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able Age Wulin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525
제119장 왕묘진입 (2)
주르륵.
검은 피가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래서 지금 저보고 도망치라는 뜻이에요?”
“상대가 좋지 않다. 마지막에라도 아비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다. 내가 막고 있는 사이, 어서 가서 장로님을 불러오거라. 아니, 장로님뿐 아니라 누구든 좋다.”
“그럴 수는 없어요.”
대화를 듣고 있던 강림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눈물겨운 이야기로군. 그런데 어쩌나, 나는 여기서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는데?”
“…….”
“특히 저년의 무공이 놀랍구나. 백리세가에 후대의 검후를 노릴 천재가 등장했다더니, 필시 그녀일 테지.”
팔짱을 낀 팔을 풀어, 그가 쥐꼬리 턱수염을 베베 꼬았다.
“련주님의 애첩으로 삼기 딱 좋은 배필이란 말이지.”
“…!”
“뭘 그리 놀라나? 귀한 씨를 받기에는 좋은 밭이 필요한 법이지. 백리정순. 네게 제안하마. 그 여아를 내어놓는다면 너희들의 목숨은 보장하마. 어떠냐?”
듣고 있던 초운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저 개뼈다귀 같은 새끼가?’
단숨에 달려 나가 쳐죽일까 하는 사이, 먼저 반응하는 이가 있었다.
***
“닥쳐라.”
백리정순이 스스로 혈도를 찍어 울컥 울혈을 뱉어내고 입가를 훔치며 일갈했다.
“남의 귀한 여식을 근본도 없는 도적에게 맡길 수는 없지.”
떨리는 다리를 다잡으며 그가 온전히 몸을 일으켰다.
“사위는 내 딸아이가 점찍은 자가 있으니, 늙은 노괴는 두말 말 거라.”
그에 백리세가의 무인들도 하나둘 검을 짚고 일어섰다.
“장주님.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립니다.”
“이곳에 뼈를 묻더라도 설이 아가씨를 살려 보낼 것입니다.”
“아가씨는 백리세가의 미래이니까요.”
“그동안 백학검법을 지도해주셔 감사했습니다. 모쪼록 무운을….”
기식이 엄연함에도 모두 상처를 부여잡고 일어나 검을 드는 그들의 모습에, 백리설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어?”
이내 자신을 막아서는 그들을 보며 다시 한번 혼란에 빠진다.
초운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금 두고 볼까?’
백리설의 얼굴은 혼돈 그 자체다.
눈동자는 갈피를 잃고 굴러다니고, 입가는 미처 지우지 못한 당혹감으로 출렁인다.
‘평생 보호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지.’
언제나 세상은 혼자 살아간다고 떠들어댄 자신이다.
그녀 또한, 그 말을 곧이 믿었다.
믿었던 가족에게서 팔려 갈 뻔한 날 이후, 누구에게도 쉽사리 마음을 주지 않고, 또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목숨을 불사하고 지켜야 할 존재가 된 것이다.
세가의 금지옥엽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보호해야 할 귀중한 미래가 된 것이다.
‘분명 백리설에게는 생경한 일이겠지.’
“끌끌. 백리정순. 허풍만 잔뜩 든 이름을 가진 네놈은 아둔하기도 하구나. 련주님의 첩실이 된다면, 그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거늘.”
“…간다.”
다시 백리정순이 달려들었지만, 강림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끌끌. 백린어룡검. 좋은 검법이나 돼지가 들어서야 진수를 펼쳐 보일 수 없는 법이지.”
“늙은 뼈다귀 베어내는 것에는 과분한 검법이다.”
“과연 그럴까?”
어지럽게 장법을 뿌리며, 원호를 그려 백리정순을 압박하자, 백색 검기가 퍽퍽 깎여나가며 그의 신형이 휘청였다.
“장주님!”
남은 백리가의 무인들이 달려들었지만, 강림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여기서 정파놈들의 수를 줄여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쳐라!”
그는 손짓해 자신의 수하들을 부르며, 동시에 백리정순을 걷어차 날리고, 재차 도약해 흑색 쌍장을 뿌리니 여기저기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
백리설의 눈빛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
‘오.’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는 각오는 가르친 보람이 있다고 할까?
하지만 의지만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귀골혈장은 초운휘도 익히 아는 무공이다.
