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986
#1985.
정리하다 (5)
“그러니까 내 말은…….”
“아, 아니, 그런데…….”
“응?”
“유민이, 너는 요즘 하던 거 잘돼가?”
“나?”
박유민이 으음, 침음성을 흘리고는 머리를 긁었다.
‘넘겼다!’
발전했다, 강진호.
훌륭하다, 강진호.
이제는 공격받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화제를 넘길 줄도 알게 되지 않았는가.
“나는, 음…….”
박유민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뭐 열심히 하고 있어. 이제 슬슬 코치 준비도 하고 있고.”
“코치?”
“응.”
“……네 나이가 몇인데 코치야?”
“이쪽은 좀 빨라. 운동선수들은 그래도 서른 중반까지는 현역으로 뛰지만, 우리는 이십 대 중반만 되도 슬슬 은퇴 준비를 해야 하거든.”
주영기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뭐가 그렇게 빨라?”
“노력으로 어떻게 안 되는 부분이라.”
“야, 그래도 아직 몇 년은 더 해먹을 수 있잖아. 너 세계 챔피언 아냐?”
“……그거, 진짜 고색창연한 표현이네.”
박유민이 하하, 웃어버렸다.
“당장 은퇴하겠다는 건 아냐. 아마 몇 년은 선수로 더 뛰겠지. 코치 준비라고 해봐야 코치님들이 어떻게 하시는지 눈여겨보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는 정돈데 뭐.”
강진호가 새삼 감탄한 눈으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말은 쉽지만, 한 가지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뒷일을 미리 고민하고 대비한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강진호 역시 항상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당장 눈앞에 다가온 일을 해결하기도 벅차하는 중 아니던가.
“안 힘들어?”
“응? 뭐가?”
강진호가 진지한 눈으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쪽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같은 업계라고 해도 선수와 코치는 하는 일이 완전히 다를 텐데.”
“으음, 그렇긴 하지.”
“아니. 질문이 잘못됐네.”
강진호가 묻는다.
“안 무서워?”
“……오늘 진호가 이상한 질문을 많이 하네. 안 무섭냐니?”
“네가 선수로서 쌓은 게 엄청 많잖아.”
“그지. 박유민이가 밖에서 좀 맥아리가 없어서 그렇지, 게임 안에서는 장사지.”
“……그거 꼭 키보드 워리어라는 욕 같다?”
“틀린 말도 아니지. 마우스랑 키보드만 잡으면 성질 더러워지는 거 보면.”
“…….”
이놈들은 같은 말의 의미를 다르게 활용한다.
“여하튼 선수로서는 대단하잖아.”
“민망하게 자꾸 왜 그래?”
“그런데 좋은 선수가 꼭 좋은 코치가 되는 게 아닐 텐데, 새로 시작하는 게 겁나지는 않아?”
박유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겁이 난다고?”
“어.”
“…….”
박유민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웬만해서는 얼굴에 부정적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박유민이다 보니, 그 찌푸린 얼굴이 생경하다.
“아니라고 하더니, 진호가 요즘 고민이 많나 보네.”
“응?”
“이상한 말도 하고 말이야.”
박유민이 강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정직한 시선에 강진호가 움찔하고 말았다.
“예전의 진호 같으면 그런 말 절대 안 했을 텐데.”
“…….”
“흐음.”
박유민이 강진호의 속내를 파악하겠다는 듯 강진호의 이곳저곳을 살핀다.
“어떨 것 같아?”
“글쎄.”
박유민이 싱긋 웃었다.
“겁나지. 왜 안 나.”
강진호가 웃고 있는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겁이 난다고 안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렇지.”
“나만 그런 게 아니잖아.”
박유민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평범하게 살던 남자가 군대를 갈 때면 겁이 나는 거고, 처음 취직을 해서 직장에 나갈 때도 겁이 나겠지. 몇 십 년을 직장 생활 하다가 직장을 나와 다시 뭔가를 시작할 때도 겁이 나지 않을까?”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감히 삶을 논할 나이는 아니지만, 산다는 건 그런 것 같더라고. 항상 지금처럼이고 싶지만, 결국 언젠가는 지금이 아닌 다른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
“이겨내야 한다?”
“음…… 굳이 이길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
“응?”
어리둥절해하는 강진호를 보며 박유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긴다’기보다는 ‘적응한다’가 맞겠지. 새로운 삶에, 새로운 체계에, 새로운 무언가에.”
“…….”
적응이라…….
왠지 그 말이 뇌리에 박히는 느낌이다.
주영기가 피식 웃었다.
“얘도 가끔 맞는 말을 한다니까. 나도 그렇지.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피자집 하고 살 줄 상상이나 했겠냐? 군대 있을 때 나한테 ‘너 나중에 피자집하고 먹고살 거다’라고 하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걷어차 버렸겠지.”
“……그도 그러네.”
“그런데 다 적응해서 잘 살잖아.”
“너는 좀 과하게 적응했지.”
강진호도 달라지고, 박유민도 달라졌다.
하지만 가장 달라진 사람은 주영기다.
군대에서만 해도 반건달처럼 껄렁대던 주영기였지만, 요즘은 손님만 보면 구십 도로 허리를 접고 시작한다.
강진호도, 박유민도 설마 주영기가 저렇게 싹싹하게 손님을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진호야.”
“응?”
박유민이 강진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주영기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나는 이 새끼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기겁하겠다니까.”
“……너무 안 어울리기는 하네.”
“크흠, 일단 들어봐.”
헛기침을 한 박유민이 진지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항상 무서웠어.”
“…….”
“알다시피 나는 다리를 절잖아.”
주영기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뭐 별거라고. 대가리에 총 맞은 놈들도 멀쩡한 얼굴로 걸어 다니는데.”
