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 business RAW novel - Chapter 15
CHAPTER 15. 비밀의 성인
혼란스럽다 하나 언제까지 대주교실에서 망연자실 서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은 비앙카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눈물은 뺨에 말라붙었고, 목을 틀어막고 있던 슬픔은 가신 지 오래였다. 그녀가 궁금했던 것을 다 알았으니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하지만 교회를 나서기 전, 프란시스에게 다시 한 번 당부해 둘 일이 있었다.
“대주교님.”
“말씀하십시오, 성인이시여.”
“혹시…. 제가 성인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 아직 제가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아서…. 당분간은 주변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네요.”
혹시라도 자카리가 알게 된다면 정말 최악이었다. 도대체 무슨 미래를 본 거냐고 캐묻기라도 하면,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녀가 본 미래는 자카리에게도 비밀이다. 하지만 비앙카는 자신이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해도, 결국 얼굴에 다 드러날 게 분명했다. 애초에 미래를 예지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뜻밖의 비앙카의 요청에 프란시스는 난처해했다. 성인의 발생을 교단에 알리고, 그가 성인의 축성식을 했음을 밝힐 생각으로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인인 비앙카가 비밀로 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프란시스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훗날 성인께서 교단의 힘을 필요로 하실 때, 교단에서 허락을 받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 명부에 성인의 이름부터 올려야 하니까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비앙카는 혀를 찼다. 자카리는 언제 전장으로 뛰쳐나갈지 모르는 사내였다. 혹여라도 성기사단을 동원하는 것이 늦어지기라도 한다면…. 불안했던 비앙카로서는 한 발짝 양보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럼 성인에 이름은 올려 두되 제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을 수는 없나요?”
“그 또한 가능합니다. 제가 직접 교황청에 가서 교황 성하와 추기경을 뵙고 말씀드리면 되는 일이니까요. 교단 내에서 당신의 존재를 숨길 것입니다.”
“곤란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성인께서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세브랑에 성인이 나타났다는 소문까지는 숨길 수 없는지라…. 오늘 같이 온 일행분들 중 눈치채시는 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절충된 비앙카의 제안은 프란시스로서는 쌍수 들고 반길 일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걱정되는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란시스의 말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오늘 비앙카와 함께 온 오델리였다. 한량처럼 보이는 공주는 생각보다 감이 예리했고, 기억력도 좋았다. 아마 세브랑에 성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기가 무섭게 오늘 비앙카가 프란시스를 만났다는 사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비앙카 또한 프란시스가 오델리를 염두에 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오델리가 입이 무거운지 가벼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무척 영리한 사람이라는 건 비앙카도 알았다. 그런 그녀가 그저 흥미 본위로 비앙카에 대해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비앙카에 대해 입을 열 때는, 정치적이나 상황적으로 ‘그럴 필요’가 있을 때일 터였다. 비앙카는 그녀가 경거망동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소문은 언제쯤 퍼질까요?”
“제가 교황청에 다녀온 이후일 것입니다. 맹세컨대, 제 입을 통해 당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때쯤은 괜찮을 것 같네요.”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시스가 교황청에 갔다 돌아올 때쯤이라면, 비앙카와 자카리도 아르노 영지에 도착했을 것이다.
자카리는 전쟁에 관한 낌새를 제외하고는 소문에 다소 둔한 사내였다. 수도에서 성인이 나타났니 뭐하니 하는 소문이 돌더라도 크게 비중을 두지 않을 테고, 오늘 비앙카가 프란시스를 독대한 일에 대해 가스파르에게 보고받는다 하더라도 그때쯤이면 성인 책봉과 연결 짓지도 못할 터였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 다시 한 번 부탁드리지만, 꼭 비밀로 해주세요. 제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귀족인지 양치기인지, 노인인지 어린아이인지…. 아시겠지요?”
단단히 당부하는 말에 프란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비앙카가 왜 그렇게까지 성인임을 숨기려 하는지 궁금했다. 비앙카가 신분을 숨기는 것은,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말로 넘기기엔 지나치게 결벽적이었다. 프란시스는 공손히 답하며, 넌지시 물었다.
“성인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성인이시여, 당신께서 성인임을 밝히시면 주변 모든 이들이 입이 닳도록 당신을 칭송하고 숭배할 것입니다. 예지의 주역인 아르노 백작 또한 당신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일 텐데, 어째서 숨기시려는 겁니까?”
프란시스의 말에 비앙카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비앙카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프란시스가 지적한 것은 비앙카 또한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것이다. 다만 생각과 동시에 머리에서 지워 냈을 뿐. 비앙카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성인이라 하더라도, 달라진 것은 없잖아요. 저는 여전히 저일 뿐이니까….”
한풀 꺾인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깊은 피로가 느껴졌다. 그녀가 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갑게 굴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이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비앙카 그녀가 아르노 백작 부인이자 블랑쉐포르가의 딸이라 하여 일방적으로 치켜세우거나 멀리했던 이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뒤돌아서서 그녀의 못된 성격을 욕하고, 그녀가 가문에서 쫓겨나기가 무섭게 그럴 줄 알았다며 코웃음 쳤다. 성인이 된다 하여 다를 것이 없다는 걸 비앙카는 잘 알았다.
게다가 비앙카가 성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자카리의 태도가 변하기라도 한다면….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은 오히려 그녀 쪽일 것이다. 비앙카는 항상 그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가 그의 진심인지, 그녀가 성인이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만 해도 지치는 일이었다. 비앙카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제가 성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편이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건 좀 씁쓸할 것 같네요.”
* * *
축성식을 끝낸 비앙카가 대주교실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이본느와 가스파르가 득달같이 달려와 그녀를 맞이했다. 이본느의 시선이 창백한 비앙카의 낯을 꼼꼼히 살폈다.
“마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별일 아니야. 간만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그런가 봐.”
비앙카는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이본느가 듣기엔 그럴싸하게 들렸다.
“하긴, 오늘 교회까지 걸어오신 것만 하셔도 힘드셨을 텐데…. 돌아가는 길엔 마차를 부를까요?”
“왕녀님도 계시는데 무슨 마차. 괜찮아.”
