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65
264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천하십검의 일인, 천의무봉 장문경 선배의 독녀.
훗날 장문경 선배의 진전을 이어 검후(劍后)의 경지에 오를 것이라 평해지는 젊은 기재.
후기지수들이 가장 선망하는 미녀.
장소월에게는 여러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최근 내가 이런저런 사건으로 명성을 높였다지만, 인지도만 놓고 본다면 장소월 소저 쪽이 훨씬 높을 것이다.
실제로 장소월 소저가 참가한다는 이유만으로 구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이 소림으로 몰려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좀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티가 난다……라…….’
팽철의 말이 머릿속에 스친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려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온갖 생각들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무공이 많이 늘었네요.”
“푸훕!”
뜬금없는 말이었는지 양손으로 입가를 가린 장소월 소저가 허리가 꺾일 만큼 몸을 숙여 웃었다.
“아하하하!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멋없는 인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가요?”
“예, 그랬어요.”
격정적이던 웃음이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미소가 남아 있다.
장소월 소저가 옆구리의 검을 툭툭 쳤다.
“명운표국에서 쭉 수련에 매진했었으니까요. 연 소협이 그리 평할 만큼 성과가 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명운표국에서 쭉 수련을 하고 있단 말을 들었지만, 느껴지는 기도를 살펴보면 상당한 성취를 예상할 수 있다.
백무호도 당 소저도 성장했다.
재능을 개화한 천재가 노력을 더하면 그 성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다.
“한데, 장문경 선배는요?”
“혈교를 쫓고 계세요. 이번에야말로 뿌리를 뽑겠다고 하시네요.”
장문경 선배는 청운삼십일식을 접한 이후 명운표국의 무공을 손봐주고 계셨다.
스스로의 검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 실전에서 칼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는 양반께서 동행하지 않아 의아했는데 우선시하는 일이 생긴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죠?”
“저번……이라면?”
“있었잖아요.”
낮게 속삭이듯 말을 잇는다.
그저 목소리를 낮췄을 뿐인데 고혹적이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는 장 소월 소저가 돌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뽑힌 검이 달빛을 받고 반짝인다.
“비무.”
“……장 소저는 주어를 똑바로 하시는 편이 좋겠네요.”
장소월 소저가 이런 어투를 흘리고 다니면 이상한 오해를 할 사람이 엄청 많을 것이다.
“그게 마음에 안 들면 가르쳐보시든가요?”
장소월 소저의 검이 푸른 섬광을 번뜩였다.
천하 모든 검의 장점을 모아 만들었다는 절정검도.
그런데 그 검에서 익숙한 궤적이 보인다.
‘청운삼십일도?’
끊어지지 않는 끈끈함을 바탕으로 어떤 자세에서도 어떤 초식이든 펼칠 수 있는 무공.
명일서 표두의 실력이 급성장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마 장소월 소저의 주 대련 상대가 명일서 표두이지 않았나 싶다.
당연히 이를 통해 장소월 소저도 청운삼십일도의 장점을 습득한 모양이다.
검법이 도법을 품었음에도 어색하지 않다.
따앙!
검면을 때려 투로를 비틀어보지만, 검이 그리는 궤적은 끊기지 않는다.
면면부절의 묘리를 제대로 담았다.
나 또한 진지하게 대응을 했다.
살짝 휘어졌던 검이 나선을 그리며 다시 복귀하는 순간 앞으로 한걸음 나아간다.
이어지기 전에 끊는다.
변화가 무쌍하다 해도 그것은 검끝의 변화일 뿐이다.
검을 휘두르는 손목을 제압하면 검도 멎는다.
튕겨낸 검이 다시 제 길을 찾기 전에 손목을 잡아 끝낸다.
조용히 비무를 끝내는 가장 원만한 방법일 것이다.
따앙!
‘어?’
그런데 손목을 잡으려는 순간, 장소월 소저가 쥐고 있던 검을 놓았다.
“잡았다.”
