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of Ice RAW novel - Chapter 7
제1장 어둠 속의 올빼미
1
오랜만에 조정례의 입가에 미소가 담겼다. 잔인함이 뒤섞인 음산한 미소였다. 한동안 그렇게 손에 들린 서신을 보며 당과를 맛보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기립해 있던 홍규가 물었다.
“일이 잘 풀린 모양이로군요.”
조정례는 짙은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손에 들린 서신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홍규는 서신을 살폈다.
서신은 사자비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이틀 후에 그의 수급이 들어 있는 상자가 도착할 것이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이로써 한시름 덜게 되었으니.”
조정례는 대답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중원 전체가 가뭄이라지? 빨리 비가 와야 할 텐데…….”
☆ ☆ ☆
보름 전 항주.
“예상대로입니다.”
매복지역에 도착한 제갈진은 밝은 표정으로 그렇게 보고를 올렸다.
가주와 사마정은 새삼 놀랍다는 얼굴이 되었다.
“모두 알고 있었다는 뜻이냐?”
가주가 묻고 제갈진이 대답했다.
“네. 대비를 해놓았던 것 같았습니다. 바로 움직이더군요.”
가주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이번 작전은 제갈세가와 사마소국이 힘을 합친다 하더라도 천라지망을 전부 상대하기란 벅찬 일었다. 상당한 수준으로 판단되는 친황대 이백 명이 가세했으니 더욱 그랬다. 화경의 고수로 짐작되는 소천룡까지 그 속에 끼어 있으니 말해 무엇하랴. 때문에 부도어사의 도움이 절실한 상태였고, 그가 대비를 해놓았다면 승산이 커질 수밖에 없다.
다행이었다. 제갈진의 예상대로였으니 말이다. 만약 그의 예상이 빗나갔다면, 그래서 부도어사에게 대비가 없었다면 오늘 작전은 포기하고 뒤를 기약하거나 원래의 방향대로 친황대를 도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문제는 부도어사가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는 것인데……, 가주의 불안은 거기에 기인하고 있었다. 모두 알고 있는 부도어사라면, 그리고 만반의 대비까지 해놓았다면 제갈세가와 사마소국의 도움이 그리 크게 와 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제갈진이 여전히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차분하게 말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또한 예상대로니까요.”
이번에는 사마정이 물었다.
“예상대로라면 수군의 진영이 함정이라는 사실은 몰랐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요구 조건을 들어주었겠군.”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항주를 우리 두 가문에 넘기겠다더군요.”
잠깐이지만 가주와 사마정의 눈빛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는 비조처럼 날아와 바닥에 내려섰다.
그림자를 알아본 가주가 물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그림자, 조금 전 사자비를 만났던 제갈천이 말했다.
“부도어사께서 우리에게 천라지망만 깨뜨리고 진영에는 끼어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방해가 된다고…….”
가주는 실소를 흘렸다.
“이 작전에 몇 명의 고수가 투입되었는지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말해 주지 않았더냐?”
“전해주었습니다만 나서지 말라고만 했습니다.”
가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제갈진을 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저와 만났을 때도 비슷한 뜻을 보이더군요. 제 눈엔 결코, 무모한 객기를 부릴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부도어사의 말대로 빠지자는 뜻이냐?”
“두 가문의 사활이 걸린 일. 이미 친황대에 등을 돌릴 결심을 한 만큼 어떤 결과가 나오든 본가와 사마소국이 부도어사에게 붙었다는 사실은 숨겨지지 않을 겁니다. 거기다…….”
제갈진의 미소가 달빛만큼이나 밝아졌다.
“그가 성공을 확신하기 때문에 빠지면 안 됩니다. 한 손 거들었다는 표시는 내야지 않겠습니까!”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겠구나.”
제갈진이 덧붙였다.
“또한, 실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도움으로써 그런 위험부담을 완전히 없애야 합니다.”
그때까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사마정이 동조를 했다.
“진의 말이 맞습니다.”
실패는 곧 항주무림의 공적으로 낙인찍히는 셈이라 일이 끝난 후에는 모든 문파의 공격을 받게 되고, 그보다 친황대의 보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사마정은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계획대로 진행하시지요, 어르신!”
가주는 대답 대신 제갈천을 향해 명했다.
“너는 매복 장소로 가서 국주의 딸과 아이들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가거라. 조만간 큰 전투가 벌어질 게다.”
작전대로 하겠다는 뜻. 그 말이 억눌렀던 제갈천의 불만을 불렀다.
“저도 거들겠습니다.”
“네가 할 일은 끝났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힘이…….”
“놈!”
가주의 얼굴에 노여움이 잔뜩 배어 나왔다.
“알량한 무공을 뽐내고자 목숨을 걸 셈이냐? 명대로 하거라.”
찔끔한 제갈천을 물리친 가주는 곧바로 사마정을 보았다.
“자네도 이만 가서 움직일 준비를 하시게. 부도어사가 그물 속으로 들어갔다니 곧 신호가 보일 터. 신호 후에는 곧바로 자네가 맡은 쪽 그물을 파괴하고 약속 장소로 오게.”
“알겠습니다.”
“어떻게 됐죠?”
밤길을 되밟아온 제갈천을 향해 제갈린 물었다.
제갈천은 눈빛으로 대답하고 손짓했다.
“본가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사마궁궁에게 친절히 말했다.
“소저도 우리와 함께 본가로 가는 것이 좋을 듯하오. 소국보다는 본가가 더 안전할 테니 말이오.”
“이대로 돌아가는 겁니까?”
말투 속에 담긴 은근한 불만은 제갈성의 것이었다. 의욕이 앞서고 한창 무공에 자신이 붙을 시기라지만, 그보다 세가의 일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아직도 보호받아야 하는 아이처럼 울타리 속에 가두려는 어른들의 처사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기회에 제갈진처럼 가문의 어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능력을 갖췄음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하나 제갈천이 그 의지를 일언지하에 꺾어버렸다.
“가주님의 명이시다.”
먹던 당과를 빼앗긴 아이 같다고나 할까. 제갈성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의외로 제갈린이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대로 우리만 돌아가기는 석연치 않아요.”
“어쩌자는 거냐?”
“직접 나서지는 못해도 지켜볼 수는 있지 않겠어요? 혹, 우리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고요. 그때 나서면 되죠.”
“고작 우리 셋이서?”
이번에는 사마궁궁도 제갈성의 손을 들어주었다.
“저도 돕겠어요.”
그녀를 호위하던 두 무사가 펄쩍 뛰었지만 사마궁궁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제갈천은 표정을 굳혔다. 사마궁궁까지 나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하지만 지엄한 가주의 명을 거스를 용기는 여전히 없다. 자연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단의 무리가 그들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침묵이 찾아왔다. 제갈천 등은 바짝 긴장하여 접근하는 무리를 주시했다. 대충 보아도 이십 명은 족히 넘는 것 같았다.
작전에 투입된 대부분은 천라지망을 구성한 상태라 빠질 수 없을 것이고, 그들을 깨뜨리기 위한 세가의 무사들 또한 매복 지역에 숨죽이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밤에, 그것도 성 밖으로 이십 명이나 되는 무리가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누구죠?”
낮은 제갈린의 물음에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혹시, 부도어사를 돕는 무리?’
제갈천의 생각은 바람에 가까웠다. 생각대로라면 다행이지만 만약의 변고라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 사이에도 적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굴을 파악할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졌을 때 제갈천은 무기를 뽑아들었다. 남은 이들도 마찬가지, 결연한 표정으로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한데, 선두에 선 상대의 용모를 파악한 순간, 그 용모가 세가의 후기 중에서 제갈진 다음의 연장자인 제갈헌원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순간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형님!?”
다가오던 제갈헌원이 제갈천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보였다.
“무기부터 뽑아든 걸 보니 단단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구나!”
표정을 구긴 제갈천이 물었다.
“본가는 어찌하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걱정이 되어서 왔다. 우리를 보호하려는 가주님의 마음은 알지만,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 이런 일을 강 건너 불구경할 만큼 속이 편한 놈은 못 되는 모양이다.”
바로 뒤에 있던 삼십대 초반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이런 중대사에 빠지면 제갈가의 자손이라고 할 순 없지.”
제갈천의 친형, 제갈환이었다.
“형까지?”
“나뿐이겠느냐?”
말과 함께 제갈환은 엄지를 들어 뒤를 가리켰다. 그곳엔 제갈을 성으로 쓰는 젊은 무인 스물다섯 명이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다.
‘우리도 이젠 어른들의 인정을 받을 시기가 왔다.’
모두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었다.
파팟!
불화살 두 개가 하늘로 솟구치더니 수줍은 새색시처럼 붉은빛을 뿌리고 사라졌다.
신호였다.
[목표물이 진영에 도착했다.]
어디선가 전음이 울렸다.
비슷한 의미의 전음은 불화살을 쏘아 올린 곳을 중심으로 십 리에 걸쳐 여기저기 흘러나왔다. 그리고 천라지망이 서서히 진영 쪽으로 좁혀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사냥을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2
세부적인 작전을 전달받지 못한 제갈헌원 등은 제갈천을 중심으로 모여 설명을 듣고 있었다. 밤하늘을 밝힌 붉은빛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제갈헌원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저 신호가 맞는 것 같은데?”
제갈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갈천을 보았다.
“이제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야지.”
그러면서 주위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선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천라지망을 피해서 이동하겠지만, 그래도 은밀히 움직여야 합니다.”
제갈환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 목적이 뭐냐? 본가를 돕는 것 아니냐?”
피해서 이동한다는 말이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제갈천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본가가 밀리면 그때 돕기로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가주님께서 진노하실 테니까요.”
제갈헌원이 수긍했다.
“맞는 말이다.”
제갈천이 선두에 서고 나머지가 그 뒤를 따랐다.
☆ ☆ ☆
사자비의 입가에 비웃음이 잔뜩 담겼다. 수군의 진영에 도착하자 건너편 언덕에 나무기둥 몇 개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거센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것 때문에 멀리서도 불이 난 것처럼 밤하늘이 밝게 보였을 것이다.
“쥐새끼들이 두려움에 떠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지경이다. 나와라!”
낮은 목소리임에도 내공이 실려 주변을 들썩이게 했다. 그러나 사위는 쥐죽은 듯 조용하다. 수군 진영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어 임시로 지어놓은 몇 개의 나무 막사와 병사들이 기거하는 천막을 지나쳤다. 잠시 후, 그의 눈에 수군이 모여 조회를 하는 드넓은 공터가 들어왔다. 진채의 중앙이었다.
사자비는 그곳 중심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내걸린 화로와 횃불, 언덕에서 타오르는 몇 개의 불기둥 때문에 사위가 대낮처럼 밝았다. 그때 하늘에서 울리는 괴소성이 귀를 어지럽혔다.
사자비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순간 수십 개의 둥근 물건이 사방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불이 붙은 그것은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여전히 스산한 괴음을 쏟아내며 연기를 쥐어짰다.
‘독?’
그럴 가능성은 없다. 독을 다루는 문파가 아니라면 저 많은 독을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곳의 지형과 시간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강변을 끼고 있는 장소는 바람이 불기 마련이고 연기를 이용한 독은 그것을 사용한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해독제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천 명이나 되는 인원을 해독할 약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답은 하나다. 아마도 사천의 당문을 시초로 무림에 퍼진 화연(火煙)일 것이다. 적의 시야를 없애고 강한 냄새와 지독한 연기로 눈과 코를 괴롭히는 물건이겠지. 그것을 증명하듯, 삽시간에 중앙 진채가 매캐한 냄새로 가득 차고, 짙은 연기가 무겁게 깔려 그 일대를 구름바다로 만들었다.
사자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고수라도 투시능력까지는 발휘할 수 없다. 시야가 연기 때문에 닫혔으니 바로 코앞도 식별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척을 죽이고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여 오감을 키운 후, 육감으로 주변을 파악해 나갔다.
‘화살인가!’
확신이 들었다. 그것도 상당한 내공이 실린 화살이었다.
적들은 진채에서 멀리 떨어져 숲을 에워싼 것이 분명했다. 활이 날아오는 소리로 적과의 거리와 숨은 장소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소리는 들리는데, 보이질 않으니 감으로 피하는 수밖에 더 있나!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날아오는 활이 너무 많은 것이다. 모두 정확히 겨냥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연기 때문에 적들도 아무렇게나 쏘고 있었다. 날아오는 방향도 목표도 정확하지 않으니 오히려 피하기가 어려웠다. 날아오는 곳을 예측하기 어려워서 잘못 움직였다가는 화살이 오는 곳으로 몸을 피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물론, 화살을 맞기에는 사자비의 몸이 빠르고 강했다. 내공을 올려 호신강기를 형성하고 지척까지 날아온 화살을 감지해서 쳐내거나 간간이 피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적들도 그것을 알 텐데 화살비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내공을 소비라라는 뜻이겠지.’
상대의 의도를 파악한 그는 곧장 신형을 움직였다. 무림고수가 쏘는 화살이라 상당한 기공의 호신강기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끌면 놈들의 의도대로 내공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헙!”
숨을 들이마시는 기합소리와 함께 그의 발이 땅을 박차고, 십여 장이나 솟구쳤다. 순식간에 구름바다를 뚫은 그는 곧이어 불기둥 뒤, 정확히 언덕 뒤에 자리한 수림에서 활을 쏘는 무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자비의 입가에 비소가 드러났다. 눈이 마주친 무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향해 활을 재는 것이다. 그 옆에서도 줄줄이 화살을 쏘는데, 누군가가 경악하며 외쳤다.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날아오는 화살이 방향을 바꾸었다. 안갯속이라 그들도 무작위로 화살을 날렸으나 이번에는 정확히 사자비를 겨냥하여 쏘는 것이다. 하지만 방향을 바꾸기도 전에 사자비는 이미 이형환위(移形換位:몸의 위치를 순간적으로 바꿔 이동하는 고급 경공술)의 기법을 이용하여 불기둥 쪽으로 몸을 날린 상태였다.
꽤 먼 거리였기에 한번 바닥에 내려서서 연기 속에 파묻히고 다시 뛰어올랐을 때, 그 행동을 예상했던 무사들이 다시 화살을 쏘았다.
다다다다닥!
연기를 가른 살은 콩 볶는 소리를 내며 주변을 고슴도치로 만든다.
사자비는 개의치 않고 달렸다. 뛰어오르고 내려서기를 반복하며 살이 쏘아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천막과 천막 사이를 뚫는데, 그렇게 이십여 장까지 접근했을 때 그의 허리춤에서 마라겸이 뽑혔다.
마라겸은 밝은 빛을 뿌리며 횡으로 연기를 갈랐다.
구우우웅!
연기가 쏟아지는 공력에 얼어 순간적으로 회오리를 일으키니, 잠시간 사자비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일순, 거대한 기운이 퍼져 나오며 연기바다가 번쩍이는데 흡사, 구름 사이를 때리는 번개같은 느낌이었다.
활을 쏘던 무사들이 그것을 보고 경악성을 터뜨렸다.
“산개(散開)!”
판단과 대응은 적절한 것 같았다. 구름바다가 갈라지며 그 속에서 반월형의 백색 강기 하나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미리 피하지 않았다면 상당한 사상자를 남겼을 것이다.
일시적으로 앞쪽으로 날아오는 화살이 멈추고 곧이어 비명이 울렸다. 양떼를 헤집는 호랑이처럼 사자비가 그들을 덮쳤던 것이다.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화살도 이젠 없었다. 이미 사자비와 부딪쳤으리라 짐작한 그들은 진법을 구성하기에 바빴다.
“삼항북봉진(三抗北鳳陳)을 펼쳐라!”
수룡문주의 내공 실린 외침이 문도들을 재촉했다. 그러나 직접 부딪힌 탈반경의 고수는 서호에서 구경했던 것 이상으로 빨랐다. 채 진이 구성되기도 전에 반 넘어 바닥에 쓰러지고, 수룡문주의 목은 타오르는 낫에 찍혀 피를 뿌린 것으로 제압되었다.
수룡문주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자신을 비웃는 사자비를 보며 뒤로 넘어갔다. 그것을 보았는지 수룡문 옆을 맡았던 천응방의 장로가 두려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대, 삼대는 삼(三)지역으로 퇴각, 일대는 목표물을 막아라!”
순간 수십 명의 고수가 벌려서며 사자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두 배의 인원은 표창과 암기를 던지며 천천히 물러나고 있었다.
“시작된 건가!”
붉게 빛나는 비단이 상상된다. 언덕을 밝히는 불기둥과 진채를 지키던 횃불은 검게 물든 수면에 그렇게 비춰 보인다.
소천룡은 한동안 그것을 감상하다가 고개를 들어 진채를 주시했다. 폭음이 울렸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구양수가 함성과 비명을 들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고군분투하는 모양이로군. 가려 뽑은 일천의 정예를 모두 상대하려면 꽤 많은 내력소모가 있을 텐데……. 생각이상으로 녀석들의 실력이 대단한 것 같지 않소?”
시간이 지날수록 소음이 커지고 비명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만큼 사자비를 상대하는 항주무인이 전력을 다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갑자기 소천룡의 입가에 조롱의 미소가 걸렸다.
‘어쩔 수 없겠지. 탈반경의 고수와 직접 부딪혀 보니 죽이는 것은 고사하고 살아남기도 벅찰 테니.’
항주무인들은 살고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수면에 타오르는 붉은 비단과 진채를 번갈아 보던 구양수가 슬며시 제안했다.
“우리 지시한 대로 움직여만 준다면 아무리 귀로주라도 상당히 고전할 것이지만, 역시 우리가 나설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소.”
구양수는 소천룡처럼 비소를 머금은 채 재밌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러다 전멸할지도 모르니!”
“어차피 천라지망을 구성한 일천의 고수까지 소모시켜야 하오.”
“그렇게 되면 처리 후, 녀석들의 불만이 심할 텐데?!”
“총독의 뜻이오.”
“……!”
“최대한 놈들의 전력을 이 전투로 줄여놓으라 하셨소.”
“설마?”
소천룡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귀로주를 처리한 후, 항주 무림 몇 개를 지단으로 만들 거라 하셨소. 하여, 주력을 여기에서 대부분 잃게 해야 하오.”
“어부지리를 택하셨군!”
구양수는 씁쓸한 미소를 남겼다.
“하긴, 그분다운 계책이오.”
☆ ☆ ☆
“큭!”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동료 하나가 쓰러졌다.
북제신관(北帝新館)의 비사대(緋四隊) 조장 도진(刀珍)은 인상을 찌푸렸다. 항상 그를 따라던 부조장 일룡룡(日龍龍)이 등에 비수를 달고 바닥에 붙어 있는 것이다. 호흡이 없는 것으로 보아 즉사였다.
“웬 놈들이냐?”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고 주변을 향해 낮게 외쳤다. 동시에 그를 따르던 오십 명의 대원이 걸음을 멈추며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들은 천라지망을 구축하다가 신호를 받고 진영 쪽으로 서서히 거리를 좁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촘촘히 천라지망을 구성한 뒤, 다시 신호가 오면 일부는 남아서 그대로 진을 형성하고 일부는 본대와 합류하여 부도어사를 처리하게 된다. 그런데 사단이 일어난 것이다.
도진은 주변을 살피며 잔뜩 긴장했다. 또 다른 변수가 존재하는 것일까? 누가 비수를 던져 일룡룡을 죽였을까?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휘리릭!
바람 소리가 일더니 숲을 뚫고 이백여 명의 익숙한 복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복하고 있었음이 분명한 그들을 보며 도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선두로 치고 오는 노인을 보았다.
“대, 대협께서는!”
도진의 눈은 제갈세가의 가주를 마지막으로 담은 채 뒤집어 졌다. 목이 잘린 것이다. 뒤따르던 대원들도 마찬가지, 약간의 저항은 있었지만 대부분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바닥에 몸을 뉘었다.
일을 끝난 후, 검처럼 예리한 무사가 보고를 올렸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가주, 제갈산하가 명했다.
“몇 명을 남겨 시체와 흔적을 지우고, 나머지는 다음 매복지로 이동하시게. 나는 진에게 잠시 들렸다 합류하겠네.”
“존명!”
“저, 저게 말이 되나?”
진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능선에 불신이 가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제갈환이었다. 그의 두 눈엔 한 마리의 백귀(白鬼)가 한가득 들어왔다.
백귀는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기계적이었다. 사라진다 싶으면 어디선가 나타나 서슬 시퍼런 낫을 휘두르고, 그러면 불빛이 번쩍인다. 불빛은 비명을 동반하고, 비명 뒤에는 피가 뿌려진다. 마지막은 하나의 시신이 바닥을 덮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것의 반복이었다. 그런 동작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보기에는 너무 단순해서, 인간이 저렇게 쉽게 그리고 규칙적으로 죽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 인간이 문파에서 가려 뽑은 무림고수라서 더욱더 그랬다.
“저, 저건…….”
제갈천이 형에게 동의하듯 경악한 목소리로 떠듬거렸다.
“파괴야!”
죽이는 단순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백귀, 부도어사는 파괴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인간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파괴하려는 악귀 같았다.
모두 정신없이 그 장관을 목격하기에 바빴다. 이곳까지 오는데, 제갈세가가 매복한 지역을 스쳐 지나왔다. 혹, 도움이 필요하면 나서서 한 팔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인데, 필요 없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자연 실력을 뽐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 하여 산등성이를 따라 이동하다가 진영이 훤히 보이는 곳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가장 중요한 작전지역이니 그곳을 주시하다가 필요하면 나설 생각을 한 것이다. 자신의 활약이 더 빛이 날 수 있도록……. 하지만 지금 그들은 백치가 되어버렸다.
저런 고수가 일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숫자를 상대로 전의를 불태우는데, 자신들이 달려들었다간 창피만 잔뜩 당할 것 같았다. 나설 기회를 살피기도 전에, 어쩌면 기회가 생겨도 나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발부터 얼어붙는 것을 느껴지는 것이다.
가장 연장자인 제갈헌원은 그나마 이성적이었다.
“저자가 정말 탈반경의 고수라고?”
서호를 시작으로 두 번째 구경하면서도 감탄에 빠진 사마궁궁이 흘러가듯 대답했다.
“그래요.”
“신호가 보이고 바로 싸웠을 테니, 이 각은 넘겼을 텐데…….”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사자비의 움직임은 내공을 철저히 제약하여 기력을 아끼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너무 빠르다.
“황실이 괴물을 길렀군. 얼마나 수련하면 저렇게 될까?”
누군가가 반박했다.
“황실의 무공이야 뻔한데, 저런 고수를 만들 수는 없죠.”
제갈성은 사마궁궁을 힐끔거리다 풀죽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 초빙 고수가 아닐까 합니다.”
“저런 고수가 무림에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는데!”
“은거 고수이거나, 은거 기인에게 배운 제자이거나 그런 유겠죠.”
이번에도 사마궁궁이 슬쩍 끼어들었다.
“황실에서 배출한 고수가 맞아요. 황족보호대는 원래부터 외부인물을 들이지 않는다고 알고 있어요. 친황대가 황족비밀보호대라니 분명할 거예요.”
모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되었다.
“도대체 황실에 저런 고수를 어떻게 키운 거야!”
이번에는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자비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기억하려는 듯 집중하기에 바빴다. 잠시의 여유라도 보였다간 사자비의 동작을 놓칠 것만 같은 것이다.
제2장 황궁의 실체
1
그는 독비양(獨肥壤)이라고 불렸다.
독비양!
멋진 별호지만, 숨은 의미처럼 홀로 고상한 고수라서 붙은 별호는 아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하여 특출난 재능을 드러낸 자도 아니었다. 한데, 왜 독비양인가!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그를 새롭게 한다.
바로 입이다.
그는 항상 무언가를 먹고 있다. 먹지 않을 때에도 그의 볼은 만두 두 개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부풀어 있어서 무언가를 먹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홀로 먹는 돼지, 그런 면에선 독비저(獨肥猪)라 불려야겠지만 감히 그 앞에서 독비저라 부를 사람은 없었다. 항주에서 뿌리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항주문의 부문주였으므로. 감당하는 직책만큼이나 그의 무공 또한 고강했으므로.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이, 거기 돼지.”
상대가 낫처럼 생긴 기형검을 들어 그를 지목한 것이다.
“그렇게 지켜만 볼 텐가?”
독비양, 강삼(江三)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친근한 별명인가. 아마도 십오 년 전일 것이다. 그때 마지막으로 그 별명을 불러준 동료를 죽이고 문주에게 호된 벌을 받지 않았던가. 상대도 그 사실을 알까?
모르는 것 같다. 상대는 개의치 않고 다시 도발해 왔다.
“수하들이 죽어 가는데, 뭘 그렇게 먹고 있나?”
“이, 이…….”
평소라면 욕설을 쏟았을 텐데, 지금 강삼은 그럴 용기를 잃었다. 싸늘한 상대의 표정이 그를 위축시킨 것이다.
작전은 애초부터 틀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손발 한 번 맞춰보지 못한 서른다섯 개의 문파가 수군 진영을 중심으로 넓게 펼쳐져 진을 구성한 작전이니 아귀가 맞을 리 없는 것이다. 다만, 치고 빠진다. 그 빠진 부분을 다른 문파가 메운다. 그렇게 목표물을 끌고 다닌다. 이것만 어느 정도 지켜질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항주문은 괴멸이었다. 역사는 깊어도 큰 문파 틈바구니에 끼어서 세력을 떨칠 수 없었던 항주문은 이번 작전에 서른 명밖에 지원할 수 없었다. 그중 열 명이 천라지망을 구성하고자 빠져 있으니 진영에는 스무 명만 투입된 셈. 그래서 사마소국의 일부와 합쳐 동쪽 수림을 맡고 있던 것인데, 언제부턴가 사마소국의 무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 수 없지만 사실을 알았을 때 강삼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 시기에 북쪽 매복이 무너지고 목표물이 동쪽으로 접근한다는 기절할 보고가 올라왔다.
이곳을 지키던 고수의 일부가 혹시 모를 상대의 도주를 막고자 달려갔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다. 상대는 도망은커녕 이곳에 있는 무사들을 모두 죽이려는 듯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모두 죽고 상대는 여기까지 밀고 들어왔다.
신호를 올려 남쪽에 지원을 요청했다.
과연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버틸 수 없었다. 탈반경의 고수를 상대로 이십 명의 정예는 소용이 없었다. 강삼은 도망치고 싶었으나 수하들을 두고 간다는 것은 치욕, 어쩔 수 없이 죽어가는 수하들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데, 녀석이 지금 그의 밑바닥 깊숙이 숨겨진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스르릉!
강삼은 몸집만큼 거대한 대도를 뽑았다.
‘빌어먹을 녀석들!’
도망친 사마소국도 저주했다. 하나 그들에 대한 분노는 금세 수그러들었다. 막 검초를 펼치려는 때 상대의 등 뒤로 사마소국의 무사 서른 명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강삼은 용기백배의 기분으로 몸에 힘을 주었다. 대도가 그의 기분을 알리듯 울음을 쏟아낸다. 하지만 상대의 뒤를 칠 줄 알았던 사마소국이 멈춰 섰다.
강삼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상대를 공격할 생각이 없는 보였다. 그렇다면 왜 왔을까?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도영진이라고 했던가. 사마소국을 이끌던 자가 상대를 지나쳐 그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요?”
물음은 놀랍게도 일검으로 돌아왔다.
팟!
예리한 검날이 강삼의 목을 쓸어내고, 그 결과 통통하게 살이 오른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그제야 바닥에 떨어진 강삼의 두 눈에 배반당했다는 분노와 의문이 풀렸다는 시원함이 드러났다.
그것을 무심히 보던 사내가 몸을 돌려 기형검의 상대에게 공손히 포권했다.
“사마소국 현천대주 도영진이라고 합니다, 대인!”
사자비는 가소로운 듯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일 뿐, 속은 그리 편치 않았다. 의외로 이곳에 매복한 녀석들의 실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가장 까다로운 점은 녀석들이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흩어졌다가 몰려들고, 세가 불리해지면 어김없이 도망쳤다. 그사이 다른 문파가 달려들어 쉼 없이 내공을 소모비 시키고, 또다시 사방으로 흩어진다.
지금까지 베어 넘긴 자만 수백 명, 정면으로 부딪쳤다면 반 각도 걸리지 않을 숫자였지만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에서 다수를 쫓아다니며 상대하자니 생각보다 많은 내공 소모가 있었다.
설혼마녀에게 얻은 상처도 문제가 되었다. 앵속으로 고통을 덜었으나 이제 약기운이 떨어진 것이다. 한 알을 더 복용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 몸 상태가 아니었다. 처음 한 알을 먹었을 때 고통은 사라졌지만 어지럼증과 흥분이 밀려와서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내심을 숨긴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인원이 전부인가?”
도영진이 대답했다.
“신호가 울렸으니 조만간 남쪽을 지키던 일부가 이곳을 기점으로 에워싸게 될 겁니다. 그중에 제갈세가가 섞여 있습니다.”
“제갈세가도 녀석들의 등을 치겠군.”
“그럴 겁니다.”
“서쪽은 몇 명이 매복해 있지?”
“도룡문을 비롯하여 여덟 개의 문파가 있습니다. 모두 이백팔십 명입니다만 지금쯤은 진영 쪽으로 들어와 있을 겁니다. 유사시에 그들도 지원을 하기로 되었으니까요.”
“국주는?”
“천라지망을 구성했던 대부분을 처리했고, 이 각 후에 합류하겠다고 조금 전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하하!”
사자비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사마세가와 제갈세가의 힘이 대단하구나. 하나, 그들과 대치하면 나서지 마라.”
왜 그래야하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사자비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남쪽이 아니라 진영 쪽이었다. 어디선가 그것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진영으로 이동 중이다.”
덕분에 동쪽으로 지원 오던 일백 명의 무사가 사자비를 쫓아 진영으로 방향을 틀었다.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사자비를 향해 도영진은 혀를 찼다.
“아직도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내공을 상당히 아꼈다는 증거인데, 전력을 다하면…….”
그는 몸서리쳤다. 결코, 저런 자를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진영을 뒤덮은 구름바다는 더 이상 시야를 가리지 못했다.
사자비는 곧장 진채를 덮쳤다. 아무래도 숲을 끼고 다수와 상대하는 것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도진영의 말대로 그곳에는 서쪽에 매복했던 항주무인들이 진입해 있었다.
그들은 사자비가 모습을 드러내자 잠시 당황한 빛을 띠더니 이내 산개하여 숲에서 했던 것처럼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숲과 진영은 다르다. 은폐엄폐물이 숲처럼 많지 않은 것이다.
다행이라면 목표물이 전투에 크게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과 내력과 체력이 빠진 듯 행동이 둔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남쪽을 지키던 항주무인들이 지원을 나와 그들의 사기를 올려주었다.
‘피해가 컸으나…….’
도룡문주는 직접 신호탄을 꺼내 들었다. 인근까지 천라지망이 좁혀졌을 테니, 이것을 쏘아 올리면 그중 일부가 다시 지원을 올 것이다. 그렇게 힘을 합하여 친황대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임무는 끝이 난다.
☆ ☆ ☆
임을 기다리는 세월이 천 년 같다고 누가 말했던가!
☆ ☆ ☆
“크윽!”
무사 하나가 기형검에 맞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는 바닥에 몸을 뉘었다.
죽음에 익숙해진 것인가. 도룡문주의 인상이 심하게 구겨졌다.
이미 백수십 명이 차례로 기형검에 의해 쓰러졌으니 놀랍지는 않았다. 수하들이 죽어가는 데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벌써 왔어야 할 원군이 보이지 않아 기분이 상할 뿐이었다.
‘신호탄을 쏜 지 이 각이나 지났는데 왜 오지 않는 건가.’
원군은 그렇다 하더라도 친황대는 벌써 왔어야 한다. 그들조차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석연치 않았다.
그리던 연인은 아니지만 애타게 기다리던 녀석들이 보이지 않으니 일초가 천 년 같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더욱 그를 불쾌하게 만든 원인은 부도어사였다. 흡사, 자신과 항주무인들을 데리고 장난치는 것 같지 않은가!
도룡문주는 오히려 부도어사가 시간을 끄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순간부터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자 부도어사는 달려드는 녀석을 제외하고는 살수를 펼치지 않았다. 비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진영을 돌아다니다가 기회를 틈타 공격하는 무사를 죽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이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남쪽에 매복한 전원이 진영으로 합류했는데도, 이젠 삼백 명도 남지 않은 것이다.
다리가 아픈 것인지 부도어사는 이제 진영 공터에 서 있기만 했다. 그래서 삼백 명이 모두 그를 둘러쌓으며 대치만 하고 있었다.
‘악귀 같은 놈!’
도룡문주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아마도 칠백 명의 피로 목욕을 했을 부도어사를 향해 욕설을 뱉어냈다. 입속에서 맴돈 말이라 들리지 않았을 텐데 부도어사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왔다.
비웃음이 분명한 미소를 흘리며 부도어사, 사자비가 말했다.
“왜 더 이상 덤비지 않는가.”
“……!”
“나를 죽이고자 끌어들인 것이 아니었나?”
사자비는 적을 두고도 마라겸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 오만한 행동을 두고 무인들이 발끈했으나 섣불리 나서는 자가 없었다.
사자비가 킥킥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죽음이 두렵나?”
그는 도발하듯 두 팔을 벌렸다.
“죽일 기회를 줄 테니 달려들어봐라. 자, 난 무방비다.”
“……!”
“역시…… 말로는 무인이라지만 결국 집에서 기른 개는 개일 뿐이지. 잘해주면 기어오르고, 때리면 꼬리를 말고 구석에서 오줌을 지릴 뿐 아닌가.”
“닥치시오.”
참지 못한 도룡문주가 노성을 터뜨렸다.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도 지금뿐일 거요.”
“믿는 구석이 있었던가!”
그때, 사자비의 등 뒤에서 우렁우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일세, 귀로주. 아니, 이제는 직책이 나보다 높으니 대인이라고 불러야겠군.”
사자비는 돌아보지 않고 도룡문주에게 말했다.
“저놈들을 믿었던 모양이로군!”
그제야 몸을 돌려 금빛 장포를 입은 두 사내를 보았다. 그중 하나를 향해 반가움을 보였다. 구양수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오랜만이오.”
구양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했는데, 총독의 계획대로 덫에 걸려들 줄은 몰랐네.”
“덫이라…….”
사자비는 조소를 흘렸다.
“오히려 내가 놀랐소. 내 실력을 한 번 경험해 보았을 텐데, 이 자리에 올 줄은 몰랐구려.”
구양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사자비와의 첫 만남에서 호되게 당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내심을 숨기고 싶은 모양, 그의 입가에 담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무공을 자신하는 만큼 바보 같은 짓이 없지.”
“맞는 말이오. 한데, 두 분만 오셨소? 숨어 있는 녀석들을 모두 데려오시오. 그래야 나에게 달려들 용기가 생길 것이 아니오.”
조롱이었다. 구양수는 더 이상 내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사자비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허장성세를 부리기에도 지쳐 보이는 얼굴인데,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가!”
이어 콧방귀를 꼈다.
“흥. 원한다면 최대한 빨리 처리해주지.”
탁!
일변 말을 하고 일변 손가락을 튕기자 딱딱한 소리가 신호처럼 울렸다. 순간 황금색 물결이 진영을 뒤덮으며 넘실거리더니 요기를 풍기는 이백 명의 친황대가 쏜 살처럼 날아와 일대를 포위해 버렸다. 그 놀라운 경공술 때문에 중인들이 놀라는 사이 도룡문주가 급히 소천룡에게 다가갔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문제가 있나?”
얼음처럼 싸늘한 소천룡의 표정을 마주하자 도룡문주는 원망을 할 수 없었다.
“진을 구성했던 자들이 아직 지원을 오지 않았습니다. 하여 대인과 천라지망에 변고가 생기지나 않았는지…….”
“천라지망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네.”
“지원을 요청한 신호탄을 쏘지 않았나?”
“그랬습니다만, 아직까지…….”
소천룡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도 신호를 확인했다. 해서 그 후로도 이 각이나 기다린 뒤에야 출발했다. 항주무인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고, 그런 만큼 사자비의 힘을 더 빼놓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소천룡은 구양수를 보았다. 의문을 구하는 눈빛이었지만 구양수라고 알 리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며 사자비를 보았다.
사자비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뭔가 있는 듯한 얼굴. 구양수가 도룡문주를 향해 확인하듯 물었다.
“그렇다면 애초 이곳에 매복한 일천의 인원으로 반 시진이나 시간을 끌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천라지망을 구성한 일천의 무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소천룡이 갑자기 살기를 풍겼다. 평생 무공에 대한 생각만으로 살아온 그였다.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계획대로 상대를 죽이면 되는 것이다.
스르릉!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얇고 긴 장검이 그의 등에서 뽑혀 나와 하늘로 솟구쳤다. 곧이어 허공에서 회전하던 그것은 훈련받은 매처럼 소천룡의 손으로 사뿐히 날아와 잡혔다. 하지만 그가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사방이 소란스러웠다.
모두 주위를 둘러보자 천막 사이사이로 남색 무복을 입은 무사들이 쏟아지는 튀어나왔다. 그들을 반긴 사람은 항주무인들이었다. 선두에 제갈세가의 가주가 보였기 때문이다.
“왜 이제야…….”
도룡문주의 말은 가주의 외침 때문에 끊어졌다.
“황명을 받들어 반역자를 처단하고자 왔다.”
외침이 명령처럼 세가무사들을 움직였다. 그 일대를 겹겹으로 둘러싼 것이다. 때문에 중앙에 사자비가 있고, 그 주위를 항주무인들이, 또 그들을 친황대가, 마지막으로 세가의 무사가 원을 그리는 형국이 되었다. 적과 적이 싸고 싼 모양이라 이상한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하는 냥을 지켜보던 도룡문주가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르신?”
“말 그대로다. 부도어사께서 위험하신데 백성으로서 어찌 넋 놓고 있단 말인가.”
도룡문주는 몸을 떨었다. 이제야 신호를 보였는데도 천라지망이 잠잠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매복 위치와 이동 경로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 기습을 해서 모두 제압해 버렸을 것이다.
제갈산하와 비슷한 연배인 거호방(巨虎幇)의 방주 노도길이 분개했다.
“이건 명백한 배신이오!”
“부도어사를 배신한 것은 그대들이 먼저였소.”
제갈산하를 대신하여 누군가가 그렇게 대답했다. 제갈산하 옆으로 걸어나온 사마정이었다.
“사마세가까지?”
두 사람을 보며 노도길이 협박했다.
“이러고도 항주에서 두 가문이 무사할 거라 믿소?”
“크하하하하!”
광소가 쏟아졌다. 내공이 실려 귀를 찢을 듯 일대를 들썩이는데, 소천룡의 웃음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몸에서 풍기는 지독한 요기는 웃는 모습이 그저 기분 좋아 웃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압도적인 마인의 힘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어서 모두 침묵만 지키자 소천룡이 입을 열었다.
“계획했던 바는 아니나, 원하는 대로 되었군. 이렇게 되어야 전투의 참맛을 즐기지 않겠는가! 구 금룡주!”
“명하시오.”
소천령은 즐거운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두 죽이시오.”
그리고는 사자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저놈을 죽일 테니!”
그는 한 걸음을 떼고, 두 걸음, 세 걸음을 떼었다. 사자비에게 가까워질수록 그의 몸에서 회오리치는 냉기가 공기를 핥듯 흘러나왔다.
책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구양수도 마찬가지. 총독의 명령이라 군말 없이 따랐으나 어차피 그도 군부의 장수이자 무장이었다. 아마도 사자비의 공작에 의해 깨어진 계책을 털어버리고 실력으로 일을 매듭지을 생각을 굳혔다.
“살(殺)!”
우렁찬 목소리가 그에게서 터져 나오고, 직접 솔선수범을 보였다. 직선으로 뻗어나가 제갈사가의 무사들을 향해 검초를 날린 것이다.
순간 이백 개의 황금빛 물결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열 배가 넘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도 그들은 추호의 망설임이 없었다. 피에 굶주린 맹수의 움직임, 승리에 대한 확신이었다.
팟-!
“크악!”
“으윽!”
일초를 펼쳤을 뿐인데, 백색으로 빛나는 구양수의 검이 무사 네 명을 베고 지나갔다. 회피의 동작도 취하지 못한, 어쩌면 어떻게 공격받았는지도 몰랐을 그들은 상부와 하부로 갈라졌다. 그만큼 구양수의 신법이 귀신같았고, 빨랐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비슷한 비명이 밤하늘을 울렸다.
“저, 저럴 수가!”