비앙카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비앙카와 이본느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스파르의 시선이 비앙카의 눈동자 깊은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 신앙심과는 거리가 멀던 그녀였다. 그런 비앙카가 대주교와 독대할 정도의 일이라…. 분명 대주교실에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인지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비앙카의 얼굴을 아무리 꼼꼼히 뜯어본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가스파르가 살피는 와중에도 비앙카의 낯빛은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하지만 지치기는 지치는구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 왕녀님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야겠다.”
비앙카는 비틀비틀 걸어갔다. 휘청이는 그녀의 등이 위태로웠지만, 비앙카는 부축하려는 이본느의 손길도 마다하고 홀로 꿋꿋이 걸어 나갔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은 태도였다.
비앙카가 예배당으로 돌아가자, 비앙카를 마주한 오델리와 카트린은 깜짝 놀라 했다. 그녀들이 보기에도 비앙카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앙카가 어색하게 웃으며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 말하기도 전에, 오델리와 카트린이 비앙카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서 쉬세요. 이대로는 픽 쓰러지실 것만 같네요.”
“맞아요. 오늘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저희도 이만 돌아갈 예정이니, 백작 부인도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마차. 마차를 불러야겠어요.”
비앙카가 괜찮다 하려 했지만, 오델리 왕녀가 한발 더 빨랐다. 그녀가 앞서 나서서 마차를 부르니, 안 그래도 지친 비앙카의 기력으로는 그녀를 막아낼 수 없었다. 오델리의 강압적인 결정에, 비앙카의 뒤에 있던 이본느는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온 비앙카는 온종일 멍했다. 그다음 날도 숙소에 콕 틀어박혀 꿈쩍도 안 했다. 비앙카는 하루 종일 창밖만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이본느가 말을 걸어도 심드렁하게 대답하거나 무시하기가 일쑤였다. 멍하니 넋을 빼놓은 그녀의 시선이 먼 곳을 응시했다. 그녀가 무엇에 그리도 홀려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자카리 또한 금방 비앙카의 이상함을 눈치챘다. 분명 교회에 가는 길을 배웅할 때만 해도 평소와 똑같았는데, 다녀온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혹시나 싶었던 자카리는 호위로 붙여 두었던 가스파르나 로베르에게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다. 오델리 왕녀와 단둘이 가는 줄 알았는데 다보빌 백작 부인이 동행한 것은 예상외의 일이었지만 별다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로베르의 눈에는 분위기가 좋은 것이 퍽 친해 보였다 할 정도니, 비앙카의 기분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자카리의 입장에선 기꺼운 일이었다.
다만 가스파르의 말 중 신경 쓰이는 것이 있긴 했다. 바로 비앙카가 대주교와 면담을 했다는 것이었다.
“비앙카가…. 대주교를 만났다고?”
“예. 선물도 준비해 가셨습니다. 처음엔 오델리 왕녀에게 건네는 선물인 줄 알았는데….”
미리 선물까지 준비했다? 우연히 이루어진 만남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평소 신앙심과는 거리가 멀다는 가스파르의 주장에 자카리 또한 동감하는 바였다. 그런 그녀가 무슨 일로 대주교를 만난단 말인가? 자카리의 의문에 답하듯, 가스파르가 말을 이었다.
“대주교에게 기적의 사례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다 하셨는데,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는 모릅니다. 마님께서 독대를 주장하신지라….”
“독대?”
가스파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카리의 얼굴이 돌조각처럼 굳었다. 가스파르가 자카리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님께서 강경하셨습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고 말이지.”
“예.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리기는 했습니다만, 알아들을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큰 소리가 오가지는 않았고?”
“예. 다만 대주교실에서 나오신 마님의 안색이 피로했습니다. 단순히 외출을 오래 하신 후유증인지, 아니면 대화 내용 때문인지는 저도 잘….”
들으면 들을수록 더더욱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기적의 사례? 왜 그런 것을 물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비앙카를 뒤흔들 일인가?
혹시나 다른 일이 또 있지 않은지 잘 생각해 보라며 닦달해도, 가스파르는 면구스러워하며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결국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참 난감한 일이었다. 그들 부부가 몸을 맞추며 이전보다 사이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대화가 드문 것은 여전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말 한 마디 거는 것에 이전만큼 조마조마하지는 않았다. 침대에서, 혹은 식탁에서 나누는 소소한 대화들. 어디를 가는지, 무슨 옷을 입을 건지, 식사는 입에 맞았는지…. 그런 것들을 통해 지금껏 보고받아 온 비앙카의 취향과 실제 비앙카의 취향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도 했다.
다만 각 잡고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떻게 운을 떼야 하지. 자카리는 끙, 골머리를 앓았다.
그렇다 하여 이 일을 그냥 넘길 수도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자카리는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비앙카의 방에 슬며시 발걸음 했다.
한 번 고기를 먹어 본 놈은 고기 맛을 못 잊는다는 말처럼, 한두 번 비앙카와 함께 침대에 머리를 뉘이고 난 뒤 자카리는 마치 제 방처럼 비앙카의 방에 드나들었다. 예전에 비앙카가 자고 가라 할 때는 부득불 뒤돌아서서 나왔던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그만큼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잠이 드는 기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황홀한 것이었다. 가끔 비앙카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묻은 채 잠이 들면, 자카리는 그녀의 팔뚝을 끌어안은 채 한참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그렇게 잦은 방문 때문인지, 자카리가 방에 불쑥 들어섬에도 비앙카는 그러려니 하며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덕분에 말을 거는 건 자카리의 몫이었다. 창밖을 보며 골몰히 생각에 잠긴 비앙카의 뒷모습에 자카리는 헛기침을 하며 넌지시 운을 떼었다.
“비앙카.”
“오셨어요?”
“으음.”
비앙카가 돌아보기가 무섭게 자카리의 입이 다시 다물렸다. 용기를 내어 운을 뗀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마치 꿀을 바르기라도 한 듯, 입술이 서로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자카리는 괜히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창 근처에서 자카리를 돌아본 비앙카는 자카리가 말이 없자 금세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한 공간에 있지만,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릴 것 같은 느낌…. 자카리가 바라보고 있는 비앙카는 본인이 아니라 그림 속 인물 같았다.
그런 비앙카의 태도에 안달이 난 자카리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날씨가 부쩍 추워. 창가에 있지 말고 이리 오시오.”
“아직은 괜찮아요.”
