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75
174화 마(魔)의 주인(1)
결정을 내렸으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포섭할 만한 곳은 어디가 있지?”
“녹림칠십이채의 파벌들은 각각의 성향에 따라, 출신에 따라, 인맥과 친분에 따라 온갖 이유로 사분오열했어. 그중에 굳이 뽑자면 온건파 쪽이겠지.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무공 특색이 정파 쪽 성향을 띠는 파벌들은 채주들 모임에서도 온건하게 움직이는 편이었으니까. 중립적 성향도 많은 편이었고.”
“그렇게 말해 봐야 우린 구분 못 해.”
“……젠장. 그럼 결국 내가 앞장서는 수밖에 없겠네.”
칼을 빼 드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분위기다.
“까짓거 해 봅시다!”
단야흔이 호기롭게 외쳤다.
“뒤는 지원할 테니 얼른 움직이기나 하라고.”
백진성 아저씨의 말에 단야흔과 만산호 그리고 그를 따르는 채주들과 녹림도들이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설아 누나 옆에 섰다.
“누나, 몸은 괜찮아요?”
“문제…… 없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은지 못한다고는 안 한다.
하지만 영 신뢰가 가지 않는 대답이다.
‘완벽하게 힘 조절이 된다면, 종종 있는 음한지기의 폭주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아야 맞지.’
설아 누나의 힘이 잘못 폭주하면 피아식별이 불가능한 대형 참사가 일어난다.
“그럼 힘은 쓰지 말아요. 떨어지지 말고 내 옆에 붙어있어요.”
순간 설아 누나가 놀란 얼굴을 했다.
“응, 그럴게.”
이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갑자기 뭐 씹은 얼굴을 한 백무호가 금방이라도 속을 게우려는 것처럼 혀를 내밀었다.
“넌 또 뭐?”
“체할 것 같아서. 뱃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느낌이야. 아침에 먹은 게 잘못됐나?”
뭔가 놀리는 느낌이다.
“편하게 해 줄까, 동생?”
“……아닙니다, 누님!”
동생의 안위를 걱정하는 설아 누나의 ‘상냥한’ 물음에 백무호가 빠른 호전을 보이며 곧장 신색을 바로 했다.
“쯧쯧! 하여간 긴장감이라곤 모기 눈알만큼도 없어요.”
백무호 아저씨가 검을 고쳐 잡으며 투덜대신다.
“앞장선다는 양반들은 엉덩이를 걷어차 줘야 나가시려나?”
이어 단야혼을 비롯한 녹림도들이 설아 누나를 보며 실실 웃는 게 맘에 들지 않으신 듯 목소리에 날을 세우셨다.
백진성 아저씨의 엄포에 녹림도들은 아직 의식이 없는 악군패까지 등에 업고 서둘러 건물을 나섰다.
그렇게 거처를 나서자마자 다른 의미로 날을 세우는 자들이 전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나오시나.”
“안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피차 평화롭게 가는 편이 좋잖아?”
기다렸다는 듯이 으름장을 놓고 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 낌새다.
하지만 그 너머에는 간과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대한 힘이 부딪치는 소리의 근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악 채주!”
“무사한가!”
아무래도 악군패가 몸담고 있는 쪽의 파벌인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다.
악군패의 무공이 소림 쪽 성향이 짙다는 것을 고려하면 저들은 포섭 대상이다.
“가자! 형제들아!!”
이번만큼은 단야흔이나 만산호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무기를 빼 들며 거침없이 돌진한다!
기존에 보던 건들건들하던 느낌은 사라진 채 녹림칠십이채의 채주 중 하나임을 증명하는 기운을 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녹림도들보다 먼저 나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허!허! 쉬엄쉬엄 오시게!”
콰직! 콰가가각!
“뭐, 뭐냐!”
“막아!!”
신승 어르신이 길을 열었다.
채주급이고 나발이고 단번에 진형의 일각을 허물어버린다.
여기 천자산에서 감히 대적할 자가 있을지 의문인 절대고수가 그 신위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헐! 보통 늙은이가 아닌 것은 알았지만…….”
단야흔을 비롯한 녹림 채주들이 혀를 내둘렀다.