그리고 빈손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손을 맞잡은 상태로 금나수로 이어지는 것인가 싶었지만, 비무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비무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스스로 다가가 손목을 잡은 이 상황.
내 손을 꼬옥 움켜쥔 장소월 소저가 입을 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잖아요.”
“…….”
“저번에는 그게 됐어요.”
한차례 콩깍지가 쓰였다 떨어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좀처럼 멀어지지가 않네요.”
“……장 소저.”
“사모합니다.”
직설적인 한마디가 예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파고든다.
방금 장 소저가 휘둘렀던 검보다 더 날카로운 일격이다.
고백을 날카롭다 느꼈다.
내가 지금 이 말을 위협으로 느꼈다는 뜻이다.
적어도 내 일부는 말이다.
“장 소저, 난…….”
“나 지금 엄청 용기를 내고 있어요. 염치도 자존심도 내려놓을 만큼.”
남녀가 서로를 좋아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잘못이 되기도 한다.
염치도 자존심도 내려놓았단 말은 장소월 소저 역시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장소월 소저는 멈추지 않았다.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쥔 장소월이 내 손에 뺨을 부볐다.
“그러니 밀어내지 말아요.”
그리고 그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
밀어내지 말라 해놓곤, 야릇한 흔적을 남긴 장소월 소저는 도망치듯 내 앞에서 사라졌다.
손바닥에서 장 소저의 입술이 남긴 옅은 습기가 느껴졌다.
“돌겠네…….”
[도랏? 도르신? 양손에 떡을 들었으면 좋아해야지, 뭔 고민질이야!]“……저기요, 사부님?”
[제자님. 지금 제자님이 하는 걸 보고 기만질이라고 하는 거랍니다, 이 기만자 놈아. 어우, 답답해!]장삼풍 사부의 가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허!]“달마 사부!”
참 오랜만에 듣는 달마 사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우리 제자 사람도 잘 치고, 여자도 잘 후리는구나.]이상하다? 왜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으신 달마 사부 목소리에서 뾰족뾰족한 가시가 느껴질까나?
설마 장소월 소저 같은 미녀와 꽁냥거리는 게 눈꼴 셔서는 아닐 테고?
‘뭔가 기분이…….’
[저놈 저래서 혼인이나 하려나 모르겠네. 어이구!]아니나 다를까, 천마 사부까지 오셨다.
나는 이 순간 매우 강한 확신이 들었다.
“……어쩐 일로 그리 헐레벌떡 뛰어오신 겁니까?”
[기만질 구경?] [허허허.] [손에다 하는 건 좀 신선했다.]분명 천상에서 축지법 같은 술법까지 쓰면서 자오경 앞으로 달려오신 게 틀림없다.
무슨 얼레리 꼴레리 하러 몰려든 열 살짜리 애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 연애사가 그렇게 재미있는 볼거린가?’
적어도 사부님들이 무엇에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지는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무인으로서는 전설이지만, 남녀 문제 쪽으론 정상이 없달까?
아무래도 노총각(?)과 모태동정(?), 난봉꾼(?)에게 연애 쪽으로 훈수를 듣는 건 좀 무리수인 듯싶다.
하지만 반대로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분야도 있다.
무공, 혹은 전투 관련으로 풍부한 경험을 지닌 전설들.
도적 연맹을 때려잡는 데 있어 가장 적절한 조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부님.”
[왜?] [듣고 있단다.] [말해.]‘어우야.’
조언 좀 구해 보려는데 한 번에 세 분이 말하니 뭔가 압박감 같은 게 느껴진다.
세 분이 다 같이 모인 건 좋지만, 뭔가 좀 복잡하달까.
세 분 사이에 미묘한 경쟁 구도도 존재하는 것 같고.
“이번에 도적 연맹과 싸우는 것에 대해 조언해주실 만한 부분이 있을까요? 가능한 피해 없이 이겼으면 좋겠는데.”
