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53
#1652.
시작되다 (2)
파죽지세.
그 말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있을까?
차이커창은 산보하듯 걷고 있는 홍왕을 보며 몸을 떨었다.
지금 그가 홍왕에게 보일 수 있는 감정은 오직 하나밖에는 없다.
경의.
아니, 아니다.
그런 미지근한 단어로는 가슴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이 거대한 감격을 표현할 수 없다.
적어도 경배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이분은 정말 신위에 오르셨다.’
지금까지 보여준 홍왕의 무학은 인간의 그것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일권으로 산을 가르고, 일보로 대지를 가른다.
그래,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다.
단 삼 일.
불과 단 삼 일 만에 홍왕은 우한에서부터 정저우까지를 단숨에 주파했다.
대륙을 종으로 가르는 행보.
잃어버린 홍왕계의 영역을 단숨에 수복함과 동시에 이제는 그들이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창왕계의 영역까지 밀고 들어가는 중이었다.
차이커창은 그런 홍왕의 행보를 보며 경외와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는 중이었다.
하늘에 닿은 무위에 대한 경외.
그리고 이런 무인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
그는 홍왕계의 중국 일통을 위해 평생을 바쳐 왔다.
수많은 계략을 짜내고, 수많은 전략을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홍왕계는 다른 삼왕계를 집어삼키지는 못할지언정, 완벽하게 강남을 장악하여 가장 탄탄한 전력을 만들어냈다.
하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홍왕을 보고 있으면 그 모든 일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지금 창왕계에 있었다면 홍왕을 막을 수 있었을까.
무슨 수로?
절대적인 무학을 이룩한 무인 앞에는 전략도, 병력도 무의미하다. 그저 조금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결과밖에는 남지 않는다.
결국은 절대자의 능력에 따라 전쟁의 결과가 달라진다면, 그의 존재 가치는 대체 무엇인가.
무심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던 홍왕이 슬쩍 차이커창을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아닙니다. 홍왕이시여, 그저…… 그저 경탄할 뿐입니다.”
홍왕이 그런 차이커창의 생각을 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차이커창.”
“예, 홍왕이시여.”
“네가 없이 내가 이 경지에 오를 수 있었겠느냐?”
“…….”
차이커창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호, 홍왕이시여, 제가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홍왕께서는 홀로 오롯하십니다. 저는 그저 그런 홍왕을 따를 뿐입니다.”
홍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다.”
“…….”
“너를 이끄는 것이 나라면, 나를 만든 것은 너다.”
“……홍왕이시여.”
“때때로 사람들은 착각하고는 하지. 무인이란 그저 홀로 수련을 거듭하여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말이야. 그렇지 않다. 그럴 수가 없지.”
“…….”
“역사만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세상에는 산골 벽지에 틀어박혀 홀로 수련을 하여 절대자의 위치에 오르는 이들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의 일화를 널리 회자되지.”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리 회자되는 이유는 그게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대문파에서 절정고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홍왕이시여.”
홍왕이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안배해 주었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저 창왕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겠지. 네게 홍왕계를 맡기고 수련에 전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네게는 항상 감사하고 있다.”
차이커창이 몸을 떨었다.
감사.
감사라.
이 절대자의 입에서 나오는 감사는 세상에 널려 있는 흔한 감사와는 그 의미가 같을 수 없다.
“속하는…… 속하는 그저 홍왕께 신명을 다할 뿐입니다.”
“그래, 그걸로 좋겠지.”
홍왕의 얼굴이 살짝 미소를 띠었다.
“그 마음을 잊지 마라, 차이커창. 그럼 내가 너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로 이끌어주겠다.”
“감히 바라옵고 또 바라옵나이다.”
홍왕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창왕이 몸이 달은 모양이구나.”
그 말에 차이커창이 고개를 홱 돌렸다.
‘뭔가 오는가?’
그에게는 아직 느껴지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의 지각과 홍왕의 지각은 바닥에 붙은 쥐와 창공을 나는 독수리 이상의 차이가 날 테니까.
차이커창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접근해 오는 이들의 속도는 더없이 빨랐고,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차이커창도 상대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푸른빛의 장포를 전신에 두르고 복면을 한 수백의 무인.
홍왕이 그 모습을 보며 나직히 입을 열었다.
“청살대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악취미로군. 시대가 어느 시대인대 저런 옷을 입힌단 말인가.”
겉모습만 보면 사극의 한 장면 같다. 영화 촬영장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지경이다.
“창왕은 좀 올드한 편이니까요.”
“아랫사람만 불쌍하군. 저런 옷을 입고는 돌아다니지도 못할 텐데.”
차이커창이 고소를 머금었다.
‘홍왕의 패션도 그리 신식은 아닙니다만.’
개량한 치파오를 입고 다니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마니악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뭐, 저 청살대에 비하면 양반이라는 것도 사실이겠지.
“창왕이 급했던 모양이로군. 암살대가 전면에 나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저들은 창왕이 심혈을 들여 키워낸 이들입니다.”
“부질없다.”
홍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 저들을 인정하기에는 내가 쌓아 올린 것이 너무도 드높구나. 창왕 역시 저들이 나를 막을 거라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어떻게든 시간을 조금 더 벌어볼 생각이겠지.”