명확한 승기를 확인한 단야흔 파벌의 녹림도들이 기세를 일으켰다.
신승 어르신의 뒤를 따라 받친다.
갈라지는 진형의 좌우를 매섭게 들이친다.
돌을 쪼개는 정을 앞세우고, 뒤에서 망치가 후려치는 모양새다.
전열이 붕괴되는 충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내 앞으로 도끼를 든 녹림 무인이 이빨을 드러냈다.
“애송이!”
내 움직임에 반응해 도끼를 휘두르는 것만 봐도 무명의 무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수다!
‘좋네.’
상대가 내 움직임에 반응했다면, 나 역시 상대의 움직임에 반응한다.
장삼풍 사부의 천경과 천마 사부의 공감각, 거기에 더해진 연경심법이 나를 새로운 단계로 이끌었다.
‘보여?’
마치 피부를 벗겨내고 보는 기분이다. 움직임을 이끌어내고 있는 근육의 선이 보일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돈되어 있는 호흡 속으로 펄떡이는 심장의 맥동이 느껴진다.
보이고, 느껴진다.
장삼풍 사부가 내 몸에 박아 넣은 무공, 영강수가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지난 겨울 동안 연경심법과 십육식, 대연기공을 수련하면서 사부님들께 배웠던 무공들 역시 몸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영강수 역시 마찬가지다.
굳이 무공을 펼친다고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따르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다른 때라면 측면으로 공격을 흘리며 만들어진 빈틈을 공략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내 앞에 적이 있다면, 뒤에는 아군이 있다.
거친 파도처럼 몰아치는 판국에 내가 맥을 끊을 수는 없다.
무조건 직진, 무조건 돌격이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매서운 도끼질을 피해낸다.
초격이 엇나가자 쇄도해오는 내게 무릎을 들어 올리며 걷어내려 했지만, 이미 상대의 영역을 장악한 상태다.
우직!
“크억!”
뻗어낸 권격이 심장을 쳤다.
단번에 숨통을 끊어낸 주먹 위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실이 툭 하고 끊어지는 감각이 남았다.
“대단하잖아, 꼬마!”
“휘유! 단혼철부(斷魂鐵斧)라면 도끼질 좀 하는 놈인데!”
“악 채주를 운으로 쓰러트린 건 아니었구만!”
역시 이름 있는 무인이 맞았나 보다. 주변 녹림도들 사이에서 감탄하는 외침이 튀어나온다.
‘가슴이 두근거려.’
이름 있는 무인을 쓰러트렸지만, 자부심이 느껴지진 않는다.
당장 눈앞에 도산검림(刀山劍林)이 펼쳐져 있다.
수많은 적들을 앞에 둔 내 심장은 쓰러진 자와 반대로 격하게 뛰었다.
긴장해서가 아니다.
이 두근거림은 그보다 더 맑고 선명한 쪽이었다.
‘설아 누나가 내 옆에 있다.’
동경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보다 겨울이 어울려 보이지만, 쓸쓸함만큼은 어울리지 않는.
하얀 머리를 한 강하면서도 약한 면이 있던 소녀.
멋대로 동경했고, 멋대로 좋아하여, 따라잡고 싶었던 그녀가 지금 옆에서 나를 보고 있다!
동심 어린 마음을 떠올리기엔 자리가 좋지 않았지만, 내 몸은 추억을 등에 업고 거침없이 움직였다.
도산검림 속으로 거리낌 없이 몸을 던진다.
사방에 사람의 몸을 가르고, 뭉개는 흉기가 가득한 곳이지만 피륙으로 이뤄진 육신은 능숙하게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콰각!
뻗어내는 소림권에는 어느새 극강격의 묘리가 감돌았다.
일개 녹림도가 감당할 수 없는 힘에 도끼날이 연약한 과자처럼 부서지고 흩어졌다.
비산하는 쇳조각의 파편을 가로지르며 뻗어내는 손이 영강수의 묘리를 담아 파고든다.
우득!
“크악!”
어깨를 부숴버린 일장에 또 하나가 허물어진다.
‘좀 더 명쾌하게.’
사람과 무기가 가득한 제한된 공간 속에서 단순한 움직임을 반복한다.
