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266
265화 내가 이길 내기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남궁세가의 장원은 예측했던 그대로의 모습이 펼쳐졌다.
정리되지 않은 혼돈 그 자체.
“그래도 그때보단 낫네. 그치?”
“예.”
주옥(酒獄)은 주옥이긴 하지만, 그나마 삼양현에서 만들어졌던 주옥보다는 낫다.
대체 뭔 생각이었던 것일까?
뭐, 부추겼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넘어가자.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
나는 제일 만만하면서도 삼양현에 두루두루 넓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았다.
촤아아악!
“우아아악!”
정신 차리라고 찬물도 부어주고.
짜악! 짜악!
“악! 아악!”
뺨도 좀 때려 주고.
“뭐야, 미친…… 아직 한밤중이구만…….”
동공이 좀 흔들리는 것 같지만, 말은 할 수 있는 것 같으니 문제는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내밀었다.
“이거 몇 개?”
“여섯 개?”
“좋아. 정상이네.”
일부러 틀리게 말한 게 뻔히 보인다.
그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는 거면 정신줄 제대로 잡은 거 맞다.
“아, 망할 새끼.”
“급해. 채주급, 국주급 양반들 챙겨서 후딱 모여. 할 말이 있어!”
거듭되는 재촉에 백무호가 잠 덜 깬 고양이처럼 흐느적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곤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같이 마시다 뻗었는지 팽철이 아직도 코를 골고 있다.
“얘도 내가 깨워?”
“니 맘대로 하든가.”
“좋았으!”
백무호가 희희낙락하며 내가 썼던 물통을 챙겼다.
지가 당한 대로 똑같이 할 작정인 모양이다.
“……무호가 제일 늦겠네.”
덤으로 팽철도.
말릴 시간도 아까웠기에 나는 혀를 차며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
“이레(칠 일) 뒤에 장강이 요동칠 만큼 큰비가 올 겁니다.”
급하게 모인 자리다. 다들 전날 연회의 여파가 남아 있는 상태다.
간신히 물만 한 번 묻힌 정도고, 대다수는 그나마도 못했기에 추레한 상황으로 모인 수뇌부들이 내 말에 눈을 껌뻑였다.
무척이나 뜬금없긴 할 것이다.
갑자기 천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거의 예언 수준의 언급이다.
남궁한이 손을 들었다.
“어…… 저기요.”
“말씀하세요.”
“이레 뒤에 비가 온다는 거지요?”
한동안 나와 다니며 내가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남궁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짚고 넘어가는 것은 ‘이레’라는 명확한 날짜가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오랜 경험이 있다면 하루 이틀 정도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지긋한 어르신들이 무릎이나 어깨가 시리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이레’ 뒤를 ‘확정’한다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안휘에서, 장강에서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어렵다.
하지만 출처를 밝힐 수 없는 내 정보는 근거가 명확하다.
큰 대가가 필요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 역시 천상을 통해 얻은 정보다.
게다가 이로 인한 영향력과 파급이 크나큰 만큼 상당한 인과를 필요로 한다고 하셨다.
무려 사부님들께서도 부담스러워하실 정도였다.
그런 부담을 달마 사부께서 기꺼이 짊어져 주셨다.
한동안 바쁘게 일하시며 인과를 제법 모으셨다며 달마 사부는 흔쾌히 나를 위해 인과를 사용하셨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이럴 때를 위해 열심히 벌어놓은 거라고 하셨다.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니 나도 자신 있게 질렀다.
“예! 옵니다!”
“으으음…….”
내 단언에 남궁한의 표정이 묘해졌다.
분명한 확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래서 더욱 의아해했다.
남궁한은 거기에서 한 가지를 더 짚었다.
“장강이 요동칠 만큼?”
비가 오는 것을 예측하는 것도 기함할 일이지만, 강수량을 예측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만약 내 예언(?)이 사실이라면 향후 행보가 크게 달라진다.