‘백팔 가지 독수에 손을 단련하고, 불로 달군 철 가루를 손바닥으로 때리며 익히는 무공이었지.’
꽤 강력하고 악랄한 효능 덕에 전생에 살짝 관심을 두었던 무공이기도 했다.
마교 오독교의 절기, 고루장법에 비견되는 치명적인 무공이었으니까.
‘놈의 경지는 초절정. 아직 설이에게는 압도적인 상대야.’
하지만, 초운휘는 나서지 않았다.
대신 언제라도 튀어 나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백리설을 기다렸다.
자신이 가르친, 알을 깨고 나온 아이가 과연 어디까지 해줄지.
‘둥지를 떠날 준비가 되었는지 보고 싶구나.’
***
차차창!
검기를 흩뿌리던 백리정순이 허리를 새우처럼 굽히고 벽에 부딪혀 주르륵 미끄러졌다.
“장주님! 크억!”
백리세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
장원에서 수련한 검법으로는 마공에 필적하는 귀곡혈장을 익힌 사파인들을 이길 수 없다.
하물며 수적으로도 열세임에야.
그때 백리설이 움직였다.
“지저분한 뼈다귀 같은 늙은이가, 입도 손도 더럽네요.”
평소와 같은 독설이지만, 두 다리가 떨리고 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살기와 음험한 음욕에 검을 안은 소매 끝도 살살 떨리고 있었다.
“생긴 건 개가 씹다 뱉은 뼈다귀 같은데, 무슨 자신감이 있어 이렇게 떠들어 댈까요?”
“…네년.”
원초적인 욕설에 강림의 눈동자에서 서늘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끝내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겠다는 뜻이냐? 여자는 고분고분한 맛이 있어야 하거늘. 뭐,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재미도 있는 법이긴 하지.”
전신을 핥는 듯한 시선과 살기에 몸이 떨렸지만, 백리설은 역시나 물러나지 않았다.
다만, 품고 있던 일곱 개의 검을 일제히 흔들어 보이며 전의를 다진다.
낭랑한 욕설과 함께.
“덤비는 것은 네 쪽이겠죠. 똥개가 빨다 버린 개뼈다귀 같은 늙은이얏!”
그녀는 아마 모르리라.
“역시 내 제자.”
이야기를 들은 초운휘가 통쾌함에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설아!”
자신을 향해 절절히 외치는 백리정순의 목소리.
나아가 백리세가 무인들의 안타까운 감정이, 메마른 마음에 일순 불을 지폈다.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작은 감동을, 격동을 그녀는 빠르게 억눌렀다.
‘적을 상대하는 데 전념해도 부족해.’
강림의 강함은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경지가 다른 강자 앞에서 자연스레 움츠러드는 근육에 입을 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떠올렸다.
‘교관님을 생각해.’
빈 연무장에서, 사람이 오지 않던 습지에서, 더러는 계곡에서 수련하던 기억이 떠오르자, 두려움이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움츠러든 감각이 일제히 되살아나며 전의를 북돋웠다.
‘아.’
모두 교관에게 배운 것이다.
– 이 더러운 강호에서 딱 엇비슷한 실력의 적을 만날 요행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아.
– 항상 너보다 흉악한 적을 만난다고 생각해야지.
– 최악의 최악을 생각해. 거기다 최악을 열 배쯤 곱한 다음 두 배로 튀기면 실제 강호와 비슷해질 거다.
어쩐지 귀찮은 듯 툭 내뱉는 목소리가 살아나는 것 같아 백리설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킥킥.”
강림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백이 있는 건지 미친 건지,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는 것을 보면 후자인 것도 같고.”
“시끄럽답니다.”
문답무용.
‘상대가 한껏 방심한 지금이 기회야.’
생각하며 오히려 치고 나가 안고 있던 칠검을 두 팔을 활짝 벌려 던지며,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백학검법이로구나. 이놈들의 무공은 영 아니었지. 오의를 깨달은 사범이라면 어떠려나?”
느슨하게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장법을 뿜어내려는 강림의 얼굴이 확 바뀌었다.
챙! 채채챙!
허공에 던진 검이 서로 부딪히고, 튕겨 나가며 어지럽게 춤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천당문의 비검술. 그리고, 제갈 씨의 진법.’
