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7
#116.
정립하다 (4)
늦은 밤이 되자 강진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몰래 병실로 숨어들어 누워 있는 원장 수녀님을 바라보았다.
‘치료해야지.’
대책 없이 술을 마셔 버린 느낌이지만, 취기가 전혀 올라오지 않아서 치료를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강진호는 원장 수녀님의 배에 손을 대고는 퍼져 버린 암세포를 제거했다. 한 번 제거한 부분에 다시 스멀스멀 생기고 있는 독기를 모두 제거하고, 아직 손을 대지 못한 부분에 대한 치료를 한참동안 시행하고야 손을 뗐다.
“후우…….”
강진호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 번 했던 일이라 그런지 저번처럼 힘들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몸이 축 늘어지는 느낌은 피할 수 없었다. 땀으로 젖어버린 옷이 거슬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나아졌어.’
원장님의 몸이 나아지는 만큼 강진호의 경지도 올라가고 있었다.
과거처럼 수련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이러한 치료 역시 수련이 되고 있었다.
잠에 빠진 원장님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강진호가 몸을 돌렸다. 병실을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온 강진호가 눈 아래 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정말 바뀌지 않은 걸까?’
이 세계에 와서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유민의 말은 그의 생각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낸 적은 없다. 하지만 박유민의 말대로 그가 먼저 다가가거나 먼저 맞추려고 한 적은 없다.
예외가 있다면, 박유민의 경우 하나뿐일 것이다.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예전의 그는 고슴도치였다.
사고가 난 이후로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장애가 있는 몸이다 보니 다른 이들이 그를 어떻게 바라볼지 두려울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시선을 거부했다.
중원에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장애는 조금 나아졌지만 이곳의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는 자각이 항상 있었다.
어쩌면 그가 적천마존으로서 천하의 공적이 된 것도 그러한 연유였을지도 모른다. 따져 보면 그곳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도 믿을만한 친구나 부하 하나 만들어내지 못한 것도 그의 탓일 테니까.
그래서 이번 생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친구도 만들었고, 가족도 있다. 그가 걱정해야 할 사람이 생겼고, 그를 걱정해 줄 사람도 있다.
하지만 박유민은 지금의 그를 보고 있으면서도 예전의 그를 보듯이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일까?
‘바뀌어야 하나?’
얼마 전이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세연의 경우에서 자신의 이런 태도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럼 그가 맞추어야 할까?
맞추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지?
“휴우…….”
강진호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다른 사람들이 너무도 평범하게 하는 일이 강진호에게는 더없이 어렵게 느껴졌다.
정말 달라지지 않은 걸까?
강진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가 이곳에 서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예전의 그였다면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스스로의 삶의 방식을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타인을 치료하겠답시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금 느린 것뿐이야.”
그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세상의 변화가 그가 따라잡기에는 너무 빠를 뿐.
갈피를 잡지 못한 강진호가 깊은 한숨을 쉬며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일 있니?”
“아뇨.”
“그런데 왜?”
“그냥 그렇네요.”
백현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진호와 밥통을 번갈아 보았다. 어제 아침에 밥이 모자라는 사태를 겪은 백현정이 자식에게 즉석밥을 먹일 수 없다는 일념하에 밥을 한 솥이나 했건만, 오늘 자식 놈은 한 그릇을 깨작깨작 겨우 뜨더니,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저 밥은 어쩌지?”
“밥이 문제예요!”
“그럼 뭐가 문제요?”
“진호가 입맛이 없잖아요! 아들내미 피골이 상접하겠네.”
“……아침에 밥 한 그릇이면 됐지.”
마누라는 강진호를 먹일수록 좋아지는 돼지 저금통쯤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늘은 어디 안 가니?”
“예.”
“그래, 잘됐구나. 아무리 휴가라지만 가족끼리 저녁은 같이 먹어야지.”
“네.”
방금 같이 아침을 먹었건만 뭔가 모자라신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뭐,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 하시면 다른 거겠지.
어머니가 식탁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드리고 나자 출근 준비가 끝났다.
“그래, 그럼 우리는 그만 가볼게.”
“예.”
“편히 쉬어. 혹시 나가게 되면 전화하고.”
“예.”
가족들이 집을 나가고 홀로 남겨진 강진호가 조금은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뭘 하지?’
휴가가 길어서 원장 수녀님의 치료에 전념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휴가가 길어서 할 짓이 없다는 단점도 있었다. 보육원에 가서 시간을 때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러다가는 아이들이 강진호가 보육원이 취직한 줄 알 것이다.
‘음…….’
군대를 가기 전에는 무엇을 주로 했나를 생각해 보니 게임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오랜만에?”
복잡한 머리를 식히는 데는 게임이 최고라고 생각한 강진호가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오랜만에 게임을 실행시키자 뭔가 업데이트가 잔뜩 된다.
강진호는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불과 3개월을 안 켰을 뿐인데 새 게임을 까는 꼴이다. 5분이 넘게 업데이트를 하고서야 겨우 게임이 실행되었다.
“시작해 볼까?”
강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떴다!”
“뭐가?”
“야, KILLYM 접속했어.”
“뭐? 진짜?”
연습으로 한창이던 스닉 폭스 게임단의 연습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진짜?”
우르르 달려와 화면을 본 사람들이 하단의 접속 목록에 떠 있는 KILLYM이라는 아이디를 보고는 다들 탄성을 흘렸다.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그러게. 진짜.”
“군대 갔다더니, 사실인 모양인데? 세 달쯤 걸린 거 아냐?”
“그런가 보다.”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자 감독이 고개를 갸웃하며 걸어왔다.
