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able Age Wulin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56
제17장 선택 강요 (1)
대화는 소소하게 이어졌다.
적당한 정도의 덕담과 적당한 정도의 찬사.
시종일관 차분하게 질문하고 대답을 이어가는 형태였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면담이 끝나고 일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제갈탄이 다가왔다.
“잘 끝나셨습니까?”
“응. 면담은 잘 끝났어. 근데 이건 뭐냐?”
아쉬운 점이라면 단 하나.
한가득 선물을 안겨주던 전과 달리, 제갈양소가 건넨 것은 한 권의 책이었던 것이 불만이랄까?
“강호백팔사(江湖百八史)?”
이런 책을 어디에 쓴담?
고개를 갸웃거리자니 제갈탄이 웃었다.
“하하. 한번 펼쳐 보시지요.”
팔락. 팔락.
책장을 넘기자 안쪽에 강호의 괴담이나 기이한 소문 같은 것이 잔뜩 적혀 있었다.
“심심풀이로 읽기는 나쁘지 않겠네…. 응?”
책 사이 사이에 작은 전표들이 끼워져 있었다.
“세가에서 자주 쓰는 방식입니다. 대놓고 주머니를 안기는 쪽보다 격조 높아 보인다던가요?”
“오. 확실히 그러네.”
이런 방식도 꽤 신박하네.
“제갈세가의 이름으로 발행한 무기명 전표이니, 어느 곳에 가도 현금으로 바꿀 수 있을 겁니다.”
무기명 전표.
제갈세가의 이름으로 발행한 수표라 꽤 쓸모가 많아 보였다.
뿐만 아니었다.
“책 자체도 제갈세가에서 발간한 양장본입니다. 꽤 희귀한 탓에 수집가들 사이에서 비싸게 팔리는 책이지요.”
“용돈을 주머니에 찔러 넣는 쪽도 좋지만, 이런 은밀한 거래도 나쁘지 않네.”
“공식적으로 책을 선물했을 뿐이니, 뇌물로 걸릴 일도 없습니다.”
역시 제갈세가.
머리가 좋은 인간들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짱돌 굴리는 솜씨가 예술이다. 품위가 있네.
‘나중에 써먹어 볼까?’
장가가서 아이가 생길 때를 대비해서 이런 좋은 것은 기억에 넣어두자.
“이제 돌아가십니까?”
“응, 내일 남궁세가만 들르면 끝이야.”
“남궁윤호는….”
“걱정할 것 없어.”
손을 팔랑거리며 초운휘가 씩 웃었다.
“모쪼록 녀석을 잘 부탁드립니다. 꽤 불쌍한 녀석입니다.”
“세상에 나보다 불쌍한 녀석이 있을까 싶지만…. 알았다.”
“살펴 가십시오.”
“응, 잘 쓸게. 나중에 보자.”
터덜터덜.
이렇게 간신히 전쟁 같은 면담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
교관실에 들어가자, 시간이 늦은 탓인지 의외로 많은 교관들이 업무에 열중이었다.
들어가기 무섭게 여매홍이 손을 흔들었다.
“흐아아아-. 오랜만이에요. 초 교관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얼굴이 반쪽이 되었네요.”
여매홍은 군것질 뽑기에 평생의 운을 다 써버려 불행만이 남은 사람처럼 대답했다.
“면담이 쉽지 않아요. 들러야 할 곳도 많은데, 다들 문파의 어른들 눈치를 보는지 딱딱한 데다,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한다니까요?”
“그것참 괴롭겠네요.”
“정말 힘들어요오오오. 있잖아요….”
이어지는 설명은 듣기만 해도 질릴 정도의 연속이었다.
아이의 성취가 좋지 않다며 갑질을 부리는 것은 예사고, 어디서 배웠기에 가르치는 실력이 이 모양이냐며 화를 내는 가족도 있다고 했다.
심지어 별호도 없는 무명의 교관이 가르친다고 화를 내는 인간들도 있다던가?
그래도 용돈도 잘 쥐여주고, 밥도 잘 주지 않냐고 반문하자 여매홍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런 환대를 받는 일도 있어요?”
아무래도 드문 경우는 아닌 모양이다.
