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3
22화 가즈아!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보이는 건 천장이었다.
천장이 보인다는 건 건물 안에 있다는 소리다. 내 발로 건물 안에 들어온 기억이 없으니 기억이 단절된 시간이 있다는 소리이고.
“기절했었나?”
[두 시진쯤?] [몸은 괜찮으냐?]편리하게도 사부님들이 얼추 상황을 이해할 만한 이야기들을 해 주신다. 그리고 달마 사부가 몸을 걱정하는 소리에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뭔가 강한 힘이 나를 때리는 걸 느꼈다.
감당 못 할 무형적인 힘이 치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어디 제대로 한 방 맞은 건가 싶어 몸을 일으켜 살피려는데 명치가 짜르르 아파왔다.
옷을 풀러 아픈 부분을 보니 가슴 부근에 피멍이 어려 있는 게 보였다. 뭔가 물에 먹물을 떨어트린 모습처럼 정확한 형태 없이 흐릿한 모양의 피멍이었다.
“뭐에 당한 거죠?”
“히엑!”
[히엑은 무슨. 진짜는 백진성이란 녀석이 다 막아서 해소해냈다. 고작 흘러나온 여파에 기절까지 하다니. 수련이 모자란 게야. 조만간 날 좀 잡아서 제대로 굴려야겠어.]장삼풍 사부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날 자꾸 갈구려 하신다.
그럼 이럴 때는 방향을 바꾸는 거다. 날 갈구는 분을 제지해 주실 법한 분을 찾아서.
“달마 사부. 저 열심히 했어요. 아시죠? 제가 막 얼굴에도 얕긴 했지만 한 방 먹인 것도 있고…….”
[아쉽더구나. 그 순간, 그 상황에서 조금만 더 갔으면……. 더 강하게 연단 시키지 못한 내 탓이지.]그런데 어째 대답이 영 시원치 않다.
왜 저 자책이 날 산 채로 갈아 버리겠다는 말로 들리지?
“달마 사부? 슬슬 점잖은 척은 그만두신…….”
[허!허!허!]“아뇨, 그냥 제가 죽일 놈이죠. 옙!”
건드리지 말자. 달마 사부도 화나면 무서우니까.
그나저나.
“그런데, 백진성 아저씨가 그 사람을 막았어요?”
[여유 있게 막더라. 게다가 둘이 친분이 있어 보이던데? 보자마자 혜원이라 부르며 뭐라 하는 걸 보면.]속가제자 정도로 알았는데, 그 정도 신분으로 소림 본산제자에 속하는 양반과 친분을 쌓을 수 있나?
속가제자 생활을 해 봐서 아는데, 현실적으로 정말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같은 문파도 아닌데 그런 교분을 나누는 건 더욱 어렵다. 중간에 특별한 가교 구실을 하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또 모르겠다.
“생각보다 거물이신가?”
특별한 분이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교분 관계도 장난이 아닌 것 같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장삼풍 사부가 슬쩍 말을 흘렸다. 누군가 오고 있단 소리다. 백진성 아저씨가 내 몸 상태를 살피러 오시나 보다.
“뭐야, 반나절은 기절해 있을 거라더니. 벌써 일어나 있잖아?”
들어온 사람은 백진성 아저씨뿐만이 아니었다. 혜원이란 분도 같이 들어오셨다.
“흐음.”
그런데 혜원 스님이 묘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자기 말이 틀린 것을 쑥스러워하시기보단 ‘이것 봐라?’ 하는 시선이었다.
뭔가 이따금 백진성 아저씨가 보내곤 하는 시선이랑 묘하게 닮은 느낌도 나는데, 저거.
그렇게 잠시 나를 탐색하듯 살펴보던 혜원 스님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일단 사과를 해야겠구나.”
“저도 좀…….”
“아니. 네가 의식이 없는 사이 이야기를 다 들었다. 제자의 미욱함이나, 내 성급함이 부른 결과이니 내 잘못이 크다. 네 탓은 없다고 봐야지.”
솔직히 범각을 조져 버린 건 감정적인 표출이긴 했다. 범각의 스승인 혜원이 제자가 두들겨 맞는 꼴을 보고 참지 못한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두 분 사부가 등 떠민 일이긴 하지만,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해 보자며 달려들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 일이 어느 한쪽의 잘잘못을 따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 내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그냥 좀 더 평화적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지.
사부님들 때문에.
남 탓만 오지게 하는 느낌이 들지만, 사실인걸.
하지만 혜원 스님은 본인이 위협적으로 다가가서 맞서 싸운 거라 생각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보니 이해심 많고 마음 넓은 참 좋은 양반이다.
[사람이 됐네. 누구랑 다르게.] [흐흠.]어째 두 분 대화를 듣고 있자니 부부 싸움을 보는 느낌이다.
