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8
#117.
정립하다 (5)
“나오셨습니까?”
“예.”
강진호는 병원 앞에서 조규민을 만났다. 미리 말을 해둔 일이라 조규민이 미리 와서 강진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능하겠죠?”
“물론입니다.”
“예.”
“진호야, 뭔 일이야?”
아침부터 강진호의 호출을 받아 병원으로 나온 박유민이 영문을 몰라 했다.
단순히 원장 수녀님의 면회를 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규민까지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그게 아닌 모양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사장님.”
“유민이, 오랜만이구나. 이사장 대리가 맞다.”
“예.”
“정확하게는 전직 이사장 대리가 맞겠지.”
강진호는 둘이 인사를 나누자 조규민을 향해 말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예. 지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가자.”
“응?”
조규민을 남겨둔 채 뚜벅뚜벅 걸어 병원 건물로 향하자 박유민이 어리둥절해하면서 강진호의 뒤를 따랐다.
“원장님한테 가는 거야?”
“그래.”
박유민은 더 이상은 묻지 않고 강진호를 따랐다. 이야기해야 할 일이 있으면 말을 해줄 것이다. 강진호는 그런 스타일이었으니까.
병실 안으로 들어간 둘이 원장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희 왔습니다.”
“왔니?”
원장님이 환하게 웃었다.
“안색이 좀 좋아지신 것 같은데요?”
“진호가 신경을 써서 좋은 곳으로 옮겨주었는데, 안색이라도 좋아야지.”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원장님의 안색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니?”
“진호가 갑자기 가자고 성화여서요.”
“진호가?”
원장 수녀님이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강진호가 생각 없이 일을 벌이지 않는 타입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그녀였다. 아침부터 강진호가 굳이 이곳을 방문했다면 목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 검사를 할 겁니다.”
“응? 검사라니?”
“전체 검사부터 조직 검사를 다시 할 겁니다. MRI 판독도 다시 할 거구요.”
“진호야.”
원장 수녀님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잡을 수 없는 걸 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
“잡을 수 있습니다.”
“……진호야?”
“저를 믿으시고 검사를 해주세요.”
원장님은 강진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호의 어조가 너무도 확신에 차 있었다. 설령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위해 이리 애를 써주는 아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깟 검사 한 번 더 못 받겠는가.
“하지만 검사는 예약을 해야 할 텐데.”
“이미 다 해뒀습니다.”
“너, 이러려고 나를 여기로 데려왔구나?”
“예.”
원장님은 가볍게 웃었다. 얼굴색이 밝아져서인지 웃음이 예전보다 조금 화사한 느낌이었다.
“그래, 받자꾸나. 그럼 진호가 편한 마음으로 복귀할 수 있겠지.”
“감사합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숙이기 무섭게 문이 열리더니, 의사와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준비해.”
의사의 지시가 떨어지자 간호사들이 휠체어를 펴고 환자를 태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환자분, 오늘 검사를 몇 가지 할 겁니다. 힘드실 수도 있지만, 치료에 꼭 필요한 것이니 잘 받아주세요.”
“예, 선생님. 고생이 많으세요.”
병실 안으로 들어온 강춘식 과장은 살짝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뭐지, 이 사람?’
재경에서 사람이 나와 VIP를 특별 대우하라고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황정후는 그런 것을 워낙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냥 재경도 아니라 비서실에서 사람이 나와 회장님의 특별 지시 운운하는 것을 보니 오금이 다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돼.’
과거 황정후의 자식이 입원했을 때도 특별 대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청년이 재경에서 황정후의 아들들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탓에 잘 보여야 한다는 마음과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검사 다 했는데.’
아무리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전이가 빨리 될 수 있다고는 하나 며칠 전에 찍은 MRI를 다시 찍으라는 것은 과한 요구였다.
회장님의 지시라는 말이 없었다면 그의 의사로서의 신념이 허락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나 이 검사로 환자의 상태가 더 나빠질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도 조직에 소속된 몸으로서 반항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반항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이래서 뭣 모르는 놈들이란…….’
강춘식이 혀를 차고는 환자의 검사를 지시했다.
“이, 이게?”
쾌속으로 나온 결과를 보던 강춘식이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차트 바뀐 거 아냐?”
밖으로 전화를 걸어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차트가 바뀐 게 아니라는 말만 들을 뿐이었다.
“그럼 이게 무슨…….”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위암 4기, 혹은 위암 말기였다. 복벽으로 암세포가 전이되어 회생 가능이 없던 환자가 단 며칠 만에 위암 3기라고 할 수 있는 상황까지 회복이 되어 있었다.
“전이가…….”
특히나 믿을 수 없는 점은, 복벽으로 전이되어 다른 장기까지 퍼졌던 암세포가 말끔하게 사라져 있다는 점이었다.
암세포가 더 퍼져 나가는 경우는 있어도 줄어들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항암 치료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기에 특별히 항암제를 투여하여 환자를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자연 치유라니.
“……믿을 수가 없네요.”
묵묵히 건너편에 앉아 있던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치료 가능합니까?”
