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487
#1486.
기여하다 (1)
짤랑.
카페 안으로 들어선 이종욱이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물론 아무도 없다.
새벽 3시. 불이 꺼진 카페에 손님이 있는 게 더 이상하다.
‘악취미군.’
이 시간대에 사람을 불러내는 것까지야 이해한다. 그를 불러낸 쪽은 밤낮이 없는 걸로 유명하니까.
하지만 사무실같이 조용히 만날 수 있는 곳도 많건만, 굳이 영업이 끝난 카페로 사람을 불러내는 건 괴이한 취향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탁.
등 뒤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이종욱은 굳이 고개를 돌려 문을 닫은 이를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일처리는 익숙하다.
얼마 전까지 이종욱이 하던 일이니까.
“왔는가?”
안쪽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이종욱은 나오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승진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런 말은 이번에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
이종욱이 눈앞의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박성조.
익숙하다면 익숙하고, 낯설다면 낯선 사람이다. 왜냐면 박성조는 현 국정원의 차장이자 과거 국정원의 해외 분야 팀장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과거 이종욱의 상사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까마득한.
“무슨 일이 있었든 승진은 축하할 일이지요, 차장님.”
“좋은 말이지, 아주 좋은 말이야. 전임이 그리 불명예스럽게 영전하지만 않았더라도 더 좋은 말이 되었겠지.”
박성조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고는 한 손을 뻗어 자리를 가리켰다.
“앉지.”
“예.”
이종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파에 앉았다.
“뭐 좀 마시겠나?”
“카페라고는 하지만, 이 시간에 주문이 되겠습니까?”
“되네.”
“그럼 달달한 걸로 한 잔 주십시오. 당이 떨어져서.”
“그렇게 하지.”
박성조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방 쪽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원두를 가는 그라인더 소리를 들으며 이종욱이 가만히 박성조를 바라보았다.
“용건이 뭡니까?”
“뭐가 그렇게 급한가.”
“바쁘신 분 아니셨습니까?”
“언제나 바쁘지. 그러니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잖은가. 그런다고 시간이 나는 것도 아니고 말일세.”
이종욱이 입을 닫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서야 그와 박성조의 앞에 음료가 놓였다. 진한 색의 커피를 바라보는 이종욱의 눈에 살짝 경계의 눈빛이 피어났다.
“자백제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리고 내성도 있을 텐데?”
“약은 언제나 발전하는 법이죠.”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자네에게 약을 쓸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아니면 음료를 바꿔줄까?”
이종욱이 피식 웃고는 음료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저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몸에 자백제를 투입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딱히 이런저런 수를 쓸 것도 없이 그냥 이종욱을 움켜잡고 주사기를 꽂아버리는 걸로도 충분할 테니까.
“용건을 듣고 싶습니다.”
“용건, 용건이라……. 예전부터 자네는 꽤 실리적인 사람이었지.”
박성조가 살짝 고개를 내젓고는 입을 열었다.
“복귀할 생각은 없는가?”
“농담이시겠죠?”
“나도 농담이면 좋겠군. 하지만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아. 이번 일로 원장 하나, 차장 둘, 그리고 기획조정실장까지 싹 갈려 나갔네.”
“…….”
그 정도면 상층부가 전멸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어느 정도 개혁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메스를 들이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뿐인 줄 아는가. 2팀의 절반이 타 부서로 전출됐네.”
2팀.
국정원 국내 파트를 지칭하는 말이다.
총회로 오기 전, 이종욱은 국정원 1팀에서 일했다. 1팀은 해외 분야를 담당하는 곳이다.
이번 김명찬 사태 때, 국정원장과 2팀이 김명찬에 협력해서 일을 벌였으니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안할 수밖에 없겠지만, 설마 그쪽을 다 날려 버릴 줄이야.
‘개혁의 의지인지 분노의 표명인지 모르겠군.’
