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18
117화 그건 전혀 안 괜찮은데?
공기가 얼어붙는 것이 눈에 보인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만도 하지.’
천하십검의 일인인 장문경의 격을 따지자면 같은 자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무당제일검 허도진인과 비견할 수 있다.
관직으로 치자면 한 지역을 다스리는 왕과 같은 존재다. 그것도 허울 좋은 이름만인 왕이 아니라 앞날이 구만리 같은 창창한, 지금보다 앞날이 더 기대되는 서슬 퍼런 권력을 쥔 왕이다.
장소월 소저의 아버지란 점에서 알 수 있듯 장문경의 나이는 아직 지천명 언저리로 알려져 있으니, 그의 시대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
장문경의 방문이라면 무림에서 날고 기는 문파들, 오대세가급에서도 가볍게 여기지 않을 일이다.
하물며 명운표국 같은 곳이라면 받아들이는 무게감과 충격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좋은 곳이군. 땀 냄새가 나.”
하지만 장문경은 산책이라도 나온 태도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장소월에게로 향했다.
“기초가 튼튼해졌구나. 옆길로 새 쓸데없는 짓이나 하며 시간을 축내는 줄 알았더니.”
“예예, 저는 잘 지냈고요.”
“한동안은 그대로 내버려두마. 지켜볼 가치가 있겠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제 저도 다 컸어요.”
특이한 대화 방식이다.
뭔가 요점들이 어긋나 있는 것 같은데, 묘하게도 주고받는 대화의 흐름이 이어졌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속에 있는 말을 거리낌 없이 꺼내는 장소월 소저의 모습이 색다르게 보였다.
평소에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면이 돋보였던 장소월 소저가, 또래의 나이로 보인다.
꾸밈없는 본 모습은 저런 느낌인 것 같다.
그러다 문득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장소월 소저의 얼굴에 가벼운 홍조가 어렸다.
그런 가운데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장소월 소저만이 아니었다.
“너구나.”
거인의 주목이 내게로 향한다.
담이 약한 사람이라면 위축되어 덜덜 떨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봐야 사부님들 밑인걸.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하지만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그렇게 앞뒤 없이 이야기하시면 알아듣기 힘듭니다.”
“허도진인께 검을 가르쳤다는 녀석.”
태연하게 하는 말에 날벼락이 담겨 있다.
“흡!”
“……저게 무슨?”
그 날벼락에 맞아 기겁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나는 장문경과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자연스럽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오연한 태도와 맞물린 그 눈빛은 정면에서 마주하자 또 다른 느낌이다.
‘늑대 같다.’
배부른 맹수가 아니라 아직도 배가 고픈 늑대.
건조하게 느껴지는 껍데기와 달리 안쪽 알맹이에서 번들거리고 있는 것은 섬뜩하리만치 선명한 굶주림이 담겨 있다.
[여유가 없는 놈이군. 하긴, 그것도 나쁘진 않아.] [내 때도 많이 있었지. 앞으로도 많이 있을 것이고.]‘어라?’
한데 장문경을 바라보는 두 분 사부의 반응이 묘하다.
허도진인이나 신승을 뵈었을 때와는 또 다르다.
동문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일까?
신나서 호들갑을 떤다는 느낌이 없다.
여유가 있는 자리라면 한번 제대로 알아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잠깐 시간 좀 내다오.”
“지금…… 바로 말입니까?
직설적인 장문경의 태도에 오히려 내가 당황해 버렸다.
“급한 일이라도 있느냐?”
“장 소저는…….”
“너를 보러 온 거다.”
이 양반, 나를 콕 집어 말한다.
말의 의미가 다소 묘했는지 주변에서 다시 한번 번잡한 소리가 났다.
누군지는 몰라도 침 삼키는 소리가 참 요란하다.
“알아서 잘하고 있는 아이라 딱히 할 말도 없고.”
“예예~~.”
장문경의 이런 태도가 익숙한지 장소월은 대충 흘려 넘기는 소리를 냈다.
“……칫.”
그런 소리 뒤에 슬쩍 혀 차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 걸 보면 마냥 속이 편한 건 아닌 것 같지만.
괜히 뒤통수가 따가워졌다. 무안하기도 하고, 멋쩍기도 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도 무공에 관한 부분에선 나도 흥미가 있긴 하니까.’
장소월 소저가 구사하는 절정 검도를 창안한 천재 검사.
장소월 소저와 비무 때 보았던 검은 참조할 것이 무척 많았다.
사부님들에게 물어보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인 것 같기도 하지만,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점에 사부님들의 의중이 있다.
사부님들이 가르쳐 주지 않는 부분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들이다.
명확한 선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부님들의 행동은 그러했다.
“이쪽입니다.”
이대로 서서 이야기할 내용은 아닌지라, 일단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로 이동할 것을 권했다.
***
“제집도 아니고 해서, 손님용으로 내놓을 만한 게 뭐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다행히 조용히 따라붙은 이화가 차를 내놓고 물러났다. 아니었으면 맹물을 내놓을 뻔했다.
보아하니 거창한 대접을 좋아하는 성격 같진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 있다.
후룩.
변변찮은 대접이지만, 장문경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차를 마셨다.
“나이는 어떻게 되나?”
“내년이면 약관입니다.”
“젊군.”
“예, 보시다시피.”
“자네 본가는 무가(武家)인가?”
뭐지, 이거?
‘호구조사?’
오가는 문답들의 내용을 보면 무슨 상견례 자리라도 나온 느낌이다. 뭔가 생각하고 예상하던 방향들이 아니다.
“지방호족에 가깝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에 나간 일이 없고, 자 자, 염 자 쓰시는 할아버지가 나름 높은 관직까지 오르셨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름에 잠깐 장문경의 눈썹이 움직였다.