비앙카가 여상스레 답했다. 아직 여름이 지나지 않았으니, 밤이라 해도 그리 춥지는 않았다. 그런 반응을 바란 것이 아니었던 자카리의 입술이 꽉 다물렸다. 전쟁에서 군이 수세에 몰려도 이렇게 초조해지지는 않았으리라. 자카리의 까만 눈동자가 조급함에 흔들렸다.
자카리는 웃으며 비앙카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 때문일까. 그의 얼굴은 무뚝뚝할 뿐이었다. 다정하게 들리기 위하여 꾸민 목소리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창밖에 무어 재미난 거라도 있소?”
“그건 아니지만…. 죄송해요. 제가 요즘 자주 멍해지네요. 향수병인가 봐요. 얼른 아르노 영지로 돌아가고 싶어요.”
비앙카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담담했다. 흠잡을 곳 없이 태연한 말투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원하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타는 듯한 목에 침을 꿀꺽 삼킨 자카리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요즘 그대 생각이 많아 보여.”
“제가요?”
“으음.”
비앙카가 천연덕스레 되묻자, 자카리는 다시 신음을 흘렸다. 일 보 전진, 이 보 후퇴. 전선에서도 이런 속도로 나아갔다가는 보급품이 동나는 것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차라리 보급품이 떨어지는 쪽이 낫지, 지금 이 순간 떨어져 나가는 것은 자카리의 정신력이었다.
그런 자카리의 속내를 모르는 비앙카는 살짝 웃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자카리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괜히 초 쳤다가 비앙카의 말 한마디가 그의 목소리에 먹히기라도 하면, 그렇게 비앙카가 다시 입을 다물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자카리가 조용히 비앙카의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사이, 비앙카의 입술이 한참 만에 느릿하게 떨어졌다.
“아라곤과의 전쟁이 걱정되어서요. 당신은 또 출전하겠죠?”
“…그렇소.”
“그렇죠…. 당신이 출전하지 않으면 세브랑이 위태로우니까요.”
비앙카의 연록빛 눈동자가 아련아련했다. 애초에 기대조차 안 했다는 듯 홀로 대답하는 그녀에게선 거리가 느껴졌다.
답을 들었건만, 오히려 자카리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라곤과의 전쟁? 출전? 비앙카의 질문은 급작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자카리와 전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비앙카와 결혼하기 전에도,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도….
그런데 갑자기 왜?
도대체 대주교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냐는 말이 자카리의 목 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끝내 뱉어내지는 못했다. 그녀와 대주교의 대화가 궁금한 이상으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비앙카가 대주교를 만나 기적의 사례에 관해 물었다는 말에, 자카리는 비앙카가 기적을 바랄 정도로 절실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 빈곤한 상상력이었지만,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했다.
다만 얼마나 힘든 소원이기에 기적에까지 기대려 할까. 비앙카는 바라는 것을 요청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편이었다.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항상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런 그녀가 자카리에게 요청하지 않은 것. 신에게 바라는 기적…. 그것인즉슨 바로 자카리가 들어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었고, 자카리가 두려운 것 또한 바로 그것이었다.
자카리는 지금껏 비앙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들어주려 노력했다. 결혼 초기, 남작이었던 시절 비앙카가 갖고 싶다 한 물건들을 제대로 구해주지 못한 것을 아직 신경 쓰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백작 위에 오른 뒤로는 비앙카의 요구를 대체로 다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갖고 싶어 하는 보석함, 향신료, 옷감, 모피….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어도, 속으로는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랬던 만큼, 새삼스레 자신이 비앙카를 위해 해 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고 속상한 일이었다.
비앙카가 대주교를 만난 일이, 혹시 자신의 출전과 관계 있는 것은 아닐까?
비앙카가 넌지시 건넨 말에서 풍기는 느낌이 그러했다. 자카리의 추론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이었다. 하지만 실제와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비앙카가 원하는 것이 자카리의 출전을 막는 것이라면, 자카리로서는 절대 들어줄 수 없었다.
세브랑을 위한 충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와 함께 들고 오는 보상이 사라짐으로써, 비앙카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더 중했다. 기사답지 않은 생각이라 해도 좋았다.
비앙카의 희고 가는 손가락은 쉽게 얼어 겨울에는 항시 손난로를 쥐고 있어야 했고, 그녀의 어깨를 감쌀 모피는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에 걸맞은 고급품이어야 했다. 그녀가 겨울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동상이라도 걸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자카리는 골백번도 더 전장에 나서리라.
그렇기에 자카리는 더욱 깊게 캐어묻지 못했다. 자신이 절대 들어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앙카가 전쟁에 나가지 말아달라 한다 하더라도,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 말할 수 없는 제 처지가 한심했다.
그럼에도 우스운 것은, 숨겨진 진실과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면서도 비앙카가 무언가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강한 피로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확답받을 수도, 그렇다 덮고 넘어갈 수도 없었던 자카리로서는 넌지시 돌려 묻는 것이 한계였다.
“무엇이 그리도 심란하시오? 만약 그대의 마음이 편해질 수만 있다면 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하리다.”
세브랑의 영웅, 철혈의 기사, 전장의 검은 늑대라는 칭호가 우스울 정도로 용기 없고 무력하다 못해 한심하기까지 한 몰골이었다. 자카리는 억지로 입술 끝을 잡아 올려 웃으면서 여유를 가장했다.
비앙카라 하여 자카리가 넌지시 묻는 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모를 리 없었다. 누가 봐도 교회에 다녀온 그녀는 평소와 달리 이상했을 테니까.
하지만 자카리에게 상황을 밝힐 수 없었다. 자신이 없고 면목이 없었다. 과거가 아닌 꿈이라고는 하나, 비앙카가 어떤 이기적인 생각으로 자카리를 배신했고 외면했는지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랬던 그녀가 인제 와서는 성인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며 자카리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 그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얼른 아르노로 돌아가요.”
비앙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카리의 질문을 무마했다. 하루라도 빨리 아르노로 돌아가야, 자카리가 성인 책봉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면 어쩌나 불안해하며 초조해하는 마음도 좀 가실 테고, 심란한 마음도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 말을 돌린 비앙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서린 진실성은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앙카도 알고 자카리도 알았다.
