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01
100화 천상의 근무 환경
소림의 진산 제자인 범각이 산에서 내려왔다면 공적인 일일 가능성이 크다.
이놈이 자발적으로 여기에 왔을 가능성은 작기 때문이다.
실제로 범각이 말한 이유를 들어보니 예상이 맞았다.
그 이유라는 것이 내가 듣기에는 좀 쌉소리에 가까웠지만.
“불경(佛經) 공부?”
“요즘 소림승들은 너무 육체적인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어서 정신적인 수양이 부족하다신다. 속세에 연자염이란 훌륭한 분이 계시니 거기에 가서 불경이란 게 무엇인지 공부 좀 하다 오라시더라. 겸사겸사 속세에 소림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다시금 알릴 겸 삼양현이란 곳에 무관 비슷한 것도 하나 만들어 보라 하시고.”
최근 외부에서 느낀 바에 의하면 할아버지의 인맥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소림에도 인맥이 있다 하셔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어째 들으면 들을수록 할아버지가 목적이 아닌 것 같다.
[너겠지.]‘그렇겠죠?’
머릿속에 들린 장삼풍 사부의 말에 속으로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소림은 내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내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세우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저런 쌉소리가 나오는 거겠지.
“대충 우리 할아버지랑 오래 붙어 있으라는 거네?”
“뭐, 일단은.”
“그럼 아예 우리 집에 머무는 건 어때?”
“차라리 혀를 깨물겠다!”
이 대답만 들어봐도 범각의 본심이 어떤지는 잘 알겠다.
“아, 그리고. 태태사조님의 전언이다.”
“신승 어르신?”
“그래, 그분.”
‘태’ 자가 두 번이나 붙었다.
보통 태사조 위로는 ‘몇 대 사조’라고 하는데, ‘몇 대 사조’는 보통 타계하신 분들에게나 쓰는 거라 저런 식으로 말한 것 같다.
아무튼, 그분이 왜?
“이름 좀 팔고 다니라 했더니, 왜 태태사조님의 이름이 무림에 언급되지 않느냐시던데? 이름 좀 팍팍 팔고 다니라고 하시더라.”
늙으면 어려진다더니.
신승 어르신이라면 내가 아는 분 중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이신데, 하는 행동은 어째 혈기 넘치는 이팔청춘이시다.
[달마 그 양반, 공료라는 놈이 올라오면 신입 연수로 며칠 고생 좀 하겠군.]뭐가 재미있는지 장삼풍 사부가 키득키득 웃으셨다.
신승 어르신께서 천상에 오르는 건 기정사실이라는 듯 말씀하셨다.
“며칠……로 되려나요?”
사람 성격이란 게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닌데.
하지만 장삼풍 사부는 단언하셨다.
[며칠이면 충분하지.]“…….”
무서울 정도로 확고했다.
이쯤 되니 무슨 짓을 할 건지 듣는 게 무섭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듣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너, 감각을 높이면 주변을 인지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은근히 느리게 보이는 현상을 겪어 본 적 있지?]장삼풍 사부가 멋대로 설명을 시작했다.
바로 알아들었다. 장삼풍 사부의 청경과 천마 사부의 공감각을 끌어올리면 빠르게 날아들던 공격도 한결 느리게 보였던 경험이 있었다.
[그걸 이 사부들이 펼치면 어떨 것 같냐?]사부님들의 무공 수준을 생각한다면 거의 시간의 흐름이 멈춘 수준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어?
‘……시발?’
무서운 이야기라는 건 묘한 중독성이 있다. 듣고 싶지 않은데 귀를 열게 된다. 이상하게 떨쳐낼 수가 없다.
[감각을 제대로 끌어올리면 네가 일각이라 생각되는 시간이 일반 사람이 보름 정도라 느껴지는 시간과 비슷할 거다. 야근까지 뛰는 걸로 하루 종일 한다고 할 경우, 하루가 십이 시진이고, 각으로 나누면 구십육 각이니, 일각 당 보름을 곱하면 총 일천사백사십 일이구나.]“…….”
어림잡아 사 년이다.