단순히 이름을 들어본 정도의 반응이 아닌 것 같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군.”
“그러십니까?”
“특이한 인물이라 들었다. 관리이면서도 무림인과 거리감이 없는 사람이라고.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있다고 하더군.”
“예에.”
말을 나눠 보면 대화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나누는 대화도 어째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느낌이고.
하지만 그 방향에서 나온 언급에 나는 흥미가 생겼다.
‘역시나 할아버지가 마냥 집에만 틀어박혀 은거 중인 분이 아니신 것 같단 말이지?’
사천의 일을 맡아 하면서 할아버지가 그냥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장문경 정도 되는 인물이 아는 사람이라면 범상치 않은 사람들일 게 분명할진대, 그런 이들과 손을 잡고 있다고도 하니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다.
“그에 대해 아시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요즘도 무언가를 하는 것 같긴 하다는 정도뿐이다.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그런 쪽 일에는 관심도 없고.”
그 부분에 대해선 딱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나는 장문경 이 사람의 말에서 한 가지 갈피를 잡았다.
‘방금 ‘그런 쪽’이라고 했지?’
장문경 이 사람은 할아버지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알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할아버지가 어떤 일에 발을 담그고 있는지에 대해선 대략적으로나마 추측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런 쪽’이라는 언급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언급되어 있으면서, 이 양반이 그런 쪽이라며 흥미 없어 할 분야라면?
‘정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나라의 녹을 먹는 이들이 언급된 분야, 정치에 대한 부분이다. 아마도 가장 유력할 것이다.
이를 고려해 보니 다시금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역시나, 할아버지 은퇴하신 거 맞나?’
뭔가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이야기가 잠시 이상한 곳으로 쪽으로 흐른 것 같군.”
‘아뇨, 그냥 처음부터 쭉 이상한 쪽으로 흘렀는뎁쇼.’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다.
‘일관되게 무미건조한 태도로 제일 먼저 꺼낸 말들이 호구조사였던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응?’
행동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따로 논다고 느끼는 가운데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행동과 말이 따로 논다고 느끼는 괴리감 사이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주제 하나만 끼워 넣으면 이게 말이 되어 버린다.
장소월 소저.
‘뭐야, 부모다운 생각도 하잖아.’
오랜만에 본 딸을 본체만체하며 나부터 보자고 독대하는 행동을 보며 약간 떨떠름했던 것도 사실이다. 허도진인의 이야기를 꺼내기에 일단 무공에 관한 이야기부터 나눌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겉보기완 다르게 나름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그런 장문경을 보고 있자니 아버지가 생각났다.
근엄한 척, 걱정 안 하는 척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늘 염두에 두고 있다.
‘남자들이란…….’
괜히 웃음이 나올 것 같다.
무림 최고봉을 다투는 천하십검의 일인이자 천의무봉이라 불리는 무인은 내게 낯선 사람이지만, 무뚝뚝한 척하면서도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라면 낯설지 않다. 그래서인지 장문경 이 사람이 조금 전보다 편하게 느껴진다.
그런 내 기색을 알아본 장문경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내 아는 녀석이 가끔 그런 표정을 짓곤 했지.”
“그러시군요.”
“그때마다 웃는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은 걸 참아야 했고.”
“……주의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했던 생각 취소.’
확실히 가족적인 생각으로 접근할 상황이 아니다.
감정이나 개인적인 생각의 이입이 없도록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면 결국 이 사람과 나는 남남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거 좀?’
잘 생각해 보면 지금 꽤 위험한 상황이다.
장문경 이 사람이 보는 나는 아무리 잘 봐줘도 귀한 딸내미를 꾀어내 한 지붕 아래서 함께 밥도 먹고, 대화도 나누며, 땀도 흘리는(무공 수련하는) 놈팽이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괜찮나?”
“예? 뭘 말씀하시는지?”
“갑자기 기가 흔들리는 것 같아서.”
눈치 없는 양반인 건 분명한데 다른 부분으로 날카롭다.
어떻게 보면 그게 더 성가시다.
그냥 단순하게 눈치가 좋은 사람이면 쓸데없는 소리도 안 할 테니까!
“가끔 수상한 목소리가 들려서요. 내면의 목소리랄까.”
[뭐냐, 너. 그 수상하단 목소리가 설마 우리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나는 파순(波旬: 불법의 수행 정진을 방해하는 흉악한 마왕) 역인가?]‘아니, 좀!’
그냥 둘러댄 말에 사부님들이 민감하게 반응하신다.
“너도 좀 특이한 녀석이군. 표정이 그렇게 실시간으로 몇 번씩 바뀌는 녀석은 그다지 본 적 없는데.”
“하하…….”
장문경 같은 사람이 한 말이라 그런지 저 말이 유독 속을 찌른다.
“본론으로 넘어가지.”
“바라는 바입니다.”
자꾸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 느낌이긴 했다.
한 번은 저 양반이, 또 한 번은 내가.
이제 진도 좀 나가자.
그리고 장문경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와 겨뤄 보고 싶다.”
……저기요?
“……예?”
“음. 겨룬다고 하니 뭔가 오해를 한 것 같군. 내게는 그쪽이 익숙한 말이다 보니…….”
굳어진 내 표정을 보고 뭔가 단어 사용을 잘못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잠시 고민을 하던 장문경이 조금 더 순화된 언어로 용건을 꺼냈다.
“네게 흥미가 있다. 그러니 비무를 해 보자.”
“…….”
조금 전에 떠올렸던 생각이 다시 한번 떠오른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왜 나는 저 검에 목이 날아가는 광경이 떠오르지?’
그건 전혀 안 괜찮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