최근 얻은 모든 것을 쏟아내며, 그녀는 첫 번의 공격을 무산시키며, 의표를 찌르고 발끝을 돌렸다.
휘이이이!
소매와 치맛자락이 회전을 타고 나풀거리며, 검을 쥔 백리설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결코 멈추지 않을 춤을!’
일격(一擊).
챙! 채챙!
“으음. 생각보다는….”
이격(二擊).
챙! 채채챙!
“음? 이건.”
쉽사리 손바닥으로 검신을 때리던 강림의 안색이 와락 굳었다.
독수로 단련한 장법을 아무렇지 않게 가르며, 금강석 같은 장심에 상처를 내는 검법의 신묘함을 알아본 것이다.
“백학검법? 백학검법이 아니로구나!”
조금 전 백리세가의 무인들과는 격이 다른 깊이의 검격에 강림은 대경하며 물러섰다.
그런 그를 백리설은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노련한 강림은 쉬지 않고 거리를 좁히는 검격을 차단하며, 손목을 비틀어 장세를 날렸다.
펑!
덕분에 장법을 복부에 허락해 숨이 막히고 말았지만, 통증에 비명을 지르는 대신 기억을 떠올렸다.
– 이게 강호야. 축하한다. 앞으로 너에게는 더 X 같은 날만 기다리고 있을 거야.
맞다, 교관이 경고한 대로다.
강호는 위험하고 언제 어떤 괴물과 맞닥뜨릴지 모른다.
‘강호에 살아가려면 이런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자, 생각이 이어졌다.
– 강호에서 손쓸 도리가 없는 맹수를 마주쳤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냐?
– 싸워야죠?
– 싸우긴 뭘 싸워. 튀어야지.
교관은 덧붙였다.
– 고수는 맹수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맹수들에게는 등을 보이는 순간 죽고 말지.
– 그런가요?
– 그러니 튈 생각을 하되, 결코 등을 보이지 마. 맹수는 등을 보인 순간 더욱 사납게 변하거든. 결국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 결국 죽는 건가요? 차이가 없잖아요.
– 차이가 없긴. 죽더라도 내가 죽을 자리는, 나를 죽일 놈은 똑똑히 보며 깨꼬닥 할 수 있는데. 누가 알아? 죽자고 덤비다 보면 꽉 물어뜯을 기회가 올 수 있을지도.
– 큰 차이 아냐?
격통에 물러나기를 무시하고, 다시 이를 악물고 나아가자 입가가 비릿했다.
아무래도 입술을 깨물어 버린 모양. 하지만, 백리설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으윽!”
패기와 집요함에 놀란 강림이 물러섰다. 그로서는 어린 소녀에게서 이런 투지를 느낄 것으로 생각하지 못한 것.
그리고, 그것이 작은 차이를 만들었다.
바로.
챙! 채채채챙!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검이 온전히 그녀의 통제 아래 들어와, 영원한 봉황의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던 것.
“크아악!”
춤이 이어질수록 빨라지고 격정적으로 변하는 것이 봉황염천무의 진실한 공능이다.
이미 검무에 몰입한 그녀의 손에서 그려지는 검기의 난무는 어린 관도의 수준을 훌쩍 넘어, 저 아득한 너머에 닿고 있었다.
핼쑥하게 질린 강림에게 처음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무슨 놈의 무공이 실시간으로 진화한단 말인가….”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사방에서 검광이 몰아치는 환상에 물러서던 그가 진기를 극으로 끌어올리며 장법의 회오리를 휩쓸었다.
“으득.”
강력한 장법의 공세에 옷자락이 터지고, 사지가 욱신거렸지만, 백리설은 버텼다.
‘물러서면 호흡을 빼앗겨. 버텨야 해.’
어떤 육신의 고통도 자유 의지를 잃고 팔려 갈 때보다 더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자신이 선택한 강호인이다.
‘오롯이 내가, 생과 사를 선택할 수 있어.’
그렇다면, 패해 죽더라도 마지막까지 적을 노려보고, 저주하며 죽으리.
그것이 교관이 말했던.
‘진짜 더러운 세상의 강호인이니까.’
하지만, 천고의 기상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내는 것만은 아니다.
“제기랄 년!”
강호에 오래 굴러먹은 강호인은 누구나 위급상황을 타파할 한 수 정도는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강림도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