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52
#951.
협의하다 (1)
“그래도 어떻게, 오늘은 볼 수 있는 모양이로군.”
마스터의 말에 위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성격이 조금 변하신 것 같은데.’
그가 아는 마스터는 은은한 불만과 비꼼을 말에 숨기는 사람이 아니다. 제대로 불만을 표출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이가 마스터였다.
마스터가 변한 걸까?
아니겠지.
무슨 경험을 한다고 해도 사람이 단시간에 바뀌지는 않는다. 더구나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성격이 바뀔 확률은 거의 없다.
마스터가 지금 그를 조금 더 편히 대하는 건, 성격이 아니라 관계가 바뀌어서다.
나이트와 마스터는 서로 존중해야 하고, 서로 경계해야 하는 법이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제 마스터는 더 이상 나를 나이트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하나?
원탁과의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위긴스에게는 항상 부담이었다.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관계.
정상적으로는 그들과의 관계를 정리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었지만, 절차를 밟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위긴스를 괴롭혔다.
하지만 지금 마스터는 그를 나이트라는 직위에서 배제했다.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원탁과의 관계를 끊어낸 것이다.
‘그저 시원할 줄 알았는데.’
부정할 수 없는 아쉬움과 섭섭함이 밀려온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원탁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었으니까. 수십 년 동안 인생을 바쳐온 원탁과 완전히 결별하는 일이다. 담담할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지금 오고 계십니다.”
“흐음.”
마스터가 볼을 긁었다.
“첫 단추를 잘못 뀄군. 자꾸 내가 기다리는 포지션이 된다는 말이지.”
“그런 걸로 기 싸움을 하실 분은 아닙니다. 약속이 이곳에서 잡혔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마스터가 홍차를 홀짝이고는 위긴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위긴스.”
“예, 마스터.”
“이제 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말씀하십시오.”
“한국에서의 생활은 괜찮은가?”
위긴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 질문은 지금까지 그가 마스터에게 들었던 질문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지금까지 마스터의 모든 질문은 결국 총회가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총회나 강진호가 아니라 위긴스에게 그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딱히……. 음.”
위긴스가 머리를 긁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리 편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문화가 다르다 보니 영 불편한 면도 좀 있습니다.”
“그렇겠지.”
“게다가 저도 나이가 있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 영 쉽지가 않습니다.”
“내 앞에서 노인인 척하긴가?”
“저도 이제 손자가 있을 나이입니다.”
“한창이지.”
위긴스가 쓴 웃음을 머금었다.
확실히 마스터의 입장에서 본다면 위긴스는 아직 젊다. 위긴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습니다. 엘레나도 잘 적응하는 중이고.”
“그러고 보니 그녀도 따라왔었지. 어떤가? 엘레나와 자네가 원한다면 엘레나는 원탁에 복귀시켜 주도록 하겠네.”
“말씀은 감사합니다. 그 말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녀가 그걸 원할 것 같지는 않군요.”
“……생각보다 총회가 괜찮은 곳인 모양이군.”
“스케일적인 측면이라던가, 맡은 일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총회는 원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곳입니다. 하지만 총회에는 원탁에 없는 게 있죠.”
“그 이야기는 이제 됐네. 충분히 들었지.”
마스터가 턱수염을 쓸어 내렸다. 며칠 사이에 까슬하게 자라난 턱수염이 그의 손끝을 간질였다.
“자네가 괜찮다면 그걸로 된 거지.”
“송구합니다, 마스터.”
“아니, 아니.”
마스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보게, 위긴스.”
“예, 마스터.”
“솔직히 나는 여전히 원탁을 떠나 총회를 택한 자네를 이해할 수가 없네. 자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 나름의 당위에 대해 듣기도 했지만……. 그래,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네.”
“마스터…….”
“아니, 비난하려는 게 아니네. 타인의 선택이 반드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내가 하지 않는 선택을 타인이 했다고 그게 틀린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아네.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니니까.”
마스터가 조금은 인자한 시선으로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존중. 그래, 존중이란 이런 거겠지. 나는 자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지만 존중하네. 내가 알지 못하는, 어쩌면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거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어쩌면 나 역시 조금은 고집을 부리는 걸지도 모르지. 성장한 아이는 품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법인데, 나는 자네가 가업을 이어주기를 바랐거든.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그것도 내려놓아야 하는데……. 보통의 부모는 그걸 하지 못하지. 그리고 나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야.”
위긴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이.
그리고 가업.
이 말이 마스터가 위긴스를 어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 무심하듯 던진 말이 위긴스를 아프게 한다.
마스터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를 아꼈는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런 표정 할 것 없네.”
“…….”
“독립이라는 것은 하는 쪽 역시 힘겨운 일이니까.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이뤄져야 할 일이지. 옳다고 믿는 게 있다면 밀고 나가게. 뒤를 돌아볼수록 갈 수 있는 걸음 수는 줄어드는 법이니까.”