도적 연맹이 자리 잡은 장강을 두고 일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이 차이는 크다.
“아무리 큰 배라도 단번에 뒤집힐 겁니다.”
“……알겠습니다!”
내 단언에 남궁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렸다.
근거는 없지만, 일단 믿어보자는 눈빛이다.
하지만 남궁세가와는 달리 다른 쪽에선 불신의 기색이 짙었다.
“접신이라도 했냐? 저 높은 하늘의 거룩한 분이 계시라도 내려?”
귀신이다. 어떻게 알았지?
백무호와 드잡이질을 했는지 얼굴에 붉은 주먹 자국이 남아 있는 팽철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했다.
“말할 새끼…… 연기 잘하네.”
어떻게 알았냐는 식으로 쓰윽 쳐다보니 팽철이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귀신 같은 게 어디 있냐는 표정이다.
제갈세가는 더욱 묘한 표정이다.
“하아! 무후(武侯)의 단언을 들은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군요.”
적벽대전에서 있었다는 동남풍의 일화를 이야기한다.
허나 조상의 일화를 말하면서도 제갈재윤은 남궁세가만큼 확신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정보의 출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스스로 벽력탄에 불씨를 붙이는 꼴이다.
미친놈 취급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팽철이나 제갈재윤 쪽의 반응이 맞다.
이럴 때는 차라리 다른 쪽으로 설득하는 것이 좋다.
마침 생각해둔 것도 있었다.
“제가 틀린다면 여기 있는 분들의 무공을 한 번씩 봐 드리죠.”
“호오?”
반쯤 내기나 다름없는 제안과 그에 대한 반대급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눈을 반짝였다.
어제 연회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는 누가 뭐래도 명일서 표두의 분전이었다.
그가 펼치는 무공 청운삼십일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다들 들어서 알고 있다.
“그건 좀 구미가 당기네요.”
잘 쳐줘봐야 이류급에 불과한 무인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잡스러운 칼질을 하북팽가의 대표 무공 중 하나인 오호단문도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무공으로 끌어올렸다.
외인인 내게 비전이라 할 수 있는 무공을 내놓을 수는 없겠지만, 적당히 알려진 무공을 강화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문에 큰 이득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쯤은 내기라고 했지만, 내 예언(?)이 틀렸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어차피 도적 연맹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그에 맞춰 싸우면 그만이다.
“좋네요. 이것도 내기라면 내기인데, 우리는 뭘 걸면 될까요?”
제갈재윤이 슬쩍 내기의 반대 조건을 걸었다.
나를 위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나중에 딴소리를 못 하게 하려고 저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내가 이길 테니까.
“그렇네요. 그럼 제가 이긴다면, 차후 제가 이렇게 믿기 힘든 이야기를 꺼냈을 때 조건 없이 신뢰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하하하! 그거야 뭐…… 맞추기만 한다면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요.”
조건으로 걸지 않아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듯 제갈재윤이 크게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솔직히 연 소협의 말대로 된다면, 나는 연 소협이 장강 용왕의 현신이라고 해도 믿을 겁니다. 용왕은 비와 바람을 부리는 신령한 존재라고 하니까요.”
이것도 뜨끔했다.
제갈재윤이야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라지만,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사부님들께서도 대라조화심결이라면 정말로 호풍환우(呼風喚雨)를 다룰 수 있다고 하셨다.
그 때문에 장삼풍 사부도 벌근을 받으셨고.
‘이러다 진짜 장강의 용왕이 현신했다는 말이 나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이미 한 번 용왕으로 불리긴 했다.
하지만, 뒷말이 어떻게 나오건 지금은 피해를 최대한 줄이며 도적 연맹을 깨부수는 것이 우선이다.
내 예언(?)을 신뢰하는 것으로 방향이 정해지자 바로 실무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장강까지 이레라……. 거리를 생각하면 죽어라 달려야겠구만.”
