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474
#1473.
종결짓다 (3)
“내가 이 자리에 취임하면서 수많은 보고를 받아봤지만…….”
레이놀드가 앞자리에 앉은 이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건 조금 충격적이로군.”
“이미 예상된 일입니다.”
“예상, 예상이라……. 자네는 정말 이걸 예상했나?”
“…….”
레이놀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은 그의 앞에 앉은 이에게서 나왔다.
“아니겠지. 그랬다면 조금 더 강경했을 테니까. 이 정도의 예산에서 만족했을 리도 없고, SOB에 대한 훈련을 그런 식으로 했을 리도 없겠지. 그렇지 않나?”
“……죄송합니다.”
“탓하는 것이 아닐세. 그저 놀라고 있을 뿐이지. 국가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한 분석이 모조리 엇나갔다는 뜻이로군.”
레이놀드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총회의 전력에 대한 파악은 거의 맞아떨어졌습니다. 저희가 예측에 실패한 것은 오직 강진호, 총회의 회주입니다.”
“그 하나라…….”
“그는 아웃라이너입니다. 다른 이들과 같은 궤에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른 무인들과 그는 쥐와 사자만큼 차이가 납니다. 애초에 종이 다르다는 느낌인지라.”
“흐음.”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사왕, 사왕이라…….”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이런 시대에 왕이라니.
그것도 영국이나 일본이 그런 것처럼 상징적인 의미로 남는 것도 아니고, 실력과 실권을 모두 갖춘 왕이다. 21세기에 그들의 영향력을 인정해야 하다니.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군.”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놀드.”
“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하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요구는 무리합니다. 적당히 협상을 해볼 여지도 있습니다.”
“그래봐야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저들은 이미 주도권을 잡았어. 입맛대로 우리를 요리할 수 있지. 저들의 전력에 대한 분석이 틀린 순간, 이건 이미 예견되어 있던 일일세.”
“…….”
“아쉬운 쪽이 우는소리를 할 수밖에 없지. 지원을 해줄 테니, 거래를 성사시키게.”
“반대파는…….”
“입을 열 염치나 있는지 모르겠군. 반대하는 이가 있다면 15사단의 부상병들이 치료받고 있는 병원에다 던져 넣도록 해. 곤죽이 되어서 나올 테니.”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사내가 미간을 좁혔다.
그의 눈에서 더없이 차가운 빛이 흘러나온다.
“이 거래를 받아들이는 건 투자의 개념이네. 막대한 투자를 하는 만큼 반드시 그 이상의 이득을 얻어내야 하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레이놀드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호에게 투자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투자의 대가는 단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미국도 사왕에 필적하는…… 아니, 그 이상의 무인을 보유할 것.
레이놀드가 해야 할 것은 그 시기를 최대한 앞당기는 것이다.
“권한은 위임하지.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것도 자율적으로 승인하게.”
“감사합니다. 반드시 완수하겠습니다.”
레이놀드가 깊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사내가 책상 한구석에 올려진 시가 통을 끌어 당겼다.
시가를 꺼내 향을 맡은 사내가 시가의 앞부분을 잘라내고 성냥을 켜 천천히 불을 붙인다. 느긋하게 골고루 불을 붙인 사내가 시가의 향을 음미해 나갔다.
‘사왕이라…….’
그들의 존재는 위협이다.
지금 당장은 협력해야 하겠지만…….
‘언젠가는 달라지겠지.’
그 시기가 언제일지 가늠해 보던 사내가 피식 웃고 말았다.
고민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때는 이미 사내의 임기가 끝나 있을 텐데.
그가 해야 할 일은 미래에 이 자리에 앉을 이의 선택지를 넓혀 주는 것이다.
“잘 부탁하지, 미래의 누군가.”
* * *
호텔로 들어선 레이놀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더없이 중요한 협상이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긴장할 이유도 없지 않나?’
저 이현수 덕분에 이미 협상의 조건은 모두 확정이 되어 있는 상태다. 이제는 가부만 결정하면 된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덕분에 일이 쉬워진 것은 사실이다.
‘좋은 일일 리가 있나.’
저 날강도 같은 놈.
동양인들이 꼼꼼하다는 말이야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이건 꼼꼼한 정도가 아니라 편집증에 가깝다. 사소한 단어 하나까지 모두 따져 들며 조건을 협상하다 보니, 계약서가 300페이지를 넘어섰다.
메일을 통해 미리 계약서를 보내놓지 않았다면, 계약서를 확인하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렸을 것이다.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쉰 레이놀드가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그를 호위하듯 둘러쌌다. 그 광경을 보며 레이놀드가 미간을 좁혔다.
“뭐 하는 건가?”
“호위를…….”
“상대를 자극할 수 있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자네들의 임무는 경호지, 호위가 아니야. 지금 벌어진 행동을 상급자에게 설명하고, 사유서를 써 오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레이놀드가 짜증 어린 얼굴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평소라면 이런 일쯤이야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있지만, 지금 그에게 그 정도 마음의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국가의 미래가 달렸을지도 모를 일을 온전히 혼자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담감에 위가 아프고 뒷골이 당겨올 지경이다.
그러니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레이놀드가 말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층을 누르고 문이 닫히자,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 한숨을 내쉰다.
