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583
#1582.
대면하다 (2)
‘이현수?’
보고에는 없던 인물이다.
MK의 조직도에도, 따로 조사한 곳에서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실장님.”
하지만 고한봉 총리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현수와 손을 맞잡았다.
“초면에 이리 환대를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하하, 어찌 초면이라 하겠습니까. 제가 실장님을 알고 있고, 실장님이 저를 알고 있는데, 얼굴을 맞대는 게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제가 하나 배우는군요. 총리님의 말이 맞습니다.”
이현수가 빙그레 웃고는 정홍근을 향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이현수라고 합니다.”
“아…… 아, 반갑소.”
정홍근이 살짝 어색한 투로 이현수를 향해 인사했다. 그러자 이현수의 살짝 뒤에서 고한봉이 눈을 찌푸렸다.
그 기색을 읽어낸 정홍근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반갑습니다, 정홍근입니다.”
“회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홍근이 이현수의 입에서 나온 회장님이라는 말에 살짝 움찔했다.
“자, 앉으시지요.”
“예. 감사합니다.”
정홍근이 자리에 앉은 이현수를 보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내 표정을 풀기는 했지만, 마음속 의혹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상석?’
자리라는 것은 나름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지금 이현수가 앉은 곳은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자리, 보통 상석이라 불리는 자리였다.
대한민국의 총리와 태광이 회장이 있는 자리에서 신분도 불명확한 자가 상석을 차지한다?
이건 웬만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홍근은 애초에 상석에 앉을 입장이 못 된다. 고한봉과 함께 있는 자리라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상석은 양보해야 한다.
문제는 뒤늦게 온 고한봉이 상석을 내버려 두고 그의 앞에 앉았다는 점이다. 둘만 있을 때는 딱히 이상한 점이 없었는데, 새로 사람이 오자 상황이 묘해졌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저 젊은이가 자연스럽게 상석을 차지하고 앉았음에도 딱히 불편해하거나 어색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생활을 해보지 못한 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 젊은이는 그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자신이 거기에 앉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강진호도 아니고, 그의 수하 주제에 대한민국의 총리와 태광의 회장보다 윗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마음 한편에 자리한 불편함을 꾹 누른 정홍근이 표정을 관리했다.
“바쁘신 와중에 두 분을 모시게 되어…… 이것참, 죄송스러운 생각뿐입니다.”
“아닙니다, 실장님. 실장님이 불러주신다면 참 감사한 일이지요.”
“…….”
정홍근이 고개를 들어 고한봉을 바라보았다.
이건 숫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할 만한 말이 아닌가.
‘저 사람이 왜 저러지?’
자존심도 없이?
‘아니, 아니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고한봉이 어떤 사람인가. 그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서도 목을 뻣뻣이 세우고 할 말, 안 할 말을 다 하다가 모진 고초를 당한 사람이다.
자존심 빼면 시체밖에 남지 않는 사람들이 전직 운동권들이다. 그런 이가 자존심을 버릴 리가 있는가.
그럼 둘 중 하나다.
저 이현수라는 이가 가진 권력이 저 고한봉이 자존심을 버려야 할 만큼 강하거나, 실제로 이현수의 위치가 고한봉보다 높아서 고개를 숙이는 데 거리낌이 없거나.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이게 대체 무슨…….’
정홍근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한봉을 바라봤다.
아울러 이현수는 정홍근의 눈빛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생각해라. 그래, 생각해라.’
웃음은 안으로 삼켰다.
정홍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빤하다. 지금 고한봉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지. 그리고 그 생각은 잘못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고한봉은 절대 이현수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지금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김명찬 사태로 완전히 경색되어 있던 정부와 총회의 관계를 회복할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현수가 먼저 연락을 한 것 자체가 화해의 제스처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고한봉이 여기에서 총회와 정부의 관계를 다시 잇는다면, 그에게는 굉장한 업적이 된다. 대외적으로 공표할 수는 없는 업적이지만 말이다.
이현수가 무엇을 원하는지 고한봉이 모를 리가 없다. 저쯤 된 정치인은 거의 요괴와도 다를 게 없어서 간단한 뉘앙스만으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귀신같이 캐치하는 법이니까.
덕분에 지금 고한봉이 평소보다 더한 저자세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중간 중간 이현수에게 시그널을 보내면서.
“회장님은 잘 지내십니까?”
“그분은 항상 잘 지내십니다. 덕분에 제가 괴롭죠.”
“하하, 그 자리가 다 그런 거지요.”
“총리님도 고충이 많으시겠습니다.”
“어허,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시면 큰일 납니다. 저는 아주 행복합니다, 아주!”
“충청도분이셨나요?”
“크흠.”
뭔가 찔리는 듯 고한봉이 헛기침을 했다.
이현수가 고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바쁘신 분들 붙들고 쓸데없이 농담을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두 분을 여기 모신 이유는 다름 아니라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상의라 하시면?”
“회장님께서 태광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볼 생각을 하신 모양입니다.”