* * *
같이 교회에 다녀온 뒤로도 카트린은 종종 비앙카를 찾아왔다. 혼자 있으면 생각이 바닥에 바닥으로 침잠하는지라, 비앙카는 카트린의 방문이 반가웠다.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대화 화제에 자주 오르는 것은 주로 비앙카의 건강에 관한 일이었다. 카트린은 오델리 왕녀도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며, 다만 왕녀인 만큼 거동이 자유롭지 않아 자주 찾아올 수 없다는 말을 전했다.
카트린은 말주변이 좋다거나 재밌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조용했고 기분 나쁠 일이 없었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영지로 돌아갈 준비가 끝났다. 비앙카가 자카리에게 빨리 돌아가고 싶다 한 덕분인지, 예상보다 준비가 끝난 시간이 빨랐다.
이별은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렇다 하여 덜 슬픈 것은 아니었다. 블랑쉐포르가의 식구들은 일부러 배웅하러 나오지 않겠다 했다. 오랜만에 만난 자식과 헤어지며 속상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를 배웅하러 온 것은 카트린뿐이었다. 카트린은 양손으로 비앙카의 손을 꼭 잡으며 안타까워했다.
“비앙카, 영지로 돌아가면 종종 연락해요.”
“카트린이야말로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둘은 그사이 이름을 부르는 사이로 발전해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또래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는 부쩍 가까워졌다.
“비앙카.”
저 멀리서 말에 탄 자카리가 비앙카를 불렀다. 그새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정말 가 봐야겠어요. 그럼 카트린, 건강해요.”
“비앙카도 항상 건강해요. 무리하지 말고요.”
카트린의 눈빛에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그동안 골골대는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아 민망했던 비앙카는 살짝 웃고는 이본느의 손에 기대어 마차에 올랐다.
비앙카가 완전히 마차에 타는 걸 확인한 자카리가 손을 들어 지시를 내렸다. 자카리의 손짓에 아르노가의 식솔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가 움직이는 동안에도 카트린은 비앙카를 배웅하듯 손을 흔들었다. 비앙카 또한 마차의 창문으로 카트린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마차가 크게 한 바퀴 돌아 성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계속.
카트린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비앙카는 크게 한숨 돌리며 창가에서 몸을 떼려 했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자코브 같은 사내가 언뜻 잡혔다. 번쩍이는 금발 같은 것으로 간신히 구별했을 정도로 먼 곳이었다. 비앙카는 잘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응시했지만, 멀어지는 마차에 초점이 흐려져만 갔다.
비앙카가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보자, 자리를 정돈하던 이본느가 말을 건넸다.
“이제 바람이 찰 거예요, 마님. 여기 쿠션 덧대어 놨어요. 이쪽에 기대세요.”
“그래. 고마워, 이본느.”
잘못 봤겠지. 비앙카는 창에서 몸을 떼며 중얼거렸다. 자코브 때문에 얼마나 이를 갈고 치를 떨었으면, 이렇게 헛것을 본단 말인가? 마치 악몽과도 같이….
정말로 자코브가 있던 것이라 해도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더욱 정이 떨어지면 모를까. 하여간 끝까지 징글맞다. 만약 비앙카가 아르노 영지로 돌아가 있는 동안 그녀의 분노에 불이 꺼질까 봐 장작을 지필 생각이었다면 정답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두고 봐, 결코 꿈에서처럼 네가 원하는 미래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테니까.
비앙카의 얇은 입술이 꽉 다물렸고, 그녀의 타오르는 눈동자는 점점 멀어져 가는 라호즈 성을 노려보았다. 새하얀 건물에 노을이 드리워져 주홍빛으로 빛났다. 마치 수도가 타오르듯이.
* * *
저녁은 노숙이었다. 원래대로였다면 아침에 출발하여 다음 도시에 도착해서 하룻밤 보낼 생각이었지만, 자카리가 떠나는 것에 안타까워하며 붙잡은 왕 때문에 출발 시각이 늦어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
노숙도 몇 번 경험이 쌓였다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비록 수도에 오기 전, 몇 개월 전의 이야기였지만. 비앙카는 창에 비스듬히 기댄 채 노숙할 준비를 하는 이들을 지켜보았다. 산짐승이 나타나기라도 할까 꼼꼼히 주변을 살피는 주변인들을 느긋이 지켜보는 그녀에게 자카리가 다가왔다.
마차 밖에 서 있는 그와 안에 있는 비앙카의 시선이 얼추 비슷했다. 이렇게 그와 시선이 정면에서 마주할 때는 주로 잠자리에서였다. 귀가 빨개진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우며 뒤로 슬쩍 물러섰다.
‘그가 왜 갑자기 다가왔지? 혹시…. 오늘 마차에서 같이 자겠다는 제안을 하려는 건….’
심장이 크게 뛰었다. 너무 설레서, 떨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할까 걱정될 정도로.
마차는 자카리와 비앙카 둘이 눕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었지만, 그렇다 하여 상대의 존재감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넓은 건 아니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 이미 그들은 부부였고, 서로의 체온을 알고 있는 사이였다.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의 두근두근한 마음은 전혀 모른다는 듯, 여상스레 물었다.
“비앙카,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은 없으시오?”
“지금은요.”
“필요한 게 있다면 부르시오. 바로 준비하도록 하리다.”
그리 말하고 나서 돌아선 자카리의 뒷모습은 언제나와 같이 무덤덤했다. 라호즈로 향할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태도였다. 잔뜩 고무되었던 기분이 순식간에 납작해졌다. 실망한 비앙카는 입술을 작게 삐죽였다.
‘나는 이렇게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가슴이 떨리는데…. 그는 나만큼 조급하거나 안달 나지는 않는 모양이지.’
첫날밤 이후 몇 번이나 살을 맞대었고, 자잘한 접촉은 놀랄 정도로 늘었다. 그녀의 방에 들어서는 일에 스스럼없기도 했다. 라호즈에서 머물면서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정작 이런 모습과 마주하면 전혀 바뀐 게 없다는 것을 직면하게 되었다.
‘이제는…. 마차에서 같이 자도 괜찮잖아.’