순식간에 수백 명이 쓰러졌다. 문파와 문파와의 전투에서 이런 광경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중인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부터 적의 전력 삼 할을 순식간에 깎아버리고 시작하는 싸움은 전율이었다. 그러나 놀람도 잠시, 그들의 압도적인 힘에 용기를 얻은 항주무인들은 곧바로 친황대의 뒤를 받쳤다.
“대열을 유지하라!”
제갈산하가 놀라서 외쳤다. 그는 이 정도로 실력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정상적이지 않은 기운을 풍기기는 했어도, 황실의 고수가 이렇게 압도적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제야 부도어사가 말한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서지 말라더니…….’
하긴, 나서지 않아도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는 했다. 친황대가 먼저 달려들었으므로. 열 배가 넘는 인원차이를 무시하고 이렇게 공격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물론, 이젠 이해할 수 있다. 친황대 하나하나가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어떤 이는 자신조차 상대가 안 되는 고수들인 것이다. 젊은 자도 있고, 나이 든 자도 있지만 대부분 마흔을 넘긴 것 같지는 않았다.
일평생 쉬이 남에게 무시당할 실력은 아니라고 자신했던 가주의 자존심은 오늘 무참히 구겨져 버렸다.
황실은 이런 고수들을 어떻게 대량으로 키워냈을까.
그는 고개를 젓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하나만 생각할 때었다. 혈육과 그를 따르는 가신들이 죽어가는 것이다.
“놈!”
조카 제갈현(諸葛玄)의 팔이 잘리는 것을 보고 일갈을 터뜨렸다. 가주는 노도 같은 기세로 조카를 공격한 친황대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떤가, 부드러운 연주 같지 않은가!”
사자비를 향해 열 걸음까지 거리를 좁힌 소천룡이 말했다. 표정이 꼭 비명을 음미하는 광인의 그것 같은데, 백일홍 때문에 따라오는 흥분과 고통, 살의는 그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끊어져서 고통을 삼키는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그를 마주한 사자비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 자세 그대로 서서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맞장구치는 여유까지 부리는 것이다.
“싫은 소리는 아니군.”
말을 하며 뒷짐을 쥐었다. 소천룡 같은 고수가 전의를 불태우는데도 전혀 싸울 생각이 없는 표정. 오히려 그는 소천룡을 도발했다.
“네 비명을 들으면 황홀할 것 같지 않나?”
순간 소천룡의 눈빛에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그의 심경을 알리듯 그의 장검이 불그스름한 빛을 띠며 타올랐다.
“뽑아라.”
사자비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
그리고는 흘러가듯 낮게 외쳤다.
“나찰귀로, 친황대를 제압하라!”
‘나찰귀로?’
소천룡의 아미가 꿈틀거렸다.
호북의 만상문에 있어야 할 그들을 왜 호명한 것인가.
놀랍게도 어디선가 대답이 들려왔다.
“나찰귀로, 부도어사의 명을 받듭니다.”
2
“저, 저건 뭐야?”
제갈헌원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 때문에 제갈성을 비롯한 세가의 후기지수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압도적인 친황대의 실력을 확인한 후였다. 당연히 겁이 났다. 이대로 지켜보고만 싶은 심정이 굴뚝.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가문의 어른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여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고 어른들의 인정을 받고자 진영으로 뛰쳐나갔다. 마음을 잡고 감추어진 용기를 끌어낸 것이다. 한데, 선두에서 달리던 제갈헌원이 멈췄으니 용기가 줄어들고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갈등의 크기만큼이나 짜증까지 솟구친다.
“뭐, 뭡니까?”
“저걸 봐라!”
“어디?”
제갈헌원은 손을 들어 진영 동쪽을 가리켰다. 모든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뭐, 뭐야?”
제갈헌원과 같은 반응이 드러났다.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한쪽 진영을 뒤덮듯 중앙으로 날아가는 일백 개의 검은 그림자는 충분히 그들에게 충격이었다.
음침한 달밤에 검은 장포를 날개처럼 휘날리고, 장포 위로 떠오른, 복장과는 판이하게 색이 달라 한눈에 들어오는 얼굴이 귀신처럼 하얘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흡사, 밤을 어지럽히는 살인자를 응징하고자 땅에서 솟아오른 악귀, 또는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저승사자 같았다.
벌써 사람이라도 잡아먹은 것인가. 자세히 보니 눈과 입 주위가 피로 범벅이었다.
후기지수들은 하나같이 몸을 떨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뭘까요?”
사마궁궁이 대상 없는 물음을 던졌다. 누구라도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녀만큼이나 다들 놀랐고 의문에 휩싸여 침묵만 이어졌다. 그때, 변화가 일어났다. 혈전을 펼치던 진영에서였다. 제갈세가를 밀어붙이던 금빛 물결이 술렁이더니 이내 물결을 움직이는 목소리가 울린 것이다.
“칠대는 나를 따른다.”
구양수였다.
그도 악귀처럼 달려오는 나찰귀로를 보았다. 왜 저들이 이곳 항주에 있는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귀로주가 이끄는 자들, 유일하게 친황대와 호적수를 이룰 녀석들을 만났으니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구양수는 생각했다. 백일홍 때문에 흥분된 상태.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상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은 무인에게는, 적어도 적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는 즐거운 일일지도 모른다.
파파팟!
일백 명의 친황대가 상대를 버리고 뛰어올랐다. 그들은 구양수를 바짝 쫓으며 삼열(三列)로 벌리더니 그대로 나찰귀로를 향해 뻗어나갔다.
채채채챙!
구양수와 갈천이 검을 맞대기 무섭게 연이어 병장기가 비명을 지르고, 친황대가 천막을 밟으며 직선으로 뻗어났다. 나찰귀로는 불구나무를 서듯 거꾸로 뛰어올라 아래로 각기 무기를 휘둘렀다.
적과 적이 교차하는 듯하더니 병기가 부딪히고 스치듯 지나갔다. 이후 몸을 돌린 금빛과 흙빛이 다시 부딪혔다. 난전이었다.
개인적인 실력은 비슷했으나, 홍면노를 비롯한 나찰귀로의 몇몇은 화경의 고수였다. 하지만 집단전에서의 실력은 친황대가 우위. 쉽게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어지럽게 검초를 주고받으며 치열하게 싸울 뿐인데, 그들 때문에 중앙공터에서의 싸움이 잠시 멈췄다.
“싸움 방식이 친황대와 비슷한 것 같아요.”
멀리서 지켜보던 제갈린의 말이었다.
홀린 듯 나찰귀로와 친황대의 전투에 시선을 빼앗긴 제갈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린의 말처럼 무공은 달랐지만 집단전에서의 움직임이 양쪽 다 유사했다.
‘그렇다면 저 괴물들도 황실이 만들어낸 고수들?’
이젠 놀랍지도 않은 듯, 짜증 섞어 외쳤다.
“도대체 황실은 어떤 곳이냐?”
“크흐흐흐!”
불리한 상황에 빠져서 당황했을 텐데도 소천룡은 음침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고작 나찰귀로를 믿었더냐?”
조롱하는 듯한데, 사자비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자신만만하군.”
“이렇게 된 바에야 누가 죽든 끝까지 해보는 것도 재밌는 일.”
그러면서 소천룡은 사자비와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
“너만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것으로 목적은 이룬 셈이 아니겠나.”
사자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그조차 이룰 수 없을 것 같군!”
“체력이 많이 빠졌을 텐데?”
“그랬지. 하지만 나를 대신하여 싸워준다는 녀석이 있더군. 그렇지 않나?”
마지막 말은 내공을 실려 허공을 맴돌았다. 잠시 후, 차가운 고음이 물음에 대답했다.
“약속은 지켜!”
진영 남쪽에서였다.
소천룡의 시선이 소리를 쫓았다. 순간 그곳으로 달려오는 인영, 쏜 화살처럼 빠르고, 빠른 만큼 빛 무리를 잔상처럼 남기며 접근하는 묘령의 여인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대경해서 외쳤다.
“서, 설혼마녀!”
그 뒤로 백궁의 고수 이십 명이 거리를 두고 그녀를 따라오는 모습도 발견되었다.
“백궁까지?”
나찰귀로 때문에 잠시 여유가 생긴 가주 제갈산하는 적을 버려두고 훌쩍 물러서서 당황한 빛을 드러냈다. 이곳에 백궁이 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있다면 단 하나.
그는 사자비를 보았다. 자신만만한 표정에서 그가 백궁을 끌어들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백궁이 이런 아귀다툼에 대가 없이 참여하지는 않았을 터.
‘도대체 무엇을 제안한 것인가!’
그는 제갈진을 찾았다.
제갈진도 구겨진 표정으로 가주에게 다가왔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제갈진도 생각지 못한 모양,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묻는 게다.”
묵묵부답!
“설마, 항주무림을 그들에게 넘기기로 한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때마침 설혼마녀가 장내로 끼어들어 항주무인 몇 명을 발로 밟았다.
퍽퍽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발에 밟힌 무인들이 쓰러졌다.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부서진 것이다. 그렇게 다섯 번째 무인을 밟고 올라선 설혼마녀는 그대로 사자비와 소천룡 사이에 착지했다.
설혼마녀가 소천룡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저놈들만 제압하면 된다?”
그녀의 등 뒤로 사자비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는 듯했다. 고개를 한 번 까딱거린 설혼마녀는 지체 없이 소천룡을 덮쳤다. 동시에 백궁의 고수들이 친황대와 세가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사자비는 설혼마녀와 소천룡의 싸움을 지켜보다가 나찰귀로를 돕고자 몸을 날렸다. 전력으로 보자면 나찰귀로가 약간 우위에 있겠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좀 더 지체하다가는 승패와 상관없이 둘 다 크게 상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친황대와 나찰귀로, 어느 하나 피해가 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훗날 무림정책에 그들은 꼭 필요했으므로.
쉬익!
마라겸을 뽑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정확히 구양수를 노린 한수였다.
챙!
한창 갈천을 밀어붙이다가 등으로 다가오는 싸늘한 감촉을 느낀 구양수가 몸을 돌려 검을 휘둘렀다.
푹!
검신에 튕긴 마라겸이 바닥에 박혔다. 그 짧은 찰나, 그곳에 도착한 사자비가 마라겸을 뽑아 구양수를 겨누었다.
“이미 결과가 정해졌는데, 포기하는 것이 어떻소?”
구양수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사자비의 어디에도 다친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소천룡을 찾았다. 그리고 소천룡을 찾았을 때, 그의 표정은 당황한 빛으로 물었다. 사자비를 상대해야 할 소천룡이 백발을 휘날리는 괴여인에게 붙잡혀 접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등한 실력을 뽐내는 것 같았지만, 예리한 구양수의 눈에는 결국 소천룡이 제압당할 것 같았다. 그만큼 백발의 여인은 강했다.
“군부의 무장으로서 명이 떨어지면 목숨을 걸고 이행해야 함을 잘 알 텐데?”
말과 달리 구양수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글쎄…….”
사자비가 가소롭다는 듯 비소를 보였다.
“군부의 무장이 나라의 명을 받들어 목숨을 건다면야 더없이 아름답겠으나, 권력과 탐욕에 젖은 한 마리 짐승의 명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만큼 꼴사납고 허무한 죽음도 없겠지.”
“감히, 총독을 능멸하다니!”
사자비는 코웃음을 쳤다.
“역시, 나무만 볼 줄 알았지 숲은 보지 못 했나보오.”
“……?!”
“조 총독은 곧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거요.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대주께서도 알 터. 계획대로 나를 죽였으면 모르되, 실패했으니 총독은 그 책임을 져야할 거요. 왜 그 사실을 간과하시오?”
“너를 죽이면…….”
구양수의 검에 검기가 서렸다.
사자비는 조롱의 의미가 분명한 웃음을 흘렸다.
“숲을 보라고 조언했잖소. 나를 죽였다한들 결과가 달라질 것 같소? 폐하께서 친황대인 나를 나찰귀로와 함께 이곳에 파견한 이유가 무엇이겠소?”
“그렇다면…….”
“이제야 이해를 하셨나보군. 폐하께서는 이미 총독을 의심하고 있소. 친황대를 이끌만한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계시지.”
강렬한 빛을 머금은 검신이 서서히 힘을 잃었다.
천천히 아래로 처지는 검을 완전히 거둬들인 구양수는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보며 사자비가 목소리를 바꿔 신중하게 말했다.
“오늘 총독이 벌인 일은 조만간 폐하께 전해질 것이오. 이후는 어떻게 될 것 같소? 폐하께서는 황명을 업신여긴 그를 그냥 둘 거라 생각하시오? 한때의 실수로 반역자란 오명을 쓰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소만.”
“만약…… 내가 그대를 따르겠다고 약조한다면 그 오명을 벗겨줄 수 있겠습니까, 대인!”
구양수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사자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양수가 몸을 돌려 큰소리로 외쳤다.
“제칠수라금룡대는 검을 거두고 물러나라!”
그러자 나찰귀로와 뒤섞인 일백 명의 친황대가 상대를 버려두고 뛰어올랐다. 사자비에게 들은 바가 있던 터라 나찰귀로도 그들을 쫓지 않았다.
돌연한 명령 때문에 물러서기는 했으나 친황대원들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왜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구양수를 향해 눈으로 질문했다.
의문은 곧 풀렸다. 구양수가 사자비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것이다.
“친황대 제칠수라금룡대 대주 구양수, 대인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친황대원들이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건 무슨 전개냐는 듯, 당황한 빛을 숨기지 못했다.
사자비의 입가에 시원한 미소가 담겼다. 그때, 가슴에 다섯 가닥의 선혈을 남기며 목책에 부딪히는 소천룡의 고함이 있었다. 결국 설혼마녀에게 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친황대 내에서 광폭하다고 소문난 그가 그대로 주저앉을 리 없었다. 목책이 부서지며 튀어나온 그는 광인처럼 앞뒤 돌보지 않고 설혼마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는 설혼마녀와 죽이 잘 맞는 듯했다. 설혼마녀 역시 그의 사지를 찢어버릴 듯한 기세로 소천룡을 향해 마주 달렸다.
그들을 지켜본 사자비가 구양수에게 명했다.
“소천룡 대주를 설득하라.”
“존명!”
구양수는 바로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나찰귀로와 제칠수라금룡대였다.
“전장을 정리하라!”
갈천을 선두로 나찰귀로와 친황대 이백 명이 아직도 피를 뿌리는 제갈세가와 친황대를 향해 달려나갔다. 동시에 사자비도 움직였다. 설혼마녀를 막기 위해서였다.
“멈춰라!”
한창 뒤엉킨 두 고수를 말리기엔 구양수의 힘이 부족해 보였다. 사자비의 외침도 두 호랑이를 떼어놓지 못했다. 결국, 마라겸이 불을 뿜었다. 강렬히 빛나는 백색 강기가 허공을 찢으며 날아간 것이다.
살기에 반응한 설혼마녀와 소천룡이 즉각 반응하여 양편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를 헤집은 강기가 바닥을 때리며 폭음과 구름먼지를 피워올리는데, 기회를 놓치지 않은 구양수가 소천룡을 잡아끌었다. 사자비는 설혼마녀를 막아섰다.
침묵은 사람을 긴장시킨다. 시끄러웠던 장소가 한순간에 조용해지면 더욱 그렇다. 정지되었던 사고가 풀리고, 그래서 묘한 기분과 여러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랬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번 함정으로 얻은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컸다. 더 놀라운 점은 정작 싸워야 할 두 부류, 부도어사 측과 친황대 쪽의 피해는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점을 가장 먼저 파악한 사람은 제갈진이었다.
그는 조용한 침묵 속에서 표정만 굳히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쓰러진 세가의 무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천 명은 족히 될 것 같은데, 저 중에 부상자를 빼더라도 절반 이상은 숨을 거뒀을 것이다. 이건 엄청난 타격이었다. 저 많은 고수를 다시 초빙하고 키워내는데 들어갈 자금은 만만치 않다.
제갈세가가 무림에 발을 들인 이래 이런 타격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제갈진의 기억으로는 무림맹의 기치에서 지옥교와 싸웠던 때를 뺀다면 없었다. 치열하기는 했지만 피해를 줄이고자 그렇게 애를 썼는데, 그리 길지 않은 전투에서 이 많은 인원이 바닥에 쓰러졌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세가보다 항주무인들이 더 큰 피해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번 전투로 문내에서 가려 뽑은, 즉 문파를 끌어가는 힘의 원천인 주력을 대부분 잃었다. 당분간 제갈세가와 사마소국에 복수한다는 꿈은 꾸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급한 문제는 피해를 본 만큼 더 큰 것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가주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상념에 빠진 제갈진의 귓속으로 그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고민을 해봐야 이미 늦었지만, 부도어사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 의문이 드는구나!]
[우리가 제시한 조건을 들어줄 충분한 능력이 있고, 들어준다 한들 그에게 득이 될 것도 해가 될 것도 없습니다. 그의 능력으로 보자면 극히 사소한 일인데, 안 들어줄 리 없습니다. 다만…….]
[다만?]
[백궁이 걸립니다.]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모르는 거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일이 만약 항주와 관련된 것이라면 향후 항주무림의 판도는 우리가 뜻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겁니다. 우선 그것부터 확인하심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자비에게 말을 붙일 기회가 없었다. 침묵을 깨고 소천룡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총독이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검을 거두고 다가온 소천룡을 향해 사자비가 물었다.
소천룡은 이미 항복을 결심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총독에게 절대복종을 다짐했지만 그것은 상관일 때에만 해당하는 일. 친황대 내부에서의 다툼이라면, 그것도 총독의 명을 받은 그의 세가 이미 기울었고, 상대가 황명을 등에 업고 욱일승천한다면 친황대는 이미 총독의 것이 아니다. 구양수의 설득도 그의 마음을 돌리는데 한몫했다.
“대인을 죽인 후, 수급을 잘라 보내라 하셨습니다.”
“내 죽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겠다?”
사자비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과연 총독답군! 그다음은?”
소천룡은 항주무인들을 힐끔거린 후에 전음으로 말했다.
[이곳에 지단을 설치하라 하셨습니다.]
이번엔 큰소리로 웃는 사자비였다.
“하하하, 역시 총독이로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어. 하긴, 일거양득은 되어야 욕심에 맞겠지.”
“…….”
“이젠, 그대를 믿어도 되겠소?”
“상명하복(上命下服)을 지침은 장수 된 자의 도리입니다. 이미 그분이 폐하의 신임까지 잃었고, 계획까지 실패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사자비의 눈빛이 갑자기 차갑게 식었다.
“그렇다면 내 명을 받들라.”
“하명하십시오.”
“지금 즉시 총독의 계획에 따라 날 암살하려 했던 무리를 처리하라.”
소천룡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후 대원들을 이끌고 항주무인들을 덮쳤는데, 그의 갑작스런 반격에 제대로 대응조차 못한 도룡문주와 힘겹게 살아남은 이백 명의 항주무인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피를 뿌리며 제사를 지냈다.
다시 한 번 황실의 압도적인 힘을 확인한 제갈세가와 사마소국은 더 깊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설마 우리까지?’
가주는 빨리 약속을 받아내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쉽사리 부도어사에게 다가가 약속을 지켜달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다만 부도어사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인데, 마지막 항주무인이 쓰러지는 것을 끝으로 부도어사가 몸을 돌려 설혼마녀에게 다가갔다.
확실히 설혼마녀는 다른 무인들과 달랐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사자비를 마주 보는 것이다.
“큰 도움이 되었다. 약속은 지키지.”
설혼마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같은 것을 보였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몰랐다.”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훨씬 더 대단한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대가를 약속하지.”
놀라운 제안이었지만 설혼마녀는 코웃음으로 대답한 후,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버렸다. 그녀를 따라 백궁의 고수들까지 가버리자 이제 제갈세가와 사마소국만 남게 되었다.
사자비가 가주와 사마정을 지목했다.
사마정은 어깨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도 부름을 받고 다가왔다.
“수고했다. 사상자를 수습하여 돌아가라!”
단지 그 말 뿐이라 가주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와의 약조를 지키리라 믿겠습니다.”
“도움을 받았으니 대가는 치러야겠지. 저 아이가 말했던 대로 이행한다.”
그때, 지목받은 제갈진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뭔가?”
“백궁을 어떻게 이 일에 끌어들였는지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로 했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너희와는 상관없는 일.”
그러면서 가라는 손짓을 보였다.
더 캐묻고 싶은 제갈진에게는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더 말을 걸었다가는 부도어사의 부화만 돋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가주와 함께 몸을 돌릴 수밖에 없는데, 그 뒤로 사자비의 입가에 비소가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한 번 쯤 의심을 했을 것이다.
세가의 무사들이 사상자를 수습할 때,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자비를 향해 전음이 들려왔다. 홍면노였다.
[거래조건이 더 있으리란 생각은 했습니다만, 이 일에 설혼마녀를 끌어들였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사자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 욕심이 과한 여인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수하들을 풀어주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터, 대화로 보아 무언가를 더 주기로 한 것 같은데요.]
사자비의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사상자를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가주 등 세가의 인물들을 훑어보면서 즐거운 듯 말했다. 이번에는 전음이었다.
[항주무림에 받은 서른다섯 개의 사업장을 석 달 후 백궁에 넘기기로 했다. 물론, 무림과 상관없는 사람을 대리인으로 내세우겠지만.]
홍면노의 인상이 구겨졌다.
[위험한 거래를 하셨군요. 그건 백궁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집단이 경제력까지 갖추면 짧은 시간에 무시 못 할 성장을 이룰 터였다.
잠시 후, 홍면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갈세가, 사마소국과도 거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들에게는 무엇을 주기로 하셨습니까?]
제갈진에게 들은 바를 설명하자 듣고 있던 홍면노가 사자비와 같은 묘한 미소를 보였다.
[과연 대인답군요.]
사자비의 말대로라면 백궁의 독주를 막을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제갈세가와 사마세가는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명문이고,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두 가문이 힘을 합한다면 백궁도 섣불리 항주를 집어삼키지는 못할 것이었다. 백궁이 힘을 키우는 동안 제갈세가와 사마소국도 사자비와의 약속을 발판삼아 더욱 성장할 테니.
[이것을 두고 어부지리(漁父之利)라고 하지.]
약속을 지키면서도 취할 것은 모두 취한다. 백궁이라면 분명히 제갈세가와 사마소국을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고, 결국에는 두 세력이 부딪치게 된다. 그간 키웠던 힘이 소진된다는 것이다.
홍면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본 사자비의 단점은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분석하고 해석한다는 점이었다.
‘어부지리보다는…….’
조삼모사(朝三暮四)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 그였다. 그러나 사자비의 계획을 듣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대화가 끝난 사자비가 구양수를 불러 명했다.
“자네는 이곳에 남아서 총독의 계획대로 문파 몇 개를 은밀히 포섭하여 지단으로 만들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만간 제갈세가와 백궁의 세력이 커질 테니, 지단을 이용해서 그 둘을 싸우게 할 조력자가 필요하네. 아무도 모르게 포섭하고 그들에게 황실의 지원을 약속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갈천을 불러 세가와 한 약속을 전해주고 당분간 항주아문에 남아 약속을 이행하도록 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홍면노가 속으로 웃었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 옳겠군!’
하지만 신기한 부분도 있었다. 도대체 이 계획이 언제 섰느냐는 것이다. 제갈세가와 사마소국의 약속이 아문에서 이곳으로 오는 중에 이뤄졌다니, 그 이후에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가장 신빙성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궁과의 약속은 서호에서 설혼마녀와의 싸움 직후에 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백궁의 독주만 예상했을 터, 그때 부도어사는 백궁의 세력을 어떻게 견제하려고 했을까.
홍면노는 아마도 친황대를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제갈세가와 사마소국은 그 계획안으로 들어온 덤일 지도 모른다. 만약 그의 예상이 맞다면 점입가경이 분명하다. 갈수록 부도어사에게 좋은 쪽으로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과연 어디까지 부도어사의 운이 이어질지 지켜보는 것도 재밌겠어.’
분명한 것은 운도 실력이 있어야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홍면노는 살아온 인생만큼이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력만 있어서는 되는 것이 아니고 집념과 끈기까지 필요했다.
“홍면노!”
갑작스런 호명 때문에 홍면노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왜 그러십니까?”
“갈천이 당분간 빠질 테니, 그동안 나찰귀로를 자네가 이끌도록 하게.”
“맡길 임무라도 있으신지요?”
“있지.”
무엇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이번에는 소천룡이 호명되었다.
“하명하십시오.”
“지금 즉시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고 총독에게 서신을 띄워라. 수급은 서신을 받은 후 이틀 뒤에 도착할 것이라 전하고.”
“알겠습니다.”
“일을 끝낸 후에는 최대한 속력을 내어 소오태산으로 가서 총단에서 오는 모든 연락을 봉쇄했으면 좋겠군.”
“그리하겠습니다.”
“홍면노.”
“네.”
“나찰귀로를 이끌고 가서 북경 남문에서 대기하게.”
“언제까지 도착하면 되겠습니까?”
“보름 안으로 가능하겠나?”
“지금 바로 출발해야겠군요. 대주님은 언제 오실 생각이십니까?”
“뒤처리와 인수인계까지 해야 하니 내일 저녁쯤 출발한다. 아마도 하루 정도 후에 도착하게 되겠지. 소천룡 대주가 이끄는 제일수라금룡대를 끌고 갈 테니, 그전까지 드러나지 않도록 나찰귀로를 철저히 통제하도록.”
“네.”
마지막으로 사자비가 손을 떨쳤다. 그러자 소천룡을 비롯하여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밤하늘을 헤엄치는 달을 보며 사자비의 얼굴에 흐뭇한 표정이 떠올랐다.
“꽃은 시들기 전에 꺾어야 맛이라 했지. 기대하시오, 총독!”
제3장 끝과 시작의 경계
1
북경 북쪽에 위치한 거대한 장원. 현판도 걸리지 않아 수상해 보이는 곳인데, 거기에 나무상자 하나가 배달되었다. 때는 여름의 밤이라 귀뚜라미 구슬프게 울고 반딧불은 불꽃놀이에 여념이 없는데, 상자는 장원 내부에 펼쳐진 정원으로 조심스럽게 옮겨졌다.
묘한 분위기의 노인은 산책을 멈추고 상자를 가져온 무사를 돌아보았다.
“홍 영반에게서 연락이 왔더냐?”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노인, 조정례의 표정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친황대의 재편성과 그간 소오태산에서의 강도 높은 훈련을 치하, 위로하고자 수라금룡주들을 호출하는 전서를 날린 적이 있었다. 나흘 전 일이었다. 하지만 소오태산에서의 답장이 없었다.
들짐승이나 매 따위에 전서를 나르던 비둘기가 잡혔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같은 내용의 전서구를 세 마리나 날리기 때문에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었지만 어쨌든 별다른 의문을 품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틀 전에 홍규를 시켜 동창 대원을 직접 보내었는데,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니 속도를 낸다면 지금쯤 대주들이 도착했어야 했다. 적어도 홍규에게서라도 연락이 왔어야 하는 것이다.
조정례는 친황대의 연락망에 허점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황실과 무림의 어떤 단체보다 빠른 정보력을 장담했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야만 누구보다 발 빠른 대처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무력과는 또 다른 면에서 친황대를 돋보이게 하는 힘이었다.
‘좋지 않아!’
하지만 불편한 심사는 무사의 보고 때문에 사라졌다.
“항주에서 제일수라금룡주가 상자를 보냈습니다.”
조정례는 무심한 표정으로 붉은 비단에 쌓인 상자를 바라보고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조정례가 앞서고 무사가 뒤를 따랐다.
그들은 장원 중심부에 있는 큼지막한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 내부는 크기와 달리 한산했다. 이 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큰 돌기둥이 호위처럼 양편으로 늘어섰고, 중앙에는 삼 장 길이의 탁자와 중원의 지리가 세밀하게 그려진 지도가 놓였는데, 그 너머에는 나무로 만든 긴 단상이 있었다. 단상 위에는 고고한 위상을 담은 은빛 찬란한 의자가 뿌리를 내린 상태로 모습을 뽐냈다.
친황대 재편에 맞춰 축조한 새로운 회의실이었다.
조정례는 거기, 은색 태사의에 앉으며 무사에게 명했다.
“이리 가져오느라.”
무사는 태사의 앞에 놓인 작은 탁자에 상자를 올려놓고 비단을 풀었다.
탁!
나무와 나무의 이음매가 깨어지며 낮은 소리를 질렀다.
상자가 서서히 입을 벌린다.
조정례의 눈은 나무상자 속, 뚜껑을 들어 올리는 무사의 움직임만큼이나 천천히 내부를 훑어나갔다. 그렇게 상자가 반쯤 열렸을 때, 붉게 물든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정례가 손을 들어 코를 훔쳤다. 이제 여름, 항주에서 배달된 물건이라면 꽤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 그가 생각하는 그 물건이 상자에 들어 있다면 벌써 상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악취를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뚜껑을 들어 올린 무사의 손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쾅-!
건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무언가가 거칠게 부서지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사는 상자를 든 그 상태로 조정례를 보았다.
조정례도 무사를 보았다. 둘은 의문스런 눈빛만 주고받았다.
이 밤에 이런 소리가 총단에서 들릴 이유가 있을까?
조정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하얗게 떠오른 그의 피부가 잠시 떨렸다고 느낀 것은 무사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조정례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무사는 상자를 내려놓고 급히 건물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무사가 나가기도 전에 조정례는 소리의 의미를 이미 파악했다. 무사 대신 그가 직접 상자를 열어젖혔기에!
사자비의 얼굴은 상자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썩어 문드러진 머리 하나가 있을 뿐. 그 얼굴이 도룡문주의 수급이라는 사실을 조정례는 알지 못했다.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있었다. 이 상자 속에 있어야 할 사자비가 지금 총단 밖에서 두 눈을 번뜩이고 있으리라는 점이다. 허연 이를 드러낸 채 주인을 물려는 개의 눈빛을 하고 있으리라.
쾅-!
문지기의 낮은 비명에 이어서 장원의 정문이 부서졌다.
“웬 놈들이냐?”
대답은 빠른 행동으로 돌아왔다. 검은 피풍을 휘날리는 일백 개의 귀신이 소리에 놀라 달려온 무사들을 기습한 것이다. 삽시간에 서른 개의 비명이 터지고, 소리를 들은 장원 내의 무사들이 그곳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 황실의 비밀 총단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 못하겠군. 겉으로 보자면 평범한 장원 같은데…….”
장원에서 조금 떨어진 허름한 초가지붕에서 중얼거림이 있었다. 나찰귀로를 이끌게 된 홍면노였다.
사자비의 말에 의하면 총단 내부를 지키는 호위들은 총독이 가려 뽑은 정예라 했다. 아마도 저항이 만만치 않겠지만, 그럼에도 홍면도는 나서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나찰귀로가 정문으로 투입되어 시선을 끄는 동안, 제일수라금룡대 일백 명이 네 개 조로 나뉘어 사방으로 총단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그까지 나설 필요가 없는 작전이다. 그러니 자리를 비운 사자비를 기다는 수밖에. 그렇게 총단을 지켜본 지 반 각 정도가 지났을까, 사자비가 나타났다.
말없이 지붕 위로 올라온 사자비는 총단을 바라보며 비명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를 음미하는 듯했다.
“수라금룡대는 투입되었나?”
홍면노가 그의 뒤에 바짝 서서 대답했다.
“소리로 보아 지금 투입된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도 슬슬 들어가야겠군.”
“한데, 어디에 다녀오셨기에 한나절 동안 자리를 비우셨는지요?”
“황궁.”
대답을 끝으로 사자비는 총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생각보다 저항이 그리 심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출처도 알 수 없는 장원을 쳐들어올 바보도 없을 것이고, 이곳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기습을 노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경계가 해이할 수밖에 없겠지.
부서진 정문을 통과한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수의 경비로 나찰귀로를 상대한 덕분인지 총단의 피해가 큰 것 같았다. 무사들의 표정에는 저항의 의지도 없어 보였다.
사자비가 내공을 실어 입을 열었다.
“폐하의 명을 받아 이곳을 점거하고자 왔다. 저항을 멈추고 무기를 버려라.”
이미 기세가 기울 대로 기운 상태. 거기다 자주 총단에 드나들었던 사자비를 알아본 자들도 있었다. 거짓을 말할 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모두 그의 말을 따라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친황대 전체를 움직이는 작전지휘소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강한 집단이라도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지.’
생각과 함께 사자비는 걸음을 옮겼다. 아직 명을 전달받지 못한 수라금룡대가 분전하는 모양, 여기저기에서 병장기 소리가 들려왔다.
“홍면노.”
“네.”
“대원들을 흩어서 수라금룡대를 저지하라. 이곳의 무사들도 모두 한 식구가 될 터이니 굳이 심각한 타격을 줄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홍면노가 대원에게 지시를 내릴 때, 사자비는 그대로 총단 중앙을 향해 걸었다. 뒤이어 그를 호위하듯 십여 명의 대원이 따라붙었다.
사자비는 내원으로 들어선 후, 인조호수 위에 올려진 구름다리를 지나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 앞에는 처음 보는 건물 입구가 있고, 그 입구에 다섯 명의 무사가 진입을 막고 있었다.
사자비가 미소를 보였다. 직감적으로 총독이 건물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총독께서는 나를 기다리고 계신가?”
스르릉!
무사들이 무기를 뽑았다. 사자비를 호위하던 나찰귀로 하나가 코웃음을 치더니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들이 부딪히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엄한 목소리가 싸움을 막았다.
“이미 끝났다. 더 피를 뿌려서 무얼 하려느냐!”
조정례였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사자비를 보더니 한 마디를 던지고는 도로 들어가 버렸다.
“나와 조용히 할 말이 있을 테지?”
당연히 있다. 사자비는 호위를 두고 조정례를 따라 건물로 들어섰다.
탁!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조정례를 바라보았다. 조정례는 탁자 앞, 정확히 건물 중앙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무심한 눈이었다. 하지만 사자비는 알고 있다. 저 무심으로 가장된 내면에 억울함과 분노, 그보다 강한 패배감과 굴욕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미미하게 웃고는 있지만 여유롭다기보다는 화산 속에 던져 넣은 화약 같은 느낌일 뿐이었다.
‘좀 티가 났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지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좋다. 패배를 마지막 순간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가상하지 않은가. 어떤 면에서는 더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다.
“폐하를 알현하고 왔느냐?”
사자비는 여태껏 총독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화사한 미소로 상대의 심기를 건드려 보는 것이다.
“네. 폐하께서 대인의 걱정을 많이 하시더군요.”
“걱정이라…….”
묘하게 흐려지는 말끝에 호탕한 웃음이 뒤따랐다.
“하하하! 그래, 그랬겠지. 뭐라 하시더냐?”
“별다른 말은 없으셨습니다. 다만, 제가 몇 가지 조언을 드렸지요.”
“조언?”
“대인께서는 친황대를 이끌 재목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조정례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는 있다고 보느냐?”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있죠.”
그러면서 조정례에게 다가갔다. 조정례는 물러서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고고하게 서서 마주 오는 사자비를 향해 여전히 냉담한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그와 한 걸음까지 거리를 좁힌 사자비가 고개를 살짝 숙여 조정례의 어깨 위로 머리를 붙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비밀이라도 되는 듯 낮게 조정례의 귀에다 속삭였다.
“그간 고생하셨으니 이젠 푹 쉬셔야지요.”
조정례의 턱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친황대는 제가 잘 이끌겠습니다. 걱정 마시길!”
꽉 깨문 이 사이로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리는 듯했다. 그제야 사자비는 승리감을 맛볼 수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상대, 꼭 되갚아 주고 싶었던 상대, 하지만 자신 만큼이나 심계가 깊어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를 이런 식으로 우롱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그에게 크게 포만감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조정례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입술과 입술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나, 애송이?”
사자비는 눈빛으로 말해주었다. 그렇다고.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이어서 조롱하듯 말했다.
“한평생 황실을 위해 살아온 공을 생각하여 벌을 주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이 또한 제가 폐하께 간절히 부탁하여 얻은 결과이지요.”
“고맙구나.”
조정례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걸었다. 움직이는 걸음 또한 정확하게 문을 향하고 있었다. 조정례는 걸어가며 충고하듯 말했다.
“꽃은 피고 진다. 난 이제 지지만 넌 언제 질까?”
조정례가 걸음을 멈추고 사자비를 보았다. 그는 가소롭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쁘구나.”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는 조정례의 등 뒤로 사자비의 웃음이 길게 따라붙었다.
“하하하! 말씀대로 저도 언젠간 지겠지만, 대인처럼 추해지지는 않으렵니다.”
조정례의 몸이 떨리는 듯했지만 그대로 손을 내밀어 문을 연 덕분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문이 열리고 조정례가 모습을 보이자 나찰귀로 한 명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반쯤 뽑았다. 푸른 달빛이 반사된 검신이 조정례의 눈을 비추었다.
지켜보던 사자비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초야에 묻혀 쉬시고 싶으시단다.”
“……!”
“소박한 소원 들어 드려야지 않겠느냐.”
그제야 대원이 검을 거두고 옆으로 비켜섰다.
사자비의 조롱이 이어졌다.
“총단을 나가 왼쪽 길로 가다 보면 폐하의 명을 받은 호위가 있을 겁니다. 그들이 대인의 거처를 마련할 터이니 따라가십시오. 앞으로 그들이 대인을 모실 겁니다.”
조정례는 대답 없이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사자비가 밖을 향해 명했다.
“홍면노에게 총단을 정리하라 일러라.”
“알겠습니다.”
간간이 들리던 전투의 여성도 완전히 사라지고 이젠 침묵의 그림자만 남았다. 촛불 몇 개에 의지한 어두컴컴한 실내를 사자비는 홀로 지키게 되었다.
그는 탁자를 지나쳐 천천히 단상 위로 향했다. 거기에 어둠 속에서 빛나는 은빛 의자가 있었다.
스륵!
장삼을 펼치며 거기에 앉아 두 팔을 팔걸이에 얹었다. 뒤로 몸을 젖혀 등받이에 등을 기대니 기억에서 가물가물한 옛 기분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늦은 밤, 글공부하다가 졸음이 몰려올 때 소회가 다가와 보듬어주었을 때의 그런 푸근한 느낌이었다.
“좋은 자리다.”
회의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으니 자신 또한 높아진 느낌을 주는 자리였다.
두 눈을 감았다. 더욱 어두워졌지만 마음은 달랐다.
더 편안해진다고나 할까!
하지만 편안함 뒤로 따라오는 아쉬움은 지워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총독을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어깨를 누르는 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보고를 위해 황제를 알현했을 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 아보를 어찌 처리할 생각인가?
아보란 조정례의 애칭인 것 같았다. 그에 대한 황제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을 했다.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입을 억지로 다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말없이 처분을 기다리는 그를 향해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 짐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녀석이다. 그 대우를 해주고자 한다.
그래서 조정례는 살아남았다. 몰래 자객을 보내어 죽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고 첫 용의자로 사자비 자신이 지목될 것이다.
“쳇!”
코웃음을 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불쾌한 기분 때문에 더는 이곳에 있기가 싫었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기도 했다.
그는 단상에서 내려와 은빛 태사의를 힐끔 보았다. 이때는 또 다른 아쉬움이 밀려왔다. 좋은 느낌의 저 자리가 당분간은 그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는 저 태사의를 다른 이에게 양보할 생각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2
거친 죽림 속을 헤치자 발에 밟힌 나뭇가지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사자비는 비명을 무시하고 계속 죽림을 걸어 좁은 공터를 만났을 때 비로소 멈췄다. 그때,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붉은 관복을 입은 청년이었다.
“축하합니다, 대인!”
청년 소정동은 바닥에 내려서기 무섭게 사자비를 향해 공손히 포권했다. 놀리는 행동이었지만 사자비는 웃기만 했다. 소정동도 마주 웃었다.
“정말 놀랐다. 네가 해낼 줄은 몰랐어.”
사자비가 어깨를 으쓱했다.
“위험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일도 아니지.”
“친황대를 꿀꺽 해놓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엄살이 심한데? 설마, 이제 와서 날 모른 척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 그보다 내가 부탁했던 건?”
소정동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몰래 만날 이유가 있는 거야? 이젠 그럴 필요가 없잖아.”
“아직 조심하는 것이 좋아. 너와 나는 태감들을 처리할 때 돕고 도움을 받았던 관계 그 이상이면 안 돼.”
“그렇다는 건 친황대의 수장인 네 권력을 난 맛볼 수 없다는 것 아닌가?”
“잠시만 기다려. 기회를 봐서 아무도 모르게 네 뒤를 봐줄 테니까.”
“과연 얼마나 봐줄지 지켜보지.”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받아라. 네가 부탁한 거다.”
사자비는 종이를 받아 펼쳤다. 황실 종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었다.
종이를 살피던 사자비를 향해 소정동이 설명했다.
