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11
#2110.
정리하다 (5)
말을 꺼낼 듯 입술을 달싹이던 강진호가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냈다. 그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자 이현수가 재빨리 불을 붙여주었다.
“고마워.”
고개를 끄덕인 강진호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고는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모두를 그 두 눈에 담았다.
“솔직하게…… 그래,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조금 긴장을 푼 듯 느슨해진 얼굴로 강진호가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회주님, 그건…….”
“잠시만.”
이현수가 끼어들려고 하자 강진호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우선 자신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 달라는 듯이.
“이건 겸손 같은 게 아니야.”
“…….”
“사람에게는 잘하는 일이 있고, 잘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 나는 싸우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야. 고민할 것 없이 명확한 적이 눈앞에 있다면 나는 누구보다 잘해낼 자신이 있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저 하는 말이 아니다. 강진호는 자신의 삶으로 지금 하고 있는 말을 증명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수많은 적이 있었다.
총회 역시 한때는 그의 적이었고, 영남회도 무시 못할 적이었다. 일본과 유럽, 중국, 그리고 마침내는 평생의 숙적마저 이겨냈다.
그러니 이건 결코 오만이나 자만이 아니었다.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 있어서 나는 반푼이에 불과해.”
강진호가 담담한 소회를 늘어놓듯 말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건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아니,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감을 못 잡고 있어.”
강진호가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이건 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것과는 다르니까. 내가 더 강해지고, 내가 믿는 사람들이 더 강해져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싸워 이겨 억누른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니까.”
차라리 저들이 무인들을 완벽하게 탄압하겠다고 총칼을 들이밀었다면 문제는 더 단순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는 건 싸움밖에는 없으니까. 그 전쟁의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한들, 강진호는 고민 없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먼저 정리를 좀 하지.”
“예, 회주님.”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저들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왔어. 이유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겠지.”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한봉이 강진호와 접촉했다는 것은 이미 이현수도 알고 있다. 고한봉은 자신에게도 접촉해 왔으니까. 그가 강진호에게 한 말 역시 자신에게 한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한봉 정도 되는 이가 강진호와 이현수에게 말을 달리 해 굳이 의심을 사는 하책을 사용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저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건 안정인 것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현수가 살짝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물론…… 시간이 조금 흐르면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요.”
“그렇겠지.”
“예.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당장 저들이 원하는 것은 이 혼란스러운 사태를 수습하는 것입니다.”
이현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저는 저들의 목적이 무인들과 평범한 이들 사이의 간극을 없애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안타깝지만, 세상은 그런 이상론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현수는 내심 흑왕의 논리에 동조하는 측면도 있었다.
화합을 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 진정한 의미의 화합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되던가.
“결국 저들이 원하는 것은 집권입니다. 이번 사태를 통해 혼란이 가중되면 그들의 집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겠지요.”
“으음.”
방진훈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그럴 거면 차라리 무인들을 싹 치워 버리는 게 낫지 않나? 그게 훨씬 더 안정적일 것 같은데, 그냥 싸그리 죽여서…….”
모두가 멍한 얼굴로 돌아보자, 방진훈이 화들짝 놀라 손을 들었다.
“아니, 아니! 그게 옳다는 게 아니라! 저 새끼들 입장에서 보면 그게 나을 수도 있다는 거지!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나 스파이 아니라고요!”
“쯧.”
장민이 답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이현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단기간에 끝날 일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당장의 적…… 예, 편의상 적이라고 하죠. 당장의 적 앞에서는 분노하는 법이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희생자가 늘어나면, 전쟁을 시작한 이에게 그 분노를 돌리는 법이니까요.”
“미국처럼.”
“예. 뭐, 거기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숨어 있지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도 그리 단순하지는 않으니, 그리 다를 건 없을 겁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그놈이 해낸 거로군.”
이현수는 굳이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인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그들이 마음 먹고 도시에 잠입하여 진짜 일을 벌이면 어떤 사태까지 벌어지는지를 전 세계에 똑똑히 보여준 이는 다름 아닌 흑왕이다.
지금 무인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이들이 무인들에게 애정이 있어서 그러겠는가.
그들은 전쟁을 선포했을 시에 벌어질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저 멀리 아랍에서나 벌어지던 전쟁의 참상을 자신들의 수도에서 보게 될 테니까. 하루아침에 수십 개의 건물이 무너지고, 수천 명이 떼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어떤 이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주전론을 외치는 이는 잃을 것이 없는 이거나, 자신이 말하는 것이 결코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진 이뿐이다.
“끄응, 골치 아프네.”