머릿속을 복잡하게 어지럽히는 생각들에 비앙카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괜히 내가 예민하게 생각하는 걸 거야. 그는 그냥….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니까. 수도로 향할 때 마차에서 같이 자지 않겠다 했으니, 지금 와서 같이 자자고 할 생각을 못 하는 것일지도 몰라. 내가…. 내가 또다시 제안하면.’
그 순간, 비앙카의 뇌리에 ‘절대 이 마차에서 자진 않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던 자카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딱딱하고 매끄러웠던 그 얼굴에, 비앙카는 결국 그를 설득하지 못했었다….
비앙카는 도리질 쳤다. 바뀐 게 없다는 것은 그녀의 착각이다. 실제로 하나하나 따져 보면, 그때와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앙카가 치맛자락을 잡았다. 마치 난 할 수 있다 세뇌하듯 주먹을 꽉 움켜쥔 그녀는, 용기를 내어 자카리를 불렀다.
“여보.”
“무슨 일이오, 비앙카.”
그 짧은 사이에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떠나갔던 자카리는 비앙카가 부르기가 무섭게 냉큼 뒤돌아 왔다. 그 전환이 얼마나 빠른지 비앙카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비앙카는 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조심하며, 느릿하게 물었다.
“당신은 오늘 어디서 주무시나요?”
“당연히….”
밖에서, 라고 말하려 했던 자카리의 입이 다물었다. 왠지 이렇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짧은 침묵. 그리고 비앙카는 자카리의 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바로 제안했다. 마치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듯한 다급함이었다.
“이제는, 마차 안에서 주무셔도 되지 않나요?”
“…날 도발하지 마시오.”
자카리는 딱딱하게 답했다. 뱃속에서부터 끓어 나오는 듯한 나직한 목소리는 위협적이었지만, 비앙카는 이제 그것이 화가 난 목소리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었다. 어떻게 대꾸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말을 고르듯 꽉 닫힌 입술. 비앙카에게서 비스듬히 흘러내린 눈빛. 자카리는 명백히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마냥 마음을 놓기엔 이르다. 자카리가 화가 나지 않았다 하여, 비앙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몰라. 비앙카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곤, 괜스레 양손으로 팔뚝을 감싸 안았다. 아직 여름이 가시지 않은 시기인지라 추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비앙카는 잔뜩 엄살을 부렸다.
“혼자서는…. 밤에 추울지도 몰라요.”
“…….”
자카리의 딱 다물린 입은 좀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카리가 거절할까 조마조마했던 비앙카 또한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얼굴 낯을 멀끔히 하고 여유 있는 척 가장했지만, 그녀의 심장은 놀랄 정도로 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지속하였을까. 자카리가 툭 하니 말을 던졌다.
“먼저 자고 있으시오.”
무슨 의도로 던진 말일까. 앞뒤 전후를 보아하건대 찾아오겠다는 말이 함축된 것 같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던 비앙카는 자카리의 눈치를 보았다.
자카리의 말이 너무나 단호했기에 정말 찾아올 것이냐 되물을 수도 없었다. 괜히 미련만 넘치고 질척해 보이니까. 대신 비앙카는 자신이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내비쳤다.
“기다릴게요.”
자카리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나직한 한숨을 크게 내뱉은 그는 아무 말 없이 부하들에게 향했다. 뒤돌아선 그의 귓가가 조금 붉었다.
그녀가 아는 자카리는 아닌 일에 한해서는 칼과 같이 날카롭게 미련의 여지를 잘라내는 사내였다. 자카리가 침묵했다는 사실은 비앙카에게 찾아오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제야 비앙카는 안도와 기쁨으로 활짝 웃었다. 자카리가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흐드러진 봄꽃 같은 미소였다.
* * *
갑작스러운 비앙카의 동침 제안에 자카리는 깜짝 놀랐다. 원래의 그였다면 고려할 것도 없이 기각이었으리라. 야심한 밤. 가까운 거리. 그녀의 곁에서 그가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무척 힘겨운 일이었으니까.
비앙카의 몸은 술과 같았다. 자신 만큼은 이성을 제어할 수 있다는 치기로 무모한 도전을 하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그것이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다. 위험하다는 걸 알고 발을 뺄 때는 이미 늦은 뒤다. 스러진 몸은 무력하게 그녀에게로 휘감긴다.
물론 그들이 머무는 곳이 그럴듯한 숙소였다면 잴 것 없이 냉큼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숲속이요, 그녀가 머무는 곳은 마차 안이 아니던가. 나뭇조각 몇 개가 덧대어진 열악한 공간에서 그녀와 단둘이…. 자카리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목이 말랐다.
당연지사 거절했어야 하는 일이지만, 최근의 비앙카를 생각하면 쉬이 그럴 수가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는 평소의 그녀와 달랐다. 항상 옷차림만큼은 단정하게 유지하며 매일매일 다른 옷을 입는 그녀가 사흘 전과 똑같은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랬던 그녀가 오래간만에 바라는 일이다. 결국 자카리는 승낙했고, 어깨에 얹어진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저 멀리 잠자리를 만드느라 분주해 보이는 소뵈르와 로베르의 모습이 보였다. 자카리는 노숙을 준비하는 가신들을 향해 다가가 말했다.
“…내 잠자리 준비는 하지 말도록.”
“네?”
소뵈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애초에 비앙카와 함께 잘 생각은 아니었다지만, 막상 눈앞에서 소뵈르가 펄쩍 뛸 것처럼 구는 모습에 자카리의 빈정이 상했다.
부부 사이에 같이 자는 것이 그렇게 놀랄 정도로 이상한 일인가? 못마땅함에 속이 비틀린 자카리는 미간 사이에 주름을 잡으며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되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요. 원래 백작님의 잠자리 준비는 안 하고 있어서….”
“뭐?”
생각지 못한 소뵈르의 답에 자카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뵈르는 오히려 그런 자카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옆에 있던 로베르에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 시선을 마주쳤다. 로베르 또한 자카리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소뵈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히 말했다.
“저희는 당연히 백작님께서 마님하고 같이 주무실 줄 알았지요.”