“네가 거론했던 분들을 모두 조사해봤지만 조건에 맞는 자는 유한(劉翰) 군왕전하 밖에 없었어. 그래서 그분에 대한 기록만 가져왔다. 전대폐하의 동생인 유상 전하의 독자로 폐하의 사촌이야. 어릴 때부터 머리가 뛰어나서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몸이 병약하여 권력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지. 한동안 지켜보았는데, 요즘도 두문불출하시면서 서책에만 파묻혀 계시더군.”
“병약하다면 좀 문제가 있는데…….”
“그렇다고 병환이 있지는 않아. 몸이 약해서 어릴 적에 잔병이 많았다는 것을 빼면 큰 문제는 없었으니까.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주변에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 군왕전하 또한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어 보였고, 그간의 행적도 그래.”
“흐음!”
찬찬히 내용을 살피던 사자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수고했다. 꽤 많은 숫자라서 모두 조사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수고롭기야 했지만, 도움을 받아서 그리 어렵지는 않았어.”
“도움을 받아?”
소정동이 씨익 미소를 보였다.
“진학을 만났거든. 네 이야기를 했더니 야속하다고 울더군. 언제 한 번 모여서 술이나 한잔해야지?”
“그래야지. 아무튼 당분간 동창 내부의 살펴봐 줘.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알려주고. 특히, 홍 대영반을 감시해줬으면 좋겠다.”
“그러지.”
그러다 생각났는지 문득 소정동이 물었다.
“참! 그리고 얼마 전에 태감들의 인사이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
“그랬어?”
놀라기를 기대했던 모양이지만 사자비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소정동이 김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섯 명이나 강등되었고, 나머지는 관직에서 물러났어. 엄청난 사건이었지. 그 때문에 동창이 발칵 뒤집혔거든. 그 과정에서 친황대에 대한 정보도 약간 새나갔어.”
“잘 되었네.”
“고작 그거냐? 향후 황실의 권력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대사건인데?”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짐작했다고?”
소정동이 재차 물었다.
“어떻게?”
사자비는 소정동이 깜짝 놀랄 말을 내놓았다.
“폐하께 태감들의 장부를 넘긴 사람이 나였거든.”
“저, 정말이냐?”
소정동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자비를 향해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도대체 왜?”
“내가 외부를 돌아다니는 사이에 폐하를 구워삶을 녀석들을 미리 쳐내야 했으니까.”
절로 실소가 튀어나온다고나 할까. 어이없다는 눈으로 사자비를 바라보다가 질렸다는 듯 소정동이 말했다.
“넌 정말 위험한 놈이야. 태감들을 건드리다니…….”
“그들이 날 건드린 것이 실수였지. 아무튼,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다.”
그러자 소정동이 급히 자신이 건넸던 종이를 가리켰다.
“한데, 그건 어디에 쓰려고?”
“든든한 울타리가 필요하거든.”
소정동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사자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오늘 밤 황제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신경 쓰고 준비할 것이 많았다.
“짜식! 옛날부터 속에 뭘 숨기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멀어지는 사자비를 향해 소정동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중앙전의 집무실에 밤을 지키는 인물이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야장의를 입고, 곤룡포(衮龍袍:왕의 정복)를 망토처럼 어깨에 두른 만인지상의 사내, 황제 유건이었다.
안정(眼睛:궁중에서 눈을 이르는 말)을 생각하여 사방으로 밝혀 놓은 등 때문에 실내는 대낮처럼 밝은데, 정작 황제는 책을 읽지 아니하고 창밖을 감상하며 서 있기만 했다.
궁중의 예법은 황제에서 황제로, 궁인에서 궁인 사이로 이어져 내려오며 정립된 법도라 황제라도 자유로울 수 없지만 곁을 지키는 환관과 궁녀가 따져 묻지 않는다면 예외도 있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평소보다 신경이 날카로운 빛을 하루 내내 유지하던 용안을, 그런 쪽으로 민감하게 발달한 환관들이 못 알아볼 리 없는 것이다. 하물며 태감들이 숙청되듯 줄줄이 파직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일을 수면위로 끌어낸 황제에게 오늘 같은 날 궁중법도 운운하는 고지식함을 보였다가는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저 하고 싶다는 대로 따르고 보좌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요, 성공의 법칙이었다.
황제가 침소를 벗어나 중앙전에서 책을 읽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당직인 어용감의 태감, 하원대는(비리가 크게 드러나지 않아 파직은 면하고, 1품이 강등되어 5품이 되었다) 황제의 소원을 흔쾌히 받아들여 책을 읽기에 최상의 환경을 마련해주는 노력을 보였다.
“폐하, 덥지는 않으시옵니까? 나인을 불러 부채질이라도 할까요?”
문밖에서 아양 떠는 하원대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황제는 대답은 꾸중 같았다.
“방해되니 중앙전 밖에서 대기하라. 필요하면 큰소리로 부를 것이다.”
“예이!”
몇 개의 발짝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한적한 침묵이 밀려왔다. 그때 창밖을 통해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사자비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조심스럽게 창문을 넘어와 무릎을 꿇었다.
“신 사자비,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창가에서 몇 걸음 물러난 황제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굳이 이렇게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가!”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소인에 대한 태감들의 시선이 곱지 않으니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태감들의 눈치를 본다?”
황제는 가소롭다는 투로 말했다.
“그들의 비리를 짐에게 고자질하고, 친황대까지 차지한 그대가 그들의 눈치를 봐야한다는 건가!”
“소인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옵니다. 하물며 대외적으로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지 않사옵니까.”
다 알면서 왜 그러냐는 뜻이었다. 해서 조정례가 총독일 때도 남몰래 황제와 만났다. 때론 구양수 등을 시켜 은밀히 보고와 명령을 주고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하던 사자비는 더없이 공손했고, 표정에는 두려움을 담았다.
그 모습이 싫지는 않았던 모양으로 황제는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탁자에 가서 앉았다.
“친황대의 인수는 차질 없이 끝났더냐?”
“그러하옵니다. 조만간 대주들까지 모두 불러 모아 폐하의 의지를 전하게 될 것이고, 이달 안으로 완벽한 친황대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옵니다.”
“그럼, 이제 네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는 일만 남았구나!”
황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듯했다. 조정례를 내친 만큼 네가 그 몫까지 더해서 성과를 내라는 압력처럼 들렸다.
사자비는 이번에도 공손히 고개를 숙여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믿고 맡겨주신 은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했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사자비는 그 말을 믿었다. 정확히 적재적소를 따른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할 때에는 정확한 시기와 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감격스런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슬며시 말끝을 흐렸다.
거만하게 앉아있던 황제가 의아한 듯 물었다.
“무언가?”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라!”
“폐하의 명과 염원을 받들어 분골쇄신할 준비가 되어 있사오나, 혹여 능력이 미치지 못할까 두렵사옵니다.”
“무슨 뜻인가.”
“저를 비롯하여 친황대 전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옵니다.”
“인재? 그 말은 친황대의 수장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황제는 의심스런 눈초리가 되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차고 넘친다고 보았던 녀석의 행동이 아니어서 종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자비가 말했다.
“바른 자리에 바른 물건을 같다 놓는 격이니 포기라 함은 당치 않으십니다. 단지, 소인보다 뛰어난 자를 윗사람으로 모시고 싶을 뿐이옵니다.”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황제는 바보가 아니다. 겉으로 보자면 아비를 잘 만나 천운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결코 그럴 수 없다. 형제만 해도 십수 명이요 정적은 그보다 더 많아 수백수천 명이었다. 말이 형제일 뿐, 끝내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꺾어야 할 경쟁자들 사이에서 태어나 날 때부터 그들을 눌러야 하는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나이가 들수록 그것은 심해져서 황제의 힘이 다해갈 때쯤에는 혈육상쟁을 벌여야 한다. 그리고 황제의 신임을 얻어 황태자가 돼야한다.
그런 면에서 유건은 승자였다. 많은 형을 꺾었고, 뛰어난 동생들을 눌렀다. 그들의 조력자까지 자신의 조력자를 이용해서 처리했다. 황제는 그저 길가다 사먹을 수 있는 당과 같은 자리가 아닌 것이다.
황제는 사자비가 뜻한 바를 짐작했다. 그래서 비웃는 것이었다.
“오늘에서야 경의 진면목을 보게 되는구나!”
숙여진 사자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무슨 뜻이지?
내 속을 들여다보았다는 건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황제가 자신의 속내를 헤아렸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만인 위에 군림할 수 있겠지.’
그렇게 편히 마음을 먹고 말했다.
“소인배의 면목은 군자의 잡념과 같다고 했습니다. 얕은 재주일 뿐이옵니다.”
황제는 여전히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침을 몇 번 삼킬 시간이 지나자 황제가 물었다. 편한 목소리로 보아 사자비가 품은 속내에 대해서 별달리 신경 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여유, 또는 오만일지도 모른다.
“천거할 사람이라도 있는가?”
“그렇사옵니다.”
“그대가 천거할 사람이라니 기대되는군. 그자가 누군가?”
“혹시, 군왕 유한을 아시는지요?”
“유한?”
“폐하의 혈족이 됩니다.”
혈족이라지만 전대황제의 형제, 즉 숙부와 백부만 해도 스무 명이었고, 그 자식들까지 가려낸다면, 그리고 사촌에 팔촌까지 모두 끌어들인다면 족히 수백은 될 터였다.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일 년에 두어 번 이상 만나지 않는다면 황제가 어찌 그들을 모두 기억할까. 그래서 사자비가 덧붙였다.
“유상 전하의 독자입니다.”
“유상 숙부의?”
그제야 기억이 난 모양이다.
“맞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몇 번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지. 짐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당시에 말들이 많았던 녀석이었다. 아주 똑똑했지. 하지만 심성이 여리고 욕심이라곤 전혀 없는 녀석인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황제가 다시 묘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따진다면 그대가 원하는 사람이로군.”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사자비의 가슴을 찔렀다. 이 순간 사자비는 확신했다. 그가 유한을 친황대의 수장으로 천거한 내심을 황제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역시 안심해도 될 법했다. 하지만 거짓의 몸짓이라도 보여야 예의가 아닐까.
“무슨 말씀이신지…….”
능청스럽게 시침을 떼는데 황제가 손을 휘저었다.
“신경 쓸 필요 없노라. 그보다 괜찮겠는가? 그는 몸이 약하다고 알고 있는데.”
“친황대를 이끌기에는 문제가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흐음! 그렇다면 경은 무엇을 가질 셈인가?”
“……!?”
황제는 탁자 위에 걸린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거기에 턱을 괴었다. 그렇게 편안한 자세로 사자비를 찬찬히 뜯어보는 보며 내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짐이 그를 친황대의 총독으로 임명한다면 경은 무엇을 가지고 싶은지 묻는 것이다.”
“유한 총독이 내려주는 직책을 성실히 이행할 뿐이옵니다.”
황제가 다시 코웃음을 쳤다. 그러다 갑자기 싸늘한 표정이 되더니 엄히 말했다.
“부총독의 직책을 내린다. 총독이 내 뜻을 받들어 친황대를 관장하며, 부총독은 그의 대리인으로서 친황대의 전 무장 세력을 통괄하게 될 것이야. 또한 친황대는 육부의 권한에 벗어날 것이고 형부와 더불어 군부의 통제권을 부여하노라.”
그리고 품계에 대해서 말했다.
“총독이 황실의 종친인 만큼, 그 품계를 없애고 친군지휘부와 함께 독립적으로 내 명을 따르게 된다. 부총독은 2품으로 하되, 군의 통제권을 발휘할 시에는 총독의 허가를 필히 얻어야 한다.”
듣고 있던 사자비의 입이 길게 뒤틀렸다. 그가 애초에 원하던 대로 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고개 숙이고 있어 들키지 않았으나 세포 하나하나가 기쁨의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사자비가 원하고 계획했던 바를 정확히 짚어 말했다.
“한 달 후 친황대를 정식 부서로 선포한다.”
그렇게 되면 친황대는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있어도 없는 그런 단체가 아니라 황제의 비호를 받으며 공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사자비 또한 2품의 벼슬을 정식으로 받게 되는 셈이었다. 황제직속의 무력부대를 관장하는 2품의 벼슬아치. 옛 총독이 동창의 대영반으로서 3품이었으니 그때에 비해 1품이나 올라간 파격적인 대우였다. 실무권자의 품계가 그렇게 된다면, 또 동창이라는 특성까지 가지게 된다면, 친군지휘부처럼 수장이 황족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이 따라올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유한을 끌어들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친왕의 자식이니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아니, 권력에 대한 욕심이라기보다는 권력을 얻고자 무리한 정치를 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 맞았다. 그러니 사자비가 세운 공을 상관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사라진다. 이후부터는 어떤 공을 세워도 그의 공이 되고 그가 빛나게 된다는 말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다른 파벌의 견제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었다. 감히 황족인 군왕을 상대로 파벌싸움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친군지휘부를 들 수 있었다. 황제의 동생 유한이 그 수장이니 누가 그를 상대로 권력다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사자비는 유한이라는 보호울타리를 만든 셈이었다.
세 번째는 친황대의 통제력이다. 사자비는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평가를 내렸다. 어떤 벼슬을 받아도 뼛속까지 무인인 친황대 대원으로 보자면 경력이 길지 않다. 시간이 흘러 능력을 보이면 다르겠지만 처음에 생기는 불신과 불만은 피할 수 없었다. 또한 조정례를 깊이 따르던 녀석들의 견제도 있을 것이다. 사자비는 그것을 유한이라는 수장을 둠으로써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계획대로 친황대가 움직이겠지만, 친황대의 수장은 유한이고 그의 이름을 빌려 명을 내릴 것이기 때문에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친황대원과의 마찰을 없앨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실패했을 때, 혹은 지원이 필요할 때 유용하다는 점이 있다. 성공은 그가 취하고 실패의 책임은 수장인 유한에게 떠넘기면 되는 것이다. 무리한 자금의 지원이나 군대를 동원하게 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마지막 생각은 황제가 꿰뚫은 듯했다.
여전히 엄한 황제의 엄포가 있었다.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이젠 짐이 준 힘을 이용하는 일만 남았을 뿐. 그 뜻이,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알 터다. 짐의 확고한 의지를 그대의 손을 통하여 펼치고자 함이니, 뼛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야.”
엄한 표정에 담긴 미소는 때론 잔인해 보인다. 황제의 미소에는 살기가 배어있는 듯했다.
“짐의 의지가 꺾였을 때, 그 대가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그렇게 말을 마쳤다.
비싼 값의 날개를 달아주었으니 그것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뜻이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각오하라는 협박이었다.
이제는 졸린 듯 깍지 낀 손을 풀고 의자에 등을 기대어 슬며시 눈을 감았다. 아래에서 그 모습을 힐끔 올려다본 사자비가 감격의 목소리로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제가 손을 떨쳤다.
사자비가 황공하다는 듯 떠듬거렸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사자비는 은밀히 중앙전을 빠져나왔다. 두려움과 감격이 뒤섞인 그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냉정하고 치밀한 사고를 돌리는 영리한 늑대의 그것처럼 차갑게 달빛에 떠올랐을 뿐이었다.
중앙전 담장을 넘자 곧바로 두 개의 검은 인영이 튀어나왔다. 야차귀로의 대원이었다. 정식절차를 밟아 황제를 알현한다면 입궁 시에 궁문에서 기록을 해야 하고, 그러면 친군지휘부와 태감들이 알아차리게 된다. 그들을 자극할 수 있기에 몰래 들어와야 했고, 나가야했다. 그러자면 야차귀로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궁을 둘러친 담장과 거기에 걸린 진법은 사자비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궁 때처럼 야차귀로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내궁을 벗어났다. 그렇게 황궁을 완전히 벗어났을 때 들뜬 기분과 달리 깊은 한숨을 쉬었다. 거침없이 여기까지 달려왔지만 꼭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것도 사실. 이제 모두 끝나서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
끝은 곧 시작을 예고한다. 무림 말살에 대한 성공을 확신하진 않았다. 다만 조정례가 실패한 원인은 알고 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결정적으로 황제가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황제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낼 자신이 있었다.
사자비의 입가에 달빛처럼 밝은 미소가 반사되었다.
제4장 수면에 떠오른 친황대
1
황제는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과한 대우를 하신 게 아니옵니까?”
괴이쩍은 목소리가 천장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보았는가?”
“아직 경험이 일천한 젊은이입니다.”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지 않는가. 젊은 패기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본좌는 그런 인재를 원하노라. 또한!”
황제의 입가에 사자비의 그것과 같은 미소가 걸렸다.
“태감들이 힘을 잃었다. 이 기회를 엿본 무리들이 정권을 잡고자 치열한 파벌싸움을 할 터. 친황대의 공식적인 운영은 그 모든 다툼을 단번에 잠재울 것이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옵니다.”
“짐의 말이 곧 법이다. 거스르는 자는 처절한 응징만 있을 뿐.”
오만에 젖은 말투는 맞춘 옷처럼 황제와 잘 어울렸다.
☆ ☆ ☆
보름 후, 조정례의 파면에 의해 혼란을 겪었던 친황대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고 본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쯤 수라금룡대의 편성훈련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는데, 일천 명이 약간 넘는 수라금룡대가 언제든지 실전에 투입될 수 있게 대기 중이었다. 제일수라금룡대에서부터 제십수라금룡대까지였다. 나찰귀로까지 합치면 열한 개의 부대로 약 일천백 명을 자랑하는 셈, 무림으로선 상상 할 수 없는 막강한 전력이었다.
거기다 아직 소오태산에서 교육 중인 수련생이 있으니, 이 년 후에 그들까지 더한다면 일천오백 명이 된다. 그 외에도 친황대 내부에서 기른 정보요원과 고수가 삼백이요, 지방에 흩어진 이들까지 합하면 일천 명이 넘었다.
동창도 있다. 친황대가 동창 내부의 조직이라지만 실질적으로는 동창보다 우위에 있었고, 정식으로 친황대가 발표된 후에는 동창을 하부조직으로 움직일 수 있었기에 그 힘도 전력에 상당한 보탬이 될 것이었다. 현재 동창 대원만 해도 일천 명이 넘어가니 말이다. 그중 칠 할은 친황대 만큼은 아니지만 소오태산에서 백일홍을 수련했던 녀석들이라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진짜 친황대의 전력은 따로 있었다. 바로 흑각철기대였다.
조정례와 태감들의 대립 때, 운 좋게 구했던 황보윤의 비밀장부 때문에 사자비도 흑각철기대에 대한 존재 여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보고는 꽤 놀랐다. 특히, 그들의 수장이 고연화의 할아버지인 고걸령 장군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삼만이라…….”
기가 막힌다고나 할까. 무림토벌을 위해 만들어진 군대의 규모로는 놀라울 정도로 컸다.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지원되는 자금과 무기, 갑옷 등 필요물품을 파악했을 때는 실소까지 튀어나온다.
그들은 병사 하나하나가 모두 흑색갑옷으로 완전무장을 하는 것 같았다. 얼굴까지 투구로 덮어 써서 눈만 드러나는 갑옷을 입고 어떻게 싸울까? 그 무게 또한 대략 백오십 근(약 90킬로그램)인데. 이 정도 갑옷이면 몸을 보호하는 철통의 두께가 얼마나 두꺼운지 알 만하다. 웬만한 고수는 그들에게 타격조차 줄 수 없으리라. 뿐만 아니라 갑옷의 무게만큼이나 나가는 방패와 무기가 있어서 완전무장을 한다면 삼백오십 근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특색은 부대의 이름대로 모두 흑색!
갑옷과 투구, 방패와 무기 모두가 흑색을 쓰고 있었다. 아마도 가장 강도가 세다는 현철을 사용하고 거기에 검은 칠을 했을 것이다.
보통사람은 입고 걷지도 못할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면 모두 무공을 익힌 자들일 텐데……. 기록에도 그들은 무공을 익힌 고수이거나, 부대에서 양성한 자들이었다. 그런 병사 삼만이 병법과 진에 의해 대열을 갖추고 적을 밀어붙인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이 힘을 가지고도 그렇게 소극적인 전략을 펼쳤다니…….”
한편으로는 조정례의 신중함을 배우고 싶고, 한편으로는 소심함을 비웃었다.
사자비는 이제 다른 서류로 눈을 돌렸다. 아직도 파악할 문서가 산더미였다. 친황대의 모든 기록과 계획을 정리하고, 그간 벌였던 사업 등을 종합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이어갈 것은 뽑아 체계를 잡아야 했다. 그렇게 열흘이 더 흘렀을 때, 갑자기 집무실로 나이 든 문사가 들어왔다. 이름이 황천강(黃天罡)이라 했는데, 친황대의 부영반이었다. 원래 친황대도 동창의 내부에 나뉜 조직이었으므로 동창과 마찬가지로 총독, 즉 대영반 한 명에 부영반 두 명이 있다. 황천강은 홍규가 동창제독이 된 덕분에 외부에 파견 갔다가 얼마 전에 복귀한 자였다.
“밖으로 나오셔야겠습니다, 총감!
“무슨 일인가?”
황천강이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로운 총독께서 곧 도착하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새로운 총독이라면 유한밖에 없었다.
사자비는 보던 서류를 덮고 황천강을 따라 정문으로 향했다. 저 멀리 보이는 한적한 촌 동네를 거쳐 길이 나있는데, 그곳으로 그림자 하나가 길게 늘어났다. 연이어 그림자가 생기더니 다섯 개의 인영이 시선에 들어왔다. 한 사람이 선두에 서서 말고삐를 잡아끌고, 말 위에는 갑옷을 입은 사십대 중반의 사내가 있었다. 그 뒤로 문사 세 명이 따랐다.
사자비는 정문 밖까지 나가서 다섯 일행을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군왕전하!”
공손히 포권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에 탄 중년인을 살폈다. 소정동의 말대로 비쩍 말라서 화려한 갑옷이 어색해 보이는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이 붙으면 꽤 미남일 것 같은데, 뼈에 살가죽을 붙여 놓은 듯해서 보기가 안쓰러웠다. 그러나 대답하는 목소리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듯 청명하고 푸근한 맛이 있는 듯하다.
“그대가 나를 폐하께 천거한 총감 사자비인가?”
“그러하옵니다.”
중년 사내, 유한은 말에서 내려 미소 같은 것을 떠올렸다.
“나를 어찌 알고 천거했는지 모르겠으나, 잘한 일은 아닐세, 그려.”
그러면서 멋쩍은 웃음을 흘리더니 총단으로 들어갔다.
사자비는 직접 유한을 안내하여 총단 지리를 파악하게 한 뒤 마지막으로 유한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동안 친황대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특성, 창립목적을 알려주었는데, 유한은 관심 없는 것 같았다. 집무실에서 각자 자리에 앉기 바쁘게 맹한 표정으로 사자비만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에 친황대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따로 정리한 서류들이니 보시고 의문이 드시면 물어보십시오.”
사자비는 준비했던 몇 개의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유한은 그것을 볼 생각도 않고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집무실을 잘 꾸몄군. 책도 많고, 창 밖 경치도 좋은 것이 일할 맛이 날 것 같네.”
“전하가 오신다고 하여 신경 써서 준비했습니다.”
“고맙네. 한데, 올해 총감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스물둘이 됩니다.”
“호오, 그래? 놀랍군.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것이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운 좋게 폐하의 눈에 들어 친황대의 부총독을 맡았을 뿐이옵니다.”
“하하, 단지 운이 좋다고 그만한 나이에 정이품의 관직을 얻을 수는 없지.”
그러면서 유한은 은근한 투가 되어 물었다.
“나에게 늦게 본 딸아이가 하나 있는데, 어떤가? 생각이 있다면 자네에게 보이고 싶네만? 자네 정도의 미남자라면 딸아이도 한눈에 반할 걸세. 아! 이제 열 살이네만 어리다고 탓하지 말게. 하하하!”
사자비는 짜증을 애써 감추며 서류를 가리켰다.
“생각해 주어 감사합니다. 우선, 서류부터 보시지요.”
“그건 나중에 천천히 보기로 하고…….”
“닷새 후면 친황대가 공식적인 부서가 됩니다, 전하. 그전까지 대충이라도 파악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때까지 봄세.”
사자비는 내심 실소를 흘렸다.
‘사람을 잘 못 택한 건가!’
하지만 아니다. 나태함에 물든 유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중 눈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른한 유한의 두 눈이 밝게 빛나는 것이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결코 나태하지 않다. 바보도 아니다. 서책에 파묻혀 살았다니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자비는 그제야 마음이 밝아졌다. 반면, 생각 이상의 인물일지도 몰라 불안한 마음도 생겼다.
사자비가 물었다.
“혹시,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
“언짢은 일? 내게 그런 일이 어찌 있겠는가? 다만…….”
말끝을 흐리던 유한이 방긋 웃었다.
“내 임무에 충실하려 한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자넨 허수아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폐하께서 나를 불러 총독의 자리를 주실 때 그런 느낌을 받았네. 난 주위에서 원하는 만큼만 하는 사람이라네. 그 이상을 하게 되면 분란을 사게 되거든.”
사자비는 둔기로 머리를 맞은 표정이 되었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 온 것 같았다.
‘원하는 만큼 한다? 대단한 것을 원하면 실망시키지 않은 능력이 있다는 건가?’
이건 또 다른 부류의 뛰어난 사람 같았다.
어쩌면 죽이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한 면도 마음에 들고, 욕심보다는 사람과의 조화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의지도 마음에 들었다. 능력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사자비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 때문에 유한이 놀라서 바라보는데, 개의치 않고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이 일에 저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결코, 전하께 소홀하지 않을 것이니 친황대를 잘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한은 멀뚱멀뚱 사자비를 보다가 침묵이 지겨워질 때쯤에 픽 웃었다.
“이제부터는 전하라는 호칭은 빼게.”
“……?”
“앞으로는 그냥 총독이라고 부르라는 말일세.”
부드러운 말투가 약간 엄해진 듯했다.
사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그제야 총독 유한이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사자비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다섯 개의 서류를 훑어보는데 일 각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 책만 읽었다더니 무시무시한 속독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대충 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건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사자비가 정리한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한참 친황대의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유한이 물었다.
“내 생각에는 조 태감의 계획이 정확하네. 가장 안전하기도 하고. 무림을 없앤다는 일은 작지 않아서 단시간에 이룰 수 없는 일일세. 그럼에도 자네는 폐하께 호언장담을 한 듯하더군. 폐하도 상당한 기대를 하고 계셨지. 무림말살에 대한 자네의 뜻이 무엇인가?”
“물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혹시,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목적에 따라 다르지 않겠나. 무림말살은 불가. 무림 통제는 어렵지만 가능. 폐하의 힘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라면 쉬운 일일세.”
사자비는 미소를 띠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목적을 상대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그런 생각을 하네. 조정례의 실패는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폐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에 있지. 폐하는 무림정벌을 목적으로 두지만 그 이면에는 황실의 힘을 알리고 싶은 의지가 있는 것이라 보았네. 조 태감은 너무 신중했어.”
“맞는 말씀입니다. 해서 무림에 황실의 힘을 보일 생각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그들의 세력을 조금씩 잠식해갈 생각입니다.”
“그렇게 결과를 보인 후, 종내에는 통제력까지 가진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총독이 하하거리며 웃었다.
“당장에 결과를 보이면서 폐하의 신임도 쌓고, 나중에는 실적을 올린다. 좋은 생각이로군. 알겠네. 자네의 목적을 알았으니 내가 힘이 되어주겠네.”
“감사합니다.”
“무림에 대한 조직체계를 서류로 작성하여 내게 가져오게. 무림에 대해 알아야 자네와 대화가 통하지 않겠는가!”
의기투합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사자비는 그간 기회가 없어 능력을 펼치지 못한 채 서책에만 파묻힌 사내의 한을 본 것 같았다. 주위의 시선과 질투를 두려워하여 웅크리다가 결국 날개를 펴고 싶은 마음이 병이 되어 서서히 의지를 잃어가는 사내, 능력이 있음에도 쓰일 곳이 없어 구석에 처박힌 사람의 한이 느껴지는 듯했다.
“오늘 안으로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두말없이 대답한 사자비는 서류를 작성하고자 집무실을 나갔다.
2
친황대의 존재가 황제의 입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부상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조례에 참석한 대신들의 반발이 생각 이상으로 컸다. 상석에서부터 아래 관리까지 차례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반대를 주장하고, 그 폐단을 거론했다.
황제 유건은 융통성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독단으로 나라를 경영해왔으면서도 대신들의 불만을 그리 많이 사지 않은 군주였다. 관리의 처지를 생각하여 많은 예외를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예외도 변경도 없다.
“과인의 결정에 불만이 있는 자는 남으라.”
돌아가면서 쏟아내는 대신들의 불평을 한 시진 가량 듣던 황제의 싸늘한 선고였다. 조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조례가 끝났을 때, 남아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의 결정을 받아들여서는 아니었다. 당장 그와 마주하여 반대할 수 있는 배짱이 없을 뿐이다.
여론은 모이면 힘을 발휘한다고 했다. 조례가 끝나고 끼리끼리 모여 의견을 일치시키니 간이 커진 모양, 다음날부터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모두 친황대의 창건을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친황대의 출범이 며칠이나 늦어진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은 요지부동. 대신 몇 명을 차례로 불러 면담하고 그 외에 몇 명은 불충한 죄를 물어 옥에 가두어 버리니 매일같이 쏟아지던 상소문이 줄고 종내에는 아무도 반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반대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예정된 순서가 진행될 수밖에. 황제는 그대로 친황대의 존재를 허락하고 옥새를 찍어 황제의 독립호위대로 인정해 버렸다. 그렇게 어렵고도 쉽게 탄생한 친황대의 출범은 이후로 얼마간 생각지 못한 문제 때문에 시름을 앓게 된다. 바로 대신들의 변심이 원인이었다.
“상림원감의 우감정(右監正)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하인의 목소리가 이제는 익숙할 지경, 사자비는 2품의 벼슬을 받으며 황제가 따로 하사한 저택 접객실에서 비웃음을 흘렸다. 결국, 황제의 뜻대로 진행되자 친황대를 반대하던 대신들이 언제 그런 상소를 올렸느냐는 듯 문이 닳도록 찾아오는 것이다. 오늘만 해도 아침나절부터 신시에 이르기까지 스무 명의 문무대신을 만났고, 앞으로도 며칠간은 손님이 끊이지 않을 것 같았다.
만남에서 그들이 하는 말은 각양각색이었다. 나라가 어떻고, 정치가 어때야 하며, 외국이 어떻고, 백성이 어떻다는 것들인데, 자신의 충심과 청렴을 유창한 언변으로 풀어놓고는 결국 한 마디로 귀결되었다. 앞으로 잘 좀 봐달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돌아갈 때는 떡값이라도 하라며 봉투 하나씩을 놓고 갔다. 그렇게 열흘 동안 만난 관리가 물경 이백을 넘어가고, 그들이 놓고 간, 혹은 얼굴이 드러나기를 꺼려서 하인을 보내어 두고 간 봉투가 도합 육만 냥이 넘었다.
사자비는 그 액수로 공포정치의 선두인 동창의 힘과 권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열흘 만에 육만 냥의 뇌물이 들어오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봉투는 모두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훗날 비수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뇌물을 받으면 받은 만큼 답례를 해야 함도 이유가 되었다. 거기에 들어가는 돈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육만 냥이라지만 실제로 사자비에게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을 가능성도 컸다. 소탐대실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이런 뇌물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었다. 당장 항주만 하더라도 서른다섯 개의 사업장을 백궁에 넘기며 일부의 돈을 상납받기로 하지 않았던가. 나머지는 매년 세금 형식으로 거둬들이기로 했는데, 마음만 먹으면 거기에서 황실로 유입되는 돈을 빼돌릴 수가 있었다. 그도 아니면 다른 문파에서 충당할 수도 있고, 친황대의 자금을 이유로 황실에 지원을 요청하여 금전적인 욕심을 채울 수도 있었다.
권력은 돈을 몰고 다닌다. 당연히 따라온 이익을 쫒을 사자비가 아니었다. 때문에 찾아오는 관리를 대충 만나주다가 열흘이 지났을 때, 몸을 빼어 갈천과 함께 장북산으로 향했다. 당장 시급히 해결할 문제가 있었다. 믿을만한 사람의 부재였다.
총감, 즉 부총독의 직책을 받았지만 사자비는 자신의 특기 때문에 총단을 비울 일이 많았다. 그때를 대비하여 유한을 보좌하고 무력부대를 책임질 사람이 절실한 시점인데, 떠오른 사람은 소정동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경력이 일천하여 대주들의 불만을 살 수 있고, 또한 홍 영반의 감시도 중요했기에 제외했다. 그러다 번쩍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친황대의 성질에 대해서 잘 알고, 무시 못 할 경력까지 있어 대주들의 불만을 누를 수 있는 자, 사자비의 생각으로는 가장 적임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갈천을 장북산 입구에 대기시킨 사자비는 홀로 산을 올랐다.
“이쪽이 맞나?”
여름의 깊은 산중은 길까지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가 덩치를 부풀려 원래 있던 길을 덮어 놓았다. 어쩔 수 없이 감에 의지하여 길을 재촉했데, 다행히 지리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지 않아서 한 시진 만에 익숙한 초옥을 찾을 수 있었다.
“계십니까?”
텃밭을 지나 곧장 사립문을 열었다. 예전의 기억처럼 닭 몇 마리가 바닥을 쪼며 마당을 거닐고 부엌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마당으로 보아 아직 사람이 있는 듯하다.
“계십니까, 선배님?”
방문을 향해 다시 외치자 귀를 거스르는 경첩 소리가 문틈을 벌리더니 작은 얼굴 하나가 빠끔 튀어나왔다.
“누구세요?”
사자비는 잠시 당황했다. 튀어나온 얼굴은 이제 열 살 정도의 사내아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말투 또한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잘못 찾지는 않았는데…….’
다시 둘러봐도 기억의 그 초옥이 맞았다. 이때 부엌에서 발짝 소리가 들리더니 소녀가 나왔다. 생김으로 보아 사내아이와 남매인 듯했다.
“어떻게 찾아오셨죠?”
열대여섯 정도의 소녀는 흥미로움을 시선에 담아 사자비를 뜯어보았다. 잘생긴 얼굴이 마음에 드는지 아이 녀석보다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살짝 얼굴까지 붉힌다.
사자비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이곳에 주 씨 성을 쓰시는 분이 계시지 않니?”
대답은 사내아이가 했다.
“사부님이요?”
“사부님?”
“네. 우리 사부님이신데요.”
사자비는 실소를 흘렸다. 그가 총독의 부름을 받고 떠난 후 제자를 받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적막한 산속에 노인 홀로 지내란 참으로 심심할 것이다. 한데, 여전히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이유는 금방 알았다.
“왜요? 형도 우리 사부님 귀찮게 하려고 왔어요?”
누군가가 찾아와서 귀찮게 했던 모양이다. 그것을 본 제자도 짜증이 날만큼 귀찮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누구일까? 평생 황실에 몸담아 수련에 열중했던 사람을 찾아와 귀찮게 할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람이 있었을까?
“또 누가 찾아왔니?”
이번에는 소녀가 대답을 대신했다.
“대동방이라는 곳에서 얼마 전에 왔었어요.”
“대동방?”
“네. 곽 씨 성을 쓰시는 분이셨는데, 무사 몇 명을 끌고 다니면서 보름 동안 사부님을 괴롭히셨어요.”
‘괴롭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물었다.
“지금 어디 계시니?”
“이 근방에 호숫가가 있는데 거기에 가셨어요. 곽 씨 분도 쫓아가셨고요.”
“흐음, 곽 씨에 대동방이라…….”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갑자기 사자비가 하하거리며 웃었다. 흘러가듯 들었던 옛이야기였다. 곽대응이라고 했던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그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주자혁에게 목숨을 걸고 비무를 신청했다가 마지막에 살려달라며 울었다던 순진한 무림초출의 이야기가 기억에서 슬쩍 고개를 쳐들었다.
“뭐가 좋아 웃어요?”
사자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이 녀석은 끝까지 불만스럽게 톡 쏘아붙였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저 모습 또한 익숙했다. 꼭 소정동의 어릴 적 같지 않은가.
사자비의 웃음이 거슬린 모양, 아이가 인상을 썼다.
“아무튼 사부님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녀석, 어른에게 버릇이 없구나. 그러다 이 형에게 혼난다.”
장난삼아 꾸짖는데 아이가 발끈하여 반응했다.
“흥, 날 건드리기만 해봐요. 사부님이 형을 가만둘 것 같아요? 우리 사부님은 무공이 무지 강해요.”
“호오, 그래? 그렇다면 너도 강하겠구나?”
“…….”
아이는 입을 꽉 다물었다. 옆에 있던 소녀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사실, 사부님을 모시게 된 건 몇 달 되지 않아서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사부님을 찾아오셨나요?”
사자비가 밝게 웃었다. 소녀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단다.”
그때, 아이가 벌컥 문을 열더니 몸을 일으켰다.
“사부님이 오신다.”
그리고는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어지간히 사부님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사자비도 몸을 돌려 문밖을 바라보았다. 과연 반가운 얼굴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그 뒤로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아마도 곽대응으로 예상되는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옷만큼이나 화려한 보검을 차고 따르고 있었다. 그를 호위하는 듯한 다섯 명의 무사도 보이고, 거리를 두고 있는 이십대 후반의 여인도 있었다.
사내는 초옥으로 오면서도 주자혁에게 무어라 쉼 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주자혁이 시종일관 인상을 찌푸렸지만 눈치 없는 녀석은 입을 놀리기에 바쁜 듯했다. 그러다 주자혁이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사내와 사내의 호위, 여인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사내가 물었고 주자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망연히 초옥 마당에 서 있는 사자비를 보다가 머리만 긁적였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초옥으로 들어왔다.
“여긴 어쩐 일인가? 설마, 벌써 쫓겨났나?”
사자비의 행색을 뜯어보던 주자혁의 물음이었다.
“그럴 리가요.”
사자비는 웃으면서 소녀와 아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보다 제자를 두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뭐 소일거리 삼아 시작했지. 사정이 딱하기도 했고, 적적하기도 해서.”
“똘똘해 보이는 것이 잘만 가르치면 대성하겠는데요.”
“그러면 나야 좋지. 한데, 산책 삼아 왔을 리는 없을 테고, 말해보게. 무슨 볼일인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누구 부탁?”
“제 부탁입니다.”
주자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녀에게 차를 내오라 일렀다. 그리고 평상에 앉아 사자비를 보았다.
“자네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지. 무슨 부탁인가?”
“복귀하셨으면 합니다.”
“복귀?”
“네. 한동안 쉬셨으니 이젠 복귀하셔야지요.”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네만?”
“달리 말씀드리면 초빙이라고 해야겠군요. 선배님을 모셔가려고 왔습니다.”
“하하, 나 같은 늙은이를 데려다가 어디에 쓰게?”
“실력이 있으면서 믿을 만한 분이 필요합니다. 거기다 인맥도 두터운 사람이면 더욱 좋죠. 곰곰이 생각해보니 선배님 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주자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자비가 떠난 후로 황실의 정보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혹시, 자네가 몸담은 곳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사자비가 고개를 끄덕일 때, 때마침 소녀가 차를 내왔다. 사내와 그 일행은 무시하고 두 잔만 가져와서는 사자비와 주자혁 앞에만 놓았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사자비가 찾아온 이유 때문인지 사내, 곽대응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봐 젊은 친구!”
찻잔을 들던 사자비가 그를 보았다.
“뭐요?”
“들어보니 어르신을 모셔가려고 온 것 같은데, 이미 늦었네. 주 어르신은 우리 대동방에서 모시기로 합의를 보았다네.”
그러자 주자혁이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보았다. 곽대응은 의도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더니 사자비를 항해 엄포를 놓았다.
“어르신의 힘이 필요하면 다른 날 다시 찾아오게. 오늘은 일없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겠소.”
곽대응이 인상을 구겼다.
“젊은 친구가 세상사는 법을 모르는구먼. 상도덕이라는 것이 있네. 같이 어르신을 모시고자 왔다면 먼저 온 사람에게 취득권이 있는 건 당연하잖은가.”
사자비는 주자혁을 힐끔 보면서 눈으로 곽대응을 가리켰다.
“이분이 전에 말씀하신 그분입니까?”
“아! 그걸 아직도 기억하나?”
재밌다는 듯 한참을 껄껄거리던 주자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이 녀석이 대동방의 곽가지.”
듣고 있던 곽대응의 표정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 어르신! 설마…… 저와의 약속을 어기신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나. 안심하게, 비밀은 평생 가져갈 걸세. 단지 여행 중에 뛰어난 후기지수를 만난 이야기를 한 번 나눈 적이 있었다네.”
