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33
132화 용담호혈(2)
하얀 손 그늘 아래 모든 생명은 숨을 죽인다.
과거 소수의 전승자들이 무림에 나섰을 때 떠돈 말이다.
무언가를 찾는 듯 무림을 서성이며 정파, 사파, 마교 가리지 않고 손에 닿는 족족 멸절시켰던 존재들.
공평하다 할 정도로 모든 세력을 건드리고 다녔기에 성향을 분류하기 애매했지만, 음한지기의 극을 보았다 평할 만한 무공을 내보인 소수신마라는 별호는 사도(邪道)로 분류되어 사도의 전설이 되었다.
한때 비슷한 행보를 걸었던 흑사신(黑死神), 광무존(狂武尊)과 더불어 무림삼불기(武林三不記)라 불리던 괴담 같은 오래된 이야기의 한 자락.
“소수신마라니…….”
당조양은 마른침을 삼키며 경악에 빠졌다.
형세를 보면 자신들을 구한 것처럼 판단되나, 상대는 소수의 주인이다. 마냥 마음을 놓기엔 오래된 과거로부터 전해진 이야기가 흉흉하기 그지없다.
사천당가의 반응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소수신마 백설아는 흑살대를 향해 서릿발 같은 기운을 뿜어냈다.
“일자살수인가요?”
순백색 일색으로 사람 같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의 말을 한다.
지금의 백설아에게 유일하게 사람 같은 행위였다.
“그렇……다면?”
“몇 호?”
“……구호다.”
일자살수, 흑살 구호.
흑살대의 위명을 고려한다면 누구라도 두려움에 떨 무게감이 있는 명호다.
“제법이군요.”
“으득!”
백설아의 평은 지극히 평이했다.
고수가 하수에게 하는 전형적인 말이다.
모욕당한 흑살 구호의 입에서 이빨 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했다. 분노한 호흡 사이에서 눈에 보일 만큼 짙은 입김이 보였다.
고작 일장의 교환이 남긴 여파다.
그저 손을 한번 섞었을 뿐인데, 흑살 구호 정도 되는 고수조차 그 음한지기를 떨쳐내지 못했다.
“어차피 배후를 털어놓을 생각도 없을 테지요?”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백설아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했다.
너무 빨라 잔상이 남은 듯한 그 모습은 흡사 이형환위를 연상케 했다.
온통 순백의 색이기에 더욱 눈에 잘 보이는 경향이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움직임을 놓쳤다.
눈이 좋기로 이름난 당가의 고수 당조양뿐만 아니라 흑살대 전원이!
다짜고짜 치고 들어온 백설아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흑살대는 정면으로 그 일장을 받아내야 했다.
파각! 퍼걱!
단 한 명도 일수를 감당하지 못했다.
하얀 손과 부딪치는 순간 검은 살얼음이 되어 깨졌고, 그 너머에 있는 자는 머리통이 사라진 얼음조각상이 되었다.
순식간에 흑살대 고수들을 처리한 백설아가 마지막으로 남은 흑살 구호를 향해 쇄도했다.
“망할!”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흑살 구호는 뒤로 물러나며 허리춤에 숨겨둔 구슬을 바닥에 터트렸다.
보랏빛이 나는 연기는 누가 봐도 극독이다.
피부에 닿거나 들이마시면 코끼리도 목숨을 장담 못 할 극독이다.
백설아가 쇄도해 오는 자리에 독무를 깔아 이득을 취하려 했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파훼 되었다.
백설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에 밀려난 독무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독으로 일가견이 있는 당조양조차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릴 정도였다.
파팡!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흑살 구호가 쌍장을 부딪치는 순간.
“크흑!”
신음을 흘리는 흑살 구호의 입에서 연초를 피운 것마냥 짙은 입김이 흘러나왔다.
얼굴에는 하얀 성에가 가득했다. 눈썹에는 흰 서리가 내렸고, 입술을 파랗게 질렸다.
파파팡!
그럼에도 백설아의 공세는 가차없었다.
파각!
어느 순간 들리는 소리가 달라졌다.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 신체의 잔해가 파편이 되어 바닥에 흩날렸다.
겉은 희지만 속은 붉은, 얼어붙은 고깃덩어리가 깨진 도자기처럼 뿌려졌다.
흑살 구호의 두 손이 잘게 부서져 떨어졌다.
“음한지기가 무섭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켜보던 당조양이 전율했다.
