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7
16화 좋든 싫든 무림의 일에는 피가 흐른다
홍무문의 장로 홍문덕은 지금 주변에서 돌아가는 전황을 읽으며 말 그대로 돌아버릴 것 같았다.
홍무문의 정예들이 격파당하고 있었다.
백가표국은 명불허전이었다.
실력이 떨어지는 어린 것들도 있었지만, 중장년의 무인들은 저마다 한가락을 하는 기량을 뽐냈다.
허리가 든든하게 받쳐 주는 가운데 번뜩이는 기량을 드러내는 이들이 하나씩 이쪽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을 제거해 나갔다.
시작은 백중세였지만 점차 전투의 흐름은 기울었다.
자신이라도 이 상황을 뒤집어야 하지만.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셨소, 홍 대협.”
백가표국의 국주, 백진성에게 완전히 막혀 있는 상황이었다.
검을 맞대는 가운데 힘을 가감하는 것이 느껴지는 걸 보면 사력을 다하는 이쪽과 달리 저쪽은 여유가 있었다. 봐주고 있단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사력을 다하지 않고 여유를 부린다는 것은 큰 피해 없이 이길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충 검을 맞대 보고 기량을 가늠한 다음 내린 판단일 터. 그렇다면 자신이 보고 있는 전투의 흐름을 그 역시 보고 있다는 이야기다.
분명 자신이 그린 흐름과 백진성이 그린 흐름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거다.
“종인걸, 그놈은 정말 개자식이군.”
중신상회는 평소 가까웠던 명운표국에게 이번 일을 맡겼다. 그리고 명운표국을 통해서 백가표국을 끌어들였다.
그렇기에 홍무문은 기본적으로 종인걸이 믿고 신뢰하는 곳은 명운표국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백가표국은 피하면서 명운표국만 털고 물러날 생각이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허의 허를 노린 것도 모자라,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명운표국조차도 그 허의 하나였다. 진짜를 명운표국이 아니라 백가표국이 가지고 있을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중신상회의 주인 종인걸은 주변의 모든 것을 장기 말처럼 이용했다.
홍문덕의 입장에선 개자식이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자였다.
“관리 출신들 성향이 좀 그런 면이 있지요. 그렇지 않은 존경할 만한 분도 있긴 하지만.”
“지금 그 개자식 편을 드는 건가?”
“편을 든다기보다, 이게 처음 당해 보는 뒤통수도 아니라서 말입니다. 게다가 그쪽에 관해서는 어차피 조만간 단단히 한 몫 뜯어낼 생각이라. 허니 이 정도 존중은 해줘도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쯧! 직접 그 꼴을 못 보는 게 안타깝군.”
홍문덕에게는 상상으로만 그려 볼 일이었다.
그래도 꽤나 만족스러운 광경이었는지 잠시 입술을 비쭉 치켜올렸던 홍문덕이 한숨을 쉬며 손에 든 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제안 하나 하지. 내 목숨 하나로 이쯤에서 서로 물러날 순 없겠나?”
서슴없이 자신의 목을 내어놓을 각오를 보이는 홍문덕에게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뒷말을 짐작한 홍문덕이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입에 담았다.
대신 뒷말을 마무리한 홍문덕을 향해 백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그게 무림의 생리 아니겠습니까.”
“좋은 사람이라 알려진 것과 다르게 냉정한 구석이 있구먼.”
“그렇다고 제가 마냥 좋은 사람으로만 알려진 것은 아닐 텐데요.”
느긋하게 말하는 백진성의 모습에 홍문덕이 얼굴을 굳혔다.
백가표국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세월은 근 이십 년에 달했다. 그사이 알려진 이야기 중 몇 가지는 제법 무서운 것들이 있었다.
“좋은 사람일지언정 검을 들었을 때는 인정을 잊어야지요. 어설프게 동정을 베풀었다는 소문이 돌면 나중에 그 대가가 제 사람들의 피로 돌아옵니다. 당장 홍 대협만 해도 이런 제안을 하지 않습니까.”
“허허.”
“죄송하지만 명운표국을 지워버린 일에 개입한 이들 중 살아서 돌아갈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백진성은 냉정하게 끊었다.
결국, 다 죽이겠단 소리다.
그 결심을 돌릴 길이 없다는 걸 깨달은 홍문덕은 소매를 찢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글자 하나를 썼다.
피로 쓴 글자는 불원(不願).
원하지 않는다.
“나중에 형님이 찾아오면 전해 주게.”
흥문덕은 혈서를 쓴 소매 조각을 던졌다.