확실한 것은 윗선, 코드 원이 이번 일을 굉장히 크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덕분에 지금 국정원 꼴이 말이 아니야. 파트 배분을 다시 하고 인력을 보충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
“저는 그리 귀여운 고양이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능력 있는 고양이는 될 수 있겠지.”
박성조가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흑묘, 백묘가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말이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쥐를 잘 잡는 고양이거든. 젊은 나이에 부장까지 오른 자네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이종욱의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이 어렸다.
“확실히 어떤 고양이인가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양이라는 것들은 개와는 달라서 한 번 자신을 버린 주인을 다시 찾지 않는 법이죠.”
“우리가 자네를 버렸던가? 반대겠지.”
“꼭 집 밖으로 걷어차야 버린 게 아니죠. 말장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보게.”
박성조가 미간을 좁혔다.
“국가가 자네를 필요로 하네.”
국가라는 말에 이종욱의 눈가가 꿈틀했다.
한때는 저 말만으로 그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종욱은 안다. 이제는 무슨 수를 써도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제가 하나 깨달은 걸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깨달은 것?”
“국정원은 국가가 아닙니다.”
“…….”
이종욱이 이죽이듯 말했다.
“정권도, 대통령도, 국정원도 국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국가를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뭐가 국가지? 국민? 그런 뻔한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글쎄요. 저도 아직 그 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국정원이 하는 일에 찬동한다고 해서 그게 꼭 국가의 이득과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자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
“모르셨습니까? 사람은 변합니다.”
이종욱이 차가운 눈으로 박성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람을 바꾸는 건 경험이죠. 저는 이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예전에 차장님이 아시는 그 애국심 넘치던 청년으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제 애국심이 어떤 식으로 사용되고, 누구의 배를 불리는지 알아버렸으니까요.”
그 시니컬하기 짝이 없는 말에 박성조가 흠칫했다.
그 짧은 말속에 이종욱이 가진 실망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지.”
“…….”
“중요한 건 그 실수를 반복하느냐, 아니면 그 실수를 바탕으로 나아가는 가 아니겠나.”
“나아간다라…….”
이종욱이 짧게 웃었다.
“어찌 되었든 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박성조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건 어떤가?”
이종욱의 눈이 살짝 이채를 띠었다.
이제 본론이 나올 차례다.
“굳이 국정원에 복귀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하지만 적당히 우리를 도와줄 수는 있잖은가.”
“제가 말입니까?”
“그렇다네.”
“국정원을 나온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도움이 되지. 도움이 되고말고. 자네는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곳에 이미 들어가 있지 않은가.”
이종욱의 눈이 좁아졌다.
“총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찰칵.
박성조가 담배를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
“우리는 총회의 정보를 빼내 그들과 적대하려는 건 아니야.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만큼 힘을 회복하지도 못했고 말일세.”
힘이 있다면 해볼 수도 있다는 뜻이로군.
이종욱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에서 압박이 들어오고 있네. 주한미군을 늘릴 테니, 부지를 선정해 달라더군. 그리고 우연찮게도 그 부지의 조건이 총회에서 가까운 곳이더군.”
“…….”
“게다가 강진호 회주와 총회의 핵심 인물들이 얼마 전 미국을 방문했고 말이야. 내 말이 틀린가?”
“맞습니다.”
이건 딱히 기밀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공교롭지. 강진호 회주가 미국을 방문하자마자 미국에서 이런 저런 요구를 해오고 있네. 환장할 노릇인 건, 우리는 미국과 강진호 회주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전혀 모른다는 거지. 저 미국 놈들도 우리에게 정보를 줄 생각을 하지 않아.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뜻이네.”
이종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야 업무가 되지 않네.”
“자업자득이라 생각지 않습니까?”
“자업자득?”
“예.”
이종욱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진작부터 총회와 적대해서는 안 된다는 보고를 몇 번이나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걸 무시하고 총회와 대적한 건 국정원이 아닙니까.”