이번 싸움은 단순히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 하나하나가 미래 삼양현의 토대가 될 역참의 핵심 인원이다.
전 녹림 출신들이야 무공에 어느 정도 성취가 있는 이들이지만, 표국 출신 표사들은 아무래도 실력이 부족할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할아버지 친구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백중세의 대규모 전투에서는 보통 가장 약한 병사부터 죽어간다고 하셨다.
[계획 없냐?]“삼양현에서 온 원군은 애초에 계산 밖이었으니까요.”
[이놈 인생 막사네. 너 인마, 그렇게 계획 없이 막살면 어! 그냥 되는대로 구르다 ‘천마’ 되는 거야!]“……천마가 되긴 했습니다만.”
막살아 천마 돼서 죄송합니다?
[천마가 뭐 어때서? 시비냐?]과열 조짐이 보인다.
아니, 싸우시는 건 좋은데, 답이라도 먼저 던져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
[그렇군. 우리 제자가 일군을 운용해본 경험은 없겠구나.]장삼풍 사부와 천마 사부가 툭탁거리는 사이 달마 사부가 진지하게 고민을 해주셨다.
“작은 규모라면 몇 번 있었지만, 일군이라 할 만큼의 인원을 통솔해본 경험은 없죠.”
[그렇다면 사람을 통제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거라. 그저 기존에 그들을 지휘해온 지휘자들 정도만 신경 쓰면 되겠지.]“함부로 나대지 말라는 뜻이죠?”
[허허! 찰떡같이 말했더니 개떡같이 해석하는구나.]혹시 오늘 기분이 안 좋으신 건가 싶다.
일이 많아서 피곤하신 건지, 아니면 위에서 깨지고 오신 건지.
[사람이 많아지면 역할도 많아지는 법이다. 허니, 네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에서 크게 움직이라는 뜻이다.]“아!”
내가 모든 것을 챙길 수는 없다.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섣부르게 움직이는 건 오히려 문제를 더 키울 수 있다는 조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
“돌격대장으로 선두에 나서서 적진을 휘젓는 역할이라면 끝내주게 잘할 자신이 있긴 한데요.”
[그거로는 부족하구나.]“예? 아, 예.”
내가 바라는 결론은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가능한 우리 쪽 사람들의 피해가 적어지는 일이다.
전면에서 날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방금까지 천마 사부와 툭탁거리던 장삼풍 사부가 조언을 주셨다.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내게 방향을 제시하신다.
마치 내가 정답을 떠올릴 수 있는 길을 틔워주시는 느낌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백전불태(百戰不殆)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지피지기(知彼知己).
나를 알아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적을 아는 것.
내가 도적 연맹이라면 어떤 대응을 보일 것인가?
‘나라면 수적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인데…….’
도적 연맹은 산적인 녹림과 수적인 장강수로채의 연합이다.
만약 세력전을 벌인다면 놈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하면서 적-오대세가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장소를 원할 것이다.
수상전.
배 위에서 싸워본 경험은 있지만, 쉽게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수상전에서는 무공을 펼치는 근간인 하체 쓰는 법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정도다.
장강을 방벽으로 움직이는 도적 연맹이라면 그다지 싸우고 싶지 않다.
쉽게 이기기도 어려울뿐더러, 설령 이긴다고 하더라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장강이 문제란 말이지…… 아!’
도적 연맹의 입장에 서서 고민을 하자 번쩍 뇌리를 스치는 것이 떠올랐다.
“사부.”
[오냐.]“혹시 근시일 내에 비가 많이 오는 날이 있을까요?”
날씨라는 것이 워낙 오락가락하기에 예측이 쉽지 않다.
하지만 천상에서 직빵으로 내려오는 일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흐흐흐! 장강이 뒤집힐 정도로 말이지?]척하면 착이라고 음흉한 장삼풍 사부의 웃음이 들려오는 것이 내가 바라는 날씨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분명 지금 장삼풍 사부의 표정이 내가 짓고 있는 표정과 같으리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