“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순진하게도 곽대응은 그 말을 그대로 믿는 듯했다. 그러다 이게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 번 사자비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아무튼, 어르신은 우리와 함께 갈 터이니 귀찮게 하지 말게.”
이번에는 주자혁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 말을 자네에게 되돌려주고 싶군. 제발 돌아가라는데도, 왜 이리 귀찮게 구는 건가.”
“어르신, 몇 날 며칠 제가 한 말을 흘려들으신 겁니까?”
“흘려들었네.”
“어르신!”
주자혁은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곽대응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르신이 아니면 저뿐만 아니라 우리 식속들이 전부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습니다. 대동방이 공중분해 되는 걸 막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
“대동방이 내 방파도 아닌데, 내가 왜 수고로워야 하나?”
“인연의 끈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딱히 자네에게 그런 걸 못 느끼겠네만!”
곽대응이 버럭 소리쳤다.
“아무튼!”
부탁하는 어조로 이어졌다.
“전 어르신을 꼭 모시고 가야겠으니 이만 항복 하십시오.”
“일없네.”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각오하고 왔습니다. 제가 제 누이와 함께 어르신 보는 앞에서 자결할 생각으로 왔다 이겁니다.”
뒤에 있던 여인이 소리쳤다.
“난 빼줘요.”
“소, 소응아, 그게 무슨 말이냐?”
당황하는 곽대응을 향해 주자혁이 말했다.
“잘 되었네. 자네가 죽으면 따라갈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
“으음!”
말장난에 놀아난 줄도 모르고 심각하게 그 부분을 생각하다가 끝내 할 말을 잃은 듯 침묵을 지킨 곽대응이었다. 아무래도 순진한 사람이 분명했다. 차를 홀짝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자비가 궁금함을 느끼며 물었다.
“그러는 형장은 왜 주 선배를 모셔가려는 거요? 대동방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할 말이 생겨 다행이라는 듯 곽대응은 금세 용기를 얻은 표정이 되었다. 그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제5장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1
그의 설명은 이랬다.
몇 달 전의 일이었다. 호광 남부지역, 즉 호남 강영(江永)에 갑자기 이름도 출처도 모를 이상한 녀석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들은 그곳을 터전으로 삼은 무림에 일언반구도 없이 표국과 전장 따위를 열었다고 했다. 강영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 자리 잡은 무림세력만 이십여 개. 자기 밥그릇을 빼앗으려는 녀석들이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여 가장 피해가 크다고 생각한 대동방과 청일문이 먼저 나섰다. 혼 좀 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뼈아픈 패배. 알고 보니 그들은 잔월신교, 즉 마교의 고수들이었다. 마교가 그곳에 분타를 설치한 것이다.
이 일은 심각한 문제를 불렀다. 마교는 여타 무림 세력과 그 성질을 달리한다. 광서성 십만대산(十萬大山)에 총단을 둔 마교가 하필 호남에 진출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 뜻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돈을 좀 더 벌어보자는 수작일 수도 있고, 마교의 건재함을 자랑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모르고 달려든 대동방과 청일문만 불쌍하게 되었지만 강호 전체로 보자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마교와 같은 곳을 영역으로 삼게 된 다른 문파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겁쟁이가 아니다. 바보 또한 아니다. 이렇게 있다가는 언제 마교의 기습을 받을지도 모른다. 예상과 달리 강호일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면 가장 가까운 그들부터 공격이 시작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남은 문파가 뭉쳤다. 그리고 깨졌다. 크고 작은 몇 번의 전투 끝에 그들은 결국 마교라는 거대한 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수도 잃고, 사업장도 빼앗겼으며, 친구와 가족, 동료도 잃었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일대 무림이 무너지자 거기를 이웃으로 삼던 무림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해서 석 달 전에 영주와 신전을 무대로 세력을 떨치던 남도문(南道門)과 여러 문파가 규합하였다.
그들은 강영을 거울삼아 곧바로 마교를 치지 않았다. 몇몇 문파가 뭉치더라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임을 강영의 일이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무인을 모으는 수밖에 없다. 영주에서 개최되는 무림대회의 속사정이었다.
그들은 무림대회를 통해 전국의 무인들을 모으고 마교의 문제를 거론할 생각이었다. 때문에 북으로는 호북과 사천. 남으로는 강동. 서로는 귀주. 동으로는 강서와 복건까지 무림 세력을 파악하고 초청장을 마련해 보냈다. 호남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되도록 힘 있는 명문을 중점적으로 해서 정사를 가리지 않고 초청장을 보냈다. 상금도 걸었다. 명색이 무림 대회인 만큼 비무대회의 형식이 필요하고, 웬만한 무인이라면 혹할 만큼의 상금을 내걸어 유혹했다.
“그걸 마교가 모르지는 않을 텐데? 대회를 방해하거나 대회가 시작된 후에 쳐들어와서 회방을 놓으면 어쩌나?”
듣고 있던 주자혁의 물음이었다. 그도 이런 설명은 오늘 처음 듣는 모양이었다.
사자비가 말했다.
“오히려 바라는 바일 겁니다.”
이번에는 곽대응이 어수룩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바란다고? 왜?”
사자비가 그것도 모르냐는 눈치를 준 후, 주자혁에게 대답했다.
“호광 남부를 비롯하여 일곱 개 성에 있는 문파의 숫자는 어마어마합니다. 정사를 가리지 않았다니 일부만 온다 해도 상당한 규모가 되겠죠. 중요한 점은 대회에 참석한 문파 중에 명문도 꽤 섞여 있을 거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마교가 쳐들어와서 그들을 상하게 하면 대회를 개최한 남도문 등 여러 문파는 어부지리가 되겠죠. 대회에 보냈던 문도가 마교의 기습에 의해 죽거나 다쳤다면 체면상 가만히 있을 문파는 없을 테니까요. 아마도 마교가 준동한다는 이유를 들어 무림이 규합할 겁니다. 또한 그러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마교 자체가 무림에서 위험한 존재로 통하니까요. 대회에서 마교의 만행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심한 견제가 시작될 것이고, 그러면 마교는 섣불리 타 문파를 공격하지 못하게 됩니다.”
“대회 자체를 열지 못하게 하는 방법도 있지 않나?”
“그 또한 무림을 자극하는 일로 보일 겁니다. 개최 전에 이미 초청장을 전 무림에 돌렸을 테니까요. 아마도 남도문주는 큰돈을 쓰더라도 마교가 잠잠해지기를 바라거나, 장강 이남 무림과 마교의 싸움이 되기를 바랄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곽대응이 손뼉을 쳤다.
“아아! 그런 꿍꿍이가 있었군. 대단한데? 젊은 친구의 머리가 꽤 잘 돌아가나 봐. 한 번에 알아맞히다니!”
옆에서 지켜보던 사내아이가 불퉁하니 외쳤다.
“그건 나도 알겠네.”
곽대응이 아이를 째려보며 얼굴을 붉혔다. 사자비가 웃으며 물었다.
“그보다 잔월신교의 실력은 어땠소? 싸워봤다니 잘 알 것 같은데.”
“말도 마시게. 나도 마교랑 부딪힌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그놈들은 인간이 아니야.”
“어떤 면에서?”
“붕붕 날아다니지 뭔가. 어떤 놈들은 몸이 막 늘어나기도 하고. 분명히 칼을 맞았는데, 금방 재생되는 놈도 있었어. 그게 인간이야? 본방과 청일문의 고수만 일천 명을 끌고 갔는데, 그쪽은 분타를 지키는 이백 명으로 우리를 끝장냈지. 와! 그걸 사람들이 봤어야 했는데. 멋졌지.”
그 멋진 장면의 희생자가 자신과 동료였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은 듯했다. 일변 감탄하고, 일변 욕설을 뱉으며 그때를 반추하는 눈으로 보고 겪은 일을 풀어놓았다.
과장이 분명한 이야기를 듣던 사자비가 다시 물었다.
“책임자는 누구였소?”
“책임자?”
“마교를 이끄는 인물이 있었을 것 아니겠소.”
“암, 있었지. 아주 삐쩍 말라서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노인이었어. 자기를 팔장로 강혈대마(鋼血大魔)라 하더군. 별호가 멋지지 않나? 그리고 그 옆에 나만큼이나 잘생긴 청년이 있었는데, 그놈은 교주의 여섯 번째 제자라고 했네.”
“교주의 제자? 흑룡, 남기린 등과 비견된다는 봉황?”
“뭐 그렇지.”
여기서 사자비의 의문이 커졌다. 흑룡과 기린, 백호 등과 함께 무림을 놀라게 했던 봉황이라면 다섯이었다. 그런데 여섯째 제자라면…….
‘새로운 제자인가.’
그러고 보니 교주의 제자는 한 번씩 무림을 떠돈다는 이야기를 설지하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 이번도 그런 이유일까? 마교의 장로라는 자와 함께 나왔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뭐 상관은 없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부분은 다른 것이니까. 그래서 물었다.
“그들의 무공은 어땠소? 교주의 제자와 강혈대마라는 자 말이오.”
“눈에 칼을 달아 놨는지 시선이 마주쳤는데, 짜식! 제법 날카롭더구만. 나만큼이나!”
“무공!”
“아! 무공이야 구경 못 했지. 그놈들은 그냥 가만히 서서 구경만 했거든.”
“흐음!”
생각보다 잔월신교가 더 대단한 것 같았다.
‘흥미롭네.’
“한데, 대동방이 주 선배님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주자혁이 대답했다.
“별일 아니네. 고수들이 죽거나 다치고, 남은 이들도 대부분 떠났다더군.”
때맞춰 곽대응이 분개한 목소리로 외쳤다.
“맞습니다. 정작 용감하게 마교와 싸운 사람은 나와 대동방인데, 세력이 꺾이니 우리 대동방에는 초청장조차 보내지 않지 뭡니까.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대동방을 개처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닙니까! 거기다 마교 때문에 사업 대부분은 엉망이 되었지, 고수랄 만한 녀석도 이제는 없어서 다른 사업을 하기에도 벅찰 지경이지.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여 삼 대째 이어온 대동방이 이러다가는 공중분해 되는 것도 시간문제요…….”
마지막은 주자혁과 함께 했다.
“가솔들까지 길바닥에 나앉을지도 모르니 큰일입니다.”
“가솔들까지 길바닥에 나앉을지도 모른다?”
수없이 들은 모양이었다. 주자혁이 씁쓸하게 웃고, 곽대응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말을 이었다.
“내가 방주직을 이어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불행이 닥치는지……. 어떻습니까, 제 사정이 훨씬 절실하지 않습니까? 주 선배님 같은 고수가 도와준다면야 작은 표국 하나를 열어 다시 시작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숨도 쉬지 않고 재잘거리더니 끝내 헥헥거렸다.
사자비가 말했다.
“딱하게 되었구려.”
“그러니 젊은 친구는 빠지게.”
“그러면 좋겠으나, 형장의 사정을 봐줄 이유가 내겐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요.”
곽대응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사자비를 훑어보며 피식 웃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친구로구만. 내가 먼저 왔고, 내 사정 또한 급한데 어디서 이치에도 맞지 않는 이기를 부리는 건가?”
“이기적인 건 그쪽도 마찬가지 같소만? 선배님은 그쪽을 따라가고 싶은 눈치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뭐, 뭐라고?”
당황한 표정을 숨기고자 했는지 곽대응이 윽박질렀다.
“하하, 이놈 보게. 어르신과 친분이 있는 것 같아 참고 있었더니 가관도 아닐세. 어디 몇 군데 부러져봐야 위아래가 보일 테냐?”
그러면서 위협하는 형식으로 슬며시 손을 옆구리로 가져갔다. 거기에는 화려한 보검이 뽑아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너무 화려해서 실전에서는 하등 쓸모가 없어 보이는 놈이었지만.
“쯧쯧!”
그를 보던 주자혁이 혀를 찼다. 그는 곽대응을 한심한 듯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어쩌나. 그만두게. 보기에는 저래도 상당한 고수라네.”
곽대응이 반박했다.
“저도 만만찮습니다. 제 실력을 잘 알잖습니까.”
“잘 알지. 그때 자네와 비무를…….”
주자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곽대응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기 때문이다.
“어르신과 백 초나 주고받았죠. 지금은 그때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백 초?”
주자혁이 인상을 썼다.
“설마,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녔나?”
“사실 아닙니까!”
사실이기는 했다. 물론, 백 초를 주고받는 동안 검면으로 곽대응을 백 번 때렸다는 이야기는 쏙 빠졌지만. 주자혁의 기억으로는 당시 곽대응은 무림초출로 어수룩했는데, 검범에도 그 성질이 담겨 있어서 허점투성이였다. 마지막에는 놀리는 재미까지 사라져서 죽이려 했다가 울고불고 매달리는 통에 사정을 두었다.
그 이야기가 저놈의 입에 튀어나오면서 어찌 저렇게 둔갑하게 되는 걸까. 꼭 치열한 혈전을 벌인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주자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슬며시 평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자비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한 탓이었다.
“강호의 사람은 꼭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곽대응과 마주 선 그는 조롱하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비쳤다.
“통 사정을 하면 꽤 난감했을 텐데,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나도 맘이 편해졌구려. 힘으로 꺾으려는 자가 힘에 눌리면 억울하지는 않겠지?”
자신만만한 사자비의 행동이 위협적이었던 모양이다. 곽대응은 처음과 달리 눈치를 살피며 훌쩍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양팔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애들아, 혼내주어라!”
결국, 자신은 빠지겠다는 소리였다.
호위들도 방주에 대한 신임이 이미 사라진 듯했다. 그럴 줄 알았지, 하는 의미가 분명한 눈으로 불퉁한 표정을 짓더니 사자비를 포위했다. 그래도 무인 특유의 기세는 있었다. 자세를 잡자 눈빛부터 달라졌다. 그때, 곽대응의 선심 쓰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르신과 친분이 있으니 살살하거라.”
“네!”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곧장 사자비에게 달려들었다. 시키니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식인데, 몇 대 쥐어박을 태세였다. 하지만 사자비의 근처까지 거리를 좁혔을 때,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 알았다.
팡!
우선 가죽 북 터지는 소리부터 들렸다. 뒤이어 사자비를 중심으로 희뿌연 안개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것을 목격했고, 그 여파로 뼈를 얼릴 듯한 냉기가 피부에 닿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냉기는 둔기로 때리는 듯한 충격을 그들에게 선사했다. 달리는 속도를 더해 그보다 빠르게 퍼져 나오는 안개에 부딪혔으니, 다섯 명의 호위는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다섯 방향으로 튕겨나갔다.
콰쾅!
순식간에 울린 다섯 개의 소리. 어떤 이는 담장에 부딪혀서 소리를 만들고, 어떤 이는 초옥 벽에 부딪혀서 소리를 흘렸다. 어떤 이는 담장 밖 나무에 부딪혔고, 어떤 이는 닭장에 처박혔다. 그렇게 꼴사나운 모습이 된 그들은 한동안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충격이 컸던지 끙끙거리며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잠시 조용해졌던 장내에서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곽대응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거, 거짓말!”
그의 누이도 입을 벌린 채 지금 보았던 장면을 머릿속에서 되감는 표정이었다. 사내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사자비가 번쩍한다는 느낌만 받았고, 그 뒤로 무사들이 날아가는 것만 목격했다. 소녀 또한 그랬다. 단지 주자혁만 홀로 턱수염을 쓸며 끌끌 혀를 찰 뿐이었다.
“수련을 게을리 한 건가? 못 본 사이에 전보다 공력이 약해진 느낌일세.”
곽대응이 그 소리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저게 약해진 거라고요?”
사자비가 어깨를 으쓱했다.
“임무가 많다 보니 수련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주자혁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러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이와 소녀에게 말했다.
“간단하게 짐을 챙기거라. 당분간 이곳에 없을 터이니 속옷도 챙기고.”
그는 사자비를 보며 물었다.
“이 아이들도 데려갈 생각이네. 이런 산중에 두기도 뭐하고, 이제 막 틀이 잡혀가는 시기라 계속 수련시켜야 하거든.”
“그렇게 하십시오. 숙소는 제가 따로 마련하겠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잠깐!”
곽대응이었다.
사자비가 그를 보며 웃었다.
“더 할 마음이 있소? 충고하지만 선배님만 아니었다면 이런 정도로 끝내지는 않았을 거요.”
“그게 아니오.”
“그럼?”
“인재는 인재를 알아본다 했소.”
그는 엄한 표정으로 어깨를 펴고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잠시 더위를 먹어 저 노친네를 찾아왔지만 이제야 혜안이 밝아진 듯하오.”
그러면서 슬며시 손을 들어 주자혁을 가리키고 있었다.
“노, 노친네?”
주자혁이 인상을 썼으나 그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젊은 친구! 그대가 나와 함께 우리 대동방으로 갑시다. 오늘 그대와 내가 만난 건 인연의 끈이 연결되었기 때문임을 난 이 순간 깊이 느끼고 있소. 운명이라는 말이오. 나와 함께 천하를 종횡해 봅시다.”
사자비는 말없이 곽대응을 살폈다.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 분명하다. 왜 주자혁이 그를 죽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시선을 느낀 곽대응이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자비가 짧게 거절했다.
“싫소.”
“뭐가 싫다는 거요?”
그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이 돌아왔다.
“난 바보와는 일하지 않소.”
2
“재밌는 사람이군요.”
장북산을 내려오면서 사자비가 한 말이었다. 주자혁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엉뚱한 녀석이지. 아무튼 고맙네. 오늘까지 억지를 부리면 며칠 몸을 피할 생각이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었어. 그보다 내가 할 일이란 게 정확히 무엇인가?”
사자비는 무거운 등짐 때문에 낑낑대며 따라오는 아이, 혁무기(赫武奇)와 소녀, 혁미소(赫美小)를 돌아보았다. 수련의 연장이라며 무거운 짐을 두 아이에게 맡긴 주자혁 또한 그들을 보았다.
“무거우면 좀 쉬었다 오너라.”
그제야 녀석들이 짐을 내려놓고 헉헉대었다.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바라보던 사자비가 걸음을 옮겨 그들과 거리를 벌렸다.
나란히 걷던 주자혁이 말했다.
“이제 말해보게.”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말 것도 없다네. 자네가 떠난 후로 황실에서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니까.”
“그럼, 처음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러면서 사자비는 솔직하게 그간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어차피 친황대로 들어오면 내막을 아는 대원들을 통해 알게 될 일이었다. 한참을 듣던 주자혁이 실소를 흘렸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거짓이 없다면 자넨 정말 몹쓸 녀석일세.”
“그렇게 보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총독의 뒤통수를 친 건 너무한 일이야.”
“저도 애초부터 그런 계획을 세운 건 아니었습니다. 총독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인과응보일 뿐이죠. 그가 먼저 저를 견제했으니까요. 항주에서는 저를 죽이려 했죠.”
“그거야 자네가 쳐놓은 함정이 아니었나.”
“그가 저를 죽일 줄 알았기에 친 함정이었습니다. 저를 믿고 일을 맡겨주었다면 이렇게까지 틀어지진 않았겠죠.”
“그 말도 일리가 있구먼!”
말과 함께 주자혁이 웃었다.
“그러고 보면 총독도 옛날과 많이 달라졌지. 예전에는 수하들을 잘 챙기셨는데…….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는 법인가 보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거든. 아마도 자네를 견제한 이유도 그런 사소한 의심과 질투 때문이라고 보네. 강호에도 이런 말이 있잖은가. 분란의 오 할은 의심과 불신에서 비롯되고, 남은 오 할은 질투와 두려움이 차지한다고. 어쩌면 환관 특유의 습성일지도 모르지만.”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르군요.”
“자넨 어떻게 생각하는데?”
“권력의 맛을 본 자의 끊임없는 욕심, 혹은 이미 가진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집착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뭐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럴듯하다며 주자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생각난 듯 의문을 품었다.
“한데, 자넨 무엇을 얻었나?”
“……?”
“총독을 제친 대가로 얻은 것이 있을 게 아닌가.”
“기회를 얻었죠.”
“기회?”
“제가 행하고 이룬 모든 일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꽤 높은 자리를 차지했나 보이?”
“총감입니다.”
“총감? 친황대에 그런 직책이 있었던가?”
“새로 만들어진 직책이죠. 총독과 부영반 사이의, 엄밀히 말하면 부총독입니다.”
걸음을 멈춘 주자혁이 뜨악했다.
“부, 부총독이라고?”
사자비가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폐하의 배려로 이 품의 벼슬자리가 되었습니다.”
주자혁의 입은 더욱 벌어졌다. 조정례가 총독이었을 때도 그런 품계는 받지 못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도중에 부도어사라는 직책을 받았다지만, 그것은 엄연히 임시직이었고, 공식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껏해야 5품의 부영반 정도가 되었을 거로 생각했더니…….
“자네…… 정말 날 놀라게 하는군.”
사자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지만 선배님께서 부영반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부영반?”
“네. 홍 부영반이 동창제독이 되면서 자리가 공석이었습니다. 황 부영반이 있지만 그는 정보담당이라 외부에 돌아다닐 일이 많고, 또 무공이 그리 강하지 않아서 무력부대를 통제하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선배님이 총독을 보좌하며 총단을 관리해주었으면 합니다.”
“자네가 하면 되지 않는가.”
“무림은 넓고 고수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제가 총단에 없는 날이 꽤 될 듯합니다.”
주자혁이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하긴, 무림정벌이라는 해괴망측한 일을 해야 한다면 바쁘기도 하겠지. 자넨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노력은 해볼 생각입니다. 총독과 함께 계획도 세웠구요.”
그러면서 사자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선 착실히 실적을 쌓을 생각입니다.”
“실적을 내기는 좋겠군. 문파 하나를 골라 깨부수면 되는 것이니 말일세.”
“그런 일도 되겠습니다만, 눈에 확 튀는 큰 실적이 좋습니다. 가령, 무림대회를 통해 황실의 힘을 보일 수 있는 그런 것들이죠.”
“무, 무림대회?”
주자혁이 입을 벌렸다.
“설마, 거기에?”
“네. 여러 가지 계획이 있었습니다만, 첫 실적으로 큰 건수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운이 좋았습니다. 꽤 괜찮은 정보를 얻었어요.”
“그래서 그쪽 사정과 마교에 대해 자세히 물었던 것이로군.”
“알아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주자혁은 끌끌 혀를 찼다. 하지만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기분은 좋아 보였다.
“허허, 말년에 자네 덕에 심심하지는 않게 되었네. 승진도 했고. 아니지, 이제부터는 대인이라고 높여서 불러야겠지?”
“공적인 자리에서만 그러세요.”
“그래도 자네와의 신분은 하늘과 땅차이가 아닌가.”
은근히 놀리는 투였지만 사자비는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이때, 장북산 초입에서 대기하던 갈천이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사자비에게 사정을 들은 갈천은 주자혁을 보고 공손히 포권했다.
“갈천이라고 합니다, 선배님!”
“호오, 꽤 분위기 있는 친구로군. 직책이 무엇인가?”
“나찰귀로를 맡고 있습니다.”
“호오, 상당히 높은 직책이로군.”
그때 사자비가 갈천을 불렀다.
“갈천.”
“네!”
“이곳에 잠시 대기하다가 혹시 미행하는 녀석이 있으면 적당히 혼내서 더는 쫓아오지 못하도록 하게. 크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사자비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일행이 모두 장북산을 벗어나기 무섭게 두 남녀가 비틀거리는 호위 몇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사자비가 말했던 놈들이라 확신한 갈천이 그들의 진로를 막았다.
“뭐요?”
왜 막느냐는 듯 짜증스럽게 말하는 사내를 향해 갈천이 물었다.
“혹시 노인과 젊은 사내, 그리고 아이들을 따라가는 것이오?”
“그들을 알고 있소? 어디로 갔소?”
“맞군!”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맞다는 거요?”
“미안하다.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이번엔 또 뭐가 미안하다는 거요? 바쁘니 귀찮게 하지 말고 비키시오.”
그러면서 옆을 지나려는데, 갈천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들리는 둔탁한 소리.
퍽퍽퍽!
얼굴과 어깨, 등을 순식간에 얻어맞은 사내는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놀란 여인이 달려들려 했으나 갈천에게서 느껴지는 사이한 요기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갈천이 경고처럼 말했다.
“이곳에 한 시진 있다가 가라. 그 안에 장북산을 벗어났다간!”
그는 자신의 검을 툭 건드렸다.
“알고 있겠지?”
여인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것을 대답으로 여긴 갈천은 그대로 몸을 날려 총단으로 향했다. 그 귀신같은 경공술을 목격한 여인은 한동안 멍해 있다가 사내에게 달려갔다.
“괜찮아요?”
사내, 곽대응이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왜!”
곧이어 분한 얼굴로 억울한 듯 한탄했다.
“마교부터 시작해서 왜 나보다 고수들만 엮이는 거냐! 전생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 ☆ ☆
통!
낫처럼 생긴 가는 쇠붙이가 수면을 때리더니 그대로 가라앉았다. 연이어 긴 나무막대도 비슷한 짓을 하고 잠수했다. 잠수한 막대는 잠시 후 훌쩍 솟아올라오더니 꼿꼿이 서서 절반쯤 수면에 몸을 담갔다. 낚시였다.
어디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작은 강변에 앉아 낚시를 즐기는 인물은 내리쬐는 태양 때문인지 창이 넓은 죽립을 쓰고 면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빠끔 드러난 눈은 막대를 주시하며 고기가 걸리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은데, 때마침 막대가 흔들렸다.
입질일까!
누가 보아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죽립인도 그런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서 낚싯대를 잡아 올린다. 월척이 분명하다. 낚싯대가 크게 휘더니 당최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죽립인은 고기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물가로 급히 걸음을 옮기며 연이어 낚싯대를 올렸다. 혹 낚싯대가 부러지거나 줄이 끊어지는 것을 우려한 행동인 듯했다. 그렇게 무릎까지 물에 잠겼을 때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월척을 수면으로 약간 끌어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태인!”
물 위로 떠오른 월척이, 정확히 사람의 얼굴이 작은 소리를 질렀다. 죽립인은 그 얼굴을 몸으로 가리고 월척을 잡아 올린 낚시꾼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잡은 월척을 감상하는 그런 모습이랄까.
“오랜만일세. 뒤에 날 감시하는 자들이 있으니 조심하게.”
“알겠습니다.”
그때부터 월척과 낚시꾼의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교주님께서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번 일을 돕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 또한……. 염려를 많이 하시더군요.”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데 교주라고 어찌 도울 수 있었겠나. 그보다 연공은 잘되어 간다던가?”
“태인께서 찾아주신 물건 덕분에 차질 없이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조만간 완성이 될 것입니다.”
“자금은 어떤가?”
“그간의 지원으로 충분해졌습니다. 태인께 감사할 뿐입니다.”
“의외로 큰 자금이 필요 없었던 모양일세. 난 부족할지도 모른다 생각했거든.”
“종교적인 집단의 장점입니다.”
그러면서 월척이 안쓰러운 표정이 되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계실 생각이십니까? 말씀만 하시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나에게도 해결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다네. 그래서 말인데……. 교주와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하던 참이었네.”
“말씀만 하십시오.”
“꽤 수고로울 수도 있는데, 괜찮겠는가.”
“태인이 아니었다면 본교는 지금의 성장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씀만 하시면 교주님께 아뢰겠습니다.”
죽립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할 이야기가 아니니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세. 내일 축시에 감시자를 데리고 멀리 떠났다가 초가로 돌아올 터이니, 그사이 초가에 잠입해 있게. 그때면 대화하기가 한층 쉬워질 게야.”
“알겠습니다.”
죽립인이 선언하듯 말했다.
“이 일이 해결되면 귀교의 오랜 염원을 이루는데 적극 협조하도록 하겠네. 교주에게 그리 전하게.”
월척은 대답 없이 수면 아래로 서서히 잠겼다. 그리고 한 손에 움켜쥐었던 물고기를 낚싯바늘에 끼워놓고는 완벽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죽립인은 낚시에 걸린 월척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숲에서 예기가 충만한 무사가 튀어나왔다. 죽립인이 잠시 멈칫했지만 다행히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황보 태감께서 오셨습니다.”
죽립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걱정되어 오지는 않았을 터. 자주 찾아오는 것을 보니 요즘 부쩍 한가한 모양이로군. 오늘은 뭘 가져왔던가?”
“삼산과 꿀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하하, 내가 그런 것을 먹어서 무얼 하게. 사람도 참!”
그러면서 무사에게 명했다.
“방으로 안내하시게. 시녀에게 일러 차도 대접하도록 하고.”
“존명!”
무사가 떠나기를 기다려 잡은 월척과 낚시도구를 챙긴 죽립인은 천천히 초옥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황보윤이 차를 즐기며 벽에 걸린 서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자주 보네!”
죽립인이 말하고 황보윤이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리에서 밀려났잖은가. 시간이 많이 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선 앉게. 차가 향이 참 좋다네.”
죽립인이 허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시작된 대화는 허공에 뜬구름 잡기 같았다. 주제도 목적도 없다. 서화에서부터 술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 어느 지역의 어느 염소가 더 새끼를 많이 낳는다는 실없는 이야기까지 흘러가더니 여자이야기로 넘어가 버렸다. 한가한 늙은이들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대화의 한가함과 달리 그들의 표정은 결코 한가롭지 않았다.
특히, 손. 붓을 든 그들의 손은 종이 하나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 내 제안을 생각해 보았나?
황보윤이 종이에 쓰고 죽립인에게 내밀었다.
이번에는 죽립인이 종이에 썼다.
– 생각해 보았네.
황보윤이 붉은 털을 가진 염소를 보았다고 우기면서 붓을 든 손을 놀렸다.
– 어떤 결정을 내렸나?
죽립인은 그런 염소를 결코 없다고 반박하며 역시 붓을 놀렸다.
– 심오한 문제에 현명한 답을 생각했네.
황보윤이 썼다.
– 목숨을 걸어야 할 걸세.
– 각오하고 있네.
– 따로 생각한 계획이라도 있나?
– 자네들의 계획이 치밀하니 그대로 해도 될 것 같네. 다만, 그 일을 맡을 사람은 내가 추천하겠네.
– 자네의 추천이라면 뛰어난 고수들이겠지?
– 믿을만한 자들일세.
– 언제 시작하는 것이 좋겠나?
– 기회는 억지로 만들면 그르치기 쉽네.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하네.
– 혹, 필요한 것이라도 있나?
– 자금, 그리고 이 일에 동참하고자 결정을 내린 이유.
– 이유? 특별히 원하는 것이라도 있나?
– 자네도 알걸세.
잠시 생각하던 황보윤이 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염소 이야기가 끝이 났다. 더불어 놀리던 그들의 손도 멈추었다. 둘은 종이에 쓰인 글씨를 유심히 보다가 반으로 찢어 각각 하나씩 입속에 넣어 삼켜버렸다.
순간 음침하게 떠오른 황보윤의 눈빛이 간사하게 빛을 바랬다. 죽립과 면포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죽립인의 눈도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 ☆ ☆
친황대 내부에서 주자혁의 입지는 사자비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오랜 야차귀로의 경력에 그 끝자락에는 친황대의 교관으로도 활동한 경험이 있어서 현 대주들도 그를 깍듯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에게 교육을 받은 대원도 있어 갑작스런 그의 초빙에 의문을 품거나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사자비는 그것을 철저히 이용하였다. 주자혁에게 당부하여 자신과 대주들 사이의 벽을 허물 수 있도록 다리역할을 시킨 것이다. 또한 감시역할로의 활용도도 있었다.
친황대가 출범한 지 얼마간의 시일이 지나고 막바지 여름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주자혁 때문에 완전히 친황대의 면모를 갖춘 시점에서 갑자기 간부회의가 소집되었다.
새로 지은 회의실에 대주와 부대주를 비롯한 간부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탁-!
탁자에 올려진 거대한 지도 위에 지휘봉 끝이 한곳을 찍었다. 호남에 위치한 영주였다. 회의실에 있는 서른 개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였다.
태사의에 앉아있는 총독, 유한을 대신하여 사자비가 설명했다.
“일대, 이대, 삼대, 사대, 오대, 그리고 나찰귀로는 두 달 후에 이곳에 투입된다. 따로 동창대원 이백 명이 투입될 것이고, 그곳에 있는 금의위 일천 명과 지휘부의 오천 군사도 작전에 합류한다.”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라금룡대 한 개 대만 하더라도 웬만한 문파 하나는 반 시진 만에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찰귀로까지 합한다고 했다. 모두 육백 명의 친황대원이 투입되는 셈이다. 이건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그만한 능력을 갖춘 문파가 있었던가? 하물며 동창 대원의 실력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 아닌가. 금의위와 지방군은 또 어떤가. 그 많은 수의 군사를 도대체 어디에 투입하려는 것인가.
회의실의 눈빛들이 의문으로 뒤섞였다.
사자비가 웃으며 말했다.
“두 달 후에 이곳에서 무림대회가 개최된다. 겉으로는 무림대회를 내걸었지만 그 이면에는 여러 가지 분란과 불씨가 내재되어있다. 우리는 폐하의 위명 아래 법을 어기는 죄인들을 소탕하려 함이다.”
그러자 제육수라금룡주 오우강(吳于强)이 나섰다. 제일수라금룡대 부대주로 소천룡의 부관이었다가 재편성 덕분에 승진한 인물이었다.
“무림대회라 하시면 어떤 종류의 대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교와의 분란 때문에 남도문을 비롯하여 십여 개의 문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대회다. 은밀히 초대장을 뿌리는 모양이라 소문이 나지는 않았지만 장강을 경계로 그 이남의 이름 있는 문파는 정사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초대장을 보냈을 것으로 예상한다.”
“상당한 규모가 되겠군요.”
제팔수라금룡주 주장자였다. 그 역시 재편성 때문에 제사수라금룡대에서 제팔수라금룡주로 승진한 상태였다.
사자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겉으로는 무림의 친목을 도모하자는 것이겠지만, 속으로는 결속을 다져 잔월신교의 도발을 눌러보자는 의미가 있을 터다. 하지만 그 의미만으로 무기를 소지한 수백 수천의 무인들이 무리를 이루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일. 또한 정사가 함께 모이는 자리이기에 내부에서도 꽤 많은 분란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바다. 잔월신교도 마찬가지다.”
말을 마친 사자비가 태사의에 앉아 있는 유한을 바라보았다.
유한이 계속하라는 듯 턱을 끄덕였다. 사자비가 말했다.
“폐하의 뜻에 따라 총독전하와 의논 끝에 내린 결정임을 명심하도록.”
모두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드는 모양이었다. 구양수가 물었다.
“목적이 있지만 반발이 심할 것으로 압니다. 어떤 죄목을 적용하시려는 겁니까?”
“말했듯이 법으로 금한 무기를 소지하고 도당을 이루어 민심을 어지럽힌 죄가 첫째이지만, 무기를 사용할 것으로 예상하여 상해, 치사, 공갈협박, 살인미수 등이 주를 이룰 것이다. 또한 집단을 이루어 대규모의 싸움이 벌어진다면, 이건 명백한 반란으로 규정지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상은……?”
“대회에 참석한 모든 무인들.”
이어 사자비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문제가 생기는 즉시 모두 잡아들이고, 저항하는 자는 황명을 받들어 법을 집행하는 황군을 공격한 죄와 폐하를 모독한 죄를 물어 참형에 처한다. 부득이한 사정이라면 즉결심판도 유하다는 폐하의 허락이 떨어졌다.”
모두 실소를 흘렸다. 부득이한 사정이라면 반항을 하거나, 도주를 감행하거나, 또는 겁 없이 친황대를 공격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일 게다. 문제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친황대가 투입되는 순간 그 부득이한 행위를 서슴지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결국, 다 때려잡는 수밖에 없었다.
면면을 훑어보던 유한이 말했다.
“이번에 투입되는 친황대는 바로 대원들을 점고하여 떠날 준비를 하게. 하남 영주까지의 거리가 있으니 은밀히 움직이려면 그 수밖에 없네. 또 이 일의 책임은 총감이 지기로 했네. 그가 대장이 되어 그대들을 이끌 것이니 본분을 생각하여 명령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총독전하!”
“귀로주?”
갈천이 대답했다.
“하명하십시오.”
“총감은 이 작전에서 대장이자 나찰귀로주로 움직일 걸세. 하여 그대는 부대주로 나찰귀로와 함께 총감의 호위를 전담했으면 좋겠네.”
“그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부영반 황천강이었다. 총독이 부르자 황천강이 대답했다.
“네, 총독전하.”
“자네는 정보요원을 최대한 동원하여 하남의 무림정세를 파악하고 무림맹에 있는 문파와 그들의 움직임, 경제력, 문도의 숫자까지 빠짐없이 조사하여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대주들이 지목되었다. 그들에게는 문파 몇 개를 일러주어 그들을 감시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로써 모든 준비를 마친 친황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제6장 혼란과 혼돈의 영주
1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선선한 바람이 대지를 적시고, 높은 하늘은 눈을 즐겁게 해야겠지만 올해는 그렇지 않았다. 여름 가뭄이 겨울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백성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지도 오래되었다. 추수를 해야 하는데 가뭄 때문에 거둬들일 농작물이 절반도 되지 않은 것이다. 느는 것은 한숨이요, 걱정뿐이었다. 이제 다가올 겨울은 어찌 날 것인가!
“휴!”
호남 영주를 관장하는 동지(同知) 호승지(葫勝之)는 이른 아침부터 한숨을 쉬었다. 백성들이 궁핍해져서는 아니다. 이곳 영주 밖 십 리나 부리나케 걸어와서도 아니다.
그는 마을 입구 여기저기에 흥건하게 고인 웅덩이를 망연히 보고만 있었다. 간밤에 비가 오지 않았으니 물은 아니었다. 웅덩이는 온통 붉었다. 피였다.
“어찌 된 일인가!”
한참을 침묵하다가 모여 있던 포쾌를 향해 물었다. 포쾌의 두목인 포두가 달려와 보고했다.
“새벽에 싸움이 났습니다요.”
듣지 않아도 짐작했던 바다.
“후!”
호승지는 또 한숨을 쏟아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분란은 항상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피가 내를 이룰 정도의 싸움은 그리 많지 않다. 간간이 이런 경우를 보기는 했다. 이곳에도 무림 문파가 있고 칼부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수시로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은 결코 없었다. 요 며칠 사이 동안 벌써 열 번이 넘지 않았던가.
“어디 어디랑?”
“그건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요. 목격자의 말로는 푸른 옷을 입은 자들이 마을입구에서 쉬고 있었는데, 녹의를 입은 무리가 지나갔다고 했습니다요.”
“다짜고짜 칼부터 뽑아들었단 말인가?”
“약초꾼 황가의 말로는 서로 알고 있는 듯 했답니다요. 갑자기 푸른 옷을 입은 녀석들이 무어라 하더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녹의 무리가 그들을 덮쳤다지 뭡니까.”
“왜?”
“기분 나쁜 말을 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원한이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죠. 황가의 말로는 원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답니다요. 아무튼, 잠깐 사이에 대여섯 명이 쓰러졌는데, 다행히 그 근처에 남도문도 십여 명이 달려와서는 말렸답니다. 말리는 도중에도 몇 명이 다쳤다는데요.”
“사상자는?”
“정확히 파악을 못 했습니다. 황가의 말로는 십수 명은 죽거나 다쳤을 거라는데요?”
또 한숨!
한승지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필, 이곳에서 무림대회를 개최할 이유가 무엇인가!”
처음에는 그도 몰랐다. 그저 남도문 등 인근에 있는 문파 수장들이 찾아와서 무림의 결속을 다질 것이라 했다. 하여 며칠간 잔치를 벌일 것이라 했다.
호승지는 순진하게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때는 좋았다. 따뜻해 보이는 봉투 몇 개를 놓고 갔으니까. 그의 상관인 지주(知州)도 좋아했다. 한데, 막상 시일이 다가오자 사정이 달라졌다. 생각했던 이상의 무인들이 영주로 도착하더니 하루가 멀다고 남문 밖, 정확히 이십 리 떨어진 남도문 앞 임시 숙소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자리가 모자라 영주 안의 여관까지 하나둘씩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호승지는 하루가 편한 날이 없었다. 이건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대체로 무림대회라 함은 무인들이 모여 그간 쌓았던 실력을 겨루고, 친목을 다지는 게 일반적이다. 정파에서 여는 대회는 정도무인이 모이고, 사파에서 여는 대회는 흑도인이 모인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정사가 모두 모였다. 같은 정도라도 시비가 있기 마련인데, 정사가 같이 모였으니 보지 않아도 그 속사정은 뻔하지 않을까? 오늘처럼 보기만 해도 무기부터 뽑는 녀석들이 도처에 깔렸을지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녀석들이 더 오리라는 점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속으로 지주를 욕했다. 문제가 불거지고, 이제는 무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곳을 책임지던 지주가 갑자기 병을 핑계로 아문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일 처리를 자신이 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남도문 등을 찾아가서 따지고 싶었다. 이런 정도의 규모였다면 애초에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모두 해산시키라고 으름장이라도 놓고 싶었다. 물론 받은 돈이 있는지라 박하게 대할 수는 없지만 한탄이라도 하고 싶었다.
