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665
#1664.
전진하다 (4)
강진호가 드러난 평지를 보며 낮게 숨을 토해냈다.
머릿속이 선명하다.
마기를 일으킬 때마다 느껴지는 충동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이게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는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마기의 충동에 이성을 잃어버리는 문제는 분명 존재했지만, 전투에 있어서 강진호가 그 광기로부터 얻던 이득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이제 저기로 가면 되나?”
“…….”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이현수가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회주님.”
“응?”
“그,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좀 애매하긴 한데…….”
“뭐?”
이현수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 목소리를 바꾸시든지, 아니면 그 마기 좀 푸시든지 둘 중 하나는 해주십시오. 너무 어색해서 기분이 이상합니다.”
“…….”
강진호가 몸을 두르고 있던 마기를 몸 안으로 회수했다. 그러자 이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이래도 되는 걸까?’
이사들을 모조리 끌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 당연히 시작부터 끝까지 심장이 조여오는 전투가 이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뭔가 여러모로 태클이 들어오네.”
“응?”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이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보다…….”
그의 눈에 한동안 이어진 녹지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도시가 들어왔다.
“저기에 홍왕이 있다는거군요.”
위긴스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창왕과 창왕의 정예도 저곳에 있겠지.”
“그쯤 되면 마굴이라고 봐야 하는데…….”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는 저 도시 안에 세상을 뒤흔들 힘을 가진 이들이 둘이나 있다.
이현수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회주님, 한 가지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말해.”
“창왕은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이 없습니다.”
강진호가 두 눈에 이채를 띠고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현수가 설명을 이어갔다.
“창왕이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홍왕을 잡아 죽일 생각이었다면, 저 작은 도시 하나를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훗날 문제가 생기더라도 쥐 잡듯이 뒤져 어떻게든 홍왕을 찾아냈겠죠.”
“음…….”
맞는 말이다.
입장을 바꿔 강진호가 한국의 소도시에 잠입한 홍왕을 찾아내는 상황이었다면 정부와 협의해 시민들을 대피시키는 한이 있었더라도 도시 자체를 뒤엎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강진호 이상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창왕이 저 도시를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이유는?”
“제 생각에는 생각 이상으로 부담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음?”
“아무리 도시는 피했다고 하지만, 창왕과 홍왕은 지금까지 중국 전역에서 전쟁을 벌여왔습니다. 그걸 무마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정치력이 들어갑니다. 매수한 정부 인사들을 총동원하고 군에도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위긴스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토할 것 같군.”
“예. 부담이 장난이 아니겠죠. 그런데 그 일련의 와중에서 도시까지 건드린다면, 정말 정부 측과 완전히 돌아서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흑왕이 없다면 감히 정부가 창왕을 어찌하지 못하겠지만, 창왕에 불만을 품은 정부가 흑왕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 버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복잡하군.”
“정치란 그런 것이죠.”
강진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중국 전역에서 전쟁을 벌여온 이들이 그 전쟁을 끝낼 기회를 얻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주춤거린다?
강진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무리를 짓지 못하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이대로 홍왕이 탈출을 하게 된다면 기껏 얻어낸 승리가 없던 것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그럴 놈은 아니겠지.”
“예?”
강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짐승을 사냥하는 방법 중에…….”
강진호가 입을 열자 이사들이 그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상처 입은 짐승을 우리에 가둬두는 방법이 있지.”
“……우리에 가둔다고요? 왜?”
바토르가 피식 웃었다.
“상처 입은 늑대를 묶어두면 무리가 구하러 오거든.”
“…….”
이현수의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렸다.
“함정이라는 겁니까?”
“모르지.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이야.”
“하지만 저들은 우리가 오는 걸 모르고 있었을 텐데요. 그전부터 굳이 홍왕을…….”
“우리가 아닐 수도 있지.”
이번에는 위긴스가 첨언했다.
“누구든 좋은 거야. 홍왕계의 정예들이 홍왕을 구출하기 위해서 다시 달려들 수도 있고, 누구든 간에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전력이 몰려들겠지. 그들만 잡아 죽여도 홍왕계를 흡수하는 게 훨씬 편해질 테니까. 머리를 잃은 몸뚱아리가 뭘 하겠는가.”
이현수가 선연한 눈으로 장자커우를 바라보았다.
이 예상이 맞다면, 저 도시 자체가 홍왕을 구하려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거대한 함정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홍왕을 미끼로 활용할 담량이 있겠습니까? 그러다 홍왕이 달아나기라도 하면…….”
“잊지 마.”
강진호가 낮게 말했다.
“창왕이라는 놈에게는 상식이 통하지 않아.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조심해야 돼.”
이현수가 입을 닫았다.
이건 정말 완벽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사실 따져 보면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그 창왕이라는 놈이 말 그대로 미쳐 날뛴 덕분 아닌가.