끔찍하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장삼풍 사부의 말이 이어졌다.
[일이 밀려서 감당이 안 되면 시간 축의 흐름을 살짝 비틀어 놓고 하거든. 그럼 시간의 흐름이 몇 배는 느리게 흘러가기도 하고. 뭐, 후유증은 좀 있지만…….]“…….”
대충 때려잡아도 내 하루가, 사부님들에게는 십 년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세상에!
[뭐, 막 올라온 신입이 그 정도까지 일을 해내긴 어렵겠지만…… 그거야 시간 축 흐름을 좀 더 예쁘게 만져 주면 될 일이니까.]‘뭐야, 그거! 무서워!’
이 이야기의 분야를 굳이 나누자면 공포물일 거다.
‘천상의 어둠이 너무 깊습니다, 사부.’
이게 천상의 근무 환경에 대해서 들은 건지, 지옥의 고문법에 대한 설명을 들은 건지 구분이 안 간다.
왜 사부님들이 야근에 이를 가시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러다 문득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어…… 그러니까 내가 지금 저런 곳에 신승 어른을 처박은…… 것인가?’
왠지 귓가에 신승 어르신의 절규가 들려오는 기분이다.
언젠가 신승 어른이 해탈(解脫)하신 뒤로 갑자기 귀가 맹렬하게 가렵거나 하면 신승 어르신이 나를 저주하고 있는 거라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내 후임이 될 녀석은 그 정도로 길지 않을 것 같다만. 뭐, 잘 만져 봐야지. 흐흐흐.]아! 그러고 보니 내가 저기에 처박을 예정인 분이 한 분 더 계시는구나…….
갑자기 명치가 아파 온다.
“내 죄가 참 깊구나…….”
“아까부터 자꾸 뭔 헛소리를 중얼거리냐?”
범각이 나를 정신 나간 놈 보듯 경계했다.
하지만 나는 범각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다음 이어진 장삼풍 사부의 말이 참 무서웠다.
[그러니까 네가 지상에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위로 올려보내도록 해라. 그게…… 너한테도 좋을 이야기일 게다.]대단한 사부님들에게 배우고 있는 만큼 나도 언젠가 천상에 다다르긴 할 것 같다.
갑자기 사명감이 용솟음쳤다.
내 편안한 천상 생활을 위해 한 명이라도 더 저 천옥(?)에 처박아야 한다.
밝힐 수 없는 진실을 삼키며 눈앞에 있는 친구들을 진중하게 살폈다.
‘우리 오래오래 보자, 친구들아.’
내가 잘 키워 줄게.
그러니까 아래에서도, 위에서도 아주아주 오래 보자.
“흐흐흐흐흐.”
“이, 이놈 눈빛이 왜 이래?”
“얀마, 미쳤냐?”
***
별다른 소란 없이 조용히 귀가했다.
할아버지가 제대로 이야기를 해주셨는지 어머니께 그냥 등짝 몇 대 맞는 것으로 끝났다.
다만 같이 따라온 이화를 빤히 주시하시는 것이 뭔가 이화의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추(手紐:수갑)가 피료해…… 아주 단단한 걸루.”
반갑게 맞이해 준 동생은 내가 할아버지에게로 향하자 돌연 미묘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냥 못 들은 거로 치자.’
사람은 가끔 들어도 못 들은 척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작은 도련님께서 수추가 필요하시다는데, 제가 알아볼까요?”
“……아니, 그러지 마.”
그림자처럼 나와 일정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이화가 불쑥 물었다.
‘애가 참 똑 부러지고 똑똑하긴 한데, 가끔 맹한 구석이 있어.’
영리한 것이 분명한데, 가끔씩 일반적인 상식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슬쩍 뒤를 바라보니 얼굴이 붉어진 청우가 후다닥 도망쳤다. 누가 봐도 호감이 있는 반응이 아닌지라 이화가 풀이 죽은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하면 안 되는 말이었나 보네요.”
“차차 나아질 거야.”
바로 아는 걸 보면 눈치가 빠른 건 분명하다.