사실 그렇게 하기는 했다. 마음처럼은 아니고, 황송한 듯 치안을 좀 신경 써 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해야 했었다. 남도문주 등은 선심 쓰는 듯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고, 그렇게 해 주었다. 이미 일이 벌어진 후에 무사들을 보낸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에잉!”
콧소리를 내고는 버럭 소리쳤다.
“찾아서 모두 잡아들여.”
그러나 목구멍에서 맴돈 외침은 금세 가슴속으로 숨어버렸다.
무어라 입을 벙긋한 호승지를 본 모양. 포두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황가를 데리고 영주를 뒤질까요? 마음만 먹으면 한 시진 안에 찾을 수 있을 텐데…….”
지금 염장 지르는 게냐? 그런 눈이 분명한 시선으로 포두를 흘겨본 호승지였다. 말 몇 마디에 칼부터 뽑아들고 사람까지 서슴없이 죽이는 놈들이다. 혹시, 관복도 알아보지 못하고 무기를 들이대면 어쩌나.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흘러가듯 말했다.
“뭐, 시체도 없고, 싸웠다는 증거도 없고, 별수 있나! 자네가 대충 보고서를 작성하게.”
“저 피는 어쩔까요?”
“한두 번 해보나? 대충 덮어버려. 아무래도 짐승의 피가 노상에 고여 있으면 보기에 흉할 테니 말일세.”
“알겠습니다요.”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고, 포두 또한 받아들였다. 이제 할 일이 끝났으므로 호승지는 아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서는 제발 이후로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염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대포두가 달려오고 있었다.
6품의 동지도 소식을 접하자마자 달려왔는데, 대포두가 이제야 모습을 비추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한소리 꾸중이라도 할 참으로 크게 입을 벌렸다.
“큰일 났습니다, 대인!”
호승지는 벌린 입을 다물었다. 설마, 다른 곳에서 또 무림인의 시비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그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몸을 떨었다. 다행히 대포두는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말을 해서 호승지를 놀라게 했다.
“황실에서 사람이 왔어요.”
“화, 황실에서? 왜?”
“놀라서 바로 뛰쳐 온 덕분에 저도 잘…….”
“황실 어디라는가?”
대포두는 허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도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아문 영빈관에 모셔두고 오는 길입니다. 어서 가시죠.”
마지막 말은 할 필요가 없는 듯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호승지는 이미 무림의 고수처럼 영주를 보며 달려가고 있었다. 대포두가 헉헉거리며 호승지를 따라 걸음을 놀렸다.
대포두의 말대로 영빈관 이 층 첫 번째 방에 황실에서 왔다는 사람이 있었다. 잘 벼른 칼 같은 느낌이 인상적인 사내. 보기에는 서른 중반 같은데,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풍겨서 위험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호승지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 더 불안했다.
“동지 호승지라고 합니다.”
자신보다 한참 아래도 보이는데도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함부로 하대할 수 없었다. 그래도 돌아오는 반응을 보고 다음을 어떻게 대처할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생각대로 상대가 반응을 보였다. 굽실거리는 행동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아무래도 높은 관직에 있는 것 같다.
호승지는 더욱 굽실거리며 헤픈 웃음을 흘렸다.
“하하, 중앙에서 오셨다고요?”
칼 같은 사내가 대답했다.
“그렇다네.”
“이 먼 곳까지 어인 일로 이렇게 오셨는지요?”
사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리고 말했다.
“그보다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야겠지.”
호승지는 이상하게 불안해져서 물었다.
“어, 어디에서 오셨는지……?”
“동창!”
참 쉬운 대답이었다. 간단한 질문에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처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호승지는 숨이 넘어갈 뻔했다.
“도, 동창!?”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려는 몸을 간신이 고쳐 세운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끝장이다.’
그 말만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관직에 몸담은 그가 동창을 모를 리 없다. 황실의 대신들도 동창이라면 벌벌 떠는 공포정치의 중추기관이 아닌가. 하물며 궁벽한 시골 관리가 눈이라도 마주 볼 수 있을까!
‘왜 왔을까? 내사? 하지만 이런 곳에 동창이 왜?’
여러 가지 의문이 뒤따랐다. 뒤이어 그간 영주에 있으면서 있었던 일을 주마등처럼 떠올렸다.
뇌물을 받은 적이 있던가!
많다. 그것도 아주 많다.
사사로이 국법을 이용하지는 않았는가!
그것도 있는 듯하다. 너무 많아서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그보다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를 남겼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나름대로 철저히 한다고 했는데, 문제는 동창이 마음먹고 들쑤시면 없는 죄도 만들어 낸다고 들었다.
갑자기 호승지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대인!”
사내가 노려보았다.
호승지는 그 시선을 피한 후, 청렴한 관리의 표본처럼 충성스러운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했다.
“이 호 아무개가 비록 능력은 없으나, 제 임무에 나태하지 않았으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음을 자부하는 바입니다. 하물며 가뭄 때문에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제 가솔처럼 대하고자 발에 땀이 나도록 노고를 아끼지 않았고, 위로는 상관을 받들고, 아래로는 판관에서 정용까지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다독이니, 그 덕이 적다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해서 이 호 아무개는…….”
사내가 인상을 쓰며 그의 말을 끊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간략히 하게.”
호승지가 입을 다물었다. 딱히 할 말은 없었던 것이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
가늘어진 사내의 눈을 보며 호승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누군가가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듯했지만 충분히 참을만한 뻔뻔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이상한 생각을 한 모양인데,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니니, 안심하게.”
멍해 있던 호승지가 그 뜻을 이해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침과 달리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러나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내사도 아니라면 동창이 이런 곳에 왜 왔을까?
‘뇌물을 바라는 거냐?’
그것밖에 없는 듯하다. 휴가를 얻어 어디 여행이라도 가다가 노자가 떨어져서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고 보니 먼지 묻은 복장이 오랜 시간 여행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젠장, 간 떨어질 뻔했네. 처음부터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리고는 급히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방을 나갔다 들어온 그의 손에는 비단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꾸러미를 탁자에 올려놓은 그의 얼굴에는 간사한 미소가 한가득했다.
“얼마 안 되지만, 필요할 때 쓰십시오. 제 성의입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이 시큰둥했다. 꾸러미를 힐끔 보더니 같잖다는 얼굴로 호승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적단 말인가! 도대체 얼마를 바라는 건가!’
사내가 몸을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호승지가 그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사내가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이곳을 잠시 거처로 써야 할 것 같네.”
“네?”
“이곳 아문을 써야겠다고. 영빈관 전체를 비워주었으면 좋겠군.”
“그, 그거야 어렵지는 않지만, 이유가 무엇인지요?”
“자넨 알 필요 없네. 다만, 조만간 여기에 내가 모시는 분이 올 걸세.”
“모시는 분이라고요?”
동창 대원이 모시는 사람이라면 역시 동창의 사람일 것이다.
호승지는 의문이 더욱 커졌다. 이곳에 꿀이라도 발라 놓았던가. 왜 동창에서 사람이 온다는 것일까.
“그분이 오시면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걸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데, 어떤 분이 오시는지…….”
“친황대라고 들어 보았나?”
기억을 더듬은 호승지가 눈을 크게 했다. 한 달 전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동창 내부에서 갈라져 나온 기관. 당시 같이 소문을 접했던 주지는 앞으로 황실의 권력은 친황대가 차지할 것이라 예견했었다. 태감이 밀려난 시점에서 급부상한 부서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도 있었다. 친황대의 수장이 황제의 사촌이라는 것이었다. 황족이 이끄는 감사기관이라면 달라도 다를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증거는 총독 아래의 품계였다. 2품의 벼슬에 군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니 그 권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그곳의 사람인가?
생각과 함께 호승지가 떠듬거렸다.
“드, 들어 보았습니다만!”
사내가 말했다.
“여기에 곧 오실 분이 친황대의 총감이시네.”
콰당!
뒷걸음질하다가 의자에 걸려 넘어진 호승지는 아픔을 느끼기는커녕 귀신에 홀린 얼굴을 보였다.
사내가 강조하며 덧붙였다.
“그분을 비롯하여 많은 수행인이 올 것이니,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특히 우리 신분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게 좋을 걸세. 아랫사람에게는 대충 둘러대는 것도 잊지 않도록 하고, 아문 밖으로는 일절 소문나지 않게 해야 하네. 그게 자네 신상에 좋고 장수하는 비결이 될 걸세.”
호승지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고개만 떨어지라 끄덕였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는 무림대회라는 골칫거리는 아득해서 기억도 안 나는 먼 이야기였다. 당장 닥쳐올 거대한 권력자를 위해 어떤 아첨을 떨어야 하는지, 그것만 가득 차오를 뿐이었다.
☆ ☆ ☆
청색 무복을 입은 무리가 영주를 향하여 길을 재촉했다. 사자비와 그의 호위를 맡은 나찰귀로였다. 많은 인원수 때문에 열 명씩 조를 이루어 영주에 모이기로 했던 터, 사자비 또한 열 명의 나찰귀로만 데리고 영주로 가는 중이었다.
“몇 시진만 더 가면 영주입니다.”
이십여 호 정도의 작은 촌락에 도착하자 절명랑(絶命郞) 양명기(楊明基)가 말했다. 나찰귀로가 되기 전에 낭인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덕분에 지리를 잘 아는 그였다.
사자비는 하늘을 보았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시간도 넉넉하니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여기에서 밤이슬을 피한다.”
그리고는 대원 몇 명에게 지시하여 빈집을 찾도록 했다. 옆을 지키던 은형신검 양운천이 말했다. 그는 출발 때부터 불편한 얼굴을 하더니 아직까지도 그랬다.
“차라리 아문에 가서 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사자비가 그 속내를 알고 물었다.
“왜, 청성파 도인들이라도 만날까 두렵나, 원천?”
옛 도호까지 끄집어내자 은형신검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청성파라면 사천이 집이니, 남도문에서 초청장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무림의 일에 간섭을 하지 않는 구파일방이지만 ‘얼마 전 마교가 준동하여 무림을 어지럽히는 이때, 무림의 결속을 다져야하지 않겠나?’ 라는 의미의 초청장을 보냈다면 대회에 참석할 수도 있었다. 마교의 저력은 구파일방 또한 간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때 몸담았던 곳입니다.”
사자비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한때였을 뿐이지. 지금은 아니지 않는가?”
“…….”
“착각하지 마라. 넌 이제 무림인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이상 하찮은 옛 은원 따위로 친황대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은형신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때마침 대원이 돌아와서 빈집 두 개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아마도 가뭄의 여파인 듯하다. 이런 빈곤한 촌락이라면 어디보다 살기 어려웠을 것이고, 살길을 찾아 떠난 사람이 있다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다.
사자비가 가보니 가깝게 붙어 있는 작은 초가 두 채였다. 그는 대원을 반으로 나누어 밤이슬을 피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대회에 참가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무리가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화려한 꽃문양을 가슴에 수놓은 남색 복장의 녀석들은 스무 명 정도였다. 그중에 두 명의 노인이 무리의 이끄는 듯하여 눈에 들어왔고, 무리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복장으로 치장한 세 명의 젊은 후기지수도 튀어보였다.
그들도 마을에 도착한 후, 밤이슬을 피할 집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사자비와 대원이 남은 두 채를 모두 차지한 후였다. 당연히 허탕만 쳤을 텐데, 잠을 잘 수 있게 집을 정리하는 대원들을 둘러보며 노인 하나가 다가왔다.
노인은 자연스럽게 홍면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홍면노를 책임자로 본 듯했다.
“책임자가 누구요?”
홍면노가 되물었다.
“왜 그러시오?”
“아무리 찾아도 빈 집이 없는 듯하오. 불편하더라도 동도끼리 조금씩 양보하여 밤이슬을 피했으면 좋겠소만.”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으나 노부는 책임자가 아니라 결정할 수 없겠소.”
노인은 약간 의외라는 시선으로 물었다.
홍면노가 옆에 있던 사자비를 가리켰다.
“이분이 책임자요.”
노인은 더 의외라는 눈빛이 되었다. 새파란 애송이가 일행의 책임자라니 당연하다. 대화를 듣던 다른 무사들도 마찬가지 표정이 되었다.
노인이 사자비를 향해 포권하며 신분부터 밝혔다. 그래야 상대의 신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노부는 강서성 장수문(樟樹門)의 주담자(朱譚子)라 하오.”
사자비 또한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홍면노라고 합니다.”
곁에 있던 홍면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반면 노인은 별명 같은 이름을 듣고 약간 당황한 듯했다. 그들의 반응을 살핀 사자비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호북 홍가부(弘家府)의 소가주입니다.”
“홍가부?”
생소한 모양으로 노인이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하지만 기억이 날 리 없었다. 방금 만든 것이었으니까.
사자비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죽산 쪽 작은 마을에 무관을 운영하니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의 표정이 한층 더 편해진 듯했다. 이름도 없고, 무림세력이라고 보기도 힘든 무관이니 정사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약간이지만 무시하는 빛도 잠깐 드러난 것 같았다. 그래도 아쉬운 쪽은 장수문이었다. 노인의 말투는 여전히 정중했다.
“소협의 기상이 높으니 조만간 크게 이름을 떨칠 것이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한데, 두 초가 중 하나를 우리에게 양보할 수는 없겠소? 보시다시피 밤은 깊어 가는데, 지낼 곳이 마땅치 않구려.”
동시에 홍면노의 전음이 들렸다.
[그렇게 하시지요. 계획을 시작하기도 전에 문제를 만들어 주목 받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 말에 수긍한 사자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해가 동도라 했으니 거절할 수는 없군요. 그럼, 작은 쪽을 비워드리겠습니다.”
“감사하오!”
이후로 두 무리는 사이좋게 빈 집을 하나씩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촌락의 집이 대개 그렇듯, 크기가 작았다. 방이 두 개라지만 하나는 두 사람이 눕기에도 비좁았고, 큰 곳도 셋 정도가 들어갈 크기였다. 결국, 절반만 방에서 쉬게 하고, 셋은 부엌에, 남은 둘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초가 앞뒤로 세워 경계를 서게 했다.
사자비도 방을 차지하지 않았다. 그는 평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 수련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 행동은 주자혁의 영향이 컸다. 장북산에서 그가 흘리듯 던진 말이 사자비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자비는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나 내심으로는 크게 동요되었다. 스스로 공력이 약해졌다고 느꼈으면 모르되, 그는 전혀 느끼지 못 했기 때문이다.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몸이 느끼지 못 했다는 것은 서서히 줄어드는 공력에 몸이 익숙해졌다는 의미인 것이다. 잠깐의 체력 소모로 치부할 성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짬이 날 때마다 내공수련에 시간을 할애했고, 오늘도 백일홍을 익히기 좋은 시간, 즉 음기가 충만한 밤에 호연지기를 느끼며 진기를 돌리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창 명상에 빠져 있는데, 구수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건너편 장수문이 차지한 초가에서 넘어오는 냄새였다. 먹을거리라도 구한 모양, 요리를 하는 것 같았다.
‘배가 고프군!’
잠시 명상에 깨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있더니 사립문이 열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들어왔다. 남녀로 장수문의 후기지수였다.
사내는 이십대 후반 정도로 각진 얼굴 때문에 무뚝뚝한 인상이었다. 여인은 이십대 초반 정도인데 사내와 달리 사근사근해 보였다.
“어쩐 일입니까?”
사내가 대답대신 들고 있던 솥을 들어보였다. 생김대로 무뚝뚝한 성격인 것 같았다. 여인도 같은 행동을 보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부님께서 이걸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요.”
“그게 뭡니까?”
“고깃국이에요.”
얼굴을 붉어진 여인을 보고 사자비가 밝게 웃었다.
“하하, 마침 시장하던 참인데 잘 되었군요. 요천검귀, 받아라.”
그러자 경계를 맡았던 요천검귀 종리설이 다가와 여인이 들고 있던 솥을 받아들었다. 순간 사내의 입가에 미소 같은 것이 떠올랐다.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한낱 무관의 무부 주제에 검귀라는 거창한 별호를 사용하니 웃겼을 것이다. 그러나 요천검귀는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솥을 평상에 올려놓았다. 사내가 들고 있던 솥까지 가져온 후, 대원들을 불러 묵묵히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사자비 또한 부엌에서 가져온 그릇으로 고깃국을 마시듯 먹는데, 두 남녀가 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며 물었다.
“하실 말이라도 있습니까?”
여인이 사자비의 눈치를 보더니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혹시, 영주에서 열리는 무림대회가 목적지인가요?”
“그렇습니다만?”
“거기 무림대회에 참가하시는 건가요?”
“글쎄요…….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저 같은 무명소졸이 참가해봐야 창피만 당하지 않겠습니까. 가서 보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사실, 참가에 의의를 둔 것이 아니라 뛰어난 고수의 비무를 감상하고자 가는 것이니까요. 아버님께서 그런 고수의 비무를 보면 수련으로 익힐 수 없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제야 사내가 말했다.
“그건 맞는 말이오.”
사자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두 분께서도 대회에 참가하시는지요?”
사내는 다시 입을 다물었고, 여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니요. 저희도 구경 가는 거예요. 하지만 대사형은 달라요. 실력이 아주 뛰어나서 이 기회에 장수문의 실력을 알리고자 하거든요. 물론, 사부님은 다른 의미로 가시는 거라지만.”
“아! 키가 유난히 크신 그분?”
“네.”
“꼭 좋은 결과를 냈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십시오.”
“네, 그렇게 전할게요. 그런데, 이번 대회에 다른 소문은 듣지 못했나요?”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 말입니까?”
“마교에 대한 것이요. 다른 문파는 모르겠지만 우리 문파에 온 초대장에는 그것에 대해 잠깐 거론되어 있었거든요.”
사자비는 능청스럽게 시침을 땠다.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여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분위기로 보아 고깃국을 가져온 목적이 마교에 대한 정보를 얻는데 있는 것 같았다. 대답하기 무섭게 사내가 여인의 팔을 슬쩍 찌르는 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볼일 끝났으니 이제 가자는 것이었다.
여인이 몸을 돌리며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영주로 언제 떠나실 건가요?”
“날이 밝으면 바로 갈 생각입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밝아진 듯했다.
“우리도 그때 갈 생각인데, 동행 하면 되겠네요.”
여인은 그 말을 남기고 다급히 걸음을 놀렸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 가는 사내를 보며 사자비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모두 두 시진만 쉬고 출발한다.”
고깃국을 먹던 홍면노가 허허거리며 웃었다.
“대인께 관심이 있는 듯한데, 같이 가시지 않고요.”
사자비도 따라 웃었다.
“문제가 생기면 포박하여 포청까지 같이 갈 용의는 있지.”
그리고는 그릇을 놓고 다시 명상에 잠겼다.
2
다음날, 날이 밝기도 전에 촌락을 벗어난 사자비는 신시가 되어서 영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영주 분위기는 생각했던 대로였다. 우선 온통 무기를 소지한 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덕분에 영주 백성은 두려움에 떨며 길가로 슬금슬금 지나치고 있었다.
“가관이로군!”
홍면노가 대꾸했다.
“무림의 무인들을 죄다 모아놓은 것 같군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평소보다는 몇 배나 많은 무림인이 거리를 장악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득을 보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객잔과 주루, 음식점 등이었다. 갑자기 몰려든 무림인 때문에 그들은 호황을 맞은 듯했다. 씀씀이가 크고 헤픈 무림인이니 그들을 상대하는 장사치들은 흉흉한 계절에 때 아닌 수지를 맞은 셈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자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쿠당탕탕!
거리를 가로질러 아문으로 가는데 어디선가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음이 난 객잔에서 한 무리가 뛰어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일렬로 서서 객잔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또 다른 무리가 튀어나왔다.
“감히, 동천문 따위가 우리에게 시비를 거나?”
“흥! 항아문도가 호랑이 탈을 쓴 고양이라더니, 딱 그 짝이군. 어디 한 번 덤벼 보아라. 오늘 전대의 원한을 갚아주겠다.”
대화 같은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고 뒤이어 알아들을 수 없는 지역 특색의 욕설이 난무하더니 결국 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은 싸웠다. 지나가던 백성이 기겁하여 비명을 지르고 거리를 뛰놀던 아이들이 놀라서 달아났다. 기물이 부서진 객잔 주인은 울상이 되었고, 점소이는 어딘가로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요천검귀가 손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다.
“제가 정리할까요?”
사자비가 손을 저었다.
“됐다. 결정적일 때 모두 잡아야지. 그 간 나서는 일 없도록.”
요천검귀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사자비는 모른 척 아문으로 향했다.
아문에 도착하자 사전에 약속한 대로 사천에서 왔다는 말을 정용에게 했다. 상관에게 들은 바가 있는지 정용은 즉각 안으로 들어가서 사십대 후반의 관리를 데려왔다.
“자네가 이곳 책임자인가?”
가장 젊은 놈이 선두에 서서 오만하게 물으니 관리는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눈치는 제법 빠른 모양으로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동지 호승지라고 합니다.”
“동지? 지주는 어디 있나?”
“갑자기 병이 나는 바람에 당분간 아문에 못 나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가서 알릴까요?”
“됐네. 그리고 다음부터는 사천에서 온 일행은 그냥 영빈관으로 들여보내라 정용에게 일러놓게.”
“아, 알겠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호승지는 종종걸음으로 앞장서서 직접 안내를 맡았다. 그를 따라가던 사자비가 물었다.
“고충이 많지?”
호승지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어찌 고충이겠습니까. 대인을 모실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런 것 말고. 요즘 인근에 무림인이 대회를 열었다고 들었네. 오면서 보니 크고 작은 사건을 계속 일으키는 것 같던데, 일 처리가 버겁지 않나?”
“아!”
탄성을 흘린 호승지의 이마에 땀방울 하나가 맺혔다. 까마득하게 잊었던 사실을 하늘이 일러주었다는 얼굴로 감격하여 성토했다.
“어찌 고충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응당 제가 관리해야 할 일로 정성을 다할 뿐입니다.”
“꽤 강직하군. 하나 백성들에게 좀 더 신경을 쓰게. 오면서 들은 하는 말을 들었는데, 불만이 많은 듯하더군.”
호승지의 이마에 두 번째 땀방울이 맺혔다. 그리고 세 번째 땀방울이 맺힐 질문이 나왔다.
“무림대회 때문에 영주를 찾은 무림인은 몇 명인가?”
“워낙 많아서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그거 이상하군. 보통 살고 있는 지역에 신고하고, 그곳을 떠나게 되면 관아에 또 신고를 하여 여행증명서를 받지 않나. 유민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 도시마다 입구에 관헌을 배치하여 신분증과 여행증을 검사할 텐데, 아닌가?”
끝내 세 번째 땀방울이 맺혔다.
“그, 그렇지요.”
“그걸 검사한 장부를 토대로 조합하면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대충은 알 수 있을 텐데?”
“아, 예!”
“설마, 이곳 포쾌는 여행증을 조사하지 않은 건가?”
“그럴 리가요.”
“흐음. 확신하는가?”
호승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확실……할……겁니다.”
“내가 영주에 들어설 때만 해도 검사하지 않던데?”
다섯 번째 땀방울이 맺혔다. 때마침 영빈관 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때 사자비가 자신감을 잃은 호승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서 말했잖은가. 고충이 심하겠다고. 무림인들이야 어디 법을 잘 지키려 하나.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생각하는 수밖에. 나도 귀동냥으로 그 정도쯤은 들어 알고 있네.”
순간 호승지의 머리가 바닥에 닿을 듯 숙여졌다.
“이해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대인!”
“그래도 평소에는 검사를 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시 자신감을 얻은 듯 호승지는 발 빠르게 움직여 사자비와 일행을 숙소로 안내했다.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사이 호승지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혀 십 년이 늙어 있었다.
“오셨습니까?”
정보 수집을 위해 영주를 돌아다닌 갈천은 아문에 도착하자마자 사자비가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찾아왔다. 사자비는 은형신검과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갈천에게 자리를 내주며 물었다.
“어떤가?”
“생각보다 문제가 좀 있는 듯했습니다.”
“파악한 대로 말해보게.”
“우선 무림 대회는 아홉 개의 문파가 주도했습니다. 남도문을 비롯한 정파 다섯과 혈지문 등 사파 네 개입니다. 넉 달 전부터 준비했다지만 촉박했던 것이 사실. 지금 와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진 것으로 압니다.”
“그렇겠지. 가장 심각한 것은 무엇인가?”
“은원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뿌리듯 무림에 초대장을 보낸 덕분에, 문파끼리의 충돌이 잦습니다. 또한 정사가 모두 모여 있어서 꽤 심각해졌습니다. 며칠 동안 십여 건의 사건이 벌어졌고, 은폐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상자도 많은 듯합니다. 정작 문제는 갈수록 심화된다는 점입니다. 오늘만 해도 아침부터 지금까지 벌써 세 번의 다툼이 있었으니까요. 작은 시비까지 합치면 훨씬 많을 겁니다.”
“아직 대회까지 닷새가 남았으니 무림인이 더 몰려들 테고, 더 많은 시비가 교차하겠지?”
“그럴 것으로 사료됩니다.”
“대처는 어떠한가?”
“아문에서는 거의 손을 놓은 지경입니다. 그나마 남도문 등 대회를 주최한 문파에서 문도들을 파견하여 영주 요소요소에 배치해 놓았습니다만 통제력이 그리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저 잠시 화해를 시키는 정도죠.”
사자비가 웃으며 말했다.
“이래서 힘을 중시하는 세계에서 힘이 없으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지. 거대명문이 대회를 주도했다면 그들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쥐죽은 듯 지낼 텐데, 안 그런가? 물론, 그 때문에 우리가 나설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이지만.”
묵묵히 듣고만 있는 갈천을 향해 사자비가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였다.
“남도문에 가서 알아본 바로는 지금까지 대략 칠십여 곳의 문파가 왔다고 합니다. 많게는 서른 명에서 적게는 열 명 정도의 인원으로 무리를 이뤘으니 당초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절반밖에 안 되는 숫자입니다. 계속 도착하고 있지만 그래도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백여 문파 정도가 최대한이 될 것 같습니다.”
“평균으로 이십 명을 잡으면 이천 명 정도가 되겠군.”
갈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비가 물었다.
“이유가 무어라고 생각하나?”
사자비는 은형신검을 주시했다. 갈천 또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은형신검이 조심스럽게 생각을 밝혔다.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첫째로는 잔월신교가 무림을 도발했던 때가 아주 먼 이야기처럼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수십 년 전, 지옥교가 압도적인 힘을 앞세워 무림일통을 꿈꾸었을 때, 누구도 그들을 당해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잔월신교가 나서서 그들을 제압했습니다. 이유는 기고만장했던 지옥교가 잔월신교의 분타까지 공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당시 잔월신교의 힘은 지옥교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때까지 근거지인 광서 외에는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무림일통의 의지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겠군.”
“남도문 등이 소란을 떨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겠죠.”
“다른 추측은?”
“남도문의 속내를 파악해서일 겁니다. 수고로운 일을 해서 남도문 등을 굳이 돕지는 않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것도 있나?”
“마지막으로, 아직은 자신들의 문파에 피해가 없으니 좀 더 추이를 관망하자는 생각일 겁니다. 섣불리 나서서 마교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뜻도 되겠죠.”
“흐음! 그럴듯하군. 그러고 보면 무림인도 자존심만 내세우는 바보만 있는 것은 아니로군.”
그러면서 갈천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초대에 응한 문파도 파악해 보았나?”
“대충 파악했습니다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처음 들어보는 문파가 훨씬 많더군요.”
“자네가 아는 세력 중에 명문만 꼽으면 얼마나 되는 것 같나?”
“우선, 호남에는 천자산(天子山)에 있는 철혈문(鐵血門)이 있었습니다.”
“철혈문이면 무림맹의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그 철혈문?”
“네.”
“거물이 왔군. 그리고?”
“호남은 마교가 문제를 일으킨 지역과 인접해 있어서 세가를 제외한 명문은 대부분 초대에 응한 상태로 압니다. 철혈문 외에도 비검문(飛劒門)과 만룡문(萬龍門)이 왔고, 사파로는 호남 거두로 알려진 원릉의 비천십팔방(飛天十八幇)과 장사의 거령문(巨靈門)이 초대에 응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어디 어디서 왔지?”
“정파는 구파일방 중 유일하게 아미파(峨嵋派)가 섞여 있고, 그 외에 당문과 동화문(東華門), 남해오각문(南海五角門)과 태양문이, 사파는 구룡문(九龍門), 혈리금도문(血籬金道門), 광풍련(狂風聯) 등이 있었습니다.”
사자비는 다시 은형신검을 보았다.
“그들은 왜 초대에 응했을 것 같나?”
“갈천 대주의 말대로 마교와 가까워서일 겁니다. 남도문 따위가 무림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탐탁지 않겠지만 결속력을 보여주어 마교가 무림을 도발하지 않도록 사전에 막자는 의도가 깔렸을 겁니다. 두 번째로는 체면 때문이겠죠. 이런 때에 명문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어차피 무사 몇 명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니까요.”
“그럼, 다른 녀석들은?”
“그들 역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다만, 제 솔직한 생각으로는 명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클 것이고, 마교의 힘을 두려워서일 수도, 무림대회에 후기지수를 내보내어 문파를 빛내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과연 명문과 그렇지 않은 문파는 생각하는 바가 다르군.”
“명문의 여유라고 보시면 적절할 겁니다.”
“대회는 어디서 열리나?”
갈천이 대답했다.
“영주에서 남으로 이십 리 떨어진 곳에 남도문이 있습니다. 남도문 바로 앞에 비무대를 비롯하여 임시 숙소까지 급조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문내에도 따로 연회를 즐길 수 있게 해놓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작전은 그곳을 중심으로 하고 짜야겠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사자비가 갈천에게 명했다.
“자넨 호 동지를 찾아가서 그 일대를 기록한 상세한 지도를 달라 하고, 임시로 지낼 수 있는 천막도 지원해 달라 하게.”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은형신검이었다.
“자넨 도착하는 대원들을 파악하게. 장소가 협소하니 수용할 수 없는 인원은 영주에서 은밀히 대기하도록 하고, 연락이 용이하도록 조치를 취하게. 또 흑영신수와 야풍은 따로 빼어 동창과 연락을 담당케 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홍면노에게 일러, 대원을 백성으로 위장시켜 거리에 배치하도록.”
“거리에요?”
“이후부터 일어나는 모든 시비와 싸움을 파악하고 기록해야하네. 어떤 문파와 어떤 문파가 싸웠는지, 누가 죽었는지, 백성의 피해가 어땠는지 소소한 것까지 기록하라고 전하게. 목격자가 있다면 그가 사는 곳과 신분도 조사해야 해.”
갈천이 의문을 드러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번 작전에 있어서 명분이 될 기록이 필요하지 않겠나. 마교가 나타나지 않았을 경우에도 대비해야 하고. 훗날 무림을 공격할 빌미를 제공할 중요한 자료로도 활용될 걸세.”
그러면서 수라금룡대를 수시로 영주 요소요소에 투입시켜 나찰귀로와 함께 마교의 움직임을 파악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갈천과 은형신검이 방을 나가자 사자비는 미소를 지었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작전을 짜고, 혹시 모를 변수를 구성하여 대처를 세우는 일은 바둑알로 탑을 쌓는 것처럼 신중하고 집요한 면이 필요해서, 그에게 작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하나의 취미 같은 것이다. 그렇게 맞춰진 계획을 실전에서 사용하고, 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자면 더 큰 기쁨이 되어 돌아왔다. 꼭 세상이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보이는 느낌이랄까. 해서 자신이 절대자가 된 포만감, 만인을 내려다보는 즐거움까지 생기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초대장도 구하지 못했군.”
하지만 그 일은 호승지를 통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다.
제7장 유쾌하지 않은 재회
1
“출타를 하시겠다고요?”
호승지가 소리치듯 물었다. 놀란 것이다. 그는 사자비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이유일까!
듣기로는 순시를 핑계로 중원 남쪽을 유람하는 것이라 했다. 그것만으로도 황실과 떨어진 이곳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을 거라는 한가한 소리를 했었다. 하지만 놀아도 때와 장소를 가리면서 놀아야지. 지금이 어느 때라고. 혹시, 이곳에서 엄한 무인을 만나 다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지랴! 위로는 지주에서부터 자신은 물론이요, 판관, 이목, 혹은 대포두와 포두까지 줄초상날 수가 있었다.
애송이 녀석이 막강한 권력의 중심, 동창의 2품 관리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을 터였다. 그런 녀석이 죽으면 분노한 황제의 노여움을 누가 감당할 수 있으랴. 어쩌면 옷을 벗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목이 날아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호승지는 피부로 와 닿는 두려움을 떨치고 아첨을 떨었다.
“헤헤, 대인! 그러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어여쁜 가기들을 불러 연회를 열겠습니다.”
“그것도 좋겠지만, 답답해서 그런다네.”
“하지만…….”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그, 그럴 리가요! 하오나 관복은 입고 다니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관리를 못 알아보고 시비를 거는 미친놈이 있을까!
물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각 지방에서 모여든 무림인이 영주거리에 가득 찬 상태. 그런 놈 중에 관리를 발톱에 낀 떼만큼도 여기지 않는 오만한 놈이 한둘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거기다 관복도 못 알아보는 개 눈깔이 있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인을 즐기는 극악무도한 녀석이 있을 수도 있었다. 왜 있잖은가. 무공 때문에 성격이 이상해져서 상습적으로 살인을 한다는 그런 부류들 말이다. 그런 놈이 영주에 몰려든 무인 중에 한둘 섞였다면 골치 아파진다. 그런 엄한 녀석을 만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가 엉뚱한 소리를 해서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관복이 웬 말인가! 나는 그저 평소 백성의 생활을 관찰하고 싶네. 한데, 내가 관복을 입고 나가면 백성이 어떻겠나.”
관복을 입어도 위험한데, 벗으면 도대체 어쩌라고.
“하지만 거리에 무림인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그냥 거리를 지나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지는 않겠지.”
맞는 말이지만, 까마귀 노는데 백로야 가지 말라고 했다. 원치 않아도 시비에 휘말리는 게 또 이쪽의 생리가 아닌가. 무림인의 싸움터에 백성이 자리를 피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길가다가 재수 없게 칼을 맞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말해야 이해를 해줄까. 그냥 솔직하게 털어 놓을까. 영주가 아문의 통제력을 이미 벗어난 지 오래라고? 차라리 대회가 끝나고 무림인이 흩어지면 그때 돌아다니라고?
차마 말을 못하는데, 애송이가 물었다.
“그리고 내 신분을 함구하라 일렀는데, 설마 말한 것은 아니겠지?”
“어찌 명을 어기겠습니까. 저와 대포두 하나, 우 판관, 정 이목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실을 모릅니다. 그 외의 관헌은 그저 사천총독의 아드님이 호위를 데리고 유람 왔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지요.”
“의심은 하지 않던가? 호위만 수백에 이르는데.”
“지깟것들이 그런 생각을 할 머리라도 있겠습니까.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 그러려니 하는 게 또 포두 포쾌 같은 아랫것들의 습성이지요. 게다가 열 명씩 따로따로 와서 수도 파악하지 못합니다.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고.”
“다행이로군. 그러니 내가 관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더 안 되지 않겠는가.”
이상한 이유를 주장처럼 내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튼 거리 정세도 살필 겸 나갈 생각이니 그리 알게.”
호승지의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졌다. 내심 영주를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애송이가 아문을 벗어나는 그 순간 그의 간은 콩알만 해져서 무사히 돌아오는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까지 그를 괴롭힐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견뎌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때 애송이가 또 그를 괴롭힌다.
“초대장도 구해주게.”
“초대장이라니요?”
“나도 동창을 이끌고 있어서 무공에 관심이 많다네. 대회에서 무예대결을 통해 실력을 겨룬다지? 무림인의 무공이 어느 정도 되는지 꼭 보고 싶네.”
“준비 하겠습니다.”
심력이 모두 쇄진된 모양, 호승지는 군소리 없이 수긍했다. 하지만 애송이가 방을 나갔을 때, 그는 창 밖 높은 하늘을 보며 한탄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사자비는 호승지가 애를 태우건 말건 달랑 호위 둘만 데리고 아문을 빠져나왔다. 갈천과 요천검귀였다. 그들은 영주, 그중에서도 무림인이 가장 많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아다니며 영주 분위기를 파악했다. 객잔이 모인 곳, 술집이 늘어선 거리, 운치가 좋은 장소, 악사와 광대가 모여 눈길을 끌고 잡다한 품목을 파는 번화가 등이었다.
오전은 북쪽 거리를 돌아보다가 이어진 거리를 통해 동쪽으로 접어들었다. 노점상이 늘어서서 먹을거리를 팔고, 각종 가게가 행인의 눈길을 끄는 그런 장소였다. 영주 백성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무림인이 자주 눈에 뜨였는데, 같은 복장에 무기를 차고 우르르 몰려다니니 사람들이 알아서 옆으로 피해 주기 일쑤였다.
사자비는 그곳을 지나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기요!”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익숙한 별호가 튀어나와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홍 소협, 홍면노를 찾는 것이다.
사자비는 상대를 확인하고는 티 나지 않게 살짝 인상을 썼다. 촌락에서 만났던 장수문의 후기지수가 다섯 명의 호위를 데리고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화려한 복장에 화장까지 해서 밤에 보았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보였다. 사자비를 확인하더니 밝게 웃으며 반가운 얼굴을 보였다. 그 옆으로 같이 음식을 가져왔던 청년이 있고, 그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대사형이라는 사내도 있었다.
“아! 여기에서 또 뵙는군요!”
사자비가 놀랐다는 얼굴로 먼저 손을 모아 인사를 건넸다. 여인과 두 사내 역시 마주 포권했다. 여인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요. 언제 영주로 오신 거죠?”
왜 같이 오지 않고, 먼저 출발했느냐는 서운한 투였다. 사자비는 웃으며 변명했다.
“하하, 급한 사정이 생겨 조금 일찍 영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사정이었는데요?”
그러자 대사형이라는 사람이 여인을 꾸짖었다.
“사정이 있었다면 그런 줄 알지 곤란한 질문을 왜 하느냐.”
여인이 얼굴을 붉혔다. 약간 불만스러운 빛이었다. 그러나 대상형은 그녀를 무시하고 사자비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거리 구경을 하는 듯한데, 동행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곳에 와보니 생각보다 위험한 듯하오. 시비도 많은 것 같고.”
꽤 호의적인 투였다.
사자비는 거절의 빛을 보이려다가 생각을 바꾸어 흔쾌히 허락했다. 이들과 같이 다니면 무림대회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 저야 고맙죠.”
그렇게 일행이 늘어난 사자비는 그들과 함께 번화한 거리를 나와 한산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 각 정도를 더 가자 음식점과 술집이 늘어선 거리였다. 그곳에는 다른 거리보다 더 무림인이 많은 것 같았다.
음식점을 보니 허기가 느껴진 모양, 여인, 장방희(張方姬)가 제안했다.
“우리 식사를 하고 가는 것이 어때요?”
그러면서 청루반점이란 현판이 걸린 큰 음식점을 가리켰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녀를 따라 음식점으로 향했다.
음식점에는 무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 층과 이 층이 트인 곳인데, 모두 자리를 잡고 음식을 먹거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다행히 자리 몇 개가 아직 비어 있었으므로 사지비와 갈천, 요천검귀 종리설, 그리고 장방희와 사형 왕도건(王棹乾), 대사형 박두기(朴頭起)가 큰 탁자에 동석했다. 약간 떨어진 탁자에 장수문의 호위들이 앉았다.
무림인답게 돈을 쓰는데 아낌이 없었다. 비싼 음식을 몇 개를 고민 없이 연이어 시키더니 반주로 비싼 술까지 한 병 곁들였다. 그리고 사자비를 향해 물었다.
“머물 곳은 구했나요?”
사자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어디에 구했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그것까지 둘러대자 또 다른 질문이 있었다. 대답을 하면 또 다른 질문이었다. 그렇게 문답이 줄을 잇고 음식이 나온 후까지 이어지자 보다 못한 왕도건이 핀잔주듯 말했다.
“그러다 홍 소협 체하시겠다.”
장방희가 다시 얼굴을 붉혔다. 때마침 박두기가 술병을 내밀었다.
“한잔하시오, 홍 소협!”