“이레보다 더 당겨야죠. 이 정보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면 그만한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장강이 요동칠 정도로 비가 온다면 도적 연맹 측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배를 물릴 것이다.
즉, 폭우가 내리기 전에 도적 연맹이 장강 위에 배를 띄워놓은 상태여야 한다.
일종의 대치 상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레 만에 도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문제는 이레 만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죽어라 달려야 할 판인데, 그보다 최소한 하루 이틀은 더 앞당겨야 한다는 점이다.
내공이 깊은 고수급이라면 그럭저럭 문제가 없겠지만, 전체적인 수준을 본다면 자칫 낙오자가 나오는 것도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근에서 최대한 말을 모아 보리다.”
남궁조 대협이 다급히 뛰어나갔다.
확실히 말이 있다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다만, 현재 이곳에 모여 있는 인원은 천 단위를 훌쩍 넘는다.
모두가 말을 타고 달리긴 어렵다는 소리다.
“큭큭큭! 한동안 욕 좀 먹겠는데?”
내 아픈 부분을 찌른 팽철이 흥미진진한 눈빛을 했다.
정말로 내 예언(?)이 맞아떨어질지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이다.
“하지만 정말 이 예언이 맞는다면…….”
“욕 값으론 충분하겠지.”
“아니,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아.”
내 기대치가 너무 낮다고 보는지 팽철이 코웃음을 쳤다.
“더 이상 무림은 너를 어린 용이라 부르지 않을 거다.”
천룡(天龍).
오롯한 하늘의 용이라 불릴 뿐이다.
“기대되는군.”
팽철이 품은 기대감이 주변으로 번져나갔다.
아마 이레 동안의 좋은 여흥이 될 것이다.
몸이 힘들면 욕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하지만 내 말이 맞다는 것이 증명되면 그들이 내뱉었던 욕은 경외와 감탄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팽철의 말처럼 내게 붙은 별호는 무거워질 것이다.
‘까짓거 짊어져 주지.’
이미 그보다 더 큰 것을 짊어진 지 오래다.
“모두 정오까지 모든 채비를 갖춰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달려야 할 때다.
***
얼음으로 뒤덮인 세계다.
어디로 눈을 돌리더라도 저 북해의 빙궁을 연상케 하는 얼음덩어리가 가득하다.
그 얼음상 위에 걸터앉은 백설아가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이 여덟 번째죠?”
“예.”
“이만하면 나올 법도 한데, 도통 나오질 않네요.”
조용조용한 목소리에는 서늘함이 가득했다.
“무시하는 건가?”
표정마저 목소리를 따라가는지 백설아의 미소는 세상 무엇도 얼릴 수 있을 만큼 차가웠다.
콰득!
섬섬옥수의 가벼운 손짓에 단단한 얼음기둥 하나가 도자기처럼 깨져 흩어졌다.
그 투명한 파편 속에는 얼어붙은 혈육이 가득했다.
주변에 즐비한 얼음기둥 속에는 조금 전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어디죠?”
“장강입니다.”
“장강이라…….”
“흩어져 있던 도적 연맹 놈들이 한데 뭉친 모양입니다.”
“아하.”
적으로 규정한 존재들의 움직임을 들은 백설아가 얼음처럼 투명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도적 연맹을 지우면 나타나려나요?”
누군가 들었다면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오대세가의 필두인 남궁세가를 쓰러트리면서 도적 연맹의 명성은 이미 무림 전역에 퍼져나갔다.
그런 도적 연맹을 대수롭지 않게 지워버리겠다는 선언이라니!
하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백설아의 발언에 토를 달지 않았다.
말한 대로 당연히 이뤄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가죠.”
자리에서 일어난 백설아가 얼음뿐인 세상에서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밖은 평범한 속세의 모습이다.
단 한 걸음.
경계를 긋는 선 안쪽에 얼음의 세상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멀리서 보면 얼음으로 지어진 성채 같다.
곧 녹아 무너져 내릴 얼음성이 제 주인을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