‘피곤하군.’
돌이켜 보면 강진호가 미국에 입국한 그날부터 단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수면 시간은 극도로 줄어들었고, 그 짧은 잠조차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물론 뒤처리까지 생각하면 더 긴 고통이 남아 있겠지만, 일단 산 하나만 넘어도 마음은 편해질 것 같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레이놀드가 심호흡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따라 걸은 그가 강진호가 거하는 호텔방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기가 무섭게 안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세요.”
레이놀드가 가만히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강진호와 이현수, 그리고 위긴스가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레이놀드가 일단 고개부터 꾸벅 숙였다.
“다시 뵙겠습니다, 회주님.”
“앉지.”
“예.”
레이놀드가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강진호의 건너편에 가 앉았다.
“담배?”
“아, 괜찮습니다. 저는 비흡연자라.”
“좋은 일이지.”
강진호가 담배를 입에 문다. 이현수가 라이터를 꺼내 강진호가 문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위긴스가 그 광경을 보다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거, 담배 좀 끊으십시오.”
“……건강에 문제도 없잖아.”
“냄새 나잖습니까. 남한테 피해를 끼치면 안 되죠.”
이현수가 살짝 놀란 눈을 했다.
“헐, 설마 이사님이 저희를 남이라고 생각하실 줄이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협상이든 뭐든 자리에만 앉으면 일단 담배부터 빼 무는 저 습관을 어떻게 하긴 해야 한다.
다른 이들이 이런 곳에서 담배를 피운다면 상대적 우위를 보여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되겠지만, 강진호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말려서 피우는 것에 불과하다.
‘니코틴에 영향도 안 받는 분이.’
이래서 습관이라는 게 무섭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잖습니까?”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
위긴스가 말문이 막힌다는 듯 레이놀드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레이놀드가 되레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오히려 위긴스 님의 말씀이 더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런건 동양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까?”
위긴스가 입을 닫았다.
“한국에 오래 계시더니 그쪽 사고방식에 많이 익숙해지신 것 같습니다.”
레이놀드야 그냥 덕담 삼아 하는 말이지만, 위긴스의 귀에는 전혀 다른 어조로 들렸다.
그러니까 저 말이…….
“꼰대라는데요?”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서 확인 사살을 할 필요가 있냐! 너는 그 입이 문제야!”
“아니, 저쪽에서 한 말인데, 왜 저한테 화를 내십니까! 그것도 꼰대짓 아닙니까?”
“꼰대짓? 지금 꼰대짓이라고 했나? 꼰대짓이 뭔지 내가 제대로 보여줘?”
강진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의가 어쩌고 하더니.”
위긴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추태를.’
이현수는 이상하게 사람을 긁는 면이 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이현수의 입에서 나오면 열이 열 배는 더 치솟는다.
“크흐흠,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레이놀드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긴장도 안 되나.’
어찌 보면 이 거래는 미국보다 총회에 훨씬 중요한 거래일 수 있다. 그들이 건 조건은 일개 집단에서 내걸 만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국가 단위는 되어야 말이라도 해볼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그 조건을 확정하는 자리에서 저리 여유로운 표정이라니.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강자의 여유라는 거겠지.’
이상한 기분이다.
그는 미국을 대표하여 여러 협상 자리에 나섰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상대가 여유를 가지는 걸 본 적이 없다. 여유란 언제나 그에게 주어진 특권이었으니까.
미국의 이름을 내건 이상 그는 언제나 강자의 입장이었고, 상대는 그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처음으로 그 입장이 뒤집힌 것이다.
레이놀드는 지금까지 자신을 상대해 온 이들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절절히 실감했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다.
“그럼 계약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아,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예?”
“지금 계약서를 다시 검토 중이니까요.”
이현수의 말에 레이놀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계약서는 지금 탁자 위에 온전히 놓여 있다. 그런데 누가 계약을 검토한단 말인가.
레이놀드의 의문 어린 표정에 이현수가 씨익 웃었다.
“한국에서 저희 법적 자문인들이 계약서를 꼼꼼히 뜯어보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웬만한 건 다 알아도, 법적인 부분은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
“곧 끝날 겁니다.”
“버, 법적 자문인요?”
“예. 저희도 법인을 운영하니 당연히 변호사가 있죠.”
어…….
어?
“아니, 이건 극비 계약입니다!”
“네. 극비 계약이죠. 그런데 법적인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쪽에서 배 째라고 해버리면 저희는 뒤통수나 맞는 거 아닙니까?”
“…….”
“믿을 만한 사람으로 구성했습니다. 총회의 회원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고, 자료는 모두 파기될 겁니다. 그리고 목숨이 아깝다면 평생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독한 새끼.
당연한 절차다.
하지만 그 당연한 절차도 이런 거래에서는 무시되는 게 보통이다.
이게 꼼꼼한 건지, 독한 건지 영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강진호가 상황을 보다 입을 열었다.
“윗선에서는 승인이 난 건가?”
레이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모든 조건을 수용하기로 하셨습니다.”
“잘됐군.”
“그리고…….”
레이놀드가 슬쩍 강진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윗분께서 회주님을 한 번 뵙고 싶어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