그가 형님이라 말하는 인물, 홍무문의 문주에게 전하라는 그 글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했다.
“유용하게 쓰겠습니다.”
“중신상회. 종인걸 그자는 사갈 같은 자이니 백 국주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걸세. 우리라고 좋아서 이런 칼부림을 벌인 게 아니니.”
새겨 두어야 할 충고이긴 했다. 지금 벌인 짓을 고려하면 분명 조심해야 할 자다.
고개를 끄덕이며 충고를 받아들이는 백진성의 모습에 잠시 홍문덕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는 날뛰는 한 젊은 고수가 들어와 있었다.
“……장래가 기대되는 재목이니 잘 키워 보고.”
“기대가 되는 아이이긴 하지요.”
“그렇겠지. 사실상 균형을 흔든 아이이니. 저 아이가 아니었다면 자네도 그리 여유를 부리진 못했을 게야.”
백진성이 온전히 기량을 드러냈다면 끝내 백가표국이 승리야 했겠으나, 백가표국이 짊어져야 했을 피해도 커졌을 거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저 젊은 고수의 활약은 판도를 바꾸었다.
날뛰는 젊은 고수를 보며 세월의 흐름을 느낀 듯, 잠깐이지만 몇 년의 세월을 더 먹은 듯한 홍문덕이 다시 검을 들었다.
“우리도 이제 끝을 보세나.”
무인답게 검을 든 홍문덕을 향해 백진성도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 모습 그대로, 무인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
기초가 튼튼한 자는 실전에서 발전한다.
기초가 단단하다는 것은 그만큼 큰 것을 받아들일 기반이 마련되어 있다는 소리다. 그릇이 작은 자와는 받아들이는 용량이 다르다.
중토신공을 일깨운 내 상태가 딱 그랬다.
평소 보지 못했던 세계가 보인다.
지금 내 상태는 일반적이지 않은 반칙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를 빌어 올라간 눈높이는 더 높은 수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높이에서 보자 그동안 수련하던 무공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배울 당시에는 몰랐으나 눈높이가 높아지니 조금씩 보이는 것이 생겼다.
어떻게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인지, 어떤 부분이 불필요한지, 배우고 익혀 온 것들이 이어지며 하나로 맞물린다.
그것들이 하나의 큰 줄기를 이뤄나갔다.
하나로 맞물리는 그 흐름을 고스란히 바라보니 다리 사이가 저릿해졌다.
장삼풍 사부와 달마 사부가 가르친 것들은 쓸데없는 것들이 없었다. 배운 것들은 하나하나가 의미를 지녔으며, 당장 이해하지 못했어도 먼 훗날에 좀 더 쉽게 위로 오르기 위한 발판들이었다.
좀 더 머리가 익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 것들이 있다. 좀 더 성숙해지고 수준이 높아졌을 때 느끼게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이 자신의 수련 곳곳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얼마나 행운아인지, 두 분 사부의 가르침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세월을 거스르는 힘을 발휘하며 실감한다.
허나 거스르는 것은 순리가 아님을 말해 주는 걸까.
“흡?!”
청명심법의 호흡이 무너지는 순간이 왔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던 실이 끊기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때렸다.
배 속에서 투웅! 하고 범종이 우는 듯했다.
내 기량에서 감당 못 할 힘을 끌어 올린 대가다.
날뛰었던 만큼 고스란히 돌아온 여파가 온몸을 때렸다.
짧게 표현하자면 이거다.
“흐이우에오…….”
죽겠다. 아주 돌겠다.
온몸이 불판 위에 올라간 오징어처럼 오그라든다.
숨을 못 쉬겠다. 손가락이 쫙 펴지지 않는다. 허리가 굽어진다.
그렇다고 편하게 정신을 놓을 수도 없었다.
[정신 못 차리느냐!] [아직 움직일 수 있다. 이 정도에 무너질 만큼 우리가 시켰던 수련들은 녹록하지 않다.]끊임없이 움직일 것을 요구했다.
조금 전까지 행운이라 생각했던 분들이 이제는 세상에 둘밖에 없는 악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말에 몸은 움직였다.
후확!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살고 싶으면 움직여야 했다.
밑바닥에서 밑바닥으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상태까지 처박혀 버린 그런 상황의 몸.
강도는 지금이 더 높지만 그래도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탈력감이었다.
그 익숙함 때문일까.
“……더럽게…… 고맙습니다, 망할…… 사부님들!”
어디에서 힘이 났는지 몸이 아직도 움직였다.