차이커창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안타깝구나.”
홍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 역시 문파를 이끄는 이로서 저들의 충심을 비하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 결국 모든 것이 끝난 뒤에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아니더냐.”
“…….”
“그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차이커창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홍왕을 바라보았다.
그 이유는 한 가지.
‘홍왕께서 다음을 논하시는구나.’
지금까지 홍왕은 단 한 번도 일통을 한 이후의 일을 논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을 정리한 뒤에 한국을 정벌하겠다는 말은 해왔지만, 그건 일통의 과정에 있는 일일 뿐, 미래를 논한 것이 아니다.
그런 홍왕이 지금 처음으로 미래를 입에 올린 것이다.
그 사실이 차이커창을 더없이 들뜨게 했다.
“허면 손속에 사정을?”
“아니 될 말.”
홍왕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 역시 무인. 무인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섰다. 손속에 사정을 두는 것은 저들을 모욕하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홍왕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최선을 다해 상대해 주는 것이 저들의 죽음을 보다 가치 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의 손끝에서 황금빛의 서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차이커창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금빛의 광휘를 뿜어내는 홍왕의 모습은 현세에 강림한 천신과도 같았다.
우우우우우우웅!
광휘가 물결치듯 퍼져 나가며 그에게 달려드는 청살대를 뒤덮었다.
“…….”
비명성조차 들리지 않았다.
차이커창이 부릅뜬 두 눈으로 광휘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없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마치 청살대가 몰려오던 광경 자체가 환상인 것처럼 처음과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공간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사라졌다.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말이다.
“편히 갔을 테니 후회는 없을 것이다.”
홍왕이 굳은 얼굴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홍왕이시여, 저는 왜 창왕이 이런 무모한 소모전을 계속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들을 모두 보내 얻은 시간이라고는 겨우 몇 초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 몇 초에 승부가 갈린다는 생각이겠지.”
홍왕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해하려 들지 마라.”
“…….”
“벽을 넘고 또 넘은 무인은 평범한 이들이 보기에는 광인과도 같다. 사고의 방식이 평범한 이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창왕에게 저들의 가치는 불과 몇 초를 버는 것으로 소모할 수 있을 정도겠지.”
“어찌…….”
홍왕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 지금껏 기다려 왔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내가 차라리 상황이 고착되기 전에 승부를 냈다면 오히려 희생이 적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홍왕이시여.”
차이커창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쟁에서 흘릴 피는 줄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피가 전부는 아닙니다. 창왕이나 흑왕이 중원을 장악한다면, 전쟁에서 흘린 피는 그저 조족지혈에 불과해질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들의 통치 앞에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나는 다르다는 말이더냐?”
“홍왕께서는 다르십니다. 홍왕께서는 따르지 않는 이를 죽여 없애시는 분이 아니잖습니까?”
홍왕이 낮게 웃었다.
“의뭉스럽구나, 차이커창이여. 하나 걱정할 것은 없다. 수많은 군왕들이 천하를 얻은 뒤에는 포악한 독재자로 변해갔지만, 나는 그런 인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러실 것입니다. 홍왕께서는 역사에 남을 성군이 되실 것입니다.”
“간지럽군. 적당히 해라.”
“예!”
차이커창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시립하자, 홍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차이커창을 곁에 두어야 한다.’
차이커창의 존재는 그의 의자 등받이에 꽂아놓은 송곳과도 같다. 조금 편하게 등을 기대려 하면 따끔하게 그를 찔러 들어온다.
때로는 귀찮고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하나.
군왕을 자처하는 자는 편함을 원해서는 안 된다. 군왕이 편하려 들면 다른 이들이 고통을 받는 법이니까.
“차이커창.”
“예, 홍왕이시여.”
“너는 변해서는 안 된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 그걸로 좋다.”
홍왕이 걸음을 옮겼다.
‘창왕.’
차이커창은 창왕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홍왕은 이제 슬슬 창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네 배 속으로 들어오라는 말이렷다?’
미끼를 풀어낸다.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창왕은 전투를 거듭할수록 홍왕의 무공이 완성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힘을 동원해 단숨에 홍왕을 처리하는 것이 합리적임에도, 홍왕이 군침을 흘릴 만한 무인들을 조금씩 유혹하듯 배치하고 있다.
대놓고 유혹하고 있지만, 홍왕은 그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왜냐면 홍왕은 스스로의 강함이 홍왕계 전체의 강함으로 이어진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네 배 속에 뭐가 있을지 궁금하군.’
독일까?
아니면 뱀일까?
무엇이든 좋다.
“이겨낸다면 나는 중원을 손에 넣는다.”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가자꾸나.”
“예!”
홍왕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차이커창이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왔구나.’
차이커창의 미소가 짙어졌다.
전열을 완전히 재정비하고 편제를 다시 짠 홍왕계의 무인들이 저 지평선 끝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홍왕이 활약해 준 끝에 이제야 홍왕계가 그 완전한 전력을 다시 갖춘 것이다.
차이커창이 싸늘한 눈으로 북쪽을 바라보았다.
‘너는 기회를 놓쳤다, 창왕.’
그 대가는 그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