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01
#1100.
처리하다 (5)
한세연이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최연하.’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알았다. 저 얼굴을 모를 수가 없다. 평소였다면 알아채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지도 모르지만, 최연하라는 이름이 확실하게 머리에 각인되어 버린 후가 아닌가.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카운터로 다가간 최연하가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예쁘다.’
그런 말로 표현하기는 조금 부족하다.
하지만 적당한 수식어를 생각해 내기가 힘들었다.
직접 눈앞에서 본 최연하는 TV나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영화관에서는 그저 예쁘다는 생각뿐이지만, 바로 앞에서 본 최연하는 압도적이다.
질투는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사람은 적당한 부자는 부러워하지만, 도를 넘어선 재벌에게는 부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무엇을 해도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한세연에게는 최연하가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그저 외모만이 아니다.
손짓 하나, 걸음걸이 하나에서 여유로움과 당당함이 느껴진다.
‘진호의 여자 친구.’
이상한 기분이었다.
과거, 한세연은 자신이 강진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헤어짐을 선언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스스로가 강진호에게 당당할 수 없었다는 것도 분명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렇기에 기분이 이상하다.
자신은 있을 수 없던 자리에 저 사람이 앉아 있다. 전혀 부족하지 않아 보이는 모습으로 말이다.
최연하의 시선이 한세연을 훑는다.
한세연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시선은 분명히 한세연은 향하고 있었다.
최연하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다.
자신만만한 웃음.
안다.
저건 절대 비웃음 같은 게 아니다. 그저 눈이 마주쳤기에 웃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세연에게는 그 어떤 비웃음보다 강렬했다.
“그럼 주문?”
“네.”
“어떤 걸로 해드릴까요?”
“뭐가 제일 맛있어요?”
“우리 집 피자는 다 맛있죠. 아시잖아요.”
“모르겠는데?”
“…….”
주영기의 얼굴이 뭐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에이, 손님 앞에서 표정이 좀 그렇다.”
“손님도 손님 나름입니다, 손님. 원래 연예인쯤 되는 사람은 때때로 을질도 당하는 거죠. ‘최연하, 피자 가게에서 난동’이라는 기사가 뜰지도 모르잖아요?”
“아, 그래요? SNS에 가게 홍보 한 번 올려 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모든 피자를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뭘 원하십니까? 메뉴판에 없는 피자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30판 살 건데?”
“……가게 거덜 내실 거예요?”
“에이, 설마. 돈 낼게요.”
최연하가 가볍게 웃고는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라서 내 취향대로 못 골라요. 잘나가는 걸로 30판 준비해 주세요.”
“회식이라도 하세요?”
“비슷해요.”
“네. 그럼 제가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결제는?”
“이걸로.”
최연하가 카드를 내밀자 주영기가 말없이 긁었다. 그러면서 살짝 시선을 돌려 강진호의 눈치를 봤다.
‘사모님한테 돈 받는 것 같아서 영 기분이 껄쩍지근하네.’
주영기가 사장의 역할을 맡고 있지만, 이 가게는 엄연히 강진호의 것이다. 돈 한 푼 투자하지 않은 사람이 사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고 해서 소유주가 되는 게 아니다.
주영기가 열심히 돈을 벌어 강진호에게서 지분을 사지 않는 이상, 이 관계는 바뀌지 않는다. 물론 강진호의 스타일상 주영기가 우는소리를 하면 나중에 갚으라는 말과 함께 지분을 넘겨주겠지만, 그건 주영기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친구이기에 받는 게 아니다. 친구이기에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좀…… 기다리세요.”
“네.”
최연하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 미소를 보며 주영기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도망가자.’
이 여자는 시한폭탄이다. 그것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괜히 홀에 같이 있다가는 주영기마저 폭발에 휩쓸릴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 홀에는 그의 친구들이 남아 있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미안하다, 얘들아. 형은 도망간다.’
니들이 알아서 잘해봐라.
주영기가 안으로 들어가자 최연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강진호의 일행이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원래는 소란스러워야 할 실내가 조용하다.
박유민이 고요해진 주변을 훑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보통 사람이 많은 데 인기 있는 연예인이 나타나면 난리가 난다던데, 이 피자 가게 안은 되레 최연하가 나타나기 전보다 더 조용해졌다.
“이, 이상하게 조용하네?”
박유민의 그 말이 신호였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들 중 하나가 일어나 최연하 쪽을 보며 말했다.
“호, 혹시 최연하 씨?”
“아, 안녕하세요?”
“지, 진짜다! 사인! 사인 한 장 받을 수 있을까요?”
“아, 네. 물론이죠. 대신에 이 피자집에서 받았다고 꼭 말해주세요. 여기 친구가 하는 데거든요. 사인보다는 사진? 사진이 나을까?”
“물론이죠!”
“지금은 잠깐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조금 있다가 테이블에 가서 찍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말이 끝나기 동시에 여기저기서 소란이 났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사인과 사진을 외치기 시작한다.
“음, 안 되겠네.”
최연하가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며 말한다.