그렇게 변하지 않은 집안을 거닐어 닿은 곳에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무당파에서 내려왔을 때를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으로, 오랜 세월 변함없는 거목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할아버지는 나를 보자 빙그레 웃으셨다.
“허도를 만났나 보구나.”
“예.”
내 허리에 있는 송문고검을 본 듯 할아버지가 쓴웃음을 지으셨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취죽이 많이 힘들었겠어.”
할아버지는 사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할아버지는 알게 모르게 폭넓은 시야와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휘하에 어떤 조직이라도 두고 부리는 것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낙향한 관리. 다만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면 신분이나 소속과 상관없이 폭넓게 만나 교분을 나눠 대단한 인맥을 가진 것 정도가 특이점.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할아버지다.
하지만 세상을 돌아보면서 나름 시야가 트이니 내가 알던 것들이 전부가 아니었단 생각이 든다.
그런 내 심중이 얼굴에 묻어난 것일까?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해 주셨다.
“그 친구 성격이라면 너와 만나는 것을 가급적 꺼렸을 테니까. 네가 그 친구를 만났다는 것은 그 친구가 나설 만한 일이 있었다는 거겠지. 게다가 그 검을 받았다는 것은 그 친구에게 네가 인정받을 만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일 테고. 내 손자라 하여 함부로 검을 내어줄 친구는 아니니, 네 무공에 대한 재능이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가 보구나.”
명확하다.
허도진인의 성격을 알기에 그 행동을 추론하고, 허도진인의 송문고검이 내게 있는 것을 보며 그 과정을 추측하셨다.
“새삼 왜 할아버지 친구가 그리 많은지 알 것 같네요.”
“상대를 차분하게 살필 수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재주란다. 그저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지. 딱히 특별할 게 없단다. 특별하다는 것은 배움으로 얻지 못하는 남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지.”
겸양처럼 말하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다.
‘충분히 대단한 것 같은데.’
차분하게 살핀다. 배워서 얻을 수 있다면 꼭 배우고 싶은 재주다.
할아버지의 시선이 내 옆을 향했다.
“사천에서 만난 아이더냐?”
“예, 이화라고 합니다. 사정이 있어 오라버니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이화가 다소곳이 인사했다.
할아버지의 시선이 이화에게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보통 아이는 아니구나. 내 눈에는 무척 특별해 보인다만.”
‘예리하시네.’
조금 전 특별함의 기준에 대해 언급해서인지 지금 하신 말에 무게가 실린다.
“네 주변에는 그런 여아가 많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종 나를 찾아왔던 장씨 성을 쓰는 여아도 무척 특별한 아이였지.”
“아…… 소월 소저가 여길 왔었군요.”
“이름은 기억하고 있으니 잊지 않아 다행이구나. 여자를 울리는 건 멋있는 일이 아니란다.”
“하하…….”
은근히 속을 찌르는 말이라 웃음으로 흘려 넘겼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 둘 곳은 좀처럼 변하질 않아서요.”
“그러냐. 하기야 그것도 괜찮지. 내 보기엔 멋은 좀 없는 것 같다만.”
멋이 없다.
누군가를 울릴 거다.
“마음이 쉽게 바뀌나요. 쉽게 바뀌는 마음이면 진지할 필요도 없고요.”
이는 내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화도 가만히 앉아서 그 말을 경청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그래. 알아서 잘하겠지. 나는 손자를 믿는다.”
“예.”
“할애비 부탁에 네가 고생 많았다. 가서 쉬려무나.”
***
연청운이 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연자염이 허허 웃었다.
“얼굴에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제 할 몫을 다 하고 왔다는 의미니, 사천의 일은 잘 해결을 보고 온 모양인데. 그곳에서 물에 빠진 산신령이라도 구한 겐지, 아니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복을 이제야 챙겨 받은 겐지. 상(狀)에 보이는 복락들이 다 피었구나. 허허허.”
관상도 볼 줄 아는지 연자염은 많이 바뀐 연청운의 상을 떠올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정작 본인은 아직 각박한 구석이 있으니 눈물 보일 아이들이 많겠어. 복이 화로 바뀌지 않으면 좋으련만. 허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