요즘 사이좋으시잖아요. 소뵈르는 작게 덧붙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소뵈르의 말은 딱히 부정할 거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한 방 맞은 것처럼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자카리는 알았다며 손을 내젓고는 뒤돌아섰다. 무언가 굉장히 심란한데,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낯선 곳에서 지금껏 꼭꼭 숨겨 두었던 바람과 조우한 듯한 그 고양감…. 그저 명분뿐인 부부 사이였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주변에서 비앙카를 그의 아내로 인정해주는 기분은 굉장한 쾌감을 동반했다. 뱃속 깊은 곳이 근질거리는 느낌. 그것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열망에 가까웠다.
그렇다 하여 이 기분 그대로 비앙카의 마차에 들어설 수는 없었다. 깨어 있는 비앙카와 마주하여, 그녀와 눈빛이라도 섞이면 도저히 이 충동을 잠재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카리는 마차를 중심으로 그들의 근거지 주변을 몇 번이고 뱅뱅 돌았다. 주변에서 백작님이 왜 그러시나 하는 시선이 쏟아져도 꿋꿋이 무시했다. 그리고 한참 뒤, 비앙카가 잠이 들었을 거라 여겨질 때쯤. 그제야 자카리는 조심스레 비앙카가 있는 마차로 향했다.
하지만 언제나 인생은 예상과는 다른 법이다. 당연히 비앙카가 자고 있을 거로 생각한 것과 달리, 그녀는 두 눈을 또랑이 뜬 채로 자카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를 더 당혹스럽게 몰아넣은 것은, 넓게 깔린 모피 위에서 고혹적으로 누워 있는 그녀가 바로 알몸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들추며 들어섰다가 화들짝 놀란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일 뻔했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후다닥 마차 위에 오른 자카리는 혹여나 바람결에 문이 펄럭일까 꼭꼭 매듭도 지었다.
문이 절대 열리지 않게 매듭지은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각오하고는, 느릿하게 비앙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시도는 의미가 없었다. 다시 비앙카를 보기가 무섭게 그의 얼굴에 피가 확 치솟았다.
“이게 무슨 꼴이오!”
자카리는 나직이 억누른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참아 누르는 듯한 꽉 막힌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으며, 그의 얼굴은 표정 관리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별로예요?”
비앙카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천연덕스레 물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묻는 모습에 자카리는 할 말을 잃었다. 짙은 회색빛 모피에 휘감긴 새하얀 살결은 어둠 속에서도 달빛을 쬔 것처럼 빛났다. 침중하게 신음을 흘리던 자카리는 한 박자 늦게서야 답을 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나는 당신의 아내고, 밖에 있는 이들은 당신을 경외하는 충직한 가신이지요. 여긴 수도가 아니에요, 여보.”
비앙카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답했다. 자카리의 초조함과 대조되는 느릿함. 자카리의 입안이 바짝 마른 것과 달리 그녀는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이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누군지 확실시하겠다는 듯이.
자카리 또한 이곳에 감히 그의 아내를 탐낼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혹시 하는 가정에 심장이 무섭도록 떨렸다.
자카리의 검은 복장과 바닥의 어두운 모피와 대조되는 그녀의 새하얀 피부는 본능처럼 자카리의 시선을 붙들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에 자카리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그냥, 나는 그들의 눈에 당신의 이런 모습이 닿는 것이 싫어.”
“저도 보여주길 원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당신은 제 옆에서 시체처럼 잠들 거잖아요.”
비앙카의 연록빛 눈동자가 도발적으로 자카리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은 고집스레 꽉 다물려 있었지만, 눈빛만으로도 재촉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 있는 동안 잠시 잊고 있었다. 그에게 갑작스레 후계자를 갖자 했을 때부터 느꼈던 건데, 그녀는 어딘가 당돌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은 자카리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비록 비앙카 본인은 모를 테지만….
자카리는 한 발짝, 한 발짝 비앙카에게로 다가갔다. 어둠은 그의 어지러운 마음을 숨겨주었다. 자카리의 목울대가 거칠게 움직였다.
마차에 오를 때만 하더라도, 오늘은 기필코 머리를 뉘고 잠만 자리라 다짐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몸은 욕망대로 흘러갔다. 한때의 다짐은 물에 휩쓸리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의 각오가 이다지도 가벼웠던가?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비앙카와 관련된 일에 관해서는 항상 이래 왔다. 그녀가 성인이 되는 시기까지 지켜줄 것이다 다짐했으면서도 기어코 질투와 욕망에 무릎 꿇지 않았던가.
비앙카가 자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카리는 그 손끝에 실이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비앙카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자카리는 바닥에 누워 있는 비앙카를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나는 심장이 약한 사내이니, 이런 일은 어지간해서는 지양해줬으면 좋겠군.”
“이런 유혹은 마음에 들지 않나요?”
“마음에 들고 말고 수준이 아니오. 그대를 거부하려는 나의 배려 의지조차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지.”
“거부는 배려가 아니에요, 자카리.”
비앙카가 나직이 웃으며 속삭였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비앙카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달콤하다. 마치 처음 먹어 본 벌꿀의 맛처럼.
자카리가 거의 넘어갈 뻔한 그 순간, 벽 너머에서 사람들의 불분명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자카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머리에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것 같았다.
그녀를 노숙하게 하는 것도 모자라 이런 곳에서 관계하려 하다니…. 아무리 비앙카가 바랐다 하더라도, 자카리 그가 거절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비앙카와 얽힌 일에 한해 자신의 자제심이 양피지처럼 얄팍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거의 넘어간 상황에 직면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물러설 수 있었다. 자카리는 성난 하반신을 애써 잠재우려 노력하며 몸을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이곳은 마차…. 읏.”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그녀의 하얀 다리가 자카리의 허리에 엉겨 붙었다. 자카리의 하반신이 비앙카의 다리 사이 깊은 곳에 닿았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옷깃을 쥔 채, 유혹적으로 그를 꼬드겼다.
“마차를 덮고 있는 가죽과 천은 제법 두꺼워요…. 천천히…. 느릿하게 하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비앙카가 빙긋 웃었다. 대낮에 하는 것이 부끄럽다며 얼굴을 붉혔던 그녀답지 않은 적극성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자카리를 원한다는 사실에 자카리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가는 자제심에 불을 붙였다. 자카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참아 낼 수 있을 정도로 성인이 아니었다.
자카리는 그대로 비앙카에게 입을 맞췄다. 비앙카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파고드는 혀끝이 어찌할 바 모를 듯 필사적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카리의 몸이 비앙카의 위로 드리워지자, 비앙카의 하얀 알몸이 꼭꼭 숨겨졌다. 마차 위에서 봤다면 비앙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카리의 허리를 휘감은 다리뿐이리라.