“저 사진 좀 찍어주고 올 테니까, 잠시만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최연하를 바라보고 있던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연하가 빙그레 웃고는 테이블을 돌기 시작했다.
“……스타네.”
박유민이 멍하게 말했다.
한세연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연하가 사인 요구를 부드럽게 받아주자 분위기가 단숨에 달아올랐다. 시끌벅적해진 홀을 보면서 박유민이 헤, 하고 입을 벌렸다.
‘한 번씩 실감한다니까.’
태연하게 대화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나누는 저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는 톱스타라는 사실을 말이다. 너무 친근한 느낌이라 때때로 잊어버리게 된다.
박유민이 슬쩍 한세연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한세연마저도 최연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테이블을 돌며 사진을 찍고 사인을 해주는 최연하를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쩐다.’
이런 말은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최연하가 얼마나 예쁜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은 옆이 조금 이상했지.’
강진호와 최연하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면 실감이 안 난다. 합이 맞으니까. 하지만 최연하가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서면 저 사람이 얼마나 말이 안 되게 예쁜지를 알 수 있다.
‘나중에 옆에 오면 피해야겠다.’
오징어는 되지 말아야지, 오징어는.
어?
“내가 진호 옆에 서면 저렇게 보이는 거야?”
“…….”
슬쩍 고개를 돌려 박유민을 본 한세연이 안쓰러운 눈을 했다.
그, 그렇게 보지 마.
테이블을 쭉 돈 최연하가 여기서 나가면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은 하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하고는 강진호의 일행 쪽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강진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너무도 태연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그 모습에 한세연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안녕하세요?”
최연하가 태연한 얼굴로 한세연에게 인사를 한다.
“아, 네…….”
“처음 뵙는 분이네. 유민 씨는 자주 봤는데. 음? 유민 씨, 살 빠졌어요?”
“네? 아…… 조금.”
“저번에 봤을 때보다 홀쭉한 것 같은데?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 봐요. 무슨 일 있어요?”
“……아, 경기 준비한다고 조금요.”
“건강해야 경기도 잘할 것 같은데. 밥 좀 잘 챙겨먹어요. 잠도 좀 자고.”
“하하…….”
박유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계산을 하러 카운터로 나오던 주영기가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쯤 되면 마귀지, 마귀.’
최연하가 여기에 왜 왔는지야 빤하다.
아마 한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말 그대로 밟아주러 왔겠지. 남자 친구가 다른 사람이라면 그런 빤한 짓은 미움 살까 봐서라도 저어되겠지만, 상대는 저 강진호다.
아마 강진호는 지금 최연하가 왜 여기에 왔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저놈은 이런 면으로는 둔하기 짝이 없으니까.
지금 최연하가 박유민를 걱정하는 이유는 친근함의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강진호 친구 박유민도 이제 나랑 더 친해’라는 과시에 가깝다.
물론 주영기의 생각이지만.
‘진호나 돼야 감당하지. 나는 무리다.’
주영기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종종걸음으로 카운터로 달려갔다.
살짝 시끄러워진 홀이건만, 이상하게 강진호와 최연하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여긴 웬일이에요?”
“피자집에 왜 오겠어요, 피자 사러 왔지.”
“많이 사는 것 같던데?”
“가져다줄 데가 있어서요.”
강진호가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쪽 분은?”
“친구.”
“아, 진호 씨 친구? 이상하다. 우리 진호 씨 인맥이 엄청 얇은데, 이런 예쁜 친구분이 계셨네.”
“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연하가 빙그레 웃으면서 한세연을 바라봤다.
“그럼 저랑도 친하게 지내요. 진호 씨 친구는 제 친구거든요.”
“……아, 네.”
한세연이 입술을 오물거린다.
그러고는 살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한세연이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한세연의 뒷모습을 최연하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세면대에 물을 틀고 손을 씻던 한세연이 살짝 짜증 어린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해보자는 거지?’
대놓고 시비를 걸고 있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눈에 박혀 떨어지지가 않는다.
시비를 걸어오는 최연하도,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강진호도,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 박유민도 다 짜증이 난다.
하지만 이 짜증의 진짜 원인이 뭔지 한세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어색해서 앉을 수 없는 강진호의 옆자리에 자연스레 앉을 수 있는 게, 그리고 그 광경이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게, 그리고…….
심지어 그 모습이 어울려 보인다고 생각한 것까지도.
“후우…….”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근 한세연이 살짝 주먹을 쥐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오늘 뭔가를 해볼 생각은 없었다.
박유민은 그녀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한세연 역시 몇 번의 만남으로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박유민이 강진호를 잘 아는 것처럼, 한세연도 강진호를 잘 안다.
그렇기에 오늘은 적당히 얼굴이나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건만, 저쪽에서 이렇게 나온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세연이 얼굴을 굳히고 몸을 쭉 펴는 순간,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세연의 얼굴이 그대로 굳는다.
또각, 또각.
최연하.
이제는 익숙해질 것 같은 발소리와 함께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최연하가 마치 문을 가로막듯이 서서 한세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뭔가 말을 걸려던 한세연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최연하의 눈이 조금 전과는 명백히 다른 서늘함을 띠고 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