“그건 우리가 한 게 아니지.”
“전임자의 탓으로 모두 돌릴 생각 하지 마십시오. 그럴 거면 국정원을 나오셨어야죠. 전임의 잘못마저 모두 짊어지는 게 후임의 역할입니다. 아닙니까?”
박성조가 불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정론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상황을 되돌려 보려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하는 짓이 내부자를 통해서 정보를 빼내는 겁니까?”
“이보게.”
“이 일이 총회 측에 알려졌을 때, 제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네도 알잖은가.”
박성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이 원래 그런 것일세. 그리고 우리의 일이 원래 그렇지. 리스크와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일세.”
“…….”
“그러니 부탁하는 것 아니겠는가. 대가는 내가 심심찮게 준비하겠네. 자네가 놀랄 정도로 말이야.”
이종욱이 커피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큰 유리컵에 든 커피를 원샷 해버린 이종욱이 탁, 소리가 나게 커피 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겠습니다.”
“이봐, 이종욱.”
“다시는 연락하지 마십시오. 한 번 더 연락하시면 저는 이번 일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총회에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네…….”
“저는 이제 총회인입니다. 만약 국정원이 총회의 적이 된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제가 알고 있는 정보로 국정원을 무너뜨릴 겁니다.”
박성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결국 자네도 타락했군.”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종욱이 시니컬한 얼굴로 대답했다.
“한때는 희생이라는 걸 대단한 가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희생해서 국가의 이득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제가 희생한다고 누가 제 희생을 알아주겠습니까?”
“……알아주길 바라는 건 희생이 아니야.”
“네, 그렇죠. 그래서 저는 더는 그쪽과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속물이 되어버렸다 욕해도 좋다.
하지만 이제 이종욱은 더 이상 뒤틀린 이상을 보며 살지 않기로 했다.
그 끝이 어떤 것인가는 김명찬이 똑똑히 보여주었으니까.
“김명찬 총리는 만나보셨습니까?”
“…….”
대답이 없는 박성조를 보며 이종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게 그쪽의 방식이니까.”
총회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총회는 자신의 식구를 버리지 않는다.
‘소속감이라니.’
웃기는 소리다.
소속감을 느끼며 버려지느니, 그를 대우해 주는 곳에서 외롭게 사는 게 낫다.
“다시 뵐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종욱이 미련 없이 밖으로 향하자, 박성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이종욱! 이종욱! 인마!”
하지만 이종욱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쯧.”
박성조가 혀를 차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합니까?”
“내버려 둬. 제가 버텨봐야 얼마나 버티겠어. 슬슬 압박하면 결국에는 협조하게 될 거야.”
“강경해 보이는데요?”
“이런 일 한두 번 해? 강경한 애들 협조하게 만드는 거야 일도 아니지.”
박성조의 뇌리에 이종욱의 주변 관계들이 스쳐 지나갔다. 누구부터 압박을…….
그때였다.
짤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혹여 이종욱이 다시 왔나 싶어 고개를 든 박성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그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굴은 알지만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인 사람이다.
“우리 막둥이를 잘 챙겨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박성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현수.
총회의 실질적인 이인자라고 할 수 있는 이현수가 태연한 얼굴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 어떻게?”
“아아, 걱정 마. 이종욱이 꼰지른 건 아니니까. 설마 내가 저놈을 벌써 믿고 감시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나? 그건 나를 너무 착하게 본 거지.”
이현수가 빙그레 웃는다.
“다만, 내 입장에서는 영 기분이 나쁜 일인데? 우리 신임 차장님께서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받은 모양이시지?”
박성조가 필사적으로 변명을 짜냈다.
“오, 오해가 있는…….”
“주둥아리 처 다물어.”
“…….”
이현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난다.
“모르면 알게 해줘야지. 함부로 수작질을 부리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박성조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총회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게 그의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