자카리의 손이 허겁지겁 비앙카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였지만, 알몸으로 있어서 그런지 비앙카의 살결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자카리의 열이 오른 뜨끈한 손이 비앙카의 찬 피부에 닿자, 그의 손이 닿은 곳부터 그녀의 피부에 열기가 퍼져 나갔다.
자카리는 비앙카에게서 잠시 입술을 떼며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추울지도 모른다면서, 이리 벗고 있기는.”
“당신이 곧 덥혀 줄 거잖아요.”
비앙카는 작게 소리 내 웃었다. 키득거리는 웃음은 평소 위엄 있는 백작 마님을 가장하던 그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경계심 없는 미소였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자카리가 유일하리라.
그리 깨닫기가 무섭게 자카리의 가슴 한곳이 꽉 죄었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여유를 잃은 자카리는 다급하게 허리띠를 풀어 바지춤을 끌어 내렸다.
자카리가 몇 번이고 마차 밖으로 뛰쳐나갈까 비앙카의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비앙카는 필사적으로 자카리를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다행히도 비앙카는 자카리를 붙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냥 안도할 수는 없었던 그녀는 자카리의 손이 그녀의 살결을 어루만지고, 몇 번이나 혀가 얽히는 상황에서도 자카리의 눈치를 보았다.
내심 불안했던 비앙카가 안도의 숨을 내뱉은 것은, 자신의 안으로 들어서는 자카리의 것을 느끼고 나서였다. 온몸을 빠듯이 메운 것 같은 묵직함. 예전보다 쉽게 젖게 되어 그를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크기는 버거웠다.
“으응…!”
비앙카의 여린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비앙카는 차오르는 숨을 가쁘게 뱉어냈다. 자카리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그의 허리춤을 꽉 죄고 있던 다리는, 어느샌가부터 채신없이 단정치 못한 모습으로 흐트러진 채였다.
마차 안이라 그런지, 자카리는 평소보다 정적으로 움직였다. 비앙카를 품 안에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고는, 성기로 그녀를 느릿하게 꿰뚫었다.
비앙카는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힘겨운지, 그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고 턱에는 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그의 흐려진 검은 눈동자에는 당장에라도 비앙카를 번쩍 들어 욕심을 채우고 싶은 다급한 욕망이 그득했다.
하지만 그는 변함이 없었다. 벨벳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듯한 느긋한 움직임. 그의 것이 어떻게 그녀의 안을 미끄러져 빠져나가는지, 그리고 어떻게 들어서는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비앙카의 안으로 점점 깊이 진입하던 자카리가 돌연 비앙카에게 물었다.
“후우…. 그러고 보니…. 왜 하필 오늘이오? 한동안은…. 관심이 없어 뵈더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비앙카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생각해도 조금 뜬금없는 일이기는 했다.
교회에서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골몰하느라 자카리에게 소홀했었다. 그러던 그녀가 수도를 나서기가 무섭게 자카리를 유혹하니, 그가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비앙카는 신음을 삼키며 답했다.
“오늘은…. 흐읏, 그냥 바꾸고 싶었어요.”
“무엇을?”
“예전과는 달리, 읏, 모든 걸요.”
과거에는 다른 공간에서 잠이 들었던 그들 부부. 여전히 없는 아이. 몸을 섞는 시기가 당겨졌고, 확실히 예전보다 친밀해졌지만, 이것만으로는 그녀의 꿈과 완전히 달라졌다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좀 더…. 좀 더 다른 것이 필요했다. 꿈과는 전혀 같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확언할 수 있는, 그런 것.
그와 동시에, 자카리에게 홀대했던 꿈을 그녀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물론 비앙카도 처음 자카리에게 자고 가라 말했을 당시에는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고작 가죽 한 겹으로 분리된 공간에서 남편에게 안긴다니, 그 얼마나 수치스러운 짓인가?
하지만 그녀는 꿈속에서 페르낭과 정원에서 관계를 맺은 적도 있었다. 그녀가 바란 것은 아니었고, 페르낭에게 어영부영 휩쓸린 것이었지만 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랬던 만큼 자카리의 앞에서 정숙하게 콧대를 높이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를 기만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
현실의 페르낭은 죽었지만, 그렇다 하여 그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여 음탕한 짓을 일삼았던 꿈이 완벽히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앙카는 페르낭에게 허락해주었던 것은 자카리와도 하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그녀의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지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하나둘 바꿔 나가면, 언젠가는 자카리의 죽음 또한 바꿔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비앙카는 필사적으로 자카리에게 매달렸다.
그런 비앙카의 매달림에 자극된 것인지, 비앙카의 허벅다리를 붙든 자카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 상체와 하체는 단단히 고정시켜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허리만 움직여 그녀의 안을 들쑤셨다.
“흐읏…!”
비앙카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느끼는 부분을 정확히 찔러 오는 성기에 도망갈 곳 없이 꽉 붙들린 비앙카의 발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평소의 빠른 추삽질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이 폭풍에 휘말리는 기분이라면, 지금의 느릿한 추삽질은 비앙카를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느끼는 곳을 하나하나 다 짚어내는 듯, 잔뜩 민감해진 내벽을 비집고 들어오는 살덩이의 느낌에 숨이 턱 하니 막혔다.
애초에 비앙카는 신음을 마음껏 내지르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억누르고 억누르는 일에 익숙한 것 또한 아니었다. 꾸역꾸역 삼켜 낸 신음이 비앙카의 입안에서 불분명이 뒤섞였다.
“흣, 아, 싫, 으으읏….”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어 자카리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카리는 오히려 쉰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비앙카의 귓가에 속삭였다.
“도발한 건 그대요, 비앙카.”
“읏, 으응, 흣….”
손으로 입을 막아도 더는 신음을 참지 못할 것 같자, 비앙카는 손가락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자카리가 그녀의 손가락을 떼 내었다. 가는 손가락에 잇자국이 선명했다.
자카리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비앙카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사이에도 계속해서 쳐올리는 하반신 때문에 비앙카는 숫제 울 지경에 이르렀다.
