였던 것이다.
그러니 내버려 두자.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자신이 박차버려서야 되겠는가?
향이를 보며 저리들 눈을 반짝거리는 것을…….
그래도 내가 먼저다, 이 위아래 없는 자식들아.
“향아.”
“예, 삼공자님.”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신경조차 쓰지 않고 안주발을 세우던 것에 이어 술맛에 연신 감탄하던 향이가 무심하게 답했다.
식충이냐?
그만 처먹고, 사람이 부르면 고개라도 돌려라.
하지만 어찌 말할까?
아쉬운 건 자신인데…….
“전에 말했던 시, 청, 후, 미, 촉을 초월하는 방법에 대해 언질이라도 줄 수 있을까?”
“에이씨, 귀찮게. 먹는데 뭘 그런 걸 물어요?”
“……응? 아, 미안. 그럼 다 먹고 말해줘.”
“됐어요. 입맛 떨어졌어요.”
“……”
향이가 젓가락을 거칠게 내려놓고는 입가에 가득한 기름기를 대충 닦아 냈다.
“……”
다 처먹었다.
고기만 골라서 처먹은 터라 접시 위에는 채소만 가득했다.
“젠장, 입맛만 버렸네. 삼공자께서 물어서 그렇게 된 거니까, 나중에 다시 사줘요. 알겠어요?”
“……응? 으응,.”
능운비가 억지로 웃음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고기만 있는 음식으로 사 줘야겠다 생각하면서.
“자, 보자. 시, 청, 후, 미, 촉 이라……. 사실 삼공자님껜 간단한 문제예요.”
“간단해?”
“예. 이미 해 봤으니까.”
“……?”
“보는 눈, 혹은 통찰의 눈 관시. 삼공자님께선 그걸 이미 깨달았잖아요.”
“아!”
전엔 몰랐지만, 자신이 살수업을 위해 익힌 그것을 관시(觀視) 혹은 관조(觀照)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 터다.
본질을 보는 눈.
혹은 상대의 무공을 꿰뚫어 보는 눈.
생각해 보면, 그 수련의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맨 처음 본 게 일 장 밖에 떨어져 있는 바늘구멍 이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인의 한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보려 하면 보인다.
어느 순간 바늘구멍이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 크게 보였고, 다시 활짝 열린 창으로 느껴지는 순간 그 너머의 세상이 보였다.
그리되었을 때, 한 줌의 쌀알을 허공에 던지고 그 쌀알에 새겨진 글자를 읽었다.
역시나 불가능하다 여겨지겠지만, 범인의 노력으로 어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눈알이 빠지는 고통을 수차례 경험했고, 눈물이 나다 못해 진물이 흐르는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겨우 도달했다.
그렇게 수련을 끝냈을 때, 능운비는 시각을 초월했다.
그런데 그 과정과 같다고?
능운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자 향이가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응?”
“하나를 익히고 나면 방법은 똑같아요. 굳이 처음부터 수련할 필요는 없죠.”
“그게 무슨?”
“보는 것을 수련했을 때처럼 듣는겁니다. 수많은 소리 중에서 오직 듣고자 하는 것만을 듣는 거죠.”
“수많은……?”
“가령, 쏟아지는 폭포 주위로 기어가는 벌레 소리 같은 거.”
“……”
담담한 향이의 말에 능운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벌레가 기어가는…… 발소리를 들어?
그게 가능하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죠?”
“……아니.”
“거짓말. 하지만 사실이에요. 강의 경지는 그런 거니까. 그 불가능을 이루어 내고서야 도달하는 그런 경지죠.”
“……”
욕을 하고 싶었다.
향이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 ‘넌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무슨 얘기를 하나 들어 보고자 귀를 기울이던 왕천과 주승도 고개만 갸웃거렸다.
알 리가 있나. 관시를 깨달은 자신도 모르겠는데.
“어렵지 않아요. 보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려 봐요. 삼공자라면 아마 금세 깨달을 겁니다.”
“……”
“흔히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하죠?”
“고요한 물?”
“예.”
“……”
도가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무위의 경지를 논하는 뭐 그딴 어려운 말.
마교의 꼬맹이 주제에 별걸 다 안다.
하나 깨달은 자의 말은 언제나 선문답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능운비는 찬찬히 눈을 감고 귀를 열었다.
“무심, 무감, 그리고 무아(無我). 가끔 폭포 같은 데 누워 있을 때, 폭포 소리보다 주위에서 지저귀는 산새 소리가 더 잘 들릴 때가 있었을 겁니다. 그걸 잘 응용해 보세요.”
“음……”
일단 귀를 열고 모든 소리를 받아들인다.
무심과 무감.
감정을 지우고, 어떠한 생각도 하지않는다.
그리고 찾는다.
수많은 소음 속에서 듣고 싶은 소리 하나만을.
“음, 호위장님. 시, 청, 후, 미, 촉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왕천의 말에 주승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하니 시비님 같은 고수께서 오감을 말했겠냐?
“음, 그럼 초월한다고 하면?”
“더 보고, 더 듣고?”
“……”
주승이 더는 말섞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다물었다.
망할놈들 같으니라고. 떠들 거면 전음으로 떠들 것이지.
그들의 쓸데없는 대화에 집중이 깨져 버렸다.
하지만 능운비는 다시금 귀를 열고 소리에 집중했다.
왕천과 주승의 목소리를 배제한 채.
그렇게 그는 조금씩 조금씩 과거의 어느 때 관시를 깨달았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무아(無我).
존재를 잊고, 차츰 세상에 동화된다.
볼에 와 닿는 바람 소리에는 바람이 되었다가, 후원 정자 아래 흐르는 물소리에는 물이 되어 고기들과 노닐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