“아, 회장님께서?”
고한봉이 반색했다.
“큰 결심을 해주셨군요. 그것참 좋은 일입니다. 나라를 위해서도 정말 좋은 일이지요.”
“다만, 음…….”
이현수가 살짝 뜸을 들였다.
“일단 어느 정도는 마음이 드신 모양인데, 사실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친분이 친분으로 남는 건 의미가 없지요. 친분이 작용을 해야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정홍근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강진호의 마음이 변했다는 건 그가 바라마지 않는 소식이지만,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상황이 그를 단순히 기쁨에 젖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이현수가 고소를 머금었다.
“태광과 합작하여 몇 가지 사업을 해보려 합니다. 물론 태광에게 큰 도움이 되는 사업이겠죠.”
“오, 사업이라고 하셨습니까? 어떤 사업을…….”
“일본으로 진출을 한 번 해볼까 합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고려를 했던 일인데…… 이제 슬슬 시작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전임께는 말씀을 드렸는데, 인수인계가 되었을지…….”
“아,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럼 말이 쉽겠습니다.”
이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태광과 합작하여 일본에 진출할 생각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여러모로 걸리는 부분이 많아서 총리님께서 조금 도와주셔야 할 것 같은데,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허허, 기업이 해외에 진출한다는데, 정부가 반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발 벗고 나서야지요.”
“단순한 기업 진출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고한봉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회장님의 뜻입니까?”
“예. 숙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럼 저는 어떤 일이든 돕겠습니다.”
고한봉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기쁜 일이지요. 안 그래도 전임 때 벌어진 일 때문에 면목이 없었는데, 이렇게라도 회장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참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이현수가 가볍게 웃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회장님은 개인의 일을 단체의 영역으로 넘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전임은 전임이고, 총리님은 총리님이시죠.”
“그리 생각해 주신다면 더없이 감사한 일이지요.”
정홍근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화가 폭풍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그 빠른 대화 속에 어마어마한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뭐 이런 내용을 저리 환담하듯 해버리지?’
일본이 어쩌고 진출이 어쩌고, 정부의 도움이 어쩌고 하는 내용들이 술자리 안줏거리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그 급전개 속에서 대체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 정홍근이었다.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한봉이 웃으며 정홍근에게 말을 건네왔다.
“예? 아, 정확하게 무슨 내용인지 잘…….”
“MK의 회장님께서 정 회장님과 손을 잡고 일본에 진출해 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아…….”
그걸 못 알아들었겠는가.
대체 무슨 분야로 뭘 어떻게 진출할 것인지에 대한 디테일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 디테일은 다 뭉개 버리고 이런 식으로 협의를 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예?”
“태광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지요. 저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잘만 하면 태광이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 될 수 있는 기회 같은데…….”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적당히 감상을 늘어놓는 척하면서 정홍근에게 정보를 넘겨주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말할 수는 없는 일. 협조를 구해야 하지만, 대외적으로 공표할 수는 없는 일. 다시 말하자면…….’
민정 합작 수준의 불법적인 일?
등골이 서늘해진다.
‘대체 MK는 뭐 하는 곳이지?’
저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지금 정부와 MK 중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는 MK다. 정확하게는 저 어린놈이 고한봉을 잡아 휘두르고 있다.
‘내 생각 이상으로 MK가 대단한 곳이라는 건가?’
정홍근이 대답할 말을 필사적으로 찾는 그 순간이었다.
“다만…….”
이현수가 술잔을 들어 살짝 목을 축였다.
“회장님께서 우려하시는 바도 있습니다.”
“어떤…….”
“합작이라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확고해야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특히나 해외, 그것도 일본에서 벌이는 사업을 어설픈 관계로 시작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 그렇지요.”
“사실 회장님은 태광을 그리 신뢰하지 않으십니다. 아아,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악감정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친분도 없고, 신뢰를 쌓을 만한 일도 없었을 뿐이지요. 그렇기에 회장님은 차라리 재경과 함께 이 일을 처리하고 싶어 하십니다.”
재경이라는 말이 나오자 정홍근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러고 보니…….’
황회장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강진호를 변호했다.
분명 무슨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이야.
“으음, 재경이라, 재경. 하지만 재경은 일본과는 딱히 관계가…….”
“예. 그래서 제가 회장님을 설득 중입니다. 결국 문제는 하나지요. 신뢰를 택할 것인가, 정보를 택할 것인가.”
이현수가 슬쩍 정홍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 해결되면 빤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 한 가지가…….”
“정 회장님께서 우리 회장님께 신뢰를 드릴 수 있다면, 더는 고민할 여지가 없는 일이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장님?”
정홍근이 이를 악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게 대체 뭐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 그가 진짜 선택을 내려야 할 때, 모든 것을 알고 한 적이 있던가.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감이다.
“제가…….”
한 번 심호흡을 한 정홍근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 간절한 정홍근의 눈을 본 이현수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욕심 많은 너구리라면 그렇게 나와야지.’
좋은 날이다.
아주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