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59
258화 오대세가의 입장. 도적 연합의 생각.
너른 들판에 사람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도주하는 자와 추격하는 자.
끝끝내 뒤쫓아 목을 날린 무인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보랏빛이 도는 무복을 입은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돌렸다.
‘모용’이라는 두 글자가 휘날리는 깃발 아래의 무리에게로 다가간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청년을 향해 무리의 중심에 있던 중년인이 물었다.
“잘 끝냈느냐?”
“예.”
청년은 익숙한 일인 듯 대답하면서 검에 묻은 피와 기름을 닦아냈다.
그러면서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팔공산이 지척인데, 여기까지 도적놈들이 어슬렁거리네요.”
팔공산은 안휘에서 이름이 있는 산이다.
안휘를 중심부와 동서남북 다섯으로 나눌 때 중부에서 살짝 북쪽에 치우쳐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남궁세가의 본가가 안휘에서 남쪽에 치우쳐있는 장강을 기반으로 한다지만, 안휘 전체를 아우르던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 부근까지 도적놈들이 진출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거인이 쓰러졌으니 뜯어먹을 것이 오죽 많겠느냐.”
중년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남궁세가를 두고 거인이 쓰러졌다 평하지만, 그 말 안에 담긴 감정은 투명한 호수처럼 평온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저희가 손을 뻗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청년에게서 강한 욕심이 흘러나왔다.
중년인은 청년의 말에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철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중년인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다른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팽’이라는 글자가 쓰인 깃발 아래 있는 사내는 자신을 하대하는 부름에 살짝 눈매를 찡그리며 대답했다.
“관심 없소.”
“어째서?”
“안휘 정도 되는 곳을 관리하자면 적지 않은 힘을 투입해야 하니까. 남궁세가의 영향력을 지우는 데 한세월, 새롭게 영향력을 심는 것에 한세월. 남궁세가의 명맥이 남아있으면 추후 분란의 소지가 충분하겠지. 두고두고 말이 많을 것이 분명하오. 장강에 자리 잡고 있는 상인 놈들도 이리저리 셈을 할 테니 그것도 한세월이겠군. 도적 연맹 놈들과의 싸움이 큰 손실 없이 끝나도 이 정도요.”
황소처럼 커다란 체구이면서도 언변은 그야말로 청산유수(靑山流水)다.
“최소한 십 년은 잡아야겠군.”
“십 년은 무슨. 기적이 일어나야 십 년일 테지요. 팽가는 안휘까지 먹을 만큼 위장이 크지 않소. 삼켜봐야 배탈이나 날 영양가 없는 짓거리에 세월 낭비하느니 그 시간에 칼이나 휘두르는 것이 더 건설적이오.”
팽철이란 사내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중년인이 다시 한번 조용히 웃었다.
“대답이 되었느냐?”
“……예.”
“성이, 네가 알아들었으니 다행이구나.”
욕심을 드러냈던 모용세가의 젊은 청년 모용성이 중년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조용조용 충고하는 중년인의 모습은 평생 화를 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차분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매서운 질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모용성은 깊이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 무리의 무인들이 모용세가와 하북팽가가 있는 곳으로 합류해왔다.
그들이 앞세운 깃발에는 ‘제갈’이라는 글귀가 휘날렸다.
“빨리도 오는군.”
팽철이 다가오는 제갈세가를 노려보며 혀를 찼다.
“팽 형은 제갈세가가 마음에 들지 않은가 보오?”
“별로지.”
“호오?”
이렇게 직설적으로 대답할 줄 몰랐는지 모용성이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모용성의 눈빛에 기묘한 기색이 어리는 것을 눈치챈 팽철이 피식 웃었다.
“그냥 맞지 않을 뿐이야. 무인은 머리보다 몸이 우선이다. 허나 제갈세가는 논리적인 것을 좋아한단 말이지.”
“아하, 그러시구…….”
“그러니 그 재수 없는 눈깔은 치우는 게 좋을 거다. 너도 마음에 안 드니까.”
거침없는 팽철의 발언에 모용성의 말문이 막혔다.