사자비가 잔을 내밀자 쪼로록거리는 소리와 함께 맑은 액체가 잔에 차올랐다. 박두기는 호탕한 사람인 듯했다. 갈천과 요천검귀의 잔까지 채워주더니 왕도건과 장방희, 그리고 자신의 잔에 차례로 술을 따라 덕담을 주고받았다. 이후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주도하는데 말솜씨가 있는 듯했다. 물론, 대화는 무공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사자비는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장방희가 불쑥 물었다.
“자신 있으세요, 대사형?”
“무슨 말이냐?”
“대회에서 우승할 자신이 있냐고요.”
박두기는 소탈한 웃음을 흘렸다.
“강호가 넓고 넓은데 나 같은 재주로 어찌 우승을 하겠느냐. 사부님과 문주님께 죄송한 말이지만 참가에 의의를 두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대사형이라면 좋은 성적을 거둘 거예요.”
박두기가 고개를 저어 부정했지만 왕도건도 장방희와 같은 소리를 해서 대사형에 대한 믿음을 보였다. 그러자 박두기가 쑥스러운 얼굴로 사자비에게 말했다.
“이 녀석들 말은 흘려들으시오. 후기지수라고는 문내의 사형제들밖에 본 적이 없어서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모른다오.”
사자비가 하하 웃었다.
“그래도 부럽군요. 사제, 사매의 믿음에 흔들림이 없으니까요.”
그때 왕도건이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쪽 보입니까?”
탁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맞은편 이 층 난간에 붙은 탁자였다. 거기에 청색 무복을 입은 무리가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박두기가 물었다.
“알고 있는 자들이냐?”
“가슴에 있는 문양을 보고도 모르십니까?”
그제야 구름과 그 위에 나는 듯 그러진 검이 눈에 들어온 모양, 박두기가 감탄하듯 말했다.
“비검문!”
“네. 확실합니다.”
“비검문도 대회에 참가했다니……. 하하 자신감이 더 사라지는구나!”
듣고 있던 사자비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비검문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장방희가 놀란 얼굴을 드러냈다.
“비검문을 모른다는 말씀이세요?”
그녀만 아니라 왕도건과 박두기도 마찬가지였다.
“비검문은 호남을 무대로 활동하는 명문정파요.”
무뚝뚝한 왕도건의 설명이었다. 사자비는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다시 젓가락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왕도건이 표정을 구겼다. 반응이 그게 뭐냐는 얼굴인 이었다. 그러나 표정을 고치고 이내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시골 무관에서만 자랐을 테니, 명문이라 불리는 곳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른 곳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자들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사람은 있었다.
콰당!
옆쪽 난간에서 귀를 찌르는 소음이 울렸다. 실내의 모든 시선이 일시에 소리를 쫓았다. 사십대 중년인이었다. 그는 방금 탁자를 주먹으로 때려 구멍을 내놓았다. 탁자에는 남청색 무복을 입은 여섯 명의 사내가 앉아 있고, 그 옆에도 같은 무리로 보이는 다섯 사내가 있었다. 아무래도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똥파리가 똥을 그냥 지나칠 리 없지.”
무림인이 모였으니 당연히 시비가 생긴다는 것이다.
사자비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장방희가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요? 분위기가 살벌하군요.”
그러면서 그도 중년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중년인이 앉아있는 무리에게 으르렁거렸다.
“다시 말해봐라, 애송이들아!”
무리 중 허여멀끔하게 생긴 무사가 피식 웃으며 모두 들으라는 듯 대답했다.
“세상 참 좋아졌다고 했소.”
중년인의 눈빛에 살기가 담겼다.
“그 뒤로 했던 말도 다시 읊어보아라.”
“어이가 없군. 굳이 듣고 싶다면 말해드리지. 도청방 무사는 꼭 호랑이 탈을 쓴 고양이 같다고 했소만?”
결국, 중년인의 분노가 폭발했다.
윙!
검이 뽑히더니 날카로운 경기를 퍼뜨렸다. 그리고 외쳤다.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강호의 불문율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 말은 이곳에서 목을 날려도 좋다는 소리로 알아듣겠다. 뽑아라.”
“그러지!”
쉽게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중년인을 향해 대도를 날렸다. 동시에 같이 있던 동료들 또한 각자 무기를 뽑았다. 당연하게도 조금 떨어진 중년인의 동료들도 몸을 놀렸다. 무기를 하나씩 꼬나쥐고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장내가 순식간에 쇳소리와 기물이 파손되는 소음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근처에 있던 무인들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자리를 피했다. 또는 하는 짓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기도 했다.
다툼은 짧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이십여 명이 한데 어울려 병장기를 휘두르니 탁자까지 자리한 좁은 복도가 협소할 수밖에. 난간을 부수고 몇 명이 일 층으로 뛰어내렸다. 음식점 전체를 무대로 싸우려는 것이다. 놀란 주인이 주방으로 도망치고, 몇몇 점원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일 층에 있던 무인들도 이런 일에 관여하기 싫은 듯 밖으로 몸을 빼려 했다.
사자비도 그중 하나였다. 오히려 시시한 싸움에 질려서 제일 먼저 몸을 일으킨 그였다. 일행에게 얻을 정보랄 것도 없어서 진즉 몸을 빼려 했는데, 잘 된 일이었다. 한데, 그 모습이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으로 보였던 것 같았다. 장방희가 급히 음식점을 빠져나가는 사자비를 보며 배신당한 얼굴, 또는 실망했다는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도 여유롭지는 못했다. 이 층의 싸움이 일 층으로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나가자. 이런 문파 간의 자존심 싸움에 휘둘리면 골치 아파진다.”
박두기가 그렇게 말하며 장방희의 팔을 끌었다. 왕도건도 그들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
밖은 이미 청루반점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반점에 있다가 싸움을 피해 나온 자들도 있고, 소문을 듣고 구경을 온 사람도 있었다. 그 앞을 지나다가 소란 때문에 걸음을 멈춘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무인들이었고, 하나같이 결과를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들을 사자비와 갈천, 요천검귀가 헤치고 있었다. 싸움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방 사람이 모여 길을 막았던 것이다. 그런데 끈적끈적한 꿀처럼 그를 붙잡는 소리가 있었다. 뒤따라 나온 장방희의 목소리였다.
“홍 소협,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거죠?”
톡 쏘아붙이는 것이 처음과 달리 꽤 화난 투였다.
사자비는 모른 척하려다가 재차 부르는 소리 때문에 뒤돌아보았다.
인파를 뚫고 그녀가 다가왔다.
“이번에도 급한 사정이 생겼나보죠?”
“하하!”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데, 장방형의 얼굴은 풀어질 줄 몰랐다.
“최소한, 위험하니 같이 피하자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나갈 수가 있죠?”
그러자 박두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너무 그러지 마라. 이런 일을 처음 겪으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너무 했어요.”
사자비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해해 주십시오. 박 소협의 말씀대로 이런 무림인의 싸움은 처음이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제야 장방희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그때 박두기가 놀란 얼굴을 하더니 어딘가를 향해 소리쳤다.
“용 소저!”
인파 속에서 아는 사람을 발견한 듯했다. 상대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구경꾼을 뚫고 다가왔다. 모두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홍의에 푸른 장포를 걸친 묘령의 여인이 일행으로 보이는 비슷한 또래의 남녀 몇 명과 함께 있었다.
순간 사자비의 표정이 심하게 구겨졌다. 동시에 다가오는 여인이 걸음을 멈췄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경악한 얼굴이었다.
“왜 그러시오, 용 소저?”
충격을 받은 얼굴을 보고 박두기가 물었다. 용 소저라 불린 여인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잘못 봤나 봐요.”
“무엇을 잘못 봤기에 그리 사색이 되신 겁니까?”
“그, 그냥……. 그보다 언제 오셨나요?”
“이틀 전에 왔습니다. 우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제와 사매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용 소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행을 끌고 박두기를 따라 걸었다.
“누구입니까?”
찻집을 찾아 길을 걷던 중에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왕도건이 낮게 물었다. 박두기가 웃으며 말했다.
“놀라지 마라. 예전 소림에서 잠깐 속가제자로 있을 때 사귀었던 분이다. 구천검문이라고 알고 있겠지?”
왕도건의 무뚝뚝한 얼굴에 긴장한 티가 드러났다. 갑자기 사라진 사자비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장방희도 놀라서 여인을 보았다. 그런데 박두기가 더 놀라운 말을 했다.
“구천검문주님의 따님이 되신다.”
“정말이요?”
구천검문주의 딸, 용화랑이 미소로 대답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박 소협의 사제, 사매가 되시나요?”
“그렇습니다. 이쪽이 사제 왕도건이고, 이쪽은 사매 장방희라고 하죠.”
그러자 용화랑도 일행을 소개해 다시 한 번 왕도건과 장방희를 놀라게 했다. 그들 모두 당문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천 오대명문 중 두 문파의 후기지수를 한꺼번에, 그것도 가까이서 보고 인사까지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감격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운 시선도 보내었다. 특히, 가장 마지막에 따라오던 청년이 소개되었을 때는 박두기까지 압도당했다. 현 당가의 최고 기재라는 당원탁(唐圓卓)이었기 때문이다.
당원탁이 유명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뛰어난 재능이었다. 오죽했으면 당가의 가신이었던 그를 보고 한눈에 반한 가주가 당 씨 성을 내리고 양자로 받아들였을까. 지금은 당문의 후기 중에 암기술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졌으며 무공 또한 당가주가 극찬할 정도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면서도, 반대로 무엇보다 빛내주는 것이었다. 바로 흑룡의 친동생이라는 점이다. 당문과 소림이 길러낸 북무림 최고의 후기지수 흑룡의 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젯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사자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장방희는 소개받은 순간부터 그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오히려 허전함을 느낀 박두기가 사자비가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홍 소협은 어디 갔느냐?”
장방희가 못마땅한 얼굴이 되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또 몰래 가버렸겠죠.”
그러자 용화랑이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홍 소협이라니요? 일행이 또 있었나요?”
“네. 시골 무관 출신이라는데, 영주로 오는 중에 곤란한 지경에 빠진 저희를 도와주어 가깝게 지냈습니다.”
“시골무관이요? 혹시, 용병이나 낭인이 아니던가요?”
용화랑의 얼굴은 점점 흑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본 얼굴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어쩌면 헛것을 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그녀의 심장을 조이는 것 같았다.
“낭인?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잠깐 본 듯한데, 아는 얼굴인 것 같아서요.”
박두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는 인물이 어떤 분이시기에 그리 불안해하십니까?”
용화랑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적한 골목이었다. 듣는 사람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다. 그녀는 잠시 신중한 표정이 되더니 낮게 말했다. 어디까지 비밀로 해야 할지,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판단한 뒤였다.
“이건 정말 비밀로 하셔야 해요.”
굉장한 비밀은 듯해서 모두 침묵했다.
“사실은 예전에…….”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그러나 줄어든 목소리는 다른 소리에 의해서 아예 끊어져 버렸다.
2
“거기까지다.”
“……!”
갑작스런 외침이 용화랑을 질색하게 했다. 그녀는 입을 닫고 고개를 쳐들어 위를 보았다. 건물 지붕에 비소를 머금고 내려다보는 한 사내가 햇살을 후광처럼 받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인파 속에서 언뜻 본 얼굴은 허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박두기와 장방희도 그를 보고 소리쳤다. 그들은 사정을 몰라서 의아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홍 소협. 거기에서 무엇을 하는 거요?”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한겨울의 새벽처럼 싸늘했다.
“철없는 애송이들을 감시하고 있었지.”
그리고는 훌쩍 몸을 날려 골목을 막아선다. 반대편도 두 사내가 길을 막고 퇴로를 확보했다. 갈천과 요천검귀였다. 그들까지 확인한 용화랑은 이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사자비도 무섭지만 구천검문의 정예를 순식간에 처리한 자들, 귀신같은 복장을 한 그의 수하들도 무서웠다. 갈천과 요천검귀에게서 풍기는 기도로 보아 그들이 분명했다.
“저는… 저는…….”
진땀을 흘리며 할 말을 찾는 용화랑과 그녀를 보며 더욱 짙은 미소를 짓는 사자비였다.
“한가하게 이곳을 찾은 걸 보니 구천검문도 이제 먹고살만한가 보구나?”
용화랑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이곳에 온 이유가 있지. 그래서 난 날 아는 사람이 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아주 신경 쓰인다.”
사자비의 눈이 흡사 잿빛으로 물든 하늘처럼 변했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용화랑의 얼굴에 힘이 빠졌다. 체념한 표정이었다.
“따라갈게요.”
“널 데려가면 이놈들이 다른 사람에게 알릴 텐데, 그건 어찌해야 할까?”
“제가 설득하겠어요. 그러니 다치게 하지 마세요. 일이 끝나고 무사히 돌려보내주시기만 하면 되요.”
듣고 있던 후기지수들이 황당한 모양으로 실소를 흘렸다. 누가 누굴 데려가? 그런 얼굴인데, 왕도건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무례한 것 아니오? 대화를 몰래 엿들은 것도 그렇지만, 지금 소협의 형태는 협박에 가깝소.”
“닥쳐라, 쓰레기야!”
생각지 못 했던 대답 때문에 왕도건의 인상이 구겨졌다.
“뭐, 뭐라고 했소?”
“강자에게 머릴 숙이고, 약자 앞에서는 거드름이나 피우는 네놈 같은 놈들이 쓰레기가 아니라면 무엇이냐!”
분노 때문에 부들부들 떨던 왕도건이 갑자기 검을 뽑았다. 용화랑이 안 된다고 소리치고, 박두기가 막으려 했으나 늦었다. 왕도건은 이미 사자비의 지척까지 다가가 있었다.
“검으로 사과를 받는다.”
그리고는 사자비의 어깨를 베었다.
사자비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호신강기를 일으켜 몸을 보호했는데, 호신강기라지만 천령강기에 기반을 둔 것이라 검을 막는 정도를 넘어 아예 부숴버렸다.
창!
검날이 몸에 부딪히기 무섭게 산산조각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공격한 왕도건이 오히려 놀라 물러섰지만 사자비의 반응이 휠씬 빨랐다.
턱!
“끄윽!”
목을 잡힌 왕도건이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후기지수들이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호신강기로 검을 부수는 모습은 그들에게 설명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들이 놀라건 말건 사자비는 왕도건을 당겨서 들어 올렸다. 왕도건이 바동거리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사자비가 손에 점점 더 힘을 주자 얼굴을 붉게 하더니 종내에는 몸을 늘어뜨린 채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그만하세요.”
용화랑이 악을 쓰며 외쳤지만 사자비의 반응은 감정 없는 기계 같았다.
“화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날 죽이려던 녀석이다. 내가 왜 살려둬야 하나?”
“제발 그만하세요.”
이때 용화랑의 뒤에 섰던 두 청년이 뛰어올랐다. 하나는 건물 벽을 차고 돌아 사자비의 다리를 향해 손을 뻗었고, 하나는 공중으로 솟구쳐 팔을 노렸다.
아래 공격은 간단히 막았다. 사실 막지도 않았다. 그저 호신강기를 그대로 유지했을 뿐이었으니까. 오히려 사자비의 다리를 때린 손이 찢어져서 피를 뿌렸는데, 그 순간 아래로 떨어지는 청년도 사자비의 손을 발로 가격했다.
사지비는 그조차 가만히 두었다. 그러나 이놈의 내공은 생각 밖이었다.
퍽!
팔목에 충격이 왔다. 그 때문에 잠시 손아귀에 힘이 빠지고, 그것을 노렸다는 듯 왕도건을 낚아챈 청년이 박두기를 향해 던졌다.
사자비는 저린 손목을 주물렀다. 꽤 충격이 있었다.
‘이것 봐라!’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청년을 보았다.
“당문이라고 했던가?”
청년, 당원탁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가 고수라는 건 왕도건이 공격하기 전부터 느꼈던 터였다. 왕도건의 공격을 막는 순간 고수 그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까지 파악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는 사자비에게 갈무리된 엄청난 기운을 느껴서 진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우릴 그냥 보내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나!”
“오늘 일은 함구하겠습니다. 그러니 보내주시죠.”
“그럴 수 없다면?”
“비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자비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협박이냐?”
당원탁의 표정이 굳었다.
“고인을 상대로 어찌 협박을 하겠습니까. 단지, 제 비기는 한번 사용되면 멈출 줄 모릅니다. 그리고 상대가 죽거나 제가 죽어야 끝납니다.”
사자비가 비웃었다.
“그러니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
“네!”
“그렇게 말하니 더 보내줄 수 없겠군. 당문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어디 비기를 사용해 보아라.”
그러면서 주먹을 쥐었다. 사자비의 눈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맨손으로 상대해주마!”
당원탁의 눈빛은 흔들렸다. 당문의 비기를 상대로 이만한 자신감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무림에 몇이나 될까. 무공을 펼치면서도 암기까지 사용하는 것이 당문 사람이다. 무기를 주고받는 중에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암기가 튀어나와 방어하기가 까다롭다. 그리고 암기에는 절독이 묻어 있어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
‘당문에 대해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고?’
그런데도 맨손으로 상대하겠다니 기가 막힐 수밖에.
“왜? 자신 없나?”
사자비가 한 걸음 다가왔다.
당원탁은 순간 숨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강하다. 아주 강해. 이 정도면 가주님, 아니!’
그는 충격을 받았다.
‘형님 정도의 고수다.’
은근히 그를 상대하려는 자신에게 집중적으로 다가오는 기운. 내공도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자신감에서 묻어나오는 이런 기도를 풍기는 상대라면 실전에는 상상조차 못할 공력을 사용할 것만 같았다.
‘나와 동년배정도인데…….’
이런 고수를 본 경우도 형밖에 없었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이해력. 그리고 체질. 수련을 하지 않아도 내공이 쌓이는 이상한 체질 때문에 그의 형은 이미 스무 살에 화경을 넘어버렸다. 그에게서 풍겼던 그런 분위기가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당원탁은 자세를 풀고 몸을 세웠다.
“따라가기만 하면 무사할 수 있는 겁니까?”
“왜 덤비지 않는가. 그대의 비기를 한 번 보고 싶은데.”
“대협을 상대로는 자신 없습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사자비가 턱을 매만졌다.
“당원탁이라고 했었지?”
“……!”
“내 밑에서 일 할 생각이 없나?”
“저, 저는 당문 사람입니다.”
“아쉽군. 지금은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몇 년 후쯤에는 상당한 고수가 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사자비는 갈천을 보았다.
“아문에 가서 대원 몇 명을 데려와라.”
갈천이 떠나자 요천검귀에게 명했다.
“모두 기절시켜라.”
“존명!”
순간 요천검귀가 후기지수들을 지나치듯 가로질렀다. 동시에 손을 놀려 목을 때리자 맞은 녀석들은 하나같이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후, 갈천이 데려온 대원들을 시켜 용화랑 등을 은밀하게 영빈관으로 옮긴 사자비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 ☆ ☆
신전에서 영주로 이어진 숲길에 청년이 쓰러져있었다. 갈색 머리에 어울리는 갈색 장삼을 입고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들뜬 얼굴, 개구리처럼 사지를 대(大)로 벌려서 좁은 길 복판에 누워 있으니 꼭 죽은 것 같았다.
마부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비좁은 숲길을 가로막은 시체 때문에 고삐를 당겨 마차를 멈췄다. 덩달아 따라오던 여덟 명의 무사도 함께 멈췄다.
“뭔가?”
짜증 섞인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흘러나왔다.
“기, 길 앞에 시체가 하나 있습니다요.”
“시체? 이런 숲에 녹림도가 있었나?”
곧이어 상관없다는 듯 명했다.
“시간 없으니 그냥 지나가게.”
그러자면 시체를 밟아야 하는데, 말과 마차가 밟으면 시체가 흉하게 상할 것이다. 그냥 내려서 시체를 살짝 밀어놓고 출발하면 좋으련만……, 마부는 꺼림칙한 얼굴로 시체를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대로 고삐를 흔들었다.
말이 전진했다. 그리고 시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부가 경악한 얼굴이 되어 고삐를 당겼다. 이번에도 마차 안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무슨 일인가?”
“시, 시체가…….”
시체의 광기 서린 눈을 본 마부는 입을 다물었다. 죽은 자가 몸을 일으킬 리 없으니 시체는 아닌 것 같은데, 허옇게 들뜬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소름이 돋았다. 이때 마차 문이 열리며 비단 장포를 입은 오십대 초반의 사내가 흉흉한 기세로 몸을 내밀었다.
“바쁘다고 했거늘!”
잔뜩 노여움을 품은 목소리였다. 중년 사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그 옆으로 무사들이 호위대형을 갖췄다.
중년 사내는 앞을 보며 마부에게 물었다.
“시체가 어쨌다는 건가, 왕노?”
왕노, 마부는 몸을 떨면서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거기에 갈색 장삼을 입은 청년이 있었다. 가만히 서서 이리저리 몸을 흔드는 것이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듯했다. 왕노의 말대로 시체 같은 느낌을 주는 녀석이었다.
중년인이 인상을 썼다. 뭐 저런 놈이 있나, 하는 얼굴로 잠시 노려보다가 귀찮은 투로 말했다.
“이런 좁은 길에 서 있으면 마차가 어찌 지나가나. 썩 비켜라.”
청년이 고개를 쳐들었다. 맑은 눈빛이 이상하게 죽어 있는 것 같아 섬뜩했다. 입가에 걸린 미소도 스산하다.
“자고 있는 어르신을 일어나게 하면 어쩌나. 썩 돌아가라.”
하품까지 하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중년인은 똥 씹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르신 운운하는 것도 어이없었지만 돌아가라니…….
“미친놈이었군. 적웅, 옆으로 치워라!”
덩치 큰 무사가 반응하여 앞으로 나섰다. 그는 시체청년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잡았다. 밀어버리려는 행동이었다.
어깨 위에 올려진 사내의 손을 보며 청년의 눈빛이 붉게 충혈되었다. 미소도 사라졌다. 옆으로 길게 찢어져서 웃는 것 같은 입가가 흔들리더니 좀 전과 다른 소리, 흡사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스산한 목소리가 거기에서 흘러나왔다.
“빛나라, 은마사(銀魔絲)!”
파파팟!
순간 듣기에도 시원한 음향이 울렸다. 그러나 소리 때문에 벌어진 일은 결코 시원하지 않았다. 곰처럼 큰 사내의 몸 주위로 은빛이 잠깐 빛나는 것 같더니 머리와 허리, 다리까지 잘려나간 것이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고깃덩이를 보며 시체청년이 중얼거렸다.
“그러기에 어르신 몸에 손을 대면 안 되지.”
조금 전까지 곰 같은 덩치를 자랑하던 적웅을 보며 중년인은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벌어진 입을 힘겹게 움직였다.
“주, 죽여라!”
하지만 그도, 그리고 남은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했다. 주변이 온통 은빛으로 빛나더니 적웅과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무슨 물건으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눈빛만 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몸을 훑고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 그 후로 조약돌로 쌓아올린 탑이 무너지듯 그렇게 허무하게 바닥에 무너져내렸다.
사방이 붉어지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마부, 왕노가 오줌까지 지리면서 빌었다.
“사, 살려주세요.”
시체청년이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씨익 웃는다. 가라는 것 같았다.
왕노는 마차에서 내려 부리나케 달렸다. 마치 뒤에서 이리오라고 무언가가 잡아당기는 것 같았지만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그 모습이 재밌는 듯 한참을 바라보던 시체청년이 다시 대자로 누웠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바람이 불더니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거기에 실려왔다.
“공자께서 명하신 대로 데려왔습니다.”
“수고했다.”
시체청년이 상쾌한 바람을 음미하듯 말했다.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꼭 이렇게 하셔야겠습니까?”
“불만인가?”
“그것이 아니오라 이런 일은 그분께서 아주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혹시, 공자께서 꾸중이나 듣지 않으실지…….”
“꾸중?”
나뭇가지 꺾이는 괴이한 웃음소리가 시체의 입에서 쏟아졌다.
“큭큭큭! 자넨 수십 년이나 그분을 모시고도 속에 품은 마음을 모른단 말인가?”
“……!”
“아둔한…… 뭐 상관없다. 어차피 일 년간은 내 맘 대로이니. 그간 본교가 천하를 종횡할 발판만 만들어 놓으면 난 그것으로 족하다. 그때 가서 그분께 꾸중을 듣든, 마종전(魔種殿)에 갇혀 고통을 받든, 내가 책임지면 되는 일 아닌가.”
“위험할 겁니다.”
“위험을 모르면 인간이 아니라 했던가!”
“…….”
시체는 눈을 뜨고 비소를 머금었다.
“이번 대회가 본교의 건재함을 알리는 나의 두 번째 행보가 될 것이다. 사형들과는 차원이 다른 업적을 남길 수 있는…… 크큭! 겁나면 모두 데리고 돌아가라. 혼자서도 충분하니.”
바람이 멈췄다. 놀랍게도 사내의 발치에 검붉은 비단으로 전신을 휘감은 노인이 부복한 채 나타났다.
“제 임무는 여섯째 공자님은 지키는 일.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 ☆ ☆
눈을 뜨자 어둠이 가득한 방이었다. 창밖으로 별빛이 보이고 두런두런 대화 소리도 들리는데, 용화랑은 시간이 정지된 느낌을 받았다. 그때 방안 어딘가에서 당옥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났니?”
용화랑은 몸을 일으켰다.
“어, 어떻게 된 일이죠?”
당옥문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뒤이어 당옥문의 동생, 당홍립의 물음이 있었다.
“도대체 그자는 누구죠?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은 또 뭐고요?”
이번에는 장방희.
“사형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리고 여긴 어디죠?”
묵묵히 질문을 받으며 기절했던 순간을 기억한 용화랑은 한숨을 쉬었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세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찬찬히 살피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일, 솔직하게 털어놓고 섣부른 짓을 못하게 막는 것이 나을 듯했다.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어요.”
그러면서 구천검문의 이야기만 쏙 빼놓고 사자비와 그의 수하에 대해 설명했다. 당옥문이 불신의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고수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는데? 그리고 용병대장의 무공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려고?”
“직접 보시고도 못 느끼셨어요?”
“음!”
잠시 침음을 흘릴 때 장방희가 제안했다.
“그것보다 빠져나갈 방법부터 모색해 봐요.”
용화랑이 펄쩍 뛰었다. 그녀는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말해야 믿어줄까. 확실히 구천검문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설명하니 제대로 이해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구천검문이 한낱 용병대에게 무너졌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문득 그녀가 표정을 굳혔다.
“민찬기 대협을 알죠?”
“연환도제 어르신?”
“네! 지금 우리 구천검문에서 지내고 계세요.”
이어 용화랑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것까지는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까 그 대장이라는 작자가 민찬기 대협을 무공으로 제압했어요.”
조용한 방에서 갑자기 비명 몇 개가 불쑥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 자기가 지른 비명에 놀라서 스스로 입을 막은 세 여인이 용화랑을 경악한 눈으로 보았다.
“미, 민찬기 대협을 이겼다면 최소한 화경의 고수는 되었다는 거잖아.”
“맞아요. 어르신이 언젠가 그랬죠. 그는 화경의 고수도 넘었다고.”
여인들이 입을 벌렸다.
용화랑이 덧붙였다.
“그 수하들도 엄청난 고수들이에요. 이젠 제 말을 믿겠어요?”
잠시 후에 당홍립이 떠듬거렸다.
“하지만 연환도제가 패했다는 소문은 못 들어 봤는데…….”
“당연하지. 우리를 이렇게 감금해 두었던 건, 아주 은밀하게 일하는 사람이라서 그래. 그때도 그랬어.”
“그럼 넌 이번이 두 번째라는 말이야?”
용화랑이 때에 맞지 않게 미소를 보였다.
“경험자라는 말이지.”
이젠 믿어지는 모양, 여인들의 얼굴에 절망한 표정이 드러났다.
용화랑이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제가 괜히 겁먹었던 게 아니에요. 그 작자는 아주 무시무시하다고요. 도망치다 잡히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요. 그러니 엄한 생각 하지 말고 그가 맡은 일을 끝낼 때까지만 이대로 지내도록 해요. 알겠죠?”
세 여인은 먹이를 줍는 참새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하지만 일이 끝나면 무사히 풀어줄 거예요. 전에도 그랬으니까요.”
제8장 무림대회
1
무림대회가 열렸다. 대소 백여 개의 문파가 초대에 응한 적당한 규모의 대회였다.
첫날은 무림의 밝은 앞날과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로 시작을 알렸다. 이어서 잔치가 벌어져 다음날 아침까지 남도문 안팎이 밝았데, 본격적인 대회의 시작은 둘째 날부터였다. 무림대회 형식에 맞게 비무대회가 개최된 것이다.
비무대회는 백오십 명이 넘는 참가자가 사흘간 예선을 치러 여덟 명을 뽑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뽑힌 여덟 명의 후기지수가 강호명숙들 앞에서 본선을 치르게 된다. 비무가 끝나면 저녁부터는 어김없이 연회가 이어진다. 때문에 낮에는 열기로 뜨겁고, 밤에는 연회로 시끄러웠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마시는 자리가 매일 이어지다 보니 남도문 주변은 언제나 소음으로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시끄러운 곳이 있으면 조용한 곳도 있는 법이다. 오히려 이런 곳은 주변이 들뜰수록 더욱 은밀해져서 비밀을 간직한 사람을 유혹하기 마련이었다. 지금 남도문 내원에 있는 작은 회의실처럼 말이다.
회의실에는 여덟 명의 중늙은이들이 앉아 있었다. 이번 대회를 주관한 남도문주와 혈지문주 등을 비롯한 문파의 수장들이었다. 이들의 모임은 겉으로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회를 주관했으니 당연히 의견을 주고받고 매시간 벌어지는 문제를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의 대화는 이번에 열린 대회와 전혀 무관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았소?”
남도문주의 물음이었다.
대답은 조사단을 파견한 백도문주의 몫이었다.
“상학문주는 실종이 아니라 살해당한 것으로 판명 났소.”
회의실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홉 명의 수장이 모여야 할 자리에 여덟 명만 있는 이유였다.
“누구의 소행이오?”
“목격자를 찾아내었소. 그의 증언에 의하면 신기한 무공을 사용한 청년이었다고 하오. 시신의 상태로 보아 믿을만한 증언이오.”
“역시 잔월신교의 소행?”
“분명하오.”
잠깐의 침묵 뒤로 대당방주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그럼 당문과 장수문은?”
“그들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한 상태요. 하지만 지금 시기에 후기지수들이 실종되었다면 누구의 소행인지는 뻔한 것 아니겠소?”
“과연, 당문의 후기지수를 납치할 만큼 간 큰 자들이 있을 리 없겠지. 결국, 그 일도 마교의 소행이라는 뜻.”
말과 함께 대당방주가 한숨을 쏟아냈다. 동시에 남도문주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이제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장수문의 후기는 문제가 안 되지만, 당문의 후기들은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요. 거기다 오늘 파악한 사실이지만 실종된 당문의 후기지수에 구천검문주의 딸이 섞여 있었다고 하오.”
모두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구천검문? 사천의 그 구천검문 말이오?”
“그렇소. 당문의 통솔자로 왔던 장로께서 찾아와 하루속히 그들을 찾아내라고 성화셨소. 이제 어찌 답을 해야 할지…….”
그때 혈지문주가 묘한 미소를 흘렸다.
“차라리 잘된 일이오.”
남도문주의 표정이 구겨졌다. 같은 목적 때문에 함께 대회를 열었다지만 역시 정사의 경계는 존재했다.
남도문주의 표정을 읽은 혈지문주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 오해는 마시오. 남도문주께서 곤란한 지경에 빠졌음을 두고 한 말이 아니오. 단지, 우리의 의도대로 진행되는 것 같아 하는 말이었소.”
이번에는 일학문주가 말했다. 그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애초 대회 의도는 무림의 결속력을 보여줌으로써 마교의 도발을 저지하자는 것이었소.”
가장 상책이었고 대회를 연 첫 번째 목적이었다.
혈지문주가 설명했다.
“맞는 말씀이나 의도를 그것에만 국한했던 것은 아니지 않소. 어차피 마교가 움직였으니 그에 맞춰 두 번째 목적에 충실할 수밖에요.”
그러나 일학문주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아직 미흡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마교가 움직였다고는 하지만 후기지수를 납치한 일과 상학문주가 살해당한 일만으로 무림을 격동시킬 수는 없을 것이오.”
침묵을 지키던 영주문주가 끼어들었다.
“대회가 시작되었음에도 마교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써부터 방해공작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결코 이 정도에서 멈추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시간을 두고 좀 더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 생각에 잠겼다.
“영주문주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소.”
남도문주였다. 그는 좌중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오. 그보다 당문의 일은 어찌 처리해야 할지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오.”
대당방주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었다.
“솔직하게 사실을 전하는 것이 어떻겠소? 어차피 마교의 만행을 알려야 하니 당문부터 시작을 하면 효과가 크리라 생각되오만.”
홍마문주가 찬성하며 덧붙였다.
“상학문주의 일도 기회를 보아서 알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당장은 시기상조겠지만 비무대회 본선이 시작될 때쯤이면 적당할 것 같군요.”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던지 모두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혈지문주가 제안했다.
“두 번째를 목적으로 두었다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면서 그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내를 지키는 문도를 외부 빼는 것이 어떻겠소? 치안을 핑계로 이동시키면 아무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오.”
마교의 움직임이 포착된 이때 오히려 방비를 허술히 하자는 말이었다.
놀랍게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마교의 기습을 대비한 처사였기 때문이다. 대회에 참석한 무인과 마교의 싸움으로 몰아가되, 자신들의 고수는 외부로 빼돌려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약은 수작이었다.
찬성은 했지만 정도문파의 수장들은 씁쓸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문에서 동지대인께서 오셨습니다. 일전에 부탁했던 일 때문에 오셨다는데요.”
그러자 일학문주가 의문을 드러냈다.
“동지께서 언제 부탁을 하셨소?”
남도문주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사천총독의 아들이 얼마 전에 영주를 찾았는데, 무림대회를 구경하고 싶어 한다 했소.”
그러면서 밖을 향해 일렀다.
“하인을 붙여주고, 이곳에서 지내겠다면 숙소도 마련해 드리게.”
“알겠습니다.”
대회에 참석한 사자비는 가는 곳마다 시선을 끌었다. 6품의 동지가 무슨 벼슬이냐는 듯 관복을 두른 호승지를 하인 부리 듯 하는 모습이 그랬고, 범상치 않은 두 명의 호위를 장식품처럼 달고 다니는 모습도 그랬다.
그러나 가장 그를 돋보이게 것은 복장이었다. 두터운 백의무복에 수백 마리 은빛 학이 수놓아진 흑색 장포를 입고, 거기에 금색 비단을 허리에 두르니, 멀리서 보자면 은은한 광채를 발하는 모습이었다.
얼굴도 시선을 잡아매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칼이 찰랑여서 여인을 유혹하듯 손을 흔들고, 앞으로 드러난 눈동자는 칠흑같이 깊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했다. 그리고 코! 우뚝 날이 선 콧대는 고고함과 고집스러움을 증명하는데, 그 아래 자리한 붉은 입술이 양옆으로 살짝 올라가서 여인을 희롱하는 그것처럼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듯 보였다.
이 모든 것이 하얀 피부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전체적으로 고풍스럽게 만들었다. 천생 사람을 부리며 고생이란 단어를 모르고 자란 귀공자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 그런 풍모였다.
행동 또한 그에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철저히 사천총독의 귀염둥이 공자처럼 걷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한손에 든 부채를 느긋하게 부치면서 걸음조차 더러운 곳을 피해 밟는 모습을 우연이라도 본 여인들은 대부분 넋을 잃고 얼굴을 붉히기 일쑤다.
사자비는 지금 하인을 안내를 받으며 느긋하게 남도문 내부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사람의 시선을 즐기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고, 볼거리를 찾아 헤매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아니다. 정작 그의 나태한 눈은 내면 깊은 곳에서 영악하게 빛을 발하며 남도문의 지리를 파악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한 시진 정도를 걸어 내부구조를 머릿속에 모두 집어넣었을 때, 그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림대회라하여 대단한 것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그저 그렇군. 원래 이런 자리가 이렇게 허섭한가?”
옆을 따르던 호승지가 잘되었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도련님. 이만 돌아가시지요?”
“무예대회를 한다며? 그래도 그건 구경을 해야지. 언제 열리나?”
그를 안내한 하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남도문 밖에서 예선을 치르는데, 잠시 후면 열릴 것입니다요.”
“본선은 따로 열린단 말인가?”
“본선은 내일부터인데, 내원 앞에서 열립지요.”
“예선이라면 실력도 없는 것들이 잔재주나 피울 텐데, 하는 수 없지. 지루하니 그거라도 보는 수밖에.”
오만함이 어떤 것인지 표본처럼 보여준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남도문 밖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하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저리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은 처음일세.”
그 말을 들은 모양, 사자비를 뒤따르던 호승지가 몸을 돌려 그를 째려보았다.
“뭐하나, 어서 도련님 모시지 않고?”
움찔한 하인은 급히 사자비 앞으로 달려갔다.
남도문 정문에는 다섯 개의 비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이제 막 시작한 듯, 다섯 쌍의 후기지수가 한창 실력을 뽐내는 중이었다.
사자비는 정문 근처에서 서서 그들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예상대로였다. 실전경험이 부족한 후기지수라 움직임이 딱딱하고, 너무 초식에만 얽매이려 해서 아슬아슬한 맛이 없었다. 거기다 실력도 비슷비슷해 관전의 재미까지 금방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정면에 있는 녀석이 튀기는 했으나, 역시 사자비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종 상대를 몰아붙이는 모습이 뛰어나기보다는 억척스러운 느낌만 강하게 풍기는 것이다.
한참 동안 비무를 관전하던 사자비가 결국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러다 찢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방정맞은 입을 놀렸다.
“역시 잔재주만 부리는군. 어디 하나 눈길이 가는 곳이 없어.”
낮은 중얼거림이라지만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에게 들릴 정도, 몇몇 무인들이 비무에서 시선을 돌려 그를 힐끔거렸다. 시선을 의식한 사자비가 한층 더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것 보게. 내 저럴 줄 알았지. 저러다 가슴을 노린다는데 만 냥을 걸 수도 있겠어.”
정면 비무대를 보고 하는 소리였다. 이번 목소리는 제법 뚜렷해서 비무대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들린 모양이다. 한창 상대를 밀어붙이던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 동작을 늦추더니 곁눈질로 사자비를 보았다. 그 눈빛에는 모르면 닥치고 있으라는 협박이 담긴 듯했다. 그러나 사자비는 멈추지 않았다.
“역시 내 말대로군.”
당연한 일이었다. 알아도 제대로 방비 못 할 공격, 그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했을 공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자비는 자신만 알고 있다는 듯 잘난 척했다.
“이젠 물러나서 허점을 노리겠지? 여기에는 오만 냥을 걸겠네.”
청년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신경에 거슬렸는지 본래 하려던 행동을 버리고 상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사자비가 혀를 찼다.
“그걸 그렇게 하면 어쩌나? 동작이 전혀 이어지질 않잖아. 바보인가!”
청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비무 중이었고, 상대에게 신경 쓰는 것도 벅찼다. 문제는 사자비가 계속 잘난 척하듯 주절댄다는 것인데, 그때부터 청년의 행동이 어색해지고 있었다. 손발이 점점 꼬이더니 동작이 끊어지고 시종 밀어붙이던 상대에게 오히려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관중도 한몫 거들었다. 청년이 사자비의 말에 놀아난다는 사실을 알고 키득키득 웃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비웃음 소리가 청년에게 안 들릴 리 없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안절부절못하는데, 공교롭게 상대도 청년이 곤란에 처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오히려 그는 사자비의 방정을 역으로 이용하여 청년을 요리하고 있었다.
사자비가 끼어든 지 벌써 오십여 초가 지났다. 이제는 완전히 대결의 판도가 바뀌었다. 청년이 힘겹게 상대의 공격을 막으며 밀리는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사자비의 결정타가 날아들었다.
“분명히 오른쪽으로 피할 거다.”
청년은 왼쪽으로 피하려 했다. 그게 정상이었다. 그래야 다음 한수를 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자비의 의도와 반대로 행동한 덕분에 낭패를 보았던 터. 머리는 아니라고 외치는데, 몸이 강하게 반응하여 정말로 사자비의 말을 따라버렸다.
휙!
오른쪽으로 피하자 상대의 검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가슴을 노렸다. 다리가 꼬인 청년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때 심사관이 큰 외침이 있었다.
“장외!”
청년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그는 토끼 같은 눈으로 비무대를 빠져나간 자신의 왼발을 노려보았다. 왜 거기에 자신의 다리가 있는 것일까? 저 다리가 정말 자신의 다리가 맞는 걸까? 그런 표정이었다.