여매홍만의 문제인가 싶었더니, 이야기를 듣던 조현 교관도 동조하고 나섰다.
“전 담당 관도가 아미파 속가 출신인데, 최근에 이곳에 오신 아미파 본산 제자님께서 제대로 가르치는지 확인하겠다며, 참관을 요구하고 계세요.”
이야기를 듣던 여매홍이 혀를 내둘렀다.
“우와. 본산에서 온 사범이요? 엄청 까다롭겠네.”
“그러니까요. 본산제자의 참관이라니…. 거기에 얼마나 까다롭게 구는지 위가 아플 지경이에요.”
두 여인은 누가 더 괴로운지 내기를 하듯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듣기만 해도 질릴 것 같은 이야기의 연속인지라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것 같았다.
‘꽤 고생이 많은 모양이네.’
역시 관도를 네 명만 맡는 것이 다행이었어.
안심하고 있자니, 이번에는 나름 이름있는 권사이자, 동천관 교관 중에서 드물게 별호를 가진 구백철권 양 교관이 다가왔다.
“응? 초 교관 아냐. 평소에 보기 힘들더니, 오늘은 무슨 일인가?”
“그게….”
입을 열기가 무섭게, 출근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 교관실로 들어왔다.
“교관님.”
“오. 윤호 왔냐?”
어두운 안색을 애써 지우며, 다가온 남궁윤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뭐, 괜찮아. 귀찮고, 번거롭고, 짜증 나긴 하지만, 월봉을 받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미리 받아둔 외출증을 꺼내, 수결을 하며 초운휘가 물었다.
“근데 왜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야? 혼자 남아서 수련한다고 하지 않았어?”
“수련도 좋지만, 작은 성취나마 얻었으니,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예의 그거 다 필요 없는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데, 예의 따위 챙길 틈이 있나.
물론 곁에서는 엄청난 항의가 들어왔다.
“관도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남궁 관도. 초 교관님의 말은 잊으세요. 무공은 몰라도 인생관은 조금도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맞다. 사람이라면 기본적인 예의는 챙겨야지.”
이 사람들 너무하네.
순식간에 폭격을 당한 초운휘가 침울하게 외출증을 내밀었다.
외출증을 받아든 남궁윤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관님. 교관님도 오늘 본가에 초대받았다고 하셨나요?”
“응. 귀찮게도.”
“잘하면 본가에서 뵐 수 있겠군요.”
“그러던가 말던가.”
한걸음 물러선 남궁윤호는 필사적인 표정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역시 이 참견쟁이 꼬맹이가 말을 흘린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는 남궁윤호를 보며 여매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는 걸까요?”
“사춘기잖아요. 사실은 오른손에 봉인된 흑염룡 같은 것은 없다고 깨달았는지도 모르죠, 뭐.”
적당히 대꾸했더니 여매홍과 조현 교관이 입을 맞춰 ‘좀 성의껏 대답해요’라고 구박했다.
“아, 나처럼 성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항변해 봤지만, 아무도 동의해 주지 않는 터라 조금 마음이 아팠다.
***
펄럭.
잘 다린 무복을 접어 개었다.
뒤이어 누더기가 된 무복마저 접고, 털이 빠진 붓과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닳아버린 먹.
손때가 묻은 신무검법 해설서.
마지막으로 약수를 뜰 때 사용하는 호리병을 챙겼다.
“다른 것은 없나?”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오 년 동안 이 작은 괴나리봇짐 안에 들어가는 물건이 전부.
하나같이 낡고 해졌지만, 손때가 묻은 만큼 익숙한 물건뿐이다.
“없군.”
신무학관의 정복 대신 조심스럽게 보관하던 의복을 챙겨 입었다.
“이걸 다시 입는군.”
유일한 외출복.
일전에 하오문의 기루에 갈 때 입었던 옷을 이렇게 빨리 다시 찾게 될 줄은 몰랐는데.
씁쓸하게 웃은 남궁윤호가 팔을 꿰어 넣고, 옷자락을 죽죽 잡아당겼다.
가진 중에 가장 좋은 옷이지만, 오래된 옷 특유의 사용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가볼까?”
괴나리봇짐을 등에 건 남궁윤호의 시선이 방을 찬찬히 훑었다.