‘함정이라고?’
이현수의 등골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만약 저기가 창왕이 홍왕이라는 거대한 미끼로 만들어낸 함정이라면, 그 함정은 지독할 것이 분명하다. 미끼가 클수록 더 거대한 것을 낚으려 하는 법이니까.
“그럼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는.”
강진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찰칵.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 강진호가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함정이라 해서 들어가지 않을 거라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지. 차이커창과는 연락이 되나?”
“여전히 안 됩니다.”
“그렇겠지.”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럼 어디 가보자고. 그 창왕인가 하는 망할 놈이 우릴 위해 뭘 준비해 뒀을지.”
* * *
차이커창이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빌어먹을.’
길게 베인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는다. 아니, 아문다고 해도 문제다. 아무리 그가 무인이라고 해도 감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청결과는 거리가 먼 이 환경은 그의 체력을 조금씩 앗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관심사는 몸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시선을 돌려 그의 앞쪽에 앉아 있는 홍왕을 바라보았다.
“홍왕이시여…….”
차이커창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겉으로 보기에 홍왕은 큰 상처가 없었다. 아니, 그만한 상처만 해도 평범한 사람은 열 번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배에 크게 뚫린 구멍은 물론이고, 육체를 종횡한 긴 자상들에서 흘러나온 피만으로도 쇼크사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상처를 입은 이가 홍왕임을 감안하면, 이 정도 상처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홍왕이 입은 깊은 내상이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기운이 뒤흔들린다는 것은 육체가 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일이다. 스스로가 쌓은 내력이 일순 자신의 몸을 공격해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이만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저 홍왕이 한낱 피육의 상처조차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차이커창이 몸을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홍왕이 가만히 눈을 떴다.
항상 정광이 흘러넘치던 그의 눈이 조금 흐려져 있는 것 같았다.
“차이커창.”
“예, 홍왕이시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 혼자라도 몸을 빼내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차이커창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육체는 지금도 쇠락하고 있다. 창왕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도무지 기운을 모을 수가 없다. 몸 안에 독이 스며든 것처럼 조금씩 약해져만 가고 있다.”
“…….”
“이대로라면 이곳을 빠져나간다고 해도 과거의 나를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그렇다면 너라도 빠져나가야 한다. 너와 내가 동시에 죽는다면, 홍왕계는 지리멸렬하고 말 것이다.”
“그건 틀린 말씀이십니다.”
“……내가 틀렸다?”
“예.”
차이커창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오로지 홍왕이 계시기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홍왕이 없으면 주둥아리만 남은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홍왕이 없이는 저도 없습니다.”
홍왕이 입을 닫았다.
“설사 제가 이곳에서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그들을 규합해 창왕과 대항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현실을 똑바로 봐주십시오.”
홍왕이 눈을 감았다.
그도 차이커창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다 해서 같이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홍왕의 시선이 슬쩍 위로 향했다.
틀어막힌 구덩이가 보인다.
애초에 건물 안에 숨어 창왕의 이목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그는 바닥을 파내 깊고 깊은 아래까지 파고들었다. 파낸 바닥을 다시 메워 완전히 외부와 격리된 곳에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힘이 남아 있었다면 이대로 굴을 파고 나가 장자커우를 빠져나가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기력을 보존하지 못한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저 이곳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다.
차이커창이 슬쩍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배터리가 떨어진 휴대폰은 이곳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배터리가 있어도 지하로 100미터는 넘게 파고든 이곳에서 전화가 될 리는 없겠지만.
“세상을 바로잡겠다던 나의 꿈이 이곳에서 끝날 줄이야.”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차이커창이 이를 갈았다.
“아직 기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총회가 올 겁니다. 마왕의 힘을 빌리면 다시 세상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구하러 오겠느냐?”
“반드시 옵니다.”
차이커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
홍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대로 죽는 것도, 마왕에게 구함을 받는 것도 그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어떤 선택지도 없었다.
“스스로가 이리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로군. 구원을 구하는 주제에 맞으러 나갈 수도 없는 처지라니. 이대로라면 그가 온다 해도 우리를 발견할 수 없지 않겠느냐.”
“아뇨. 그들이 우릴 발견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을 발견할 겁니다.”
“그건 무슨 소리냐? 여긴…….”
그 순간이었다.
우르르르르릉!
그들이 파고든 동굴이 갑자기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
순간, 당혹감을 보인 홍왕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갔다.
그와 동시에 차이커창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온 모양입니다.”
“…….”
홍왕이 차이커창과 뒤흔들리는 위쪽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정말 여기까지 왔다고? 다름 아닌 나를 구하러?”
“…….”
“구함을 받는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웃기는 일이지만…….”
홍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마왕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내가 본 놈 중에 제일 미친놈이로군.”
“그 말에는 공감합니다.”
말과는 달리 두 사람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가시죠.”
“그러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