심사관에 의해 승패가 결정 나자 상대가 검을 거두고 물러섰다.
“가르침 고맙소.”
상대가 비무에 대한 예를 갖추었지만 청년은 그를 보지도 않았다. 꽉 다문 입 때문에 거센 콧김만 쏟아낼 뿐. 그러다 갑자기 몸을 돌려 사자비를 향해 걸음을 놀렸다. 씩씩거리는 형태가 크게 사달 낼 태세였다.
구경하던 무인들이 흥미로운 빛을 보이며 청년의 진로를 터주었다. 과연 청년이 어떤 대처를 보일까, 사자비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 하는 눈빛들이었다.
잠깐 사이에 사자비와 청년이 두 걸음을 두고 마주 서게 되었다.
“넌 무엇 하는 물건이냐?”
청년의 분노는 목소리에서부터 쩔쩔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자비는 전혀 위축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걸 왜 묻냐는 눈빛으로 여유로운 미소만 흘렸다. 그 때문에 간이 콩알만 해진 호승지가 몸을 떨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인가!’
그는 지금 이 순간 사자비를 원망했다. 이 철없는 녀석은 눈썹 밑에 달고 있어야 할 눈도 없단 말인가. 도대체 무인을 자극해서 어쩌자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긴, 젊은 나이에 황궁의 실세 중의 실세라는 동창의 총감이 되었으니 눈이 제대로 되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없는 눈도 달고 봐야 하는 장소가 바로 여기였다.
다행히 청년은 명문가의 후기다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극악무도한 무림인과는 조금 다를 것 같았다. 물론, 안심할 수는 없다. 정인군자도 한평생 살다 보면 한 번 정도는 미쳐서 날뛰는 날이 있으니까. 만약 오늘 청년이 그런 날이라면 2품의 벼슬도 속절없이 요절날 것이었다.
호승지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섰다.
설마 관복을 못 알아보지는 않겠지.
“이분 도련님은 사천총독의 아드님이 되시네.”
미리 신분을 알려 청년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였다.
청년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그래도 총독의 아들이라 섣부른 짓을 할 수 없다고 판단 한 것 같았다. 거기다 이곳에는 심사관을 비롯하여 청년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보는 눈도 많았다.
호승지의 생각은 맞았다. 청년, 요즘 철혈문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조백산(曹白山)은 6품 관복을 입은 중년인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라는 무거운 장신구를 어깨에 달고 있었다. 알아보는 사람도 많은데, 이곳에서 철혈문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성질이 뻗쳐서 그냥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하는데…….
“그대의 아버님이 오늘 그대를 살렸다는 걸 아나?”
그렇게 자존심을 세웠다.
사자비는 여전히 빙글거렸다.
“내 아버님의 위세가 대단하긴 하지. 그래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주랴?”
간신히 위험을 막은 호승지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조백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는 비웃음처럼 말을 던지고 몸을 돌렸다.
“입 함부로 놀리는 버릇 고쳐라. 객사하기 딱 십상이니.”
돌아서는 그를 보며 사자비가 하하거리며 웃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조백산은 이미 멀어졌고, 사자비도 부채질을 하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잔뜩 기대했던 구경꾼만 김샜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그제야 호승지가 울상이 되어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하는 짓이 어설퍼서 몇 수 가르쳐 준건데, 뭐가 잘못되었나?”
“그게 아니라 무림인들이 어떤 부류인 줄 잘 아시잖아요.”
“하하,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데 날 어찌하겠나? 그보다 이제 그만 숙소로 들어가세.”
“재미가 없다하지 않으셨습니까. 차라리 아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요, 제가 연회를 열어 드리겠습니다.”
은근한 제안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여기도 저녁부터 연회를 연다지 않았던가. 강호 명숙들이 모이는 자리라니 어찌 생기면 명숙이라 불리는지 면상이라도 구경해야지. 내일 본선도 열린다니 그것도 관전하고.”
말하기 무섭게 남도문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자비였다. 호승지의 깊은 한숨이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2
어디선가 징소리가 울렸다. 오늘 열린 비무대회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늘이 마지막 예선이라 했으니 아마도 본선에 참가할 여덟 명의 후기지수가 모두 정해졌을 것이다.
징소리 다음은 북소리였다. 한 시진 간격을 두고 울린 이 신호는 이제부터 연회를 시작한다는 알림일 터였다. 과연, 별채를 나오자 곳곳에 등불을 내걸어 남도문 전체를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건물마다 금음이 흘러나와서 떠도는 무사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사자비는 호위로 따라왔던 친황대원을 별채에 대기시킨 채 호승지와 함께 내원으로 향했다. 그중에서도 호웅전(豪雄殿)이라는 곳의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명문의 문도와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고수만 따로 불러 즐기는 자리였다. 사자비는 호승지의 입김과 총독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입장할 수 있었다.
호웅전에서도 사자비는 대접을 받았다. 물론, 총독의 아들이라는 신분 자체가 무림인에게 큰 위협거리는 아니었지만, 영주의 실무를 보고 있는 호승지가 너무 굽실거리니 자연스럽게 무게가 실린 탓이었다. 자연히 남도문주의 부름에 응하여 무림에 잔뼈가 굵은 노고수들이 있는 자리로 안내되었는데, 관리를 대접한다는 이유로 손님자리에서 가장 상석에 앉게 되었다.
연회가 시작되자 사자비는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음식이 나오고, 술이 돌고, 악사들이 들어와 연주도 하는데, 정작 중요한 무림의 정보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림이 어떻다는 둥, 어디에 있는 어느 문파가 어떻다는 둥, 하등 필요 없는 대화만 주고받았다. 그러다 남도문주를 비롯하여 대회를 주관한 몇몇 문주들이 마교의 문제를 거론했다. 잠깐이지만 기대를 한 사자비는 이내 실망했다. 그 역시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마교의 악행을 과장하고 동석한 무림 노괴들의 동조를 구하려는 수작이 같잖게 비쳤을 뿐이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사자비는 이젠 정말 지루해져서 술만 홀짝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사자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어딜 가서도 구박받기 딱 좋을 얼굴을 한 오십대 중후반의 노인이었다. 강서성 회창에서 악명을 날리는 광풍련의 삼당가 단동악(段東岳)이 그의 이름이었다.
“공자께서도 무공에 관심이 있으시오?”
사자비는 가만히 단동악을 살피다가 지루한 티를 역력히 보이며 대답했다.
“있으니 이런 대회를 찾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눈치가 없는 않을 터. 그렇다면 퉁명스런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단동악이 약간 굳은 표정으로 다시 질문했다.
“관심이 있다면 무공도 익히셨겠소?”
“어깨너머로 익혔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왜 그만뒀소? 배우기 어려웠소이까?”
“그 반대죠. 너무 쉬워서 그만뒀습니다. 배움에도 성취감이 있어야 하거늘, 이건 매일 남을 두들겨 패는 것만 가르치니 배우기 아니 쉽겠습니까?”
동석한 노인들이 실소를 머금었다. 그중에 대답이 재밌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남해오각문의 장로였다. 그는 웃으며 질문했다.
“남을 두들겨 패는 일이 쉬운 일이오?”
“원래 나쁜 일이 대개 배우기 쉽죠. 그런 것은 배우지 않아도 절로 익혀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 말라는 짓은 더 잘하게 되는 법처럼.”
“그래서 공자께서는 무공이 나쁜 것이라 생각하오?”
“좋은데 사용하면 옳겠지만, 사실 아직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군요. 그만큼 하찮은 것을 고민하면서 허송세월 보내고 싶진 않거든요.”
모르면 용감하다고 했다. 사자비의 대답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노인들은 오히려 분위기를 풀고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류도 있었다. 감히 어른들의 자리에 끼지 못해 정원에 자리를 마련하여 연회를 즐기던 후기지수들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문내의 어른들을 상대로 귀를 어지럽히는 소리를 해대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그들은 사자비를 향해 찌를 듯한 눈빛으로 매서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사자비는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물어오는 질문에 그저 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귀찮은 표정을 간간이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곧 지겨워졌다. 더 있어 보았자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소피를 핑계로 일어나 연회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기회를 보다가 슬며시 숙소로 돌아가려는 심산이었다. 한데, 연회장을 한 바퀴 돌고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여덟 명의 후기지수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들은 무공에 대해 한창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연회에서 각자 소개를 했었으므로, 한 명은 만룡문의 후기지수요, 한 명은 비도문의 후기, 다른 한 명은 천룡대협이라는 자의 제자임을 알고 있었다. 남은 두 명은 남녀로 태양문의 후기지수, 또 다른 한 명은 남해오각문의 후기지수, 그리고 역시 남녀로 철혈문의 후기지수도 있었다. 젊은이들의 선입견이 강한 때문인지 내면을 숨긴 노인들과 달리 후기지수들은 정사가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은근히 견제를 하는 듯했다. 이곳에 있는 녀석들을 모두 정파의 후기들이었다.
“잠깐!”
그들을 지나치려는데 누군가가 사자비를 불러세웠다.
사자비는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오늘 낮에 그에게 창피를 당한 철혈문의 조백산일 것이다.
몸을 돌려 목소리 주인을 찾자 예상대로 조백산이 비웃음을 머금은 채 싸늘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사자비 역시 오만한 모습 그대로 부채를 살랑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나에게 볼일이라도 있나?”
조백산은 잘 걸렸다는 얼굴이었다.
“낮에도 그렇고, 어르신들과의 대화도 그렇고, 무공에 꽤나 혜안이 있는 듯해서 가르침 좀 받자고 불렀다.”
나이 든 강호의 어른들이야 어린놈의 말장난에 열을 내보았자 체면이 떨어진다 생각했을 테니 허허거리며 웃어넘겼겠지만 여기 혈기왕성한 후기들이야 어디 그런가. 아까처럼 주절대 봐, 찍 소리 못하게 눌러주마, 라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자비는 가소롭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려무나.”
조백산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무공을 익힘에서 첫째가 기본이요, 둘째가 마음이라고 했다. 이건 무슨 뜻이냐?”
“고작 그걸 물으려고 불렀더냐? 아주 간단하지. 기본에 충실해서 몸을 바로잡고 마음으로 넓게 하여 동작을 이뤄야 한다는 뜻이 아니냐.”
그러자 만룡문 녀석이 끼어들었다.
“두루뭉술한 대답이지만 어쨌든 좋소. 그럼, 무공으로 심득을 얻는다는 건 무엇이오?”
“무공으로 심득은 무슨! 도 닦나? 그저 그때그때 자신의 실력에 맞게 수련방법을 터득하고, 무공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넓혀 가면 되는 것이지. 그러다 답답하면 마음가짐을 달리하면 되는 것이고.”
후기지수들이 픽 웃었다. 그런 대꾸를 누가 못하나. 끼워 맞춘 느낌이 확연한 대답이라 비웃음만 흘렸다. 그러나 은근슬쩍 넘어가 주었다. 더 곤란한 질문, 직접적인 질문을 던져서 이제부터 대답이 궁하게 할 참인 것이다.
천룡대협의 제자라는 녀석, 이번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선보여 본선에 올라간 공인량(空仁倆)이 입가에 미소를 담고 물었다.
“수련을 하다 보면 종종 답답함이 밀려오고, 빠르게 늘던 실력이 더뎌지더니 끝내 막히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오?”
“잘 알지.”
공인량이 걸렸다는 듯 급히 질문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경우 어찌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소?”
사지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이런 사소하고 간단한 것까지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싶지만, 모르겠다니 친절히 가르쳐주지. 같은 수련을 반복하는데, 늘던 실력이 꽉 막힌다는 것은 몸이 이미 거기에 익숙해졌다는 것이고, 그것을 뚫을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익히던 수련을 중단하고 명상에 들어가서 상상 속의 상대와 수련한 초식으로 대련을 하는 것이지.”
“상상의 상대와 대련을 한다?”
공인량의 얼굴에 잠깐 놀란 빛이 드러났다.
사자비가 웃으며 말했다.
“해본 적이 없나? 그런 걸 하게 되면 완벽했다고 생각했던 초식들이 얼마나 불안전했던 건지 객관적으로 알게 되고, 머리가 그걸 인식했다는 것은 몸도 인식했다는 것이지. 그렇게 문제점을 파악한 후에 다시 수련해봐. 아주 자알 될 거다.”
공인량은 표정을 굳혔다. 지금 그가 이 문제에 봉착하여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지어낸 말 같지만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 사부님이 했던 말과 유사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모두 묘한 얼굴이 되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예민하게 감지한 조백산이 급히 나섰다.
“신검합일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사자비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보여주었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묻나?”
“…….”
“마음과 검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 아닌가!”
“누가 그런 의미로 물은 것이냐?”
“훗!”
사자비는 조롱이 분명한 웃음을 흘린 후에 물이 흐르는 것처럼 말했다.
“몸과 검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지만 어찌 몸과 검이 하나가 되나. 일부 아둔한 녀석들은 검을 제 몸의 일부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느끼며 움직인다고 말하는데,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본뜻을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검은 검이고, 나는 나다. 그걸 분명히 알았을 때야 비로소 검이 무엇인지 참맛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신검합일이다.”
답변이 그럴싸해서 반박이 궁해진 쪽은 오히려 조백산이었다. 그러자 그를 돕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몇몇 후기지수들이 차례로 어려운 질문을 던져댔다. 하지만 사자비는 그들의 질문을 미리 알고 준비라도 한 듯 대답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결국, 두 명을 제외한 여섯 명의 후기지수가 사자비 하나 때문에 할 말을 잃어버린 황당한 경우를 당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마지막으로 공인량이 물었다. 다른 후기지수와 달리 그는 사자비에게 조언을 구하는 태도였다.
“무공의 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질문이 이상했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바꾸었다.
“아니, 무인이 추구해야 할 무의 극의가 무엇이오?”
“이제야 질문 같은 질문이 나오네.”
다시 한 번 후기지수들의 성질을 건드린 사자비가 이내 신중한 표정을 보였다. 말투도 조금이나마 겸손해졌다.
“극의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無)에서 파생된 것을 다시 무(無)로 돌리는 것이 무인이 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생각하오만?”
공인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제 한 번 술이라도 한 잔 대접해주고 싶소.”
사자비가 끝까지 철없는 귀공자티를 냈다.
“난 비싼 술이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소.”
손을 휘휘 저으며 아서라는 듯,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탄성처럼 한 마디를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아아! 마지막 질문을 제외하고는 우문현답(愚問賢答)이었어.”
우문현답,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대답이란 뜻으로 사자비가 자기 자신을 현명하다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물론, 반대의 의미가 더 짙었지만.
남겨진 후기지수들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럴싸한 말로 포장했지만, 결국 궤변일 뿐. 온몸에 잘난 덩어리를 붙여 놓은 마냥 잘난 척만 실컷 늘어놓고 가버리는 모습이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침묵만 지켰던 차가운 인상의 후기지수가 처음으로 입을 벌렸다. 태양문의 기대주이자 명성이 자자한 태양검웅의 막내 제자, 신혁이었다.
“어디 몸이라도 아픈 게냐?”
그는 옆에 있는 묘령의 여인을 보고 있었다. 바로 삼 년 전에 사찰귀사 육조명 때문에 숲에서 큰 봉변을 당했던 초류진이었다.
“아, 아니요.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그녀의 시선은 이제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사자비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화 내내 옛 기억이 떠오르는데, 그때 얼핏 보았던 무시무시했던 사내와의 느낌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닐 거야.’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느낌이 비슷한 사람은 많다. 호광성 하나만 뒤져도 비슷한 외모에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을 찾으면 몇 두름은 엮여 나올 것이다. 그녀는 확신했다. 그때 보았던 고수일 리 없다고. 무엇보다 사천총독의 아들이 뭐가 아쉬워서 산채를 도륙 낼까. 그녀는 다시 편안한 마음을 하고 무림의 후기지수와 친분을 쌓는데 열중하였다.
사자비가 별채로 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흑풍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사자비와 함께 방으로 들어와 둥근 막대 모양의 물건을 주었다. 신호탄이었다.
사자비가 신호탄을 침상 밑에 밀어 넣으며 물었다.
“도지휘사사의 지원은?”
“대인께서 주신 서찰을 드리자 흔쾌히 병력을 지원하셨습니다. 아마도 내일 아침이면 영주에 도착할 겁니다.”
“그럼, 이걸 참장에게 전하게. 작전 명령서네.”
그러면서 책장에 숨겨놓았던 두툼한 서신을 건넸다. 다음은 남도문 내부가 그려진 지도였다.
“이건 제일대주에게 전하게. 이곳을 장악할 때 움직이기 편할 걸세.”
“알겠습니다.”
서신과 종이를 품속에 갈무리한 흑풍행이 물었다.
“더 지시하실 사항이 있으십니까?”
“그보다 나찰귀로는 모두 잠입했나?”
“네. 무림대회라 그런지 출입이 어렵지 않더군요. 모두 무사로 위장하여 문내에 대기 중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뭔가?”
“대회를 관리하는 이쪽 무사들이 다수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했는데, 돌아올 생각을 안 하더군요.”
사자비기 비소를 지었다.
“영악한 여우들의 잔꾀일 뿐이지.”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자주 그러던가?”
“네. 한 시진 간격으로 눈에 띄지 않게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후부터 빠져나가는 무사들을 주시하다가 은밀히 미행하여 그들이 있는 장소를 파악하게. 파악되는 즉시 제일대주에게 전해서 새벽쯤에 전부 체포하여 인적이 드문 곳에 묶어 놓으라고 하게.”
흑풍행의 얼굴에 음침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겠습니다.”
“마교의 움직임은 포착했나?”
“네. 시키신 대로 음식을 대량으로 사들여서 외부로 빼는 식당 몇 개를 찾아 그 뒤를 밟으니 마교도로 보이는 무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몇 명이던가?”
“영주에서 서쪽에 있는 산에 흩어져 있는데, 원체 그곳 경계가 삼엄해서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침투하라고 할까요?”
“섣불리 건드려서 계획에 차질을 빚을 필요는 없겠지. 그대로 두라고 하게. 다른 움직임은?”
“대회를 주관했던 남도문도와 백도문도가 마교의 존재를 파악하고자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있다는 전달을 받았습니다만 소천룡 대주께서 대원들을 시켜 따돌리셨다는군요.”
“좋은 대처다.”
“그리고…….”
흑풍행이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뭔가?”
“사소한 문제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전에 총감께서 데려오셨던 무림 후기지수 중에 사내 녀석들이 대원들이 다수 빠져나간 틈을 이용하여 도주를 시도했습니다.”
사자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놓치지는 않았겠지?”
“그럴 리가요. 다만, 사상자가 약간 있었습니다. 놈들은 한 명이 죽고, 두 명이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쪽은 대원 하나가 심각한 부상을, 그리고 한 명은 가벼운 경상입니다.”
“기껏 몇 명을, 그것도 애송이들을 상대로 두 명이나 다쳤다는 말인가?”
“놈들 중에 한 녀석이 상당한 고수였습니다. 거기다 극독이 섞인 암기를 쏘는 바람에 미처 대처하지 못했답니다. 해독은 다행히 그의 품에 있는 해독제를 찾아서 했습니다.”
“죽은 녀석은 누구인가?”
“암기를 쓴 녀석입니다. 당원탁이라더군요.”
사자비의 이마가 살짝 구겨졌다가 평소처럼 돌아왔다.
“어쩔 수 없지. 이만 돌아가서 계획대로 신호를 기다리라고 전달해라.”
“알겠습니다.”
제9장 귀공(鬼功) 헌원혁(軒轅奕)
1
하얀 종이에 올려진 손, 그리고 거기에 들린 가는 붓. 붓에는 검은 먹이 묻어 있었다.
붓이 움직였다.
– 기회가 생겼네.
그렇게 종이 맨 윗부분에 글자가 새겨지고, 이내 종이가 돌아서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거기에 또 하나의 손이 붓을 들고 있었다. 그 붓은 짧게 움직여 내용을 종이에 남겼다.
– 어떤 기회?
종이가 다시 처음의 손으로 돌아갔다. 손은 붓을 놀려 다시 종이 위를 돌아다녔다.
– 기우제(祈雨祭)를 하기로 계획이 잡혔네.
중원 전체가 가뭄 때문에 타들어가니 내년을 기약하여 기우제를 한다 하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종이가 옮겨지고 다시 붓이 움직였다.
– 하늘이 돕는군!
– 그렇게 생각하나?
– 아닌가?
– 나를 비롯하여 태감들이 신경을 좀 쓴 탓이지.
– 언제로 잡혔나?
– 아직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네. 길일을 따져서 조만간 정하겠지.
– 장소는 천단(天壇:중국 황제가 기우제를 드리는 곳으로 북경 남쪽에 위치해 있다)이겠지?
– 그렇다네.
– 그럼, 촉박하군. 병부상서는 어찌 되었나?
처음 붓을 놀렸던 손의 주인, 황보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손이 계속 붓을 움직였다.
– 경위지휘사사의 수장도 하루속히 포섭하게.
황보윤이 종이를 당겨썼다. 그는 웃고 있었다.
– 이미 포섭했다네.
– 지금부터 내가 적는 대로 실행하게. 홍규를 찾아가 금의위 증편을 건의하라 하고, 허가가 떨어지는 즉시 내가 소개한 자들을 합격시켜 금의위에 넣도록 하게. 이건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무조건 해야 하는 걸세. 그리고 친군지휘부에도 몇 명을 포섭해 놓게. 해서 기우제 날에 펼쳐질 호위대형과 계획서를 빼내도록 하게. 또 거사 전날 환관들을 은밀히 규합하여 사실을 알리고, 우리와 동참의사를 밝히는 자들에게 내궁을 장악하라 지시를, 반대의 낌새가 보이는 자가 있다면 예외 없이 모두 죽여야 하네.
황보윤이 잠시 침음을 흘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연회가 끝나고 날이 밝기 무섭게 짐을 챙겨 떠나는 무인들이 생겼다. 대부분 문파를 대표한 후기지수가 예선에 탈락하여 자존심을 구긴 자들이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간밤 연회에서 흘러나왔던 흉흉한 소문, 바로 마교에 대한 소문이 은근히 그들을 두렵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주를 떠난 무인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본선을 관전해서 무공에 대한 혜안을 넓히고자, 혹은 예선에 탈락한 마당에 때맞춰 돌아가기가 오히려 자존심 상해서, 나아가 좀 더 무림강호에서의 친분을 쌓아 입지를 굳히고자 남은 자들이 더욱 많았다. 어쩌면 ‘마교 따위에 겁먹으랴, 우리 문파는 그런 겁쟁이가 아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고 문파의 위세를 자랑하려는 듯 자리를 지킨 멍청한 부류도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아무튼 본선을 관전하는 사람이 예선보다 더 많아진 건 사실이었다. 사흘 동안 백오십 명에 달하는 무인이 여덟 명을 뽑고자 치열하게 다투었을 테니, 비무를 한 숫자만도 엄청났을 것이다. 당연히 보다가 지쳐서 숙소에 틀어박힌 부류도 있을 테고, 이미 무림에 명성을 알린 후기지수의 비무만 골라서 관전한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본선은 한 비무대에서만 치러지게 되었고 예선에서 고르고 고른 고수들의 비무였다. 당연히 내원 앞으로 천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비무대가 뚫어지라 시선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관심과 열기도 예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니 장소가 협소해 보일 지경이었다. 내원 앞이 넓은 공터라 좁은 편이 아니었지만 천여 명을 모두 수용할 정도의 공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넓은 비무대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남도문에서 이런 문제를 예상하여 나무로 만든 큰 계단식 관중석을 가장자리에 이어서 (ㄷ)자 형태로 가져다놓았지만 그래도 자리가 없어서 일부는 담장 위에 몸을 올려놓고 구경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 면에서 사자비는 특혜를 받은 셈이었다. 내원 정문 앞으로 큰 단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무림에서 알만한 문파나 고수들의 자리를 마련하여 비무를 관전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는데, 사자비도 그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단상 위에는 모두 마흔 개의 의자가 있었고, 의자마다 크고 넓어서 편해 보였다.
사자비는 호위 둘을 뒤에 세우고 중앙에서 약간 왼쪽에 위치한 의자에 호승지와 나란히 앉았다. 잠시 후 대회를 주최한 수장 몇 명이 나와서 대회의 의의를 연설하더니 곧이어 본선이 시작되었다.
쿵쿵쿵쿵!
첫 번째 비무를 알리는 북소리가 내원 안에서 들려왔다. 본선에 참가할 후기지수도 거기에서 대기하는 모양이다. 북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정문에서 두 명의 청년이 나와서 단상을 돌아 비무대 양편에 섰다.
비무 방식은 예선과는 조금 달랐다. 예선에서는 내공을 사용할 수 없게 했는데, 부상자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예외 또한 그 부분에 두었다. 상대의 무기가 몸에 닿을 때만 내공으로 몸을 보호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내공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부상의 우려가 있지만 본선 진출자들의 실력을 믿고 맡긴 조치였다. 적당한 선에서 공격을 멈추고 방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또한, 보는 사람들의 눈도 즐겁게 하려는 의도도 상당수 작용한 것이었다.
사자비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한손은 부채질을 하며 느긋하게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예선과 달리 후기들의 기도가 제법 살아있는 것 같았다. 내공 또한 다른 후기지수들과는 달라서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쟁-!
짧은 징소리가 여운을 남기고, 동시에 비무대 위가 바빠졌다. 본선 진출자 중 유일한 여인, 여고수들의 세와 텃세가 강하기로 유명한 혈리금도문의 조냉아(曺冷娥)가 바닥을 박차고 상대를 향해 쇄도한 것이다. 반대편에 있던 괴홍문(魁洪門)의 도도사(都萄四)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괴홍문을 이 기회에 알려보고자 그는 처음부터 강한 공격으로 조냉아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내공은 조냉아가 한 수 위인 듯했다.
그녀는 여인답지 않게 몸이 얇은 도를 썼는데, 도도사의 대검을 맞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오히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도도사의 인상이 구겨지는 것으로 보아 손이 아플 정도의 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남자답지 않은 섬세한 초식이 그에게는 있었다. 반대로 조냉아는 여인답지 않게 조금은 무식해 보이는 방법으로 도도사를 몰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반 각을 치열하게 주고받더니 기회를 얻은 도도사가 내공을 이용한 초식을 쓰기 시작했다. 초식에 맞춰 조냉아를 공격하고, 때론 피하게 하며, 대검을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완성이 된 초식에 의해 빛을 발했다. 대검에 검기가 서린 것이다. 이때부터는 조냉아가 무기를 부딪칠 때 인상을 썼다.
그녀는 더 이상 대적하기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훌쩍 뒤로 물러서서 공중으로 솟구쳤다.
이 장이나 뛰어오른 그녀는 허공에서 내공을 쓰는 초식을 사용했다. 공중에서 대상도 없이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어찌 보면 우스울 수 있겠지만 그녀의 모습은 결코 웃기지 않았다. 도를 움직일 때마다 공기를 가르는 도명이 쏟아지고 바닥에 내려섰을 때는 이미 그녀의 도에서 빛이 배어 나왔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다시 호적을 이루었다.
“빠르다.”
“놀랍군.”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출전자 중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두 사람의 무공이 상당한 경지라 감탄한 것이었다. 내공이 깊어서 보이는 나이보다는 좀 더 많겠지만, 젊은 사람들이라 그리 차이가 많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저 나이에 저런 무공이 가능한가?”
“괴홍문이 물건 하나 건졌군!”
대결은 더욱 치열해졌다. 사자비도 예선과는 달리 흥미롭게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 시선을 돌렸다.
“어떻소, 공자?”
광풍련의 삼당가 광동악이었다.
사자비는 뭘 묻느냐는 표정을 보였다.
광동악이 미소를 지으며 비무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젊은이들이 대단하지 않소?”
“뭐 좀 하는군요.”
광동악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특히, 저 여인이 그렇지 않소?”
“제겐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초식을 잘라서 순간적으로 도기를 만드는 것은 저 나이에서는 몹시 어려운 일이라오. 저런 정도라면 금세 초식 없이 내공을 밖으로 뿜어내어 유형화시키는 단계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소. 물론, 운이 없으면 저 정도 실력에서 평생 멈출 수도 있겠지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 청년보다는 여인에게 더 점수를 줘야 할 거요.”
사자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요.”
“혈리금도문주의 제자라오.”
사자비는 알면서도 모른 척 물었다.
“그게 누구입니까?”
“사파의 십존 중 한 명이오. 금도파파(金刀婆婆)라고 불리는데, 저 소저와 비슷한 모양의 도를 사용해서 그렇게 불리지. 그녀가 내공을 일으키면 도가 온통 금빛에 휩싸인다고 들었소.”
“꽤 강한 할머니인가 보군요.”
그러면서 더는 귀찮게 묻지 말라는 표정을 보여주고는 다시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대결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광동악의 예상대로 조냉아가 승기를 잡아서 놓질 않는 모습이었다. 도도사는 계속 밀리고 밀려서 끝내 대검을 뒤로 돌렸다. 패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상대가 무방비 상태로 물러나자 조냉아도 급히 검을 거두고 물러섰다.
“이렇게 대단하신 여걸이 있는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늘 마음 깊이 한 수 배우고 갑니다.”
도도사가 감탄했다는 얼굴로 공손에 예를 취했다.
조냉아도 포권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저 역시!”
“꼭 우승하길 바랍니다.”
그리고는 비무대를 먼저 내려가는 도도사였다. 조냉아는 남아서 관중을 향해 예를 취하고 마지막으로 단상을 향해서 마찬가지 행동을 보였다.
“혈리금도문의 조냉아라고 합니다. 여러 어르신께 승리를 알립니다.”
그러자 강호의 늙은이들이 대단하다며 덕담 몇 마디를 던져주고는 비무를 끝냈다. 곧이어 북소리가 울렸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진출자가 내원에서 나왔다.
첫 번째 비무가 사파와 사파의 대결이었다면 두 번째는 정파와 정파의 대결이었다.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비검문의 축일영(祝日英)이 당당히 걸어 나오고, 뒤로 만룡문의 태웅(態雄)이 축일영과 비슷한 길이에 크기의 검을 차고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사자비가 씨익 웃었다. 태웅이 그를 의식했는지 비무대에 올라서서 이쪽을 힐끔거렸기 때문이다. 어제의 일 때문에 잔뜩 몸에 힘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해서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는 결의의 행동처럼 보였다.
사자비는 어제 조백산의 비무를 떠올렸다. 그렇게 한 번 더 해볼까? 그래서 단단히 창피를 줘볼까?
픽 웃고는 참기로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친황대를 장악한 후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제법 장난스런 생각도 하고, 행동도 하지 않는가.
‘아직은 멀었지.’
갈 길은 많다. 목표도 계속 커지는 것 같다. 권력의 단맛을 맛보자 거기에 물들어가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징소리가 울려서 시작을 알렸다. 그는 비무대로 시선을 고정해 태웅을 보았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재롱 한번 피워보아라.
태웅이 검을 앞으로 세우며 상대를 가리키는 자세에서 몸을 약간 숙이는 형태를 취했다. 조금 특이한 기수식이었다. 그러나 기수식만 취했을 뿐, 그는 제대로 검을 놀릴 기회도 없었다. 비무를 방해하는 큰 소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훨씬 지난 소란이었다. 조냉아와 도도사의 화려한 비무 때문에 인파의 함성에 묻혀 그리 신경 쓰이는 정도도 아닌 그런 소란이었다. 그런데 비무가 끝나자 소란은 점점 더 가까워져서 커지는 듯했다. 그러다 축일영과 태웅이 막 승부를 가리려는데 몇 개의 비명이 울린 것이다. 이번 후기지수는 어떤 무공을 보일까, 하는 궁금증에 관중도 침묵해서 더욱 크게 들린 건지도 몰랐다.
소란은 공터 밖이었다. 내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건물 몇 개가 병풍처럼 세워져서 바람을 막고 있는데, 그 너머로 들려온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도 들려왔다. 둔탁한 소리와 비명이었는데, 계속 비명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순 관중의 시선이 내원으로 오는 두 개의 길목으로 향했다. 축일영과 태웅도 이상하다고 느껴서 자세를 풀고 그곳으로 눈을 돌렸다. 단상에 있는 노고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일하게 사자비만 묘한 미소를 흘리며 느긋하게 앉아 있을 뿐.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다. 검은 무복을 입고 지독한 마기를 풍기는 무리가…….
무리는 중앙건물 왼쪽과 오른쪽, 두 길목을 이용해서 모습을 보이더니 곧이어 계단식 의자 사이, 통행로처럼 만들어 놓은 양쪽 입구를 막는 것처럼 멈춰 섰다. 뒤로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내에서 보이는 자들은 서른 명 정도였다.
“저, 저…….”
불청객처럼 찾아온 무리를 보고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누군가가 비명처럼 외쳤다.
“마교!”
2
“이런 이런!”
무리 중에서 유일하게 갈색 장삼을 입은 사내가 몇 걸음 앞으로 나왔다. 갈색 머리카락에 피부는 허옇게 들떠서 꼭 병자 같은 모습을 한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서 강한 인상을 남기는데, 그 눈이 웃는 듯했다. 실제로도 그는 웃고 있었다.
“마교라니…….”
청년은 느릿느릿 재밌다는 듯 입을 벌렸다.
“입 조심해야지. 언제부터 잔월신교가 마교가 되었나?”
작은 중얼거림인데도 장내 모두가 뚜렷하게 들릴 정도로 크게 들렸다. 그 때문에 모두 침묵했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입구를 통해 들어오고, 마교도들에 의해 사악한 마기조차 거기에 섞어오는 느낌이었다. 모두 숨이 막히는 얼굴이었다.
한참만에야 단상에서 남도문주가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될 줄 예상 했을 텐데도, 실제로 닥치니 두려웠던 것 같다. 여러 무인 앞이라 당당한 듯 보였지만 두려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잔월신교가 이곳에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소?”
“알고 있으면서 능청은!”
청년이 킥킥 웃으며 조롱했다.
“늙은 여우 같으니라고.”
남도문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교도가 아니었다면 소리쳐 꾸짖고 당장 달려나가서 버릇을 가르쳐줬을 테지만, 불행히도 청년은 마교도였고, 또 무시무시하다는 수라천군의 제자임을 이미 강영을 통한 정보로 짐작한 터였다.
청년, 수라천군의 여섯 번째 제자로 짐작되는 녀석이 말했다.
“그쪽도 능청을 떤다니, 나도 장단을 맞춰주는 수밖에.”
그러면서 천천히 장내 중앙으로 걸어들어왔다. 그 뒤를 검붉은 비단으로 전신을 둘러친 깡마른 노인이 뒤따랐다. 청년은 노인을 아래에 남겨두고 홀로 비무대 위로 올라서더니 사방을 둘러보며 하하거렸다.
“무림 후기의 실력을 가리겠다고?”
그는 단상 쪽으로 몸을 돌려 남도문주를 보았다.
“그렇다면 진짜 비무대회를 해야지. 이런 허섭스레기들을 데리고 어찌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를 논한단 말인가!”
졸지에 쓰레기가 되어버린 태웅과 축일영이 잔뜩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청년은 그들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그대들이 들으면 아주 기뻐할 그런 제안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했다.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나도 비무대회에 참가한다.”
놀란 빛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 본선에 참가한 후기지수가 여덟 명이라지? 한 명씩 나에게 도전하라. 내키지 않으면 모두 덤벼도 좋아.”
혈지문주가 굳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도대체 이러는 의도가 무엇이오? 왜 남의 잔치에 와서 협박하는 것이오?”
“협박? 난 기회를 한 번 주고자 함이다.”
“거절한다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자는 없다.”
청년이 다시 키득거렸다.
“물론, 비무에서 져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
모두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할 말을 잃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러니 이기면 될 것이 아닌가! 날 제압하는 자가 이곳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조용히 사죄하고 물러갈 뿐만 아니라, 강영에서 빼앗았던 사업장도 모두 돌려준다. 어떤가, 먹음직스러운 상품 아닌가?”
그때 태웅이 같잖다는 투로 불쑥 끼어들었다.
“가만히 두고 보자니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단상에서 노한 목소리가 그를 꾸짖었다.
“경거망동 말고 가만있거라, 태웅!”
만룡문의 장로였다. 철없는 것이 호기를 부려 목숨을 잃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미 꼬일 대로 꼬인 태웅이었다. 마교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나 그에게는 상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먼 이야기일 뿐,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해져온, 과장이 다분히 섞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당장 무림의 어른들이 젊은 청년 하나에 쩔쩔매는 것도 속에 뒤틀린 그였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사천 총독의 위세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총독 자신도 아닌 그 아들의 재롱을 웃으면서 받아주나. 더욱 그런 놈에게 그 또한 무시를 당했다는 사실이 분통 터지는 터였다.
그는 장로이자 자신의 사숙은 보지도 않았다. 다만, 청년을 향해 검을 들어 보이며 기수식을 잡았다.
“네 오만함을 오늘 이 자리에서 내 검으로 꺾어주마.”
청년이 그를 보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보였다.
“용기가 가상하다면 혼자서는 힘들지 않을까? 비무라지만 동료를 불러도 난 개의치 않는다.”
“닥쳐라!”
“호오!”
청년은 웃으면서 단상을 향해 말했다.
“그럼, 비무는 성립된 것으로 하지.”
단상에 있던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젠 나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건 또 자존심 문제로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룡문의 후기지수가 정식으로 비무에 응해버렸다. 떼거리로 달려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상대가 비무의 특성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그랬다가는 강호에 소문이 퍼진다.
무림에서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체면이었다. 체면을 잃으면 어디에서든 설 자리를 잃는다. 앞에서는 웃지만 뒤에서는 나약함을 비웃고, 비겁함을 꾸짖을 것이다. 그것이 또 소문이 되어 다시 자신의 귀로 들어온다. 그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되어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강호의 소문은 그래서 무섭다.
또한 태웅을 말리면 그에게도 모욕될 터였다. 만룡문에 대한 모욕도 된다. 물론, 만룡문의 장로는 말리고 싶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마교의 제자와 목숨을 건 비무를 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태웅은 그를 보지도 않는다. 이미 싸울 결심을 다진 것 같았다.
“흐음!”
잠시 침음을 흘린 그는 하는 수없이 몸을 뒤로 옮겨 의자에 몸을 묻었다. 태웅이 마교의 청년을 꺾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만룡문에서는 청년영웅이 탄생하게 된다. 한동안 무림의 우러름을 받을 수 있을 테고, 명성은 하늘을 치솟을 것이다. 그런 기대도 장로의 묵인에 약간이나마 영향을 미친 상태였다. 그러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청년이 무어라 중얼거린 것 같았다. 빛나라 은마사? 그런 것 같았다. 그 순간 손도 약간 앞으로 움직인 것 같다. 그리고 끝났다.
파파팟!
비쾌한 음성이 울리고 무언가가 청년의 손에서 번쩍였는데, 사방을 울리는 시원한 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 결과 태웅은 조각조각 나서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온몸에 피란 피는 다 쏟아진 것처럼 잘린 살덩이와 같이 바닥에 떨어져 그 주위를 흥건히 적셨다.
일천 쌍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는 눈이 숨김없이 드러나더니, 이내 공포로 물들었다. 여덟 명의 본선진출자는 다른 후기지수와는 실력이 몇 수는 위였다. 이미 예선에서 그것을 증명한 바 있었다. 그것도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랬다. 한데, 마교를 상대로는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어쩌면 당한 태웅조차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대낮인데도 주위가 어두워진 것처럼 조용했다. 그 속에서 청년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이런,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하지 못했군.”
그는 이미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운 태웅을 향해 포권을 했다.
“잔월신교의 교주님이신 수라천군의 여섯 번째 제자, 헌원혁(軒轅奕)일세. 사부님께서는 그냥 귀공이라고 부르지. 염라대왕을 만나면 그런 놈에게 죽었다고 전해주게.”
그 형태를 보고 만룡문의 장로가 침통한 얼굴로 아플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헌원혁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그에게 비소를 한번 보이고는 축일영에게 몸을 돌렸다.
“다음은 누구냐? 너냐?”
축일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비, 비무에서 사, 상대를 죽이다니…….”
헌원혁이 비틀린 나뭇가지처럼 웃었다.
“크큭! 역시 허섭스레기로구나. 하긴,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자랐을 테니 당연하겠지.”
“하, 함부로 말하지 마라.”
“함부로 말한다?”
헌원혁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그는 지금까지와 달리 차갑게 말했다.
“난 적어도 죽음과 함께 이곳까지 왔다. 사형사제들이 모두 마공에 의해 죽어가는 속에서 끝내 살아남아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단 말이다. 그 고통을 너 따위가 알겠느냐?”