아이들 정서에 안 좋으니 계속하실 거면 저쪽 가서 하세요.
훠이.
그나저나, 범각이란 놈. 벌써 깨어난 건가? 나보다 더 오래 기절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강제로 일으켜진 거라면 이해는 가지만.
게다가 의외로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 같다. 좀 꼬인 구석이 있는 녀석 같던데, 이상한 핑계를 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은 모양이다.
알아서 눈치를 본 건가?
하긴, 이쪽은 꽤나 고위직 관리가 뒤를 봐주는 모양새인 데다, 혜원이란 분과 말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백진성 아저씨도 생각보다 거물인 것 같다.
뒷배로는 나도 안 꿀린다는 거다.
실제로 범각 입장에서는 거짓말을 할 경우 말할 게 궁하기도 했고.
소림 무공이나 한 수 가르쳐 달라고 초청했는데 이유 없이 그냥 공격해서 때려눕혔다고 하는 건 좀 이상한 말이니까.
차라리 기량을 파악해 보려 손을 겨뤄 봤다가 생각보다 뛰어나 당했다는 게 쉬이 납득이 된다.
“들어오너라.”
혜원 스님의 말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범각이 들어왔다.
잔뜩 혼이 났는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들어온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푹 고개를 숙였다.
“미안.”
날 무시하고 씹어대긴 했지만, 대가는 톡톡히 치렀으니까 딱히 감정은 안 남아있다.
그럼 건방지게 나가서 좋을 게 없겠지. 알아서 챙겨 준다는데 건방 떨어 봐야 주변에 좋게 보일 리 없으니까.
“머리 괜찮아?”
“……아직도 울려.”
아무래도 나와는 달리 좀 강제적인 과정을 통해 깨운 것이 맞는 것 같다.
“나도 좀 심했어.”
“아니, 내가 한 말들이 지나쳤지.”
“뭐, 그럼 서로 감정은 없기로 하자.”
나는 깔끔하게 모든 걸 다 털어내는 모습을 보여 줬다.
물론 내 주도 아래.
녀석도 그게 좋은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으으…….”
그러다 머리가 아픈지 신음을 흘렸다.
좀 띨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얻어맞은 여파가 다 사라지지 않아서 그런 건가?
“이제 내 제자와 안 좋은 감정은 없는 거냐.”
“예, 물론이죠.”
“잘됐구나.”
다른 생각이 있어서 감정을 털어낼 자리를 만든 건가?
그렇다는 건?
“저기…….”
“소림 무공에 관심이 있다면 직접 한 번 찾아오는 건 어떻겠느냐?”
“예?”
정말 갑자기 튀어나온 제안이다.
머릿속에서 상반된 두 반응이 교차했다.
[내가 제일 처음 발굴했는데 그걸 왜 소림이 떠먹…… 읍! 으읍!!] [가자고 해! 소림! 소림 가즈아!!]달마 사부, 너무 좋아하신다.
두 분 말고도 놀란 사람은 더 있었다.
그냥 혜원 스님 빼고 전부 다 그랬다.
“어, 그건 좀…….”
“사부님 그건 좀…….”
머릿속 사부님들의 대립과 다르게 이쪽에선 의견이 통일 중이다. 백진성 아저씨와 범각이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같은 말을 했다.
혜원 스님은 고개를 갸웃하며 백진성 아저씨를 보았다. 범각이야 그럴 수도 있지만, 왜 백진성 아저씨가 반대하냐는 것이다.
“소림과의 만남을 주선한 건 자네라고 들었는데? 이 정도면 좋은 기회 아닌가?”
“아니, 그렇긴 한데. 저 녀석만 소림으로 보냈다간 설아가 내 목을 조를 거라서. 아닐 거라곤 생각하지만, 혹여 일이 이상하게 꼬여서 저 녀석 삭발하는 일이라도 벌어지면 그날이 내 제사상 차리는 날일걸? 제사상이나 받아먹을 수 있으려나?”
“설아?”
“내 딸.”
“아아. 그렇군. 자네 집안이 좀 그런 편이라 듣긴 했지.”
혜원 스님이 뭔가 많은 걸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집안 운운하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백진성 아저씨네 집안에 뭔가가 있나?
백진성 아저씨네 집안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선 백무호.
음. 푼수를 낳는 집안이라는 건가?
아, 그렇다고 백진성 아저씨가 푼수라는 건 아니고. 그런 기질이 좀 있다는 소리지.
솔직히 말해 나도 소림을 찾아가는 건 좀 아니다 싶다. 소림에 간다고 해도 크게 배울 게 있을까?
지금 나를 가르치시는 분이 무려 달마 사부님이시다.