상대의 공격은 움직임을 최소화하여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손을 쓸 때는 반드시 부순다.
어느덧 내 손에 박살 난 녹림도 숫자가 열을 넘겼다.
스물이던가?
무아지경으로 보이는 족족 박살 냈기에 얼마나 쓰러트렸는지 모르겠다.
채주급 강자들이야 신승 어르신을 비롯한 고수들이 정리했기에 내 행보를 막는 자는 없었다.
“씨발! 강하잖아!”
“이 새끼들 표국 맞아?”
얼마나 많은 화살을 쏘아도, 얼마나 많은 창칼을 겨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존재.
전장 속에서 사람이 아닌 것.
분명 눈앞에 있는데, 아무리 무기를 휘둘러도 닿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란.
그건 존재 자체가 공포다.
“일단 물러나! 그래, 전열! 전열을 가다듬자!”
귀를 아프게 하는 함성이 가득한 곳에서 공포에 질린 누군가의 외침이 유난히 선명하게 번져나갔다.
‘무너지겠네.’
공포는 빠르게 전염되는 감정이다.
신승 어르신이 보인 무위가 초장을 제압하면서 완전히 기세가 꺾여버렸다.
전의를 일으키며 전열을 유지해도 모자랄 판에 도망칠 길을 열어주면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
낙승.
녹림칠십이채의 흉명에 어울리지 않는 결과지만, 그렇기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이곳에서 우릴 막아선 이들은 천자산에 산재한 녹림도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녹림의 일에 있어 부외자다.
녹림칠십이채의 분쟁이 본격화된 이유는 녹림왕이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니, 진짜 전력은 그 왕을 가리는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 있을 터!
“역시나 쉽게 가지 않겠는데…….”
싸움이 정리되고 악군패의 파벌로 보이는 자들이 속속 모여들었지만, 그 수는 생각보다 미비했다.
악군패가 내게 쓰러지자 생각을 달리하며 떨어져 나간 자들이 많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저 피라미들에게 쩔쩔맨 것도 납득이 된다.
게다가 그 말인즉슨, 그 빠져나간 전력이 어딘가에 붙었단 의미다.
당연히 본격적으로 일어날 분쟁은 한층 더 규모가 커질 것이 분명했다.
‘결국, 가 봐야겠네.’
벽지심이 손을 쓴 방식을 보면 이경천 쪽도 아주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이경천이 마교에서 떨어져 나온 (방계라곤 하지만) 천마의 혈맥이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천마를 모시는 마인이라 해도 대다수의 구성원들은 근본부터가 잡탕일 수밖에 없는 녹림이다.
파벌 전체가 마교 마인이진 않을 것이니 이경천이 천마의 혈맥이란 것을 아는 자는 최측근으로 제한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벽지심의 농간에 전향하는 자가 나왔을 수도 있다.
반대로 생각보다 이경천의 영향력이 강하여 전향자가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것이다.
벽지심 입장에선 이경천이 그만큼 강적이라 판단할 테니 만반의 준비로 이경천을 상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쪽인데…….’
이대로 그들과 접촉한다면 일행 모두가 보고 듣게 될 것이다.
이제 와서 이 난리통에 나만 별도로 움직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보여야 할지, 아니면 실패를 감수하고서라도 이경천에게 모두 맡길지.
‘정했다.’
설아 누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누나가 그랬죠? 언젠가 이야기해 달라고.”
“그랬지.”
“당장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보여 줄 순 있어요. 지금…… 같이 간다면…….”
이경천은 시간을 둬 가며 접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여유를 부릴 틈이 없을 것 같다.
판이 깔린 이상 멀리 돌아갈 것 없이 찍어 누를 생각이다.
물론 ‘소천룡 연청운’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천마 연청운’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일전에 달마 사부가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마에 닿아 마를 이뤘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보다 마에 가깝다고.
그 이후 이따금 그 말의 무게를 실감할 때가 있었다.
내 안의 마(魔). ‘천마(天魔) 연청운’의 무게를.
‘설아 누나는 또 다른 나를 어떻게 볼까?’
홀연히 떠오른 의문 하나가 내게 물어왔다.
아마 곧 알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