그러더니 다시 처음의 장난스러운 표정,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 정도는 막아낼 줄 알았지.”
킥킥거리며 어깨까지 으쓱했다.
“설마, 저렇게 손도 못 쓰고 토막 날 줄 알았나! 자, 너는 살살 해줄 테니 덤벼 보려무나!”
“일영! 비무대에서 내려와라!”
단상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비사문의 후기를 책임진 비응대주(飛鷹隊主) 홍각사(紅角士)가 외친 것이다. 무림에서 비매도협(秘埋刀俠)이란 별호로 더욱 유명한 고수였다.
헌원혁이 축일영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빈정거렸다.
“것 봐라. 든든한 울타리가 다 보호해주지 않느냐. 똥강아지처럼 꼬리를 말고 내려가도 어른의 명을 따른 것이니 다른 이들도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겠지. 자, 빨리 꼬리를 말고 내려가라. 주인이 부르신다.”
축일영은 내려가지도 서 있지도 못하는 난감한 신세에 빠졌다. 홍각사의 무서운 표정을 보면 어서 내려가야 할 텐데, 헌원혁의 모욕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과연 헌원혁을 상대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공격을 막을 수나 있을까?
순간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은 무언가를 썼을 뿐이라 생각했다. 번쩍이는 빛이 그것을 증명했다. 빛이 번쩍이면 상대가 죽는다. 상대는 피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죽는다. 빛이 번쩍일 때, 그 자리에 없으면 죽지 않을 것이다. 아주 단순한 원리였지만 축일영은 자신감이 생겼다. 내공에 자신 있는 그였기 때문에 첫 한 수만 피해낸다면 상대의 허점이 발견될 것이고, 그 순간 승리는 그의 것이리라 생각했다. 물론, 모험이었다. 그러나 빙글거리는 헌원혁의 얼굴을 대하자니 도저히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는 홍각사를 보았다.
“저에게 도망치라는 말씀은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홍각사가 노해서 소리쳤다.
“놈!”
이때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중이 있었다. 잠시 만들어진 소강상태를 이용해서 이곳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본 비무대 아래의 노인이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것은 좋으나, 조심하거라. 비무장 주위로 잔월신교의 교도들이 있으니……. 들키는 즉시 목숨을 내놔야 할 게다.”
일어서던 자들이 동작을 멈추고 다시 자리에 궁둥이를 붙였다. 그런데도 나가는 자들이 몇몇 있었는데, 곧이어 비명이 들려왔다. 그 사이 홍각사가 단상에서 일어섰다.
“저 아이 대신 이 홍 아무개가 그대를 상대하겠소.”
이번에는 축일영이 소리쳤다.
“대주님!”
“닥쳐라!”
헌원혁이 빈정거렸다.
“동문에 동료애라……. 그럼, 두 사람이 같이 덤비는 것은 어떠하냐? 같이 죽으면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도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장내의 사정을 이미 파악했던 모양으로, 내원에서 여섯 명의 후기지수들이 갑자기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상을 훌쩍 뛰어넘더니 헌원혁을 향해 직선으로 쇄도해 갔다.
헌원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래야 할 맛이 나지.”
말과 함께 접근하는 후기지수에게 몸을 돌렸다.
쉬익!
헌원혁이 손을 들자, 바람 소리가 일어났다. 이어서 빛이 번쩍이더니 선두로 달려오던 후기지수가 가슴에 피를 쏟아내며 뒤로 튕겨나갔다. 이번에는 몇몇 무인이 그것을 정확히 보았다.
“실?”
분명했다. 너무 가늘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물건이 빠르게 움직이니 넋 놓고 있어서는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빛이 번쩍였던 이유도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실에 힘을 주어 날려야 하니 내공을 넣어야 했을 것이었다.
후기지수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서 바닥에 핏자국을 남길 때, 맨 먼저 헌원혁을 공격한 사람은 조냉아였다. 그녀는 달려올 때부터 초식을 펼쳐 도기를 머금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도기를 잔상처럼 남기며 헌원혁의 배를 가르려 했다.
“귀여운 것!”
헌원혁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얼굴로 두 손을 움직였다. 왼손을 오른손으로 옮겨 무언가를 당겼는데, 거기에 실 몇 가닥이 빠져나왔다.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배를 노리는 얇은 도를 휘감았다.
승-!
두부 잘리는 소리가 이럴까!
내공을 머금은 도가 몇 조각으로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실 몇 가닥으로 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조냉아가 뜨악한 눈으로 도신이 완전히 사라진 자신의 애도를 보았다. 한 뼘 정도의 몸만 남은 도는 헌원혁의 배에 닿지도 못하고 허공만 갈랐다. 동시에 배에 충격을 받고 날아가 내원 담장에 부딪혔다. 울컥 피를 토하는 모습으로 보아 심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그녀의 희생으로 약간의 여유를 얻은 다섯 후기지수가 약속이나 한 듯 헌원혁의 퇴로를 모두 막았다. 그러나 용기만 가상했을 뿐, 그들 역시 조냉아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간을 꽤 끌기는 했지만 결국 두 명이 피를 뿌리며 태웅과 같은 신세가 되었고, 그 시점을 기하여 연이어 세 명이 심한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비무대는 난장판이었다. 사방이 젊고 뜨거운 피로 물들고, 그 위로 시체와 부상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헌원혁은 이련 모습이 익숙한 듯 개의치 않고 축일영을 보았다.
“이제 한 녀석만 남았군!”
축일영은 완전히 자신감을 잃은 얼굴을 했다. 상대가 이 정도의 고수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헌원혁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축일영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검을 잡은 손은 계속 떨려서 들고 있기도 어려워 보인다.
참고만 있던 홍각사가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장 오른쪽에 있던 여인이 그보다 먼저 앞서서 단상을 내려왔다. 모두 그녀를 보니 회색 가사에 염주를 든 여승이었다.
그녀를 확인한 사람은 하나같이 기대에 찬 눈빛이 되었다. 무림정도의 우상, 구파일방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아미파의 여승이었기 때문이다.
아미파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하다. 마교는 구파일방도 좌시할 수 없는 무게의 일이라, 그들도 이 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문파 하나를 뽑아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 영주에서 가장 가까운 구파일방을 꼽자면 거리상으로 사천의 아미, 청성, 그리고 같은 호광에 위치한 무당을 들 수 있었다. 세 문파가 비슷했기 때문에 의논 끝에 아미파가 영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관심만 보여주고자 했기에 책임자 하나에 제자 셋만 달랑 보내어 체면만 차린 상태였다. 지금 비무대로 올라오는 여승이 그 아미파의 아미일수(峨嵋一手) 도해신니(道海神尼)였다.
구파일방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개방을 제외하고는 무림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해서 많은 억측이 떠돌았다. 실제로 그들의 실력을 확인할 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도해신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단지 구파일방이니까 뭔가 있겠지, 라는 단순한 마음뿐이 전부였다. 그리고 헌원혁의 실력을 확인한 그녀가 직접 나섰다는 것도 기대의 이유가 되었다.
헌원혁도 그녀를 보고 이채를 띠었다.
“비구니도 있었군!”
도해신니는 무심한 표정으로 헌원혁을 향해 합장하며 너그럽게 말했다.
“아미타불! 빈도의 수양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많은 피를 흘렸으니 이만 살의를 거두고 돌아가 주십시오.”
“하하하. 지금까지 구경만 하다가 이제 와서 그런 소린가!”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몸이니…….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태의 허가 없이 손속은 나눌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이젠 도저히 못 참으시겠다?”
“이만 물러나 주시면 부처님의 은덕이 함께 하실 겁니다.”
헌원혁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깔렸다.
“그렇게 못 하겠다면?”
“부득이하게 제가 손을 써 이제부터 일어나려는 유혈사태를 막으려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해보아라. 선수는 양보하지.”
도해신니는 한숨을 쉬고, 왼쪽 다리를 약간 앞으로, 오른 다리는 뒤로 빼어 서기 편한 자세를 취했다. 왼손은 뒤로 돌려 뒷짐을 진 듯했고, 오른손은 여전해서 반장을 한 모습이었다. 누가 보아도 방어가 힘들고, 공격하기도 어려운 자세였다.
“그것으로 뭘 하겠다는 건가?”
헌원혁은 묻음이 끝나기 무섭게 아미가 꿈틀댔다.
스르륵!
그림자가 바닥을 쓰는 소리가 있다면 이럴 것이다. 순간적으로 도해신니의 신형이 흔들린다 싶더니 금방 몸이 늘어져서 이미 헌원혁의 코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어서 반장했던 손이 앞으로 뻗어나가 헌원혁의 가슴을 노렸다.
쾅!
굉음이 울린 후, 놀랍게도 도해신니의 손은 무언가에 막힌 듯 헌원혁의 앞에서 멈춰져 있었다. 가는 실 뭉치가 그녀의 손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헌원혁이 놀라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는 얼굴로 아직도 푸르게 빛나는 도해신니의 손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때 도해신니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실을 뱀처럼 타고 돌아 헌원혁의 목을 노리는 수법이었다.
헌원혁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아슬아슬하게 도해신니의 장력이 그의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가 하늘로 솟구쳤다. 소리도 없는 유형무음의 장법이었다.
꺾인 헌원혁의 턱 끝에서 나무를 비트는 껄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야 할만하겠군.”
도해신니가 잠시 당황한 빛을 보였다. 동시에 헌원혁이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며 턱으로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양손을 뻗자 수백 가닥의 실이 그녀의 전신을 찢어놓으려는 듯 달려들었다. 놀랍게도 헌원혁의 주위로 실이 늘어나서 그를 보호하듯 둘러치고 있었다. 이제부터 진짜라는 듯 헌원혁이 기합을 지르자 실에 강한 내공이 실려 검은 빛을 뿌렸다.
사람들이 경악했다. 한순간 역전하여 도해신니를 몰아붙이는데, 그 실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무공 또한 무림의 흔한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실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서 끊임없이 도해신니를 쫓아다니는데, 너무 빨라서 그녀의 몸에 계속 상처가 생기고 피가 튀었다. 기회를 놀려 헌원혁에게 다가가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호신강기처럼 그를 보호하는 실에 막혀서 실패만 했다.
‘과연 수라천군의 제자다.’
일변 놀라고, 일변 두려우면서도 내심 감탄을 아끼지 않은 중인이었다. 반 각도 지나지 않아 도해신니를 잡아버린 헌원혁의 무공과 그에 뒷받침되는 내공, 그리고 실전 경험은 무림의 후기지수와는 차원이 달랐다.
촤락!
공간을 찢는 채찍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어느 순간 헌원혁의 양팔이 도해신니 앞에서 자신 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도해신니의 목 주위로 실 몇 가닥이 둘린 상태였다. 행동으로 보아 그녀의 목을 자르려는 심산 같았다.
도해신니의 양팔이 위로 올라와서 목 앞으로 합장했다. 실은 거기에 걸려서 더 이상 그녀의 목을 조르지 못했다.
헌원혁이 가소롭다는 웃음을 흘렸다.
“어마나 버틸까?”
그는 더욱 힘을 주는 듯했다. 실에서 강한 빛을 띠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도해신니의 손이 점점 목으로 좁혀졌다.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더는 버티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일성이 울렸다.
“사부님!”
단상 밑에 있던 세 여승의 소리였다. 그녀들은 도해신니를 구하고자 비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이젠 틀렸다고 생각한 단상 위의 노인들도 비무대 위로 몸을 날렸다. 이렇게 무림의 고수가 하나씩 죽다가는 완전히 사기가 꺾인다고 판단한 행동이었다. 어차피 마교와의 일전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상태. 지금 적의 우두머리를 꺾어버리자는 의도였다. 물론, 일 대 일의 비무 중에 이런 대응을 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었지만, 이젠 이유가 생겼다. 아미파의 여승들이 먼저 뛰어들었으니 그녀들을 도왔다는 핑곗거리가 생긴 것이다.
여승들을 시작으로 일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우선 단상의 노고수들이 비무대 위로 뛰어들자, 입구를 봉쇄했던 백여 명의 마교도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그들을 본 관중석의 일천 명 고수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마교가 자신들도 가만두지 않으리라 판단해서 모두 무기를 뽑아들고 아래로 내려왔고, 일부는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니 순식간에 장내가 난장판이 될 수밖에. 거기다 잠시 후에는 담을 넘어 나타난 삼백여 명의 마교도가 가세하게 되었다.
“징 하게도 싸우는군!”
내원 정문 위. 기왓장을 쌓아 올린 곳에서 피를 튀기는 장내의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자비였다. 그의 양옆으로는 친황대원 두 명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왼쪽의 대원이 물었다.
“이제 모두 모였으니 신호탄을 쏘는 것이 어떨까요?”
사자비가 고개를 저었다.
“좀 더 놔두지. 자기들끼리 치고 박는데,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닌가! 그보다 대단하군!”
그는 마교의 고수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제10장 강혈대마
1
협소한 공간에서 다수의 전투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지금처럼 말이다. 일천오백여 명이 이 좁은 장소에서 뒤엉켜 싸우는 모습을 보자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우선 고수들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밀집된 전투에서는 사방이 적이지만, 또 사방이 동료이기 때문이다. 함부로 무기를 놀렸다가는 아군의 피해가 적지 않게 된다. 꼭 보이는 적을 확인하고 공격해야만 한다.
문제는 거기에서 또 파생된다. 보이는 적을 확인해야 하니 등 뒤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너무 밀집되어 있어서 방어하기도 까다롭다.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바로 살기였다.
고수들은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사방이 적과 아군으로 뒤섞여 있다면, 어떤 살기가 적의 것이고, 아군의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어디선가 검이 날아와도 감지 능력이 떨어져서 실력과 반대로 허무하게 죽을 가능성이 다분히 컸다.
가장 큰 문제는 진영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손발을 맞춘 동료와 함께 훈련한 대로 움직이고 공격과 방어를 해야 힘을 발휘하는데, 발 디딜 틈도 없는 전투라면 사실상 숫자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무림의 고수들이 군대를 상대할 때 가장 취약한 이유였다. 군대는 위의 문제를 완벽하게 보완하고 있었다. 대규모의 병력이 문파로 짓쳐들어오면 무림은 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일반 병사들이라면 군대라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흑각철기대를 만든 것이로군.’
무공을 익힌 군대!
이런 밀집 지형에서도 온몸을 보호할 수 있는 두꺼운 강철 갑옷. 평소 빠른 이동을 할 수 있는 기마. 그리고 정면으로 부딪칠 때 힘을 발휘하는 방패. 언제 어디서건 무림세력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흑각철기대는 갖추고 있었다.
물론, 정말 뛰어난 고수를 상대로는 그들도 취약하다. 그래서 그 부분을 보완한 것이 아마도 친황대일 것이다.
사자비는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면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를 호위하는 대원은 한가하지 않았다.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그들을 발견하고 공격해오는 마교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황대의 상대는 아니었다. 이미 두 배가 훌쩍 넘는 무림군웅을 상대로 밀집된 곳에서 싸워서 그들도 꽤 피해를 입었고, 지쳐 있었다. 그래도 대단하긴 했다. 사백 명으로 제약된 공간에서 일천 명을 상대하는데도 시종 압도하며 고수들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넓은 공간에서 기습을 이용했다면 여기 있는 고수들은 이 각도 버티지 못했을 것 같았다. 과연 무림이 마교를 왜 무서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거기다 흥미로운 점도 발견했다. 일부 마교도는 칼을 맞아 팔이나 다리가 잘렸는데, 기어가서 잘린 부분을 붙이자 신기하게 붙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상한 흙빛이 퍼져 나왔다.
‘저런 무공을 익히면 어디서 암살당할 일은 없겠군.’
그러나 어떤 무공이든 완벽한 것은 없다고 믿는 사자비였다. 백일홍만 해도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아마도 저런 무공은 머리를 다치거나, 몸이 완전히 두 개로 나뉘면 회복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회복되기도 전에 사람이 죽어버릴 테니 말이다.
‘그래도 심각한 부상은 피할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가하고 있는데, 전투는 벌써 이 각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인원이 살아서 죽고, 죽이고 있었지만 이젠 더 볼 것이 없다고 판단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내원 끝 담장에서 익숙한 복장이 발견했다. 관복이었다.
피식 웃음을 쏟아낸 사자비였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호승지가 담장에 머리를 처박고 엉덩이만 뒤로 뺀 채 벌벌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투에 신경 쓴다고 호승지도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그는 담장 아래로 내려가서 호승지에게 향했다.
“지금 뭘 하고 있나?”
엉덩이를 떨고 있던 호승지가 고개를 슬쩍 빼어 사자비를 보았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어서 이쪽을 와서 저처럼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달라지는 것이라도 있나?”
호승지는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다시 머리를 벽에 대고 손으로 감싸쥐었다.
‘이대로 두면 심장병 걸리겠군.’
사자비는 손을 내밀어 호승지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놀란 호승지가 바동거렸지만 손의 주인이 사자비인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또 놀라워했다. 한 손으로 자신을 번쩍 들어 올린 사자비가 신기한 것이다.
사자비가 웃으며 말했다.
“백주대낮에 수백 수천이 모여서 살인을 일삼는데, 자넨 뭘 하고 있나?”
“제, 제가 무슨 힘이 있어 이런 일을 말리겠습니까.”
“고충은 짐작하네만, 그래도 뭔가 하려는 의지는 보여야지.”
“사방이 피바다인데 의지가 있겠습니까.”
호승지는 울음이라도 터뜨리려는 얼굴이었다.
사자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혼자보다는 여럿이 있는 게 낫겠지. 관복을 입고 엎드려 있으니 보기 흉하네. 그냥 서서 나와 함께 구경이나 하세.”
“저,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호승지는 말끝을 흐렸다. 방금 그들을 발견한 마교도 하나가 달려왔는데, 사자비의 두 호위가 베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호승지가 경악하여 물었다.
“저, 저들은 누구입니까?”
“내 호위들이 아닌가. 동창의 고수들이니 안심하게.”
전투는 끝을 보이고 있었다. 모인 무인들이 절반 이상 줄어들고, 그 때문에 공간이 제법 넓어지자 더는 상대가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 이유인 것 같았다. 그제야 대형을 이루어 늑대에게 내몰린 양떼처럼 밀리고 밀리더니 결국 체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때다 싶은 마교도가 그들을 한쪽으로 몰아넣고 포위해 버렸다.
“그만!”
내공 실린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런 싸움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듯 입구에서 노인의 호위를 받으며 장내를 지켜보았던 헌원혁의 목소리였다. 그는 천천히 비무대 쪽으로 걸어왔다. 그렇게 무림인들 앞에 서서 지치고 다친 얼굴들을 즐기듯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놀라운 제안을 했다.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보이면서였다.
“다섯 명만 나와라. 나와서 나와 비무를 펼친다. 날 이긴다면 곱게 물러나지. 물론, 반대의 경우에는 너희 스스로 자결해라.”
웃으면서 하는 말이라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무인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미 절망에 빠져 있는데, 녀석은 더욱 깊은 나락으로 밀어 던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누가 마교도 아니랄까 봐 그런 마음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싸움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에 압도당해 떠는 상대의 모습을 즐기는 광인 같았다. 얼굴에도 그런 사람의 그것 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허옇게 들뜬 얼굴에 두 눈은 흥미롭다는 듯 번뜩이고, 입가에는 이런 상황이 재밌다는 것처럼 미소를 짓고 있으니…….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끝까지 저항해서 한 녀석이라도 더 죽이자는 의지가 얼굴에 드러난 자도 있었지만 많이 지쳤는지 지금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괴음이 터졌다.
팡-!
모든 시선이 하늘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연기를 달고 공중으로 비산하는 불꽃이 있었다. 잠시 후에 무리 속에서 사자비가 호위를 데리고 걸어나왔다. 이미 불꽃은 사라졌고, 중인들의 관심도 더는 불꽃에 없는 듯했다. 다만, 앞으로 나온 사자비를 보며 실소만 머금었을 뿐이었다.
“불꽃은 내가 쐈다.”
그렇게 말하며 좀 더 앞으로 나가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정말 무림인들이 관부의 눈을 피해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쓰러진 시체 하나하나를 훑어가고 있었다.
“이건 거의 전쟁 수준이 아닌가!”
그를 본 헌원혁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넌 누구지?”
무림인들 속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절강총독의 아드님이시오.”
호승지였다. 이 시간에도 사자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인 듯했다. 하지만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인들 사이에 섞여서 꽁꽁 숨어 있었다.
“절강총독의 아드님이시라?”
헌원혁이 크게 웃었다.
“그런 녀석이 여기엔 무슨 일이냐?”
사자비가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역시 미소를 보였다.
“구경하러 왔지. 무림인은 어떻게 싸우나!”
“큭큭. 재밌는 녀석이 아닌가!”
그렇게 한참 괴한 웃음을 흘리다가 헌원혁이 입구를 가리켰다.
“가라. 여긴 너 같은 부류와는 다른 세계다. 잘 구경했다니 나도 기분이 좋다.”
그리고는 킥킥거렸다.
그때, 기회다 싶었는지 호승지가 헐레벌떡 튀어나와 사자비 옆에 섰다. 같이 가겠다는 뜻이었다.
사자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웃음소리가 상당히 거슬린다.”
중얼중얼 거리는데 헌원혁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 했지?”
“그 웃음이 처음부터 거슬린다고 했다. 흡사, 자신이 대단한 권력을 가진 장난꾸러기라도 되는 듯해서. 뭐가 그리 즐겁나? 내가 보기에는 칼을 쥔 철부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옆에서 파랗게 질린 호승지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럴 수도 있죠. 참으십시오, 도련님!”
헌원혁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다시 같은 웃음을 흘렸다.
순간 사자비의 눈빛이 붉게 빛났다. 그리고 ‘스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자비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뒤에 있던 호위의 검집에서 검이 사라진 상태였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있던 헌원혁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컥!”
숨을 쉬는데, 폐부에서 피가 입으로 올라왔다. 그의 목은 빨간 선이 그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옆에는 언제 왔는지 사자비가 서 있었다. 그것도 검을 들고서.
“어, 언제?”
그 말이 마지막 힘을 짜내었던 것 같았다.
툭!
붉은 선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이내 헌원혁의 머리가 떨어져 붉게 물든 바닥을 뒹굴었다.
그걸 지켜보았던 사람들이 입을 벌렸다. 무림인도, 마교도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도 파악을 못 하겠다는 듯 그렇게 입만 벌리고 서서 사자비와 조금 전까지 기괴하게 웃던 얼굴, 피가 고인 웅덩이에 빠져 피칠을 한 헌원혁의 머리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사자비가 자세를 일으켜 똑바로 서서 침묵을 깼다.
“거슬린다니까.”
그는 헌원혁의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때 귀청을 찢을 듯한 거성이 공터를 들었다 놓았다. 내공이 약한 무인은 귀까지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이놈!”
검붉은 비단을 두른 노인, 강혈대마였다. 그는 급히 달려나와 쓰러진 헌원현의 몸을 끌어 머리가 있는 곳에 눕혔다.
그 뒷등을 향해 사자비가 싸늘하게 물었다.
“다른 이가 네놈들 손에 죽는 건 괜찮고, 네 상관이 죽으면 억울하다는 것이냐?”
대꾸없이 헌원현의 옷을 추스르던 강혈대마의 몸에서 갑자기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왔다. 근처에 있던 무인들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엄청난 마기가 그들을 밀어내는 것 같아서 절로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사자비의 표정이 칼같이 변했다.
“네가 강혈대마라는 놈이냐?”
대답이 없었지만 사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군.”
그러면서 대원을 향해 들고 있던 검을 던지며 명했다.
“내 검을 가져와라.”
대원이 검을 받아쥐고, 대신 등에 메고 있던 긴 상자를 풀어 사자비에게 넘겼다. 마라겸이었다. 그것을 본 무인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복건성 장산!”
모두 소리를 지른 사람을 보았다. 묘령의 여인이 피묻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태양문주의 외손녀 초류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다시 비명처럼 외쳤다.
“당신…… 당신…….”
사자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날 알고 있나?”
“알아요. 잘 알아요. 장산에서 산채의 일을 잊었나요?”
그제야 옆에 있던 신혁도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사자비가 들고 있는, 낫처럼 굽은 기형검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그들과 함께 있던 태양문의 장로 상청관도 사정을 파악했다는 얼굴로 표정을 굳혔다.
사자비가 비소를 머금었다. 그도 이제 기억난 것이다.
“삼 년 전이었던가! 그런 일이 있었지. 그때 그 소녀였나?”
대답이 없었다. 강혈대마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서는 내공과는 좀 다른 사이한 기운이 온몸에서 풍기어 감싸는 듯했다. 은은히 피어오르던 흙빛도 더욱 강렬해졌다. 거기에 두 눈은 붉게 빛을 쏘아내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마치 지옥의 야차 같은 형상이었다.
“감히, 공자님을!”
분노한 목소리가 힘이 되어 그의 걸음에 파괴력을 더했다.
쿵!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땅이 울리는 것 같았다. 두 걸음 째는 더욱 기세가 강해졌다. 강혈대마는 그렇게 사자비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마, 마교의 일개 장로가 저런 고수라면…….”
마교에는 교주와 장로, 그리고 대주들이 있고, 그 외에 교주의 제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고수가 있다. 강혈대마를 지켜보던 무인들은 마교의 공포스러움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그런데, 사자비를 보고는 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팡-!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자비의 몸에서 지독한 냉기가 퍼져 나왔다. 놀랍게도 냉기는 희뿌연 연기를 동반해서 아래부터 깔리더니 바닥에 고였던 피와 시체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그리고 전신이 강한 백색으로 휩싸여 공기와 부딪혀 뇌전을 일으켰다.
“저, 저건 또!”
“도대체 저 고수는 누구인가?”
놀란 눈으로 기가 막힌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때, 강혈대마가 사자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자비 또한 기다리지 않고 강혈대마를 덮쳤다.
쾅!
흑색과 백색이 부딪치자 강렬한 내공의 회오리가 주변을 삼키더니 이내 굉음이 여러 번 울리고 격타음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회오리가 줄어들자 그 속에서 강혈대마가 튕겨 나와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사자비는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강혈대마에게 달려가며 마라겸을 움직이는데, 검로에 따라 길게 뻗은 강기가 쏟아져서 강혈대마를 덮쳤다.
콰콰콰쾅!
귀를 때리는 소리가 강혈대마에게서 나왔다. 강기를 맞아 죽었는지, 강기를 막았는지, 그도 아니면 피했는지 사람들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 근처가 흙먼지로 뒤덮였기 때문이었다.
피했는지, 막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먼지구름을 뚫고 강혈대마가 튀어나오더니 사자비게 장력을 뿌리기 시작했다.
“어딜!”
사자비도 마라겸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강기와 공기를 삼키는 검은 장력이 부딪치자 굉음을 동반하며 두 고수 사이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그 여파로 바람이 일고, 역시 먼지를 뿌려 지켜보던 사람들을 물러서게 했다.
두 고수는 강기 무공을 구사하면서도 점점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일 장 거리로 좁혀졌을 때 다시 몸과 몸끼리 부딪히고, 곧이어 뒤엉켰다.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자비와 강혈대마의 움직임을 쫓지 못해서였다. 그러다 강혈대마의 어깨에서 피가 터졌다. 동시에 괴성을 지른 그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놀랍게도 사자비 주위로 다섯 명의 강혈대마가 생겨났다.
다시 경악성이 터졌다. 사람이 어떻게 다섯 명으로 늘어날 수 있을까.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연신 탄성만 흘려대는데, 사자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는 듯, 당황하고 있었다. 빠른 신법으로 잔상을 남기는 것이라면 이해를 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다섯 방향으로 짓쳐들어오는 모든 곳에서 실제 사람의 냄새, 그보다 더 확실한 내공과 살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팟!
“크윽!”
사자비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연이어 몸을 맞아서 이러 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다행히 힘이 분산되어서 받는 타격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이대로 더 가다가는 정말 몸이 상하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퍽!
앞으로 세 명을 상대하다가 뒤에서 치는 강혈대마의 장력을 맞고 몸이 기울어졌다. 기회라는 듯 다섯 강혈대마가 일시에 사자비를 덮쳤다.
사자비의 눈빛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리고 순간 그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전부 날려버리면 되지.”
그리고는 친황대원에게 외쳤다.
“물러나라!”
말하지 않아도 이상한 낌새를 받은 대원은 이미 내원 담장 위로 물러나 있었다. 다른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자비도 기다리기 힘들었다는 듯 말을 채 맺지도 못했다.
윙!
검명처럼 사방이 진동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그의 몸이 빛을 뿌렸다. 팔 할 이상의 내공을 쏟아낸 천령강기였다.
쿠아앙!
빛이 소리를 내면서 사자비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졌다. 빛이 아니라 내공덩어리였다. 강혈대마도 민감하게 그것을 느끼고 물러나고 있었지만 천령강기의 폭발력보다는 빠르지 못했다.
“크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빛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리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폭발의 여운은 먼지를 하늘로 크게 올려놓고, 고인 피와 시체들을 가장자리로 밀어버렸다. 사자비를 중심으로 사방을 삼켜버린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사방을 에워싼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을 때까지였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누군가가 외쳤다.
“사, 살아있다.”
그의 말대로였다. 강혈대마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꼿꼿이 서 있었다. 사자비의 표정이 굳었다. 살아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부터 강혈대마의 몸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있어서였다.
윙!
사자비는 마라겸에 다시 내공을 주입했다. 어검술로 끝장을 볼 생각을 한 것이다.
“크크크큭!”
강혈대마의 웃는 모습을 보고 사자비가 실소를 흘리며 물었다.
“뭐가 그리 웃긴가?”
“수십 평생 그대 같은 젊은이가 무림에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소. 공자께서 목숨을 잃었어도 욕된 일은 아닐 것이오.”
“고작 그따위 생각을 하고 있던가! 누구에게 죽든 같은 죽음이다. 개에 물려 죽든, 돌에 깔려 죽든, 사람에게 죽든.”
사자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이상한 족속들이란 말이지. 고수에게 죽으면 당연한 일이라는 건가?”
강혈대마가 약간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구겨지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는 쥐어짜내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노부의 진정한 마공을 보일 참이오. 목숨을 걸 상대를 만났으니 마지막으로 펼쳐보는 것도 괜찮겠지.”
“목을 내놔야 하는 무공인가?”
사자비의 몸에서 더욱 강한 기운이 몰아쳤다. 강혈대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당장 달려들어 목을 베어버리고 싶지만,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천령강기 같은 수법을 숨기고 있다면 낭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마교도들도 느꼈는지 경악한 얼굴을 보였다.
“천마강령(天魔降靈)?”
강혈대마가 외쳤다.
“모두 이곳에서 벗어나라.”
그러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는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교도들이 담을 넘고, 입구를 통하고 해서 공터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분위기를 보고 무인들도 마찬가지로 흩어졌다.
우우우웅!
공기가 꽉 눌린 괴음이 일어났다. 동시에 회오리가 일기 시작했다. 내공에 의한 공기의 굴절이 아니라 진짜 회오리였다. 강혈대마 중심으로 바람이 돌더니 점점 크기를 좁혀서 강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강혈대마의 몸이 지금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기운이 터질 것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강했는지, 몸을 두른 천이 찢어져서 흩어졌고, 상의도 터져서 상의를 전부 드러내었다.
사자비가 심각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대단하다. 마교에는 너 같은 고수가 도대체 얼마나 있나?”
이젠 입을 열 여유도 없는 모양, 강혈대마는 묵묵히 회오리 속에 파묻혔다. 회오리에서 그의 함성이 울렸다. 그리고 회오리는 더욱 힘을 받아서 오 장이나 솟구쳐 올라갔다. 거기에 걸린 모든 것이 회오리에 말려서 그 동선을 따라 흩날렸다. 돌, 먼지, 피, 그리고 시체까지도!
2
“도대체 저자가 누구요?”
내원 쪽으로 몸을 피한 무리 중에서 수염을 멋지게 기른 노인이 상청관에게 다가와서 그렇게 물었다. 상청관 등 태양문이 그를 알고 있는 듯해서였다. 노인은 철혈문의 장로였다.
상청관이 그를 힐끔 보다가 거대한 회오리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막 회오리 속으로 거대한 백룡이 달려드는 중이었다. 온몸을 희뿌연 연기로 뒤덮은 채 거센 기세로 달려드는 사자비는 정말로 여의주를 삼키려는 백용의 머리 같았다. 어쩌면 구름을 헤치고 승천하려는 용처럼 보이기도 했다. 회오리에 섞이자 내공조차도 말려 올리는 거대한 회오리가 그렇게 보이게 했다.
그 장면을 놓칠 수 없는 듯 뚫어지게 보다가 슬며시 말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오. 장산에서 사찰귀사와 그 수하들을 홀로 도륙 냈었다는 것밖에는.”
“대화를 들어보니 삼 년 전이라는 것 같던데, 정말이오?”
이번 대답은 초류진이 했다.
“네.”
장로 뒤에 있던 청년이 놀라서 앞으로 튀어나왔다.
“정말이오, 소저?”
물음을 던진 이는 조백산이었다.
초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럼, 그때 그의 나이가 지금보다 더 적었다는 뜻이 아니오.”
초류진은 고수의 대결에 집중하는데, 왜 당연한 걸 물어 방해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조백산이 꿀꺽 침을 삼켰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자신이 창피했던지 얼굴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에 사자비가 주절대었던, 지금의 그에게는 금과옥조(金科玉條)같은 말이 되어버린 대화를 떠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런 정도라면 화경은 충분히 넘었을 것이고, 어쩌면 탈반경의 고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고인이 무공에 대해서 말했으니 이건 정말 큰 깨달음을 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당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헛소리로 치부해서 들은 즉시 흘려버렸던 것을 그는 이제야 뼈저리게 후회했다.
이때, 내원 안쪽이 소란스럽더니 갑자기 황금색 장포를 걸친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후문 쪽으로 해서 내원을 지나쳐 오는 것 같은데, 돌연한 그들의 등장에 모두 긴장했다.
“모두 잡아라.”
선두에 선 이가 그 말을 하더니 기다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먼저 반응한 것은 그곳으로 피신했던 마교의 고수들이었다. 체력이 많이 빠졌다지만 마교는 질 수 없다는 듯 소수의 인원으로 물러서지 않고 황금빛 무리에게 마주 달려들었다. 하지만 선두의 사내가 검을 한 번 휘두르자 강기가 튀어나왔고, 그들 중 십여 명이 일시에 강기에 맞아 토막 나버렸다.
“저, 저 사람은 또 뭔가?”
그의 놀라운 실력에 무인들이 또다시 경악했다. 검강을 저렇게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화경의 고수밖에 없었다. 오늘 도대체 화경의 고수를 몇이나 보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떤 이들은 이젠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은 그 뒤를 따르는 무리였다. 무림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절정의 실력으로 무인들을 제압하는데, 조금의 반항이라도 보이면 가차없이 무기부터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지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생각될 정도의 고수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여기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남도문의 동서남북 모두 같은 무리가 같은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 외에도 소수의 인원이 건물을 샅샅이 뒤지며 숨어 있는 자들을 찾아다녔고, 또 요행히 빠져나간 인물은 남도문 전체를 겹겹으로 둘러싼 호광의 병력에 의해 처단되거나 붙잡혔다. 일부 뛰어난 고수들은 붉은 제복을 입은 동창에 의해서 잡히거나 쓰러졌다.
콰콰쾅!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비무대 쪽에서 넘어왔다.
친황대에게 포위당해서 하나씩 포박당하던 무인들은 그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회오리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잠깐 시간이 지났다. 이젠,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회오리의 흔적이 사라져 있었다.
“저기, 저 안에서 싸우던 사람이 당신들의 대장인가요?”
초류향이 자신의 팔을 묶는 요사한 사내에게 슬며시 물었다.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대원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당신들은 누구죠?”
대답은 내원 정문에서 나왔다.
“황실의 고수지.”
일단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거기에서 사자비가 걸어나오는 중이었다. 결국 그가 강혈대마를 제압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걸레처럼 변해있어서 낮에 입었던 화려한 복장이 맞나 싶을 정도고, 군데군데 피도 흘리고 있었다. 얼굴도 꽤 지친 티가 보였다.
순간 황금의 무리가 동시에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강기를 사용했던 비쩍 마른 사내가 대표로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총감!”
‘총감?’
그 말을 들은 무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총감이라니, 정말 황실의 관리인 듯하지 않은가!
황실 관리가 마교의 장로를 처리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탈반경의 고수라면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어찌 황궁에서 그런 고수를 키워낼 수 있을까. 무림에서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그런데 말이 되는 것 같다.
“유한 전하께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고, 피해 상황을 파악해 내게 보고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사자비의 명령과 강기의 사내, 소천룡의 대답했다. 무인들은 실소를 흘리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망연히 사자비만 바라보았다.
사자비는 그들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다른 대원을 불러 명령했다.
“모두 남도문 정문으로 끌고 가라.”
“존명!”
초류진은 죄인처럼 끌려가면서 옆을 힐끔힐끔 보았다. 사자비가 몇 걸음 떨어져서 같이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문이 보이자 용기를 내어 불렀다.
“저기…….”
사자비는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뭐냐?”
“저희는 왜 끌려가는 거죠?”
“몰라서 묻나?”
그녀가 무서워하는 것이 분명한 표정을 지었다.
“모, 모르겠어요.”
“그래서 끌고 가는 거다. 자기 죄가 뭔지도 모르는 녀석은 또 죄를 짓거든. 잡힐 때까지, 누군가가 벌을 줄 때까지 계속 해서 같은 죄를 짓지. 왜일까?”
사자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모르기 때문이지. 가서 철저히 가르쳐 줄 게다. 너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초류진은 울상이 되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태양문의 문주가 자신의 할아버지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빼내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사자기가 비웃듯 말했다.
“누군가 빼줄 거라는 생각은 버려라.”
“…….”
“황제폐하의 후광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니면 꿈을 버리라는 뜻이다. 도망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테니. 물론, 잡히면 극형이겠지만!”
그 말을 남기고 걸음을 빨리해서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초류진은 정말 울기 시작했다.
사자비가 정문을 나오자 갈천이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왔다.
“수색을 모두 마쳤습니다.”
남도문 내부 수색은 이미 지리를 파악한 나찰귀로가 맡아서 했다. 그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숨어 있는 녀석이 없던가?”
갈천이 조소를 보였다.
“남도문주 등, 대회를 주최한 문주들이 있었지요. 그들은 마교와의 전투에서 이미 내뺐던 모양이었습니다.”
사자비도 조소를 흘렸다.
“그 녀석들은 특별 관리를 하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그보다, 이제 총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계획대로라면 그래야겠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그럼……?”
“우선, 영주에서 문제를 일으킨 문파를 파악해 놨겠지?”
“은형신검이 기록부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은형신검에게 말해서 기록부를 보고 호광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목 근처에 있는 문파를 따로 뽑아 놓으라고 하게.”
의문을 품은 갈천을 보며 사자비가 미소를 지었다.
“가는 길이니 하나하나씩 벌을 내려야지 않겠나.”
갈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거대한 석실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경계를 검은 천이 가로막았다. 천에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지옥도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천 앞에 선 사내는 그것을 보고도 무표정하기만 했다. 아마도 자주 본 것 같았다.
“태인께서 보내신 정보가 있습니다.”
사내가 천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벌렸다.
천 안쪽에도 사람이 있는 모양,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보라 했나?”
놀랍게도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뿐인데, 지옥도가 크게 요동쳤다. 그 때문에 지옥도가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사내는 이것조차 익숙한 듯했다.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다.
“네. 예전부터 황실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귀한 정보라 했습니다.”
“말해 보아라.”
천 안쪽의 인물은 별다른 관심이 없는 목소리였으나 사내의 보고를 듣고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규보의 무덤이 있는 장소에 대한 정보입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간 후에 사내가 더욱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 태인께서 말씀하셨지요.”
또다시 침묵!
한참 후에야 천 안쪽에서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태인께서도 바라는 것이 있겠지?”
“그러합니다.”
“무엇인가? 일전의 부탁과 관련된 것인가?”
“아닙니다. 그것과는 별도의 일입니다.”
“말해 보라.”
“우리 계획에 한 사람을 끌어들이라 했습니다.”
“태인께서 죽이고 싶어 할 만큼 원한을 가진 자가 있던가!”
“태인을 지금 상태로 빠트린 자지요. 바로 현 친황대 총감입니다.”
“고작 친황대 총감? 차라리 살수를 보내지 않고.”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그 총감이라는 자의 무공이 탈반경이라 했습니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옥접(地獄蝶)과 소교주에게 맡기도록 하라. 그리고 혈야대군(血夜大君)을 동행시키도록.”
이번에는 사내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소, 소교주님에 혈야대군…….”
“확실하게 하고자 함이다.”
사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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