결국, 소림에 가는 건 명분 채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것 때문이라면 그냥 수련에 매진해서 더 높은 경지에 올라 보고 싶다는 게 본심이다.
저렇게 좋아하는 달마 사부에게는 좀 미안한 소리이긴 하지만.
[소림에 내가 남겨 둔 게 있다. 네가 거두면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게다.] [야, 이씨!]“가겠습니다!”
달마 사부님이 저렇게 원하시는 데 제자 된 도리로 따르는 게 당연한 거지. 당연한 거라고 이건!
……나 뭔가 성격이 변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아니, 뭐. 사부님들이 주는 거 받아먹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던져주는 거 예쁘게 받아먹는 것도 힘든 일이라고.
그게 까마득한 천상에서 떨어트리는 거면 더더욱.
그렇게 해서 소림행이 결정되었다.
***
“이 밥풀떼기야.”
“왜 또 시비야.”
“내가 할 소리다. 니가 여길 왜 따라붙고 난리야?”
백무호 이 녀석도 따라왔다.
백가표국을 이어받을 후계자라는 놈이 표국으로 안 돌아가고 친구 따라 소림 간다는 게 말이 되나?
진짜 특기는 검술인 녀석이 주먹질로 유명한 소림에 무슨 관심이 있다고?
“그렇게 말하지 마라. 나도 올 수밖에 없었다고. 나도 몰렸단 말이야.”
“뭔 소리야?”
“니가 머리카락을 자르면 내 머리도 잘릴 테니까.”
어째 비슷한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여전히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다만 혜원 스님은 알아들은 것 같다. 소리 내어 웃으시는 게 꽤나 재미있어하신다.
반면 나와 마찬가지로 뭔 소리인지 파악이 안 되는 범각은 눈만 멀뚱거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곤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실력의 고하가 나눠진 상황이라서 그런지 내 앞에서는 극도로 조심하고 있는 중이다.
“자당(慈堂)은 잘 계시는가?”
혜원 스님이 백무호에게 모친의 안부를 물었다.
“어머니를 아십니까?”
“우리 세대에선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지.”
혜원 스님은 뭔가 아련한 기색을 담아 말했다.
백무호 어머님이 그 정도였나?
생각해 보면 백무호의 어머니를 만난 일은 거의 없었다. 병이라도 있으신지 좀처럼 밖으로 나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할까.
그나마 기억에 남아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무척 아름다운 미인이셨다는 거다.
마치 설아 누나처럼.
“여전하십니다.”
“그렇군.”
혜원 스님은 백무호의 대답을 듣고 다시 한번 추억을 곱씹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아깝게 됐군. 저리 감시자가 눈을 떼지 않고 있으니 말이야.”
“예?”
“사실 자네에게는 소림에 자리 잡을 걸 권해 보려는 생각이 있었네.”
백무호의 눈길이 날카로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피부 위로 ‘아니라고 말해!’라는 글자가 살아서 진격하는 것 같다.
“하하, 제가 어찌.”
“무당파의 속가제자였다고 들었네. 무슨 이유로 그들이 자네를 내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자네는 무당보다는 소림이 어울려. 불자로서 탐심을 드러내는 일이 부끄럽긴 하네만, 솔직히 자네가 탐나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좋게 평가해 주는 일이니까. 소림의 본산제자가 저 정도로 높게 쳐준다니 어깨가 으쓱해질 일이다.
하지만 무당산을 내려온 이후로는, 그 어느 곳에도 고개 숙일 일이 없을 거다.
내게는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분들이 계시니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소림 문하로 들어가는 건 좀…… 어렵습니다.”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혜원 스님은 내게서 백무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픽 웃으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제안은 언제까지나 유효하니 마음이 바뀌면 부담 없이 말해 주게.”
“마음이 바뀐다면 그러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정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내 말을 들은 혜원 스님은 방긋 웃으셨다.
그런데 저거 포기한 표정이 아닌데.
소림으로 가면 뭔가가 있나?
“아, 그리고.”
뭔가 다른 용건이라도 있는지 혜원 스님이 돌연 옆에 앉아있는 범각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가는 길에 종종 이 녀석과 어울려 줬으면 좋겠네. 이제 보니 헛배가 좀 들어간 게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어?”
아, 이건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범각이 한 말이다.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 사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참 읽기 쉬운 감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 눈이 이번엔 내게로 향했다.
“어?”
“너도 좋다고?”
“어? 어어…… 어?”
말문이 막혔는지 ‘어’라는 말만 반복하는 범각이었다.
새삼 그 모습을 보면서 천상에 계신 사부님들이 날 골려 먹을 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대략 가늠할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원한다면야.”
절대 감정이 남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진짜로.
다 털어버렸다니까.
“……어?”
그러니 살살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