“제 주제에 맞게 행동해라, 어리숙한 놈. 여우짓을 하려는 놈이 눈깔에 힘을 주는 것부터가 모자람을 드러낼 뿐이다.”
“큼! ……흥!”
이어지는 타박에 모용성이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홱 돌렸다.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각 가문을 대표하는 이들이 나서며 수인사를 나눴다.
“안휘의 일에 칠종칠검(七宗七劍)이 나설 줄은 몰랐소이다.”
“소가주께서 나서신 상황이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소.”
“소가주?”
모용세가를 이끄는 중년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담겼다.
가문의 다음 세대를 이끌 후계자의 참전이라니 그럴 만했다.
그때 한 청년이 싱글싱글 웃으며 예를 갖췄다.
“혹시, 모용진 숙부님이 아니십니까? 북천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용세가의 중년인 모용진이 그런 청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제갈윤재겠구나.”
“그렇습니다, 숙부님. 제갈윤재가 모용진 숙부님께 인사 올립니다.”
오대세가끼리는 대부분이 혈연관계로 이어져 있었고, 설령 혈연관계가 없더라도 수뇌부들끼리 호형호제하는 경우가 많아 친인척처럼 편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허나 초면이면서도 이렇게 살가운 경우는 드물었다.
“표정이 밝구나.”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잖습니까. 웃는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지요.”
제갈윤재가 구김 없는 얼굴로 답했다.
그 모습이 참으로 해맑아 보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실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침은 뱉지 못해도 혀를 차는 사람은 있었다.
제갈윤재를 보며 고개를 젓던 팽철이 옆에 있는 모용성을 보며 이죽거렸다.
“저게 여우짓이라는 거다.”
뜬금없이 끌려 들어온 모용성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입술을 씹었다.
“학습력이 떨어지는군.”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지적하며 팽철이 한 번 더 이죽거렸다.
그런 둘 사이의 대화와는 관계없이 제갈윤재는 이 자리에 모인 세 세가의 전력을 살피며 재차 웃었다.
“생각보다 적네요. 아! 물론 모용 숙부님이 오셨으니 녹림칠십이채와 장강수로십팔채에서 누가 나오든 대적할 자가 없겠습니다만…….”
“걱정되느냐?”
“아하하! 그냥 모자란 녀석의 기우(杞憂)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무래도 남궁세가를 패퇴시킨 놈들이니까요.”
몸을 낮추는 제갈윤재의 말에 모용진이 피식 웃었다.
“내 보기엔 적당한 듯하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장강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적당한 전력이지.”
“아하…….”
제갈윤재는 곧바로 모용세가의 뜻을 알아차렸다.
“안휘를 수복할 생각이 없으시군요.”
“남의 집안일에 내 집안 곳간을 거덜낼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
남궁세가를 돕기 위해 참전했으니 오대세가의 일원으로 충분한 명분은 확보한다.
도적 연맹의 주요 전력이 밀집해 있는 장강을 건드릴 생각이 없으니 큰 손해도 없다.
그저 남궁세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정도의 도움만 주면 충분하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고, 부잣집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했다. 남궁세가는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주겠지.”
안휘의 남부를 포기하고 중부와 북부를 수복한다면 어떻게든 남궁세가의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혹여 위로 치고 올라올 도적 연맹의 진격을 막아줄, 못해도 발목 정도는 잡아줄 돌부리.
남궁세가에게 바라는 것은 딱 그 정도였다.
***
모용세가와 하북팽가의 인물들이 다시 각자의 진형으로 흩어지자 제갈윤재의 옆으로 제갈세가를 대표하는 고수들인 칠종칠검이 모였다.
“모용세가라면 이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냉정하군요.”
미리 짐작했다는 제갈윤재의 말에 칠종칠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가 꺾인 지금이라면 모용세가가 오대세가의 수좌 자리를 넘볼 만하지. 사천당가의 위세가 만만치 않다고 하나, 너무 외곽에 있는 데다 평판 또한 좋다고 할 수가 없으니 말일세.”
