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488
#1487.
기여하다 (2)
“국정원이?”
[네.]액셀을 밟는 강진호의 발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국정원이라…….’
들어서 딱히 좋은 감정이 들지 않는 곳이다. 국정원과 얽힌 일치고 골치 아프지 않은 게 없었다. 더구나 강진호에게 있어서 국정원은 김명찬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이미지다 보니 더더욱 껄끄러움이 커진다.
“그래서?”
[적당히 경고해 놨습니다.]적당히라…….
이현수의 ‘적당히’라는 건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적당히’와는 단위가 조금 다르다.
‘흠씬 주물러 놨겠군.’
하지만 강진호는 굳이 이현수를 나무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국정원이 다시 총회의 일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고,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정보 수집 차원에서 벌인 일인 것 같더군요.]“경고했을 텐데?”
[신입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새로 윗자리에 앉은 것들은 전임이 하지 못한 일들을 한 번씩 손대보고 싶어 하기 마련이죠.]“흐음.”
납득이 가는 대답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속이 시원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총회가 한국에 있는 이상은 간간이 벌어질 일들입니다. 저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데 총회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없던 것처럼 살기는 힘들잖겠습니까.]“그렇기는 하지.”
[저쪽에서 헛수작을 못 부리게 감시하는 걸로 충분할 겁니다. 더 과격하게 나온다면 굳이 우리 손을 쓸 것도 없이 미국을 통해 압박을 넣을 수도 있겠구요. 아, 미국보다는 중국이 나으려나?]강진호가 피식 웃고 말았다.
‘상황이 묘하군.’
한국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과 중국을 이용한다라…….
누가 들으면 딱 매국노라 힐난하기 좋은 상황이다.
‘뭐,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지만.’
딱 하나 변명의 여지가 있다면, 강진호나 총회의 행동 원칙 자체가 국익에 반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왕이면 국가에도 도움이 되고 총회에도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와 총회의 이득이 상충할 경우에는 국가보다는 총회를 우선시한다는 것도 사실이니까.
“이종욱은?”
[단호하더라구요.]수화기 너머에서 살짝 감탄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솔직히 총회에 적응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조금은 혹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습니다. 일 조금 빼줘야겠어요.]강진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일을 조금 빼준다는 말은 다른 이들에게는 별것 아닌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 말이 이현수에게서 나왔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아마도 이번 일로 이현수가 이종욱에게 꽤 큰 신뢰를 갖게 된 모양이다.
“해프닝이네.”
“다만, 앞으로는 모르는 거고.”
[물론입니다.]강진호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분명 이번 일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확인했듯이 국정원은 결코 총회 내부의 정보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한 번 호되게 당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슬그머니 손을 뻗어올 게 빤했다.
“결국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국정원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것인가, 아니면 적당히 다시 손을 잡아줄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국정원과 완전히 척을 질 각오로 뻗어오는 손을 족족 잘라 버리면 그만이니까.
정보를 얻기 위한 대가가 너무 크다는 판단이 서면 그들도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국정원은 물론이고, 정부와도 원수가 될 뿐이다.
이미 원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도 정부와는 일절 협력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어진다.
이번 정부에는 극히 감정이 좋지 않은 강진호지만, 어쨌든 한국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상, 정부와 완전히 돌아선다는 것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관계 회복을 고려해 보시겠습니까?]강진호가 낮게 침음을 삼켰다.
국정원이나 정부와 척을 진다는 건 좋지 않은 판단이다. 이성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강진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가만히 있던 강진호와 총회를 먼저 공격한 것은 명백히 저쪽이다. 그런데 강진호가 왜 그들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단 말인가.
강진호가 대답하지 않자 이현수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회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사실 그게 회주님 특기시잖습니까. 상황 고려 안 하고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새끼가?
뭔가 살짝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시든 딱히 손해 보는 것도 없으니, 마음 편하게 결정하십시오.]강진호가 살짝 웃고 말았다.
이현수가 그를 편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다. 이현수의 말이 틀린 게 없기 때문이다. 이미 강진호의 마음속에서는 결정이 끝났다.
“관계 회복이라…… 좋은 말이지.”
[네. 말 그대로 좋은 말이죠.]“그런데 저쪽에서 그걸 원했다면, 이종욱에게 접촉해서 정보를 빼내려 드는 게 아니라 나를 먼저 찾아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과일 바구니라도 들고 말이죠.]“그렇지.”
과일 바구니야 농담이겠지만, 순서가 잘못된 건 맞다. 국정원이 그들과 관계를 회복할 의지가 있었다면, 이런 공작질을 할 게 아니라 일단 강진호에게 와서 머리를 숙였어야 한다.
그럼 이런 방식이 아니라 정당하게 정보를 얻어 가는 방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정원의 행동은 과거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국정원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새로 취임한 국정원장도 과거의 국정원장과 다를 게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럼 대처는 어떻게 합니까?]“알려줘야지.”