“……그건 적어도 겉으로는 안 보이잖아.”
박유민이 고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항상 무서웠어. 대학 갈 때도. 진호가 있기는 했지만, 내가 다리를 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까.”
“…….”
“프로게이머를 처음 할 때도 그랬어.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장애인이라 차별을 받지는 않을까?”
“야, 이 새끼야. 손으로 하는 게임인데, 다리 저는 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없지. 아무 상관 없지.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우습지만, 그때는 진지하게 무서웠어.”
“…….”
“그리고 다른 게임으로 다시 프로게이머를 할 때도 너무 무서웠지. 이거, 괜히 하는 것 아닐까? 예전에 내가 했던 만큼 보여주지 못하면 예전 팬들이 실망하는 건 아닐까? 그냥 조용히 잊혀지는 게 나을까?”
박유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그냥 하면 되는 거였지. 그런데 그때는 정말 무서웠어. 떨렸고.”
주영기와 강진호가 말없이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그래. 아직은 아니지만, 곧 다시 또 그런 생각을 하게 되겠지. 그냥 선수로 은퇴하는 게 낫지 않을까? 코치를 했다가 제대로 못하면 괜히 선수 생활 때 쌓은 것만 날려 먹는 거 아닐까?”
박유민이 옅게 웃었다.
“그게 아니면 내 성격에 애들을 잘 이끌 수 있을까? 뭐, 그런 걱정들. 그래, 두려울 거야. 내 성격은 내가 잘 알거든. 그런데…….”
박유민의 시선이 강진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 어쩌겠어. 할 수밖에 없잖아?”
“…….”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한 채 손 놓고 벌어놓은 돈이나 까먹으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
“그게 좋은 거 아니냐?”
“……그렇게까지 풍족하게 벌지는 못했어.”
“개소리하네! 너 이번에 연봉 계약한 거 야구 선수보다 많다고 기사 쫙 깔렸더만! 여기 술값 니가 내라! 꼭 니가 내라, 이 새끼야!”
“……너도 가게 이번에 분점 또 낸다며?”
“마! 분점 내면 돈 버냐? 분점을 냈으니까 투자한다고 번 돈 다 빨리는 거 아냐! 나는 가난해 죽겠다.”
“……영기야,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돌 맞는다. 입조심해야지.”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인마!”
박유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여하튼 내 생각은 그래. 결국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도 막상 닥칠 때는 무섭고 두렵지. 그래도 해야지. 산다는 건 그런 거잖아?”
“…….”
강진호가 조금 멍한 얼굴로 박유민을 바라보았다.
“그런 거라…….”
“헤헤, 내가 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어색하긴 하지만.”
“아니야.”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정말 아니야. 말해줘서 고마워.”
“……갑자기 왜 그래, 친구끼리 어색하게.”
“정말로.”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친구라는 건 함께 있어서 즐거운 사람이기도 하지만, 힘이 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강진호는 박유민이 자신의 친구라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래, 인마. 다 적응하고 사는 거지. 나도 씨…… 적응하고 살잖아.”
“뭔 적응? 가게?”
“아니!”
주영기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마누라가 저렇게 독할 줄 몰랐지. 옛날에는 천사 같았는데.”
“…….”
“…….”
“몇 시냐? 너무 늦게 마시면 맞아 죽는데…….”
강진호와 박유민이 동시에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적응해야지.”
“응, 별수 없지.”
투닥대기 시작한 주영기와 박유민을 보면서 강진호가 말없이 맥주잔을 들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럴 수 있을까?
지금 이 혼란도 훗날 돌이켜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생각될까?
그랬으면 좋을 것 같다.
그건 극복했다는 의미니까.
언젠가는,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과 무인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어울리며 살아가는 세상이 올 것이다. 아니, 오게 만들어야 한다.
“진호야, 그러니까…….”
“응?”
“힘내.”
뜬금없는 말이었다.
박유민이 강진호를 보며 담담히 웃었다.
“넌 잘해낼 거야. 나한테 이런 걸 알려준 건 다름 아닌 너니까.”
“……강진호가 좀 사나이긴 하지.”
강진호가 웃고 말았다.
이런 시선이 부담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그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말 그대로의 믿음. 친구에게 보내는 더없는 신뢰의 말들이다.
“마시자.”
“그래.”
“크, 오늘 바가지 좀 긁히겠네.”
“그럼 들어가든가.”
“이 새끼야, 사나이는 바가지를 두려워하지 않아! 긁으면 긁으라지.”
“너, 전화 왔다.”
“뭐? 진짜?”
기겁을 하여 테이블을 내려다본 주영기가 두 눈으로 불을 뿜었다.
“안 왔잖아, 이 새끼야!”
“……사나이라며?”
“사나이도 마누라는 무서운 거야. 마, 그 낚시 하던 사람도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고 평생을 살았다잖아.”
“……강태공. 영기야, 강태공.”
“그래, 그 양반! 낚시 잘하던 사람!”
“……알았으니까 마셔.”
잔과 잔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맥주잔 위에 가득 찬 거품을 보며 강진호가 옅게 웃었다.
깊은 생각?
미래에 대한 고민?
모두 떨쳐 버릴 수는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조금 접어두고 싶다. 마주하는 얼굴들을 온전히 느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즐겁네.’
시시껄렁한 농담만 주고받고 있어도 그저 기쁘고 평온하다.
그래서 더욱 그렇다.
‘멈췄으면 좋겠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하루 또 하루.
시간은 무정하게만 흘러간다.
흑왕이 선언한 시간으로부터 이제 남은 날은 그리 길지 않다.
더없이 빠른, 그렇기에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 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