오랫동안 신세 져온 그늘진 방.
눈을 감아도 눈을 뜬 것처럼 익숙한 이 방에서의 시간이 떠오르자 감회가 새로웠다.
“후우. 잘 있거라. 다시 보자.”
남궁윤호가 문을 열고 다시 닫았을 때, 방에 남아 있는 것은 식어가는 온기와 코끝을 스치는 먼지 냄새뿐이었다.
***
“학관을 나서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모든 것이 새로웠다.
좀처럼 들르지 않던 연무장.
시선을 피해 걷던 그늘진 울타리.
모두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느지막하게 향하던 배식소까지.
뒤이어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지만, 이제는 요람 그 자체가 된 외곽의 연무장까지.
아무도 남지 않은 그곳을 돌아본 남궁윤호는 천천히 모든 것을 돌아보며, 약수터로 올랐다.
꼴꼴꼴꼴.
그곳에서 조심스럽게 호리병을 기울여 석수를 채우고는 다시 산책길을 따라 내려왔다.
“남궁 관도. 외출인가?”
“네, 장 교관님.”
“하하. 잘 다녀오게나. 금의환향이로군.”
금의환향이라.
안면만 겨우 익힌 교관 몇과 인사를 한 남궁윤호는 저 앞에 커져가는 성문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오래전.
이곳에 들어올 때가 언제였던지 까마득하다.
‘그때는 꽤 희망에 부풀었던 것 같은데.’
울적한 기억에 치여 지워졌는지, 정확히 어떤 기분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달그락.
검집을 매만지며 성문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남궁 관도. 이제 나가도 좋네.”
외출증을 확인한 문지기가 목패를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원하는 동안 푹 쉬다 오게.”
글쎄, 그럴 수 있을는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남궁윤호는 대답했다.
“다녀오겠습니다.”
***
교관이 그랬던 것 같다.
– 어우씨. 사람 사는 곳답지 않게 엄청 각박하더라.
동감이다.
사람이 머무는 곳은 동천관이나 이곳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왜 이리 각박한지.
“깨끗은 하네.”
마차 몇 대는 충분히 지나갈 대로. 거기에 양옆으로 늘어선 값비싼 장원과 별장들.
무척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길이다.
‘이것 참…. 불편한걸?’
한때 이곳의 일부였음이 분명할 남궁윤호는 어느덧 고급스러운 거리보다 낡은 방과 먼지 섞인 나무 냄새에 익숙해져 있었다.
“꿀꺽. 꿀꺽.”
목이 타는지라 호리병을 기울여 약수를 몇 모금 삼켰다.
익숙한 물맛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후우. 좀 살겠군.”
저 끝에 화려하게 빛나는 ‘남궁’의 깃발과 ‘창천’기가 나란히 휘날리고 있었다.
남궁윤호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
거창한 환영 같은 것은 없었다.
끼이이이이.
묵직한 송목을 통째로 덧대 만든 문이 열리고, 안에 한 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왔구나.”
굳은 표정을 한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사내.
숙부인 남궁일준이었다.
남천일검. 남천의 검을 대표하는 검객답게 온몸에는 서슬 퍼런 기도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늦었다.”
“준비할 것이 있었습니다.”
“짐은 그게 다냐?”
“지금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겨왔습니다.”
“그 안에 마음의 정리가 담겨 있으면 좋을 것을.”
“좀처럼 담기지 않아, 그것만 남겨두고 왔습니다.”
“쯧.”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반응이었다.
“뭐, 상관없는 일이지.”
무슨 마음이든 돌릴 자신이 있다는 걸까?
아니, 당연히 가능하다는 자신감의 발로겠지.
‘워낙 냉정한 사람이니까.’
응해줄 생각은 조막만큼도 없지만 말이다.
다만 의외의 포석이 있었다.
“용호를 불렀다.”
“동생을 말입니까?”
“제 형이 돌아왔다니 뛸 듯이 기뻐하더구나.”
“…….”
“동천관의 어린 것들과 뒤엉켜 살다 보니 네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다. 용호를 보면 좀 나아질 것 같아 불렀다.”
역시나.
무슨 속셈으로 동생을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겠군요.”
남궁윤호는 모르는 척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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