“앗, 안 돼, 소, 리가 들려버려요, 흣, 응, 으흣….”
“그럴 순 없지.”
자카리의 미간이 비틀렸다. 그는 그대로 비앙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비앙카의 터져 나오는 신음을 전부 삼켜 내겠다는 듯이. 혀가 얽히고설키며, 비앙카의 신음은 작게 뭉개져서 흩어졌다.
“응, 응, 으응, 읏….”
비앙카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파도가 몇 번이고 철썩이면서도 모래사장을 전부 쓸어내지는 못하는 것처럼, 절정의 끄트머리가 그녀에게 닿을락 말락 찾아왔다. 그것은 고통에 가까운, 폭력에 가까운 쾌감이었다.
차라리 빨리, 아무 생각도 못 하게 그녀를 뒤흔들어줬으면. 평소보다 오랫동안 지속하는 쾌락은 그녀의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마비시켰다.
자카리를 밀어낼 수도 없고, 그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다. 비앙카는 오로지 자카리를 끌어안고, 한시라도 빨리 이 느릿한 쾌감에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비앙카의 머릿속에서 하얀 섬광이 번쩍번쩍 튀었다. 그리도 바라는 절정이었다.
“하으…!”
기어코 참지 못한 신음 한 가락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내벽이 강하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일순 찾아온 강한 자극에 자카리는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큿…!”
쥐어짤 듯한 자극에 견딜 수 없었던 자카리는 허겁지겁 비앙카의 안쪽에서 성기를 빼내었다. 애액으로 번드르르해진 붉은 성기가 꼿꼿이 선 채 튕겨 나왔다.
그리고 빠져나온 성기를 손으로 훑자, 그리 오래지 않아 단단하게 치솟은 그의 성기 끝에서 희뿌연 정액이 후두둑, 터져 나왔다. 기세 좋은 파정. 비앙카의 오목하게 들어간 배꼽 위로 정액이 흩어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비앙카는 숨을 몰아쉬며 멍하니 누워 있었다. 사고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채 주변 눈치를 보며 정사를 나누었다 보니, 평소보다 더 힘들고 지쳤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속눈썹 사이 흐려진 눈동자가 초점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쾌락의 여운을 곱씹던 비앙카는 뒤늦게서야 자카리가 그녀의 밖에 파정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처음을 제외하곤 항상 그랬었어….’
항상 절정에 먼저 다다르는 것은 비앙카였고, 그 뒤에는 절정의 여운에 몸을 떠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껏 눈치채지 못한 게 말이 된단 말인가?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듯한 충격에 얼떨떨해진 비앙카는 표정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아이를 가지려면, 꼭 안에 파정해야 하는데….’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비앙카가 도대체 왜 그런 거냐 묻기 위해 숨을 몰아쉬는 자카리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순간, 자카리의 입술이 비앙카의 입술을 덮었다. 그대로 자카리에 대한 질문은 그의 혀에 얽혀 사라졌다.
“응, 으응….”
“한 번만, 더 해도 되겠소?”
자카리의 까만 눈동자가 비앙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비앙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할 때는 있어도, 비앙카가 하기 싫은 일을 하게 하지는 않았다. 아마 비앙카가 그를 거부하면 그는 쉽게 떨어져 나가리라…. 오히려 그렇기에, 비앙카는 그를 쉽사리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 한 번만 더 해 보자. 내가 착각한 걸 수도 있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비앙카는 승낙의 말 대신, 자카리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날 자카리는 총 세 번의 파정을 했지만, 그녀의 안에 사정하는 일은 없었다. 결국 지친 비앙카는 까무룩 기절하듯 잠이 들었고, 자카리에게 왜 피임을 하는 것이냐 물어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 *
자카리와 비앙카가 수도를 떠난 지 열흘쯤 뒤. 그사이 수도 라호즈에는 신묘한 소문이 돌았다. 바로 세브랑에 성인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성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평소라면 성인의 등장을 널리 알렸을 교단에서도 성인의 정체를 꼭꼭 숨겼다. 성별도, 신분도, 나이도.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성인이 세브랑 출신이며, 성인이 원하면 교단에서는 성인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거라는 것 정도였다.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성인의 존재. 아무리 꼭꼭 숨겨졌다고는 하나 성인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다. 사람들은 이것저것 추측해대기 시작했다.
영지도 없는 몰락한 남작가의 한량은 아닐까. 부유한 상인의 자식일지도 몰라. 성인이라 하여 귀족이라는 법은 없지. 양치기일 수도 있는 일이야.
사람들의 추측은 끝도 한도 없었다. 하지만 수도 없이 나열된 것 중, 비앙카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에게 사치를 일삼는 귀족 부인은 성인과 가장 거리가 먼 존재였다.
세브랑에 성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에 가장 크게 반응한 것은 바로 아라곤이었다.
지금껏 교단에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세브랑 출신인 성인이 나타났으니…. 교단에서는 성인의 뜻을 따르니, 자칫하다가는 아라곤이 교단의 성기사단까지 상대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릴 수 있었다. 아라곤 내에서 불안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이번에 세브랑과 결혼으로써 동맹을 맺은 카스티야는 아라곤과 정반대에 있는 나라라서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교단은 달랐다.
성기사단이 강한 군대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교단을 믿는 신도들이 많았고, 그들은 성기사단에게 칼을 들이밀기를 주저했다. 아라곤 또한 교단을 믿는 이들이 많았다.
아라곤은 세브랑을 침략하던 횟수를 점차 줄였다. 자코브를 왕위에 올리고 세력을 키울 생각이 만만이었다 하나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치고 팔짝 뛰겠는 것은 다름 아닌 자코브였다. 자코브는 비밀리에 성인의 존재를 찾기 위해 애썼다. 사람을 풀고 교단을 만나 보고 별짓을 다했지만, 그는 성인의 발끝도 찾을 수가 없었다.
비앙카가 용기를 내, 내디딘 한 발짝으로 세계의 흐름이 변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계가 비밀스러운 성인의 존재로 시끄러운 것과 달리, 영지로 돌아가는 아르노가의 사람들은 수도에 들끓은 소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영지가 저 멀리, 눈앞에 펼쳐졌다. 푸르렀던 들판은 누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떠났던 봄이 지나고 여름도 지나, 이제 곧 가을이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