“예, 마스터.”
“그래, 그걸로 된 거야.”
위긴스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와 마스터는 맞지 않다. 그는 마스터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마스터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때로는 그의 기대가 과도한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위긴스는 마스터를 존경했다. 그 존경심만큼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 이제 그럼.”
마스터가 자신의 목을 주물렀다.
“내 목을 걸고 단판을 지어야 하는 순간인가.”
위긴스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강진호의 기운이 느껴진다. 마스터 역시 그 기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사라진 마나가 그의 감각마저 차단하지는 못할 테니까.
“조언 하나 부탁하지.”
“예?”
“자네의 로드는 말이 통하는 사람일까?”
“물론…….”
위긴스가 입을 닫았다.
강진호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던가?
대화는 되지. 대화는 정말 잘 이뤄진다.
뭔가 이야기가 무척 잘 흘러갔다 싶은 순간에 갑자기 판을 잡고 뒤엎어 버린 다음에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라 그렇지.
위긴스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마스터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내가 생각한 그대로인 모양이군.”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이미 겪어봤는데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지. 그는 내가 알던 일반적인 독재자들과는 조금 달랐으니까.”
“……분명 다르긴 합니다만.”
위긴스가 고민에 빠졌다.
전혀 다른 과정을 가지고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는 일을 과연 ‘다르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과정이 조금 지난하고 복잡할 뿐, 결국 결과는 같지 않은가.
이건 생각해 볼 문제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생각의 시간은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강진호의 기가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는 것을 파악한 위긴스가 문으로 향했다.
강진호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끝이 좋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극단적으로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이라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 미약한 가능성에 비해 마스터의 끝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몇 십 배는 더 높다.
위긴스는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강진호는 협상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협상이라는 것 자체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협상이라는 것은 상대에 대한 신뢰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인 사회에서의 협상과 협약, 그러니까 계약은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무인계의 협약은 누구도 보호해 주지 않는다.
오로지 상대에 대한 신뢰로만 이루어지는 게 무인계의 협약이다. 그리고 강진호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친인이라 생각되는 이가 아니라면 조금의 신뢰도 주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하여 판단한다면 결과는 너무 뻔하다.
‘적어도 내 손으로.’
이 협상이 틀어진다면 마스터가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는 너무도 뻔한 일이다.
그리고 강진호에게는 굳이 마스터를 살려 보내야 할 이유가 없다.
명분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 강진호가 마스터를 초대한 것이 아니라, 마스터가 다짜고짜 강진호를 찾아온 것이니까. 일국의 수장이 호위대도 이끌지 않고 제 멋대로 잠재적 적국으로 쳐들어와 도발을 해댔다.
그 대가로 목숨을 잃는다고 한들, 누가 강진호를 비난하겠는가.
대부분은 마스터의 무모함을 비웃을 것이다. 길길이 날뛰는 것은 원탁 하나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위긴스는 여기서 마스터가 목숨을 잃는다고 해서 과연 원탁이 한국에 적대적으로 변할지조차 의문이었다.
원탁은 원래 그런 곳인데다가…….
“음.”
강진호가 문 바로 앞까지 다가온다.
위긴스는 설사 협상이 틀어지더라도 마스터가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는 낮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어서 오십시오. 로…….”
문 앞에 서 있는 강진호를 본 위긴스의 눈이 살짝 떨렸다.
‘응?’
안 그래도 미묘한 위화감이 있었다.
강진호의 기운을 느끼기는 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강진호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 기운은 평소처럼 묵직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생명을 끊어야 할지도 모르는 곳, 그리고 앞으로의 원탁과 총회의 관계를 설정하는 자리다. 당연히 강진호 역시 무거운 마음으로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기운이 예상보다 무겁지 않았다.
기운만으로 상대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법.
그래서 그러려니 했는데…….
강진호의 얼굴을 본 위긴스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이거 어쩌면?’
강진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평소라면 이건 절대 좋은 신호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일그러짐은 평소의 일그러짐과는 달랐다.
실룩.
강진호의 입꼬리가 제멋대로 씰룩인다.
웃음이 자꾸 터지는 걸 참으려다 보니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풀릴 수도 있겠는데?’
그 순간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좋은 날이군. 그렇지, 위긴스?”
“아……. 아, 네! 로드!”
강진호가 미소를 지으며 위긴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고는 양팔을 벌리며 마스터를 향해 다가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자, 이제 이야기를 해보죠.”
평소 강진호에게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리액션을 보며 위긴스가 주먹을 움켜잡았다.
‘길이 열렸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강진호는 역대 최고로 기분이 좋다.
그런데…….
그런데 왜 저리 기분이 좋지?
위긴스는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