백설아는 그저 빠르고 강할 뿐이다.
하지만 극한의 음한지기가 실리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저 손을 섞는 것만으로 피가 얼어붙고, 기혈이 굳어지며 내공을 운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공을 운용할 수 없게 된 무인이 저 냉기에 노출되면 결말은 분명하다.
“왜 소수신마가 무림삼불기라 불리며 강호를 휘저었는지 알겠군.”
“속 편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숙부.”
당사연이 백설아의 무공을 평하는 당조양의 옆구리를 찌르며 성을 냈다.
파각!!
뒤이은 일장에 흑살 구호의 머리가 부서졌다.
머리가 부서지기 직전, 최후의 순간 흑살 구호의 모습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온몸은 냉기에 잠식당했고, 관절이란 관절은 모조리 굳어져 있었다.
꼼짝도 못 하는 상태로 머리가 박살 나 죽었다.
그렇게 압도적인 힘을 보여 준 백설아의 시선이 당사연과 당조양을 비롯한 사천당가 무인들을 향했다.
잔뜩 긴장한 그들을 향해 백설아가 입을 열었다.
“지시를 따르면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알겠네.”
당조양은 양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보였다.
“설영(雪影), 이들을 모셔라.”
“예, 소주(少主).”
백설아의 부름에 하얀 사신과도 같은 자들이 나타나 사천당가 무인들을 에워쌌다.
지시를 내린 백설아는 북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하얀 선이 되어 멀어지는 백설아의 모습을 보며 당사연은 경외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본의 아니게 제대로 서열 정리가 되어버렸다.
***
삼양현 서쪽에 나타난 흑살대를 쓸어버린 백설아는 마을 북쪽으로 향하며 혀를 찼다.
그곳에서 심상치 않은 힘들이 부딪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당가만 해도 골치 아픈데…….”
과거 무림에서 소수신마라 불리던 선조들은 대부분 정상이 아니었다.
일족의 천형과도 같은 이 음한지기를 제어하지 못해 하루하루 고통에 시달리다 미쳐 갔고, 그런 와중에도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원수를 찾아 무림을 떠돌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은원이 얽혔다.
저주 같은 천형이지만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는 그 이상의 축복이 없을 정도였기에, 일족의 어른들은 끝내 한천마경을 뜯어고쳐 명옥진기라는 신공으로 승화시켜낼 수 있었다. 살아 있는 채로 얼어가던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방법도 찾아냈다.
하지만 소수신마라 불리며 미쳐 날뛰던 조상들의 악명과 은원은 해소할 방도가 없기에 은거를 택했다. 무림에 나서는 것은 원수의 흔적을 찾았을 때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당가 사람들에게 정체를 드러낸 것은 백설아에게도 큰 모험이었다.
과거 악명을 떨치던 시절 쌓인 은원들 대부분은 세월의 흐름 속에 삭아 스러졌다지만, 혈족의 존재가 알려지면 자칫 곤란한 처지에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었지. 모두 청운이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니…….”
세상 모두에게 손가락질당하는 것보다, 연청운의 실망이 더 두려웠다.
위험부담이 있는 것은 알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들을 용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소림, 사천당가와 함께 삼양현에 스며든 또 하나의 세력.
마교.
그들을 용인한 이유 역시 결국은 연청운 때문이다.
아마 지금 북쪽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이 힘의 주인은 그들과 연관이 있을 거다.
직접 확인해 봐야 했다.
백설아의 몸이 하얀 섬광이 되어 삼양현을 가로질렀다.
곧, 백설아의 눈에 거대한 힘의 격돌이 보이기 시작했다.
금광을 발하는 아홉 신형과 거대한 어둠이 격돌하고 있었다.
***
“녹슬지 않았군.”
“그대 역시.”
“오랜 세월 소림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을 줄 알았더니.”
“흥! 누가 할 소릴!”
오랜 세월을 넘어 재회한 인연들의 대화가 오갔다.
쾅! 콰쾅! 쾅! 콰아아앙!!
그러나 그들 사이에 오가는 것은 말뿐만이 아니었다.
귀가 먹을 것만 같은 폭음이 연달아 폭발했다.
연대구품을 펼쳐 아홉 개로 나뉘어 날뛰는 신승 공료의 신형은 단순한 잔영이 아니었다.
얼마나 강대한 공력이 움직이는지 아홉 개의 신형은 실제 힘을 발휘했다.