“뭐, 그런 거겠지요.”
모용세가의 의도를 읽어낸 제갈윤재와 칠종칠검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모용세가와는 달리 남궁세가가 안휘를 온전히 수복해내는 것을 제갈세가는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반쪽짜리 남궁세가라……. 이렇게 된다면 가치가 많이 떨어집니다만…….”
“별다른 변수가 없는 이상 계획을 수정하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네.”
“그러게요. 흐음…… 어쩐다?”
난제(難題)를 앞에 두었음에도 제갈윤재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
***
도적 연맹은 남궁세가를 장강에서 밀어내고 안휘에서 영향력을 넓혀갔다.
안휘 남부에 위치한 장강을 중심으로 안휘 곳곳으로 퍼져나가며 힘을 과시했다.
이미 안휘에는 도적 연맹에 대항할 세력이 전무했고, 관의 병사들마저 그들의 행사를 제지하지 않으니 제 세상이라도 온 것처럼 날뛰었다.
하지만 그런 도적 연맹을 움직이는 쌍두 천신채주 건룡대도 벽지심과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 장강교룡 혼원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흐으으음…….”
“생각보다 남궁세가가 박아 놓은 뿌리가 깊군.”
“그러게 말이야. 모가지에 칼을 들이미니 고개는 숙인다만, 단지 그뿐이야.”
남궁세가의 영향력은 안휘 전체를 아울렀다.
각 지역에서 사람을 키워 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남궁세가의 사람이 아니기에 장강대전 이후로도 토호로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도적 연맹의 칼 앞에 머리를 숙였지만, 마음마저 승복하지는 않았다.
“다스린다는 것이 쉽지가 않군.”
그냥 죽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다.
실제 몇몇은 본보기로 죽인 후 새 사람을 앉혔다.
하지만 도적 연맹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졌다.
지금이야 수그리고 있지만, 상황이 달라진다면 언제든 도적 연맹을 향해 칼을 들이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뿌리를 뽑겠다며 모조리 죽이는 것도 문제다.
십 중 십으로 행정적 혼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관에서 눈을 감아주고는 있다지만, 그것도 선이 있다.
특히나 벽지심과 혼원세.
아니, 그 이름을 쓰는 존재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은밀한 자들의 위에 서 있는 가장 높은 자는 그런 식의 혼란을 좋아하지 않았다.
“염병! 그놈의 인과가 뭐라고.”
혼원세는 ‘그분’이 신경 쓰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에 짜증을 냈다.
벽지심 역시 어느 정도 공감을 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남궁세가만 눌러놓는다면 언젠가는 꺾이게 될 거야. 문제는 시간이지. 하지만ㄴ 이대로라면 너무 오래 걸려.”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잖나.”
또 다른 문젯거리의 지적에 벽지심이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습격자들 말이군.”
“남궁세가의 잔당도 잔당이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음한지기의 고수도 문제야. 벌써 여럿 당했다고.”
남궁세가의 영향력을 지우기 위해 안휘 각지로 흩어진 도적 연맹의 고수 중 상당수가 정체불명의 고수에게 당했다.
생존자 하나 없이 몰살당한 자리에는 지독한 음한지기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그 정도의 음한지기를 다루는 고수는 흔치 않다.
“북해빙궁이려나?”
“새외사세는 ‘그분’께서 평정하셨다. 포달랍궁이 마지막이었지. 설령 북해빙궁의 잔당이 남아있다 한들 여기까지 내려와서 깽판 칠 이유가 없어.”
“그렇다면 결국 소수신마밖에 없잖아.”
“……그게 문제지.”
무림삼불기의 하나가 칼을 들이밀고 있다.
“이 양반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고…… 최악이구만.”
혼원세 역시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둘은 장고 끝에 뜻을 정했다.
“일단 죄다 불러들이세. 이대로 각개격파당하면 장강마저 위험해. 다른 곳은 다 놓친다 해도 장강만은 양보할 수 없어.”
“짜증 나지만, 정론이군.”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발 물러나자는 결론에 다다르면서 도적 연맹의 행보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