강진호가 조금 심드렁하게 말했다.
“주제에 맞지 않는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그렇게 해.”
강진호가 차창을 조금 내렸다.
차창을 통해 차가운 공기가 차 안으로 훅 밀려 들어오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럼 나중에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은 강진호가 시트에 몸을 살짝 기댔다.
‘정부라…….’
한 번은 더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굳이 강진호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강진호에게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이들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편해지는 건 또 아니지만.’
강진호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액셀을 꾹 밟았다.
* * *
“거, 진정 좀 하십시오.”
“……내가 뭘?”
“밑창에 구멍 나겠습니다. 좀 앉으십쇼!”
구정범 이사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황민수가 뚱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거, 그렇게 달달댄다고 뭐가 해결이 됩니까? 제자리서 빙빙 도시는 것만 30분째입니다. 체통 좀 지키십시오, 체통 좀!”
“체통이 밥 먹여줘, 체통이?”
황민수가 눈을 부라렸다.
그 살벌한 눈빛에 구정범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예전에는 이런 분이 아니었는데…….’
과거, 황민수가 재경에서 일할 때는 그래도 강단이라는 게 있었다.
언제나 황정후가 주는 압박에 눌려 안색이 어둡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업을 이끌어 나감에 있어서는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뭐 마려운 강아지도 아니고…….’
구정밤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몇 천억짜리 계약도 앉은 자리에서 하시던 분이 이게 뭡니까?”
“그때랑 상황이 다르잖아, 상황이! 그때는 내가 책임지는 게 아니었다고!”
“나잇값 좀 하십시오.”
“그러는 구 이사는 아까부터 왜 그렇게 다리를 떨어 대?”
“제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다리는 강철처럼 굳건합니다.”
“강철 스프링이겠지.”
“…….”
구정범이 슬쩍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덜덜 떠는 다리를 부정할 수가 없다.
“죽겠습니다.”
“내 말이.”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업하면서 이렇게 떨려본 일이 없는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노태광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전 세계를 누비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같이 겁쟁이가 되어서는!”
구정범이 눈을 찌푸렸다.
“너는 괜찮냐?”
“하나같이 겁쟁이가 됐다고 했잖아. 나도 마찬가지지.”
그 당당함에 구정범이 할 말을 잃었다.
“겁이 안 날 수가 있나.”
노태광이 피식 웃었다.
“여기에 우리 운명이 다 걸려 있는데. 솔직히 이전 계약들이 이천억이니, 삼천억이니 해봐야 그거 잘못된다고 모가지야 날아갔겠어? 좌천되고 끝이었지.”
“그야 그렇다만.”
“하지만 이건 아니지. 이거 잘못되면 회사가 날아갈 수도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회사가 날아가는 게 아니라 그들이 있는 부서가 날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임원들의 운명은 부서와 함께하기 마련이다.
일반 사원들은 부서가 사라진다고 해도 타 부서로 전출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평가야 조금 낮아질 수는 있겠지만, 숟가락을 빼앗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임원은 다르다.
임원이 임원이라 불리는 이유는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은 이 프로젝트의 사활을 걸고 황민수가 영입한 이들. 만약 프로젝트가 박살 난다면 이들의 입지도 박살이 날 것이다.
임원들은 노동법에 호소할 수도 없으니, 그냥 백수로 전직할 판이다.
“……살 떨려 죽겠네.”
황민수가 크게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겠지.”
“목소리나 떨지 말고 말씀하십시오.”
“……진짜 죽겠다고.”
황민수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한 가지 사업에 명운을 걸고 가진 모든 것을 올인하는 건 황민수도 처음 해보는 경험이다. 그 살 떨림을 경험하고 나자 황민수는 새삼스럽게 황정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황정후는 이런 경험을 수도 없이 하면서 바닥에서부터 재경을 만들어낸 것 아닌가.
그러니 황정후의 눈에 황민수가 미덥잖아 보였겠지.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편한 환경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해서 징징거렸으니까.
그리고…….
벌컥.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자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일제히 일어났다.
황민수가 떨리는 눈으로 안으로 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지.’
어쩌면 황정후 이상으로 빠르게 바닥부터 이곳까지 치고 올라온 사람이다. 그동안 받은 중압감으로 따지자면 황정후를 까마득하게 능가하고도 남을 사람.
강진호가 태연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황민수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회장의 격을 세워준다?
물론 그런 것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지금의 황민수는 진심으로 강진호를 인정하고 있었다. 아마 강진호는 지금 황민수가 겪는 압박감의 수백, 수천 배를 이겨내고 지금의 MK를 세웠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기분은 이사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강진호가 격한 인사에 흠칫했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어요?”
“…….”
“…….”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 먹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