어느 것은 아라한신권을, 어느 것은 소림삼절수를, 어느 것은 백보신권을 펼치며 날뛰었다.
그에 맞서는 마교 노인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다.
굳건한 마신상이 된 노인은 거력을 휘두르는 거인이 되어 신승 공료의 절기를 감당했다.
사람의 영역을 넘어 신의 경지에 발을 들인 이들의 격돌.
흑살대를 상대로 넉살을 부리던 용린대 대원들이 창백해질 정도의 절기가 오가는 상황임에도 둘의 대화는 이어졌다.
“근래 마교가 날뛰고 있더군. 소림이 침범당했고, 그로 인해 종남의 장문제자가 죽었지. 혹, 그 일들이 자네가 이곳에 있는 것과 관련이 있나?”
근래 있었던 마교의 도발에 대해 추궁하는 신승 공료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감돌았다.
반면 마교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진정한 천마의 무맥을 이은 이를 따라왔다는 사실을 공료에게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마교 노인은 슬쩍 이야기를 돌렸다.
“어째, 개인적인 감정이 느껴지는군.”
“내 제자! 아니, 제자나 다름없는 녀석이 이곳에 있으니까!”
“제자?”
“소천룡 연청운! 이곳은 내 제자 놈이 사는 곳이란 말이다!”
콰아아아아앙!!
감정이 실린 강격.
대력금강장의 강맹한 일수와 아라한신권의 신묘한 일격이 일거에 펼쳐지며 노인의 마신상을 가격했다.
거대한 마신상을 한 노인이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주춤 물러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신승 공료의 입에서 나온 이름 탓이었다.
다행히 이 쓸데없는 싸움을 끝낼 방도를 찾은 것 같다.
마신상을 해제한 노인이 단언했다.
“자네가 말한 이야기는 나와 무관하네.”
“무관하다?”
“나는 마교를 나온 몸이니까.”
“허? 다른 이도 아니고 마교 서열 삼 위, 마존의 일좌에 앉아 있는 그대가 말인가?”
“자네가 말하는 그런 방식들에 신물이 났다고 해두지. 하여 나를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중원으로 왔네. 연자염이라는 이가 정사마의 구분 없이 교분을 나누는 대인이라 하여 잠시 몸을 의탁할 생각이었지. 보는 바와 같이.”
노인은 용린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노인의 주변을 찬란하게 채우던 아홉 개의 신형이 스르르 하나로 모여들었다.
“망명이란 말이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노인이 씁쓸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이냐?”
공료는 용린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갑자기 몰려든 괴물들의 관심에 얼굴이 창백해진 용린대 조장은 난처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누군지는…… 알고 계신지요?”
“안다. 황실의 충견이지.”
“아하하……. 역시 백수를 넘기신 분답게 아는 게 많으시군요.”
“묻는 말에나 답해라.”
“……뭐, 사실입니다. 이분은 저희와 손을 잡으셨죠.”
그래도 어떻게든 수습이 될 것 같은 상황에 용린대 조장은 안도했다.
하지만 공료의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무림삼불기의 하나인 소수신마 역시 황실과 손을 잡은 게냐?”
갑작스레 허를 찔린 용린대 조장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자리 잡았다.
그런 것 따윈 모르겠다는 듯 차분하게 내려선 백설아가 차가운 존재감을 발했다.
“대체 이 삼양현은 뭐 하는 곳인 게냐? 황실 비밀 조직에, 마교에, 이제는 무림삼불기의 하나인 소수신마라니!”
“아하하하…….”
용린대 조장의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흘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참 조용조용한 꿀보직이었지 말입니다.”
***
중신상회에서 흑살대가 삼양현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황급히 돌아온 나는 조용한 마을을 보며 안도했다.
“아직 안 왔나?”
다행히 마을의 상황을 보니 습격을 당한 곳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혹시 몰랐기에 급히 집으로 돌아가자,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뭐야, 이 정신 나간 조합은?’
설아 누나는 그렇다 쳐도, 소림에 있어야 할 신승께서는 대체 왜 우리 집에 와 있단 말인가?
문제는 이화를 따라 옆집에 자리 잡은 마교의 노인까지 같은 자리에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유를 모르겠지만 잔뜩 쫄아 있는 당사연과 당가 사람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방 귀퉁이에서 애처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환장의 조합이었다.
“왔구나.”
그렇게 혼란에 빠져 있는 나를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