내 머리통을 부숴버릴 듯 주먹을 휘둘렀던 이의 공격을 부드럽게 피하고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던진다.
몸에서 사그라지고 있는 힘의 마지막 잔재가 그 과정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게 상대를 바닥에 내리꽂는 순간.
콰각!
그 위에 엎어지듯 넘어지며 팔꿈치로 상대의 인중을 내려찍었다.
사혈을 제대로 찍었다. 죽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의 마무리다.
그것이 내 마지막 움직임이었다.
“아오…… 죽겠다.”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힘을 쥐어짜 낸 몸이 마지막으로 쓰러트린 적의 위에 포개져 움직임을 멈췄다.
***
장절했다.
마지막까지 홍무문의 무인을 쓰러트리고 그 위에 포개지는 연청운의 모습은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 광경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를 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죽여!!”
“저 새끼라도 죽여!!”
“막아!”
“털끝 하나 다치게 두지 마!”
홍무문 무인들에게는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은 적이지만, 백가표국 표사들에게는 정반대의 아군이었다.
종횡무진으로 날뛰던 연청운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피 냄새를 맡은 늑대 무리처럼 달려드는 이들을 백가표국의 표사들이 막아섰다.
그중에는 백무호의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졌다.
그렇게 잠깐 시간을 벌자.
서걱! 서걱!
홍무문의 무인들에게 악몽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진성과 정일상 표두.
백가표국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중진들이 움직이자 여력을 불태우던 홍무문 무인들의 투지는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렇게 전투가 마무리되고, 백가표국의 표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연청운이 쓰러져 있는 근처였다.
“청운이 이 녀석, 무인 되겠다던 게 엊그제 같은 데 언제 이리 컸나.”
어릴 적부터 백무호와 어울리는 연청운을 보아 온 연륜 있는 표사들은 강한 무위를 드러낸 모습을 보며 대견해하였다.
연청운에게 함부로 까불었던 신입 표사들 중 일부는 씁쓸한 기색을 보였고, 일부는 동경하는 눈빛을 띄웠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이는 가운데.
“청운이가 무공을 배우러 갔던 곳이 정말 무당파였습니까?”
“그건 왜?”
“일시적으로 힘을 증폭시키는 무공은 보통 잠력을 격발시키는 계열의 무공이잖습니까.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사파의 무공이고…….”
오해를 하는 사람도 나왔다.
걱정과 의문이 섞인 얼굴로 연청운을 살피며 정일상 표두가 눈을 찌푸렸다.
“사파는 아니야. 저렇게 기운이 정순한데 그럴 리 없지.”
“허나…….”
“게다가 정파라고 해서 일시적으로 힘을 증폭시키는 무공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야.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좀 있어.”
백진성은 사파 무공일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런 그가 연청운을 바라보며 왠지 아련한 얼굴을 했다.
“어쩌면…… 청운이의 스승이 누구인지 알 것도 같군.”
***
[어쩌면…… 청운이의 스승이 누구인지 알 것도 같군.]자오경을 통해 연청운을 주시하고 있던 장삼풍과 달마는 백진성의 말을 들으며 흠칫했다.
“우릴 알아차렸다고?”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워낙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마냥 부정하지도 못한 두 신선이 작은 긴장감을 품고 자오경을 응시했다.
백진성의 입이 열렸다.
[서문대성.]“……누군데, 그거?”
“허허.”
설마 했지만 역시나였다.
전혀 모르는 이름이 나왔다.
다만 못 알아먹은 건 장삼풍과 달마뿐이었다. 정일상은 바로 알아듣고 서문대성이란 자에 대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구파 공동제자……였던 인물 말입니까? 불세출의 천재였다는?] [구문귀일신공(九門歸一神功)이라면 기운을 격발시키는 수법도 설명이 돼. 그 무공 자체가 충돌과 상생을 기본으로 한 무공이었으니까.]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는데 죄다 엉터리다.
장삼풍이 헛웃음을 지었다.
“저거 허당이네.”
“허허. 저들 입장에선 차라리 저게 더 합리적인 생각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저승 쪽 업무 지원 나갔을 때 하계에서 그런 시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고.”
가끔 지옥 부서 쪽에서 일손이 달린다며 장삼풍이나 달마에게 도움을 청해 온 적이 있었다. 하계 돌아가는 꼴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잠깐 지옥 부서 일을 도우며 들은 이야기 중에 그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았다.
구파 무공의 정수를 모아 최강의 무인을 만들어 보자는 시도였다던가?
결국, 실패로 끝난 일이었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