방진훈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이건 정치의 영역이다. 친구도, 적도 아닌 이와 친구인 척을 해야 하는.
그동안 간명한 세상에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럼 좋아. 이현수.”
“예, 회주님.”
강진호가 이현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을 때의 리스크는 뭐가 있지?”
“어떤 방향의 리스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그건 회주님이 뭘 원하시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회주님께서 만약 평화를 원하신다면…….”
이현수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책임은 우리 쪽으로 돌아올 겁니다.”
“좀 더 상세하게.”
이현수가 깊이 숨을 들이쉰다.
“저들이 전향적으로 나와 평화를 외친다면, 그 평화를 깨는 자가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회주님은 무인들을 대표하는 입장에 있지, 무인들을 통제하는 입장에 있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계속해 봐.”
“지금은 회주님께서 입장을 확고히 공표하지 않으셨기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입장이 정해지면 무인은 둘로 나뉘게 되겠죠. 동조하는 자와 반발하는 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반발하는 자들입니다.”
“아니, 잠깐만.”
바토르가 영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반발하는 자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더 문제입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자신이 다수라 여기는 이들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소수라 여기는 이들은 극단적이 되기 마련이죠. 평범한 방법으로는 상황을 뒤바꿀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일리가 있다는 듯 바토르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세상에는 미친놈들이 드물지 않게 존재합니다. 그리고 제 입으로 말하기는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무인계는 미친놈 천지에다 미친 정도도 평범한 일반인과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뭐, 맞는 말이지.”
다들 인정한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이들이 정말 전쟁을 원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일을 벌이겠지. 테러라든가.”
“예. 대화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무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높이려 할 겁니다. 아마 자신들은 그걸 성전이라 여기겠죠. 지금 현실에서 일부 극단론자들이 저질러 대는 일이 좀 더 큰 스케일로 벌어지게 될 겁니다.”
이건 꽤 심각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회주님, 이건 조금 아이러니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현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회주님이 정말 평화를 원하신다면…… 회주님 역시 극단적이어야 합니다. 저들의 입장을 존중해 주고, 그들의 자유를 보장한다면, 머지않아 반드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강진호가 눈을 감았다.
대충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우스운 이야기가 아닌가. 저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오히려 그들을 통제해야 한다니.
‘청마가 들었으면 배를 잡고 웃었겠군.’
그는 한정된 공간이나마 무인들에게 완벽한 자유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들에게 드넓은 세상을 주는 대신 그들의 자유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어느게 더 옳은 방법일까?
강진호가 천천히 눈을 뜬다.
고민의 여지는 없다. 고민할 것이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법은?”
“네트워크입니다.”
“네트워크?”
“예. 전 세계의 무인계를 하나의 집단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각국에 그들을 통제할 단체를 선정하고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통제를 벗어나는 이들에 대한 즉각적인 응징을 통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는 그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강진호가 가볍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본 이현수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입니다.”
강진호가 모두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같은 생각인가?”
방진훈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뭘 압니까? 저 똑똑한 새끼가 생각한 게 맞겠죠.”
“…….”
“그냥 저는 그런 생각입니다. 이게 뭐 어떤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처음에 회주님이 하던 거랑 그리 다른 방향 같지는 않습니다.”
“응?”
강진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방진훈이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MK요.”
“아…….”
그제야 방진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강진호가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거 처음에 회주님이 만든다고 할 때, 저는 그냥 돈 벌려고 하는 건 줄 알았죠. 아니면 은퇴한 애들 밥벌이나 시켜주든가.”
“……그랬지.”
“그런데 MK가 생기고 나니까 결국에는 우리 애들도 거기에 가서 일을 하게 되잖습니까. 그리고 예전에는 직업도 못 밝혀서 조폭이나 사채업자 취급받던 놈들이 번듯한 대기업 명함이라도 하나 파서 다닐 수 있게 됐고.”
이현수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랑 뭐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더 많은 자유와 세상에 나갈 기회를 준다. 그런데 대신에 힘 써서 문제 일으키는 새끼는 뒈질 각오를 해라.”
“…….”
강진호가 멍한 얼굴로 방진훈을 바라본다.
“좀 일이 커져서 거창하게 느껴지는 거지, 본질적으로는 별로 다를 것 없는 이야기죠. 그래서 저는 그냥…… 예, 뭐, 지지합니다. 나도 그 새끼들이 그 명함 같은 종이쪼가리 한 장으로 그리 좋아할 줄은 몰랐거든요.”
강진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귓가에 방진훈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결국 숨어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저는 회주님이 옳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