강춘식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능합니다. 원래는 안 됐는데, 지금이면 가능합니다. 차트가 바뀐 게 아니라면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보니 자꾸 차트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언급하는 강춘식이었다.
“방법은요?”
“지금이라면 위 절제술로 위를 통째로 드러내야 합니다. 전이된 암세포가 소수 있을 수 있지만, 그 정도는 항암 치료로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진행해 주세요. 수술 일정은 최대한 빨리 잡아주시구요.”
“네? 아, 네.”
강춘식은 도통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차트를 뒤적거렸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MRI가 사실이라면 학계에 보고해야 할 상황이 틀림없었다.
“과장님.”
“아…….”
그제야 강춘식은 조규민이 미리 했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이 환자에 대한 어떠한 사항도 외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병원 안에서의 공유도 금지한다.
‘이걸 미리 알았다는 건가? 검사도 하기 전에?’
강춘식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약인가?’
만약 이 환자에게 신약이 투입되어서 효과를 본 것이라면 이 모든 사태가 설명이 된다. 눈앞에 보이는 젊은 놈은 신약 개발의 책임자일 거고, 적당한 환자를 찾아서 VIP실에 입원을 시킨 다음 임상 실험을 한 것이겠지.
허가 없이 임의로 환자를 뽑아 실험을 한다는 것은 법적으로나 의학 윤리적으로 허락될 수 없는 일이니, 그의 입단속을 하는 것일 터였다.
“환자분께는 말씀 잘해주십시오.”
“예. 걱정 마십시오.”
모든 상황을 지레짐작한 강춘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로서 이런 일에 동참을 한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환자의 상태가 그런 마음을 억눌렀다.
살릴 수 없을 것 같던 환자를 살리게 되는 것은 확실히 기쁜 일이니까.
문이 열리고 박유민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휠체어에 앉은 원장 수녀님이 고개를 꾸벅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강진호가 자리를 비켜주자 박유민이 휠체어를 강춘식의 건너편에 대고는 초조한 마음으로 소견을 기다렸다.
“우선 말씀을 드리자면, 환자분의 상태는 매우 호전이 되었습니다.”
“정말인가요?”
박유민이 눈을 크게 떴다.
가망 없다는 말을 들은 게 언제던가. 그런데 그사이에?
“예. 매우 호전이 되었습니다. 지금 상태라면 수술도 가능합니다.”
“수술요?”
박유민이 아연한 얼굴로 강춘식과 원장 수녀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수술이라니.
암세포가 너무 퍼져서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게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상태가 호전되어서 수술이 가능하다니.
그도 이런저런 정보를 알아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그 상태까지 갔으면 차라리 환자를 편히 보내주는 것이 낫다고 했다. 가끔 가망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다 사이비거나 대체 의학의 신봉자였다.
그런데 수술이라니.
“저, 정말요?”
“예, 가능합니다.”
박유민의 눈에 눈물이 뿌옇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원장님!”
박유민이 원장 수녀님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본인이 수술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수녀님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고개를 돌려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본 수녀님이 미소를 지었다.
“이거였니?”
“예.”
“진호가 고생이 많았구나.”
박유민도 고개를 돌려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너무 정신이 없어 생각을 못했지만, 강진호가 뭔가를 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일단 설명부터 마저 들으시죠.”
“그러자꾸나.”
강춘식이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위를 완전히 절제해 내고 식도와 소장을 이은 다음 항암 치료로 남은 암세포를 박멸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위를 절제한다고 해도 음식의 섭취만 주의하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말까지 듣고 나자 박유민은 그 자리에 반쯤 주저앉았다.
“이런 일이…….”
강진호가 병원을 옮겨야 한다고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기는 했지만, 가시는 길을 편히 모시겠다는 생각인 줄 알았다. 그런데 눈앞에서 극적인 변화가 생긴 것을 확인하고 나자 머리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수술은 최대한 빠르게 잡겠습니다. 혹시라도 상태가 안 좋아질 수가 있으니까요. 일단 다음 달까지는 스케줄이 다 차 있어서 당장 수술을 하기는 어렵지만…….”
조규민이 살짝 눈치를 주자 강춘식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환자분의 경우는 워낙의 급한 경우이므로 정규 수술 시간이 아니더라도 수술을 감행하겠습니다. 그럴 경우 며칠 내에 수술이 잡힐 수 있으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박유민이 눈물을 쏟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담담한 얼굴로 상황을 받아들이던 원장 수녀님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감사의 인사는 수술이 끝난 뒤에 받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나가보셔도 됩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생각해 두셨다가 내일 회진 시간에 물으시면 됩니다.”
“예.”
일행들이 휠체어를 몰고 밖으로 나왔다.
“병실로.”
강진호의 말에 박유민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실을 향해 휠체어를 몰았다.
“나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래 보인다.”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버린 박유민이지만, 휠체어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얼마나 기쁜지 날아갈 것 같은 심정이었다.
병실에 도착해 원장님을 침대에 눕힌 박유민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원장 수녀님의 손을 꼭 잡았다.
“원장님, 정말 잘됐어요.”
“그래, 유민아. 잘됐구나. 그런데…….”
원장님이 강진호를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유민이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니? 진호와 둘이 할 말이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