“왜? 무슨 일이야?”
“감독님, 랭킹 1위 떴지 말입니다.”
“뭐, 랭킹 1위가 별거야?”
“얘는 별겁니다.”
“응?”
감독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아이디를 확인했다.
“저거, 예전에 1위 독식하던 그 아이디 아냐? 무슨 프로 게이머 부캐라던데.”
“얘 프로 아닙니다.”
“확실해?”
“예. 보통 프로는 경기하는 시간이 방송 경기랑 맞아 들어가는 면이 있거든요.”
“응?”
“보통 프로 게이머 부캐면 개막식이나 미디어 날이나 이럴 때, 그러니까 프로 게이머들이 다 참석해야 하는 때는 접속을 안 하는데, 얘는 게임 돌립니다. 아마추업니다.”
“그래?”
스닉 폭스 게임단의 감독인 박우성은 미묘한 시선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 겜 걸어봐.”
“잘 안 받아줍니다.”
“알았으니 걸어봐.”
“예.”
자리에 앉아 있던 이가 아이디를 클릭하고 대전 신청을 넣었다.
“얘는 커스텀 게임은 잘 안 받아주는데…….”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수락이 떨어졌다.
“헐?”
“웬일이래?”
“군대 갔다가 휴가 나온 거면 감 찾으려고 게임하는 거 아냐? 그럼 받을 만도 하지. 괜히 랭겜 들어갔다가 레이팅만 깎아 먹을 거 아냐.”
이전의 KILLYM은 그냥 화석 같은 존재였다.
당연히 1등을 하고, 순위에 제목 같은 느낌으로 언제나 1등에 박혀 있는 존재. 그러다 보니 프로 게이머들도 자연스레 KILLYM을 제외하고 2등을 랭킹 1위라 여기고 게임을 하곤 했다.
최상위권 게이머들이 배넷에서 빡겜을 하게 되면 1등을 탈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있었지만, 대회와 연습실에서 서로의 연습을 도와줘야 하는 게이머들이 일반 랭겜에서 최선을 다해 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러다 보니 언제나 1위는 KILLYM의 것이었다.
최근 몇 달 동안 접속을 하지 않았기에 겨우 아이디가 휴면 처리되어 다른 이들이 1등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킬복절된 지 얼마나 됐다고 슬금슬금 다시 나타나냐.”
“그러게. 또 킬제강점기 터지겠네.”
“……이건 뭔 소리야?”
아이들의 드립을 알아듣지 못한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재 개그로 해드려야 하나?’
다들 고민에 빠질 시점에 게임이 시작되었다.
가만히 한 게임이 끝날 때까지 뒤에서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게임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많이 죽었네.”
“한 판도 안 했구만. 옛날 메타에 컨트롤도 예전 같진 않아.”
“그래도 뭐 번뜩번뜩한 건 여전하구만. 센스는 안 죽었네.”
“메타 흡수하면 다시 장기 집권하겠네. 아, 휴가라고 했지? 그럼 2년 동안은 킬복절 안 끝나겠네.”
박우성은 심각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해석할까?’
프로 게이머와의 대전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건 흠이 아니다. 문제는 게임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보통 아마추어가 프로와 게임을 할 때 이기고 지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프로가 마음먹고 빡겜을 했을 경우는 일방적으로 승부가 갈리기 마련이었다.
감독인 그가 지켜보고 있으니 슬슬 게임을 했을 리는 없고, 지긴 했지만 합이 맞는 게임이 나왔다는 것은 상대의 실력이 프로에 육박한다는 의미였다.
“세 달 동안 게임을 안 했다고?”
“예. 접속 없었습니다.”
“부캐 키운 거 아냐?”
“그럼 저런 빌드 안 쓰죠. 저거 올초에 유행하던 건데.”
“음…….”
그럼 세 달간 게임을 놓았는데도 현역 프로 게이머와 대등한 승부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물건인데? 연락할 방법 없냐?”
“얘 연락 안 받습니다. 쪽지 보내도 다 씹습니다.”
“다른 게임단에서도 영입하려고 몇 번이나 연락했는데, 관심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박우성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지금 군대 가 있잖습니까. 영입하려고 해도 일 년 반 기다려야 됩니다.”
“아, 그러네.”
그 말을 들은 박우성은 그제야 확실히 포기를 할 수 있었다.
“야, 그래도 나중 일은 모르니까, 쪽지 하나 보내놔. 친해질 수 있으면 좀 친해져 놓고.”
“예.”
“아쉽네.”
박우성은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화면을 돌아보다가 몸을 돌렸다.
포기는 깔끔하게 해야 한다.
“음…….”
강진호는 화면을 보며 고심했다.
‘졌네.’
원래는 질 상대가 아니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가볍게 이길 수 있는 상대였는데, 세 달 동안 게임을 놓은 여파가 컸다.
‘내가 이 정돈데…….’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육체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똑같이 세 달간 손을 놓는다 해도 그는 실력이 감퇴하는 속도가 더딜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예전이라면 가볍게 이길 수 있는 상대를 이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박유민은?
박유민이 연습실을 나온 게 한 달이 넘었다고 했다.
‘얼른 들여보내야겠어.’
시간을 더 끌다가는 박유민의 선수 생명에도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강진호가 재대전 신청을 했다.
‘그건 그거고…….’
지니까 열이 받는 건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강진호가 마우스를 꽉 움켜잡았다. 가볍게 시작한 게임인데 이리되니 불이 붙는다.
누군가는 겨우 게임일 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승부가 걸린 일에서는 양보가 없는 강진호였다.
“잃었으면 되찾아야지.”
물론 실력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