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56
55화 네 바닥을 봐야겠다
장소월 소저와는 좋은 분위기가 되었지만, 오래 상대할 수는 없었다.
한산월 아주머니를 뵈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을 기약하며 장소월 소저와 헤어진 뒤 백가표국의 심처라 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 옆에 조용히 따라붙은 설아 누나가 입을 열었다.
“한동안 같이 지내고 있는데, 좋은 아가씨더라.”
“예, 그런 것 같더라고요.”
진취적인 사람 중에는 옆을 헤아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시선을 높게 잡고 살아가는 사람은 눈 아래를 살피지 않기도 한다.
장소월 소저는 둘 다 아니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주변을 살피는 소양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주변을 잘 챙긴다. 자연히 좋은 사람이란 말이 따라붙는다.
손을 잡기 좋은 상대다.
왠지 설아 누나의 목소리가 뾰로통해졌다.
“성격도 밝고 구김도 없는 편이고. 무공도 뛰어나고 가문도 명성이 높고. 얼굴도 예쁘고.”
“그래도 누나만큼은 안 예뻐요.”
“…….”
장소월을 한껏 치켜세워 주던 설아 누나가 내 대답에 말을 멈췄다.
살짝 눈을 찌푸린 채로.
“자신감이 붙어서 그런가? 능글맞아진 것 같아.”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할 뿐이에요. 누나한테는 그래도 되잖아요.”
“특별취급해줘서 참 고맙구나.”
누나가 미숙한 동생을 대하듯, 터울이 느껴지지 않게 서슴없이 올라오는 설아 누나의 손이 내 뺨을 꼬집었다.
“마음에 들었니?”
“마음에 들기야 하죠. 장 소저를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을걸요. 심성이 곧은 사람이니까요.”
장소월은 분명 매력적인 여자다. 괜히 어딜 가든 그녀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게 아니다.
“뭐, 그래도 남녀 간의 애정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딱히 그렇진 않지만요.”
“보통, 남자는 그 둘 사이의 거리감이 애매하지 않니?”
“전 안 그래요. 실제로 도움이 필요하다면 돕겠다고 했을 뿐이에요.”
사실이다.
나는 굳이 엉성하게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누나인걸요?”
“이 녀석.”
내 뺨을 잡은 설아 누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벼운 남자가 됐어.”
진지하게 받아들인 느낌은 아니다.
“가벼워진 건 무호 때문인가?”
설아 누나가 슬쩍 백무호를 흘겨봤다.
고개를 돌린 탓에 설아 누나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 시선을 받은 백무호의 반응을 보니 어떤 표정이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계속 꽁냥거리기나 할 것이지, 왜 얌전히 있는 사람은 건드리고 그래?”
백무호가 기겁을 하며 투덜거렸다.
내게는 시야의 사각이라 보진 못했지만, 다시 한번 백무호를 누른 설아 누나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남자는 진중한 면이 있는 게 더 멋있어.”
“예, 기억해 둘게요.”
“그래.”
순순히 그 말을 받아들이는 내 모습에 살포시 웃은 설아 누나가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왠지 살짝 떠는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에게도 진지하게 진심으로 대하면 괜찮을 거야. 그리고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든 난 네 편이야. 너를 믿어.”
말을 끝낸 설아 누나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물러났다.
설아 누나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백무호가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내 옆구리를 찔러 왔다.
“이 자식, 무서운 놈이었네.”
백무호가 날 다시 봤다는 듯 이야기한다.
‘그렇게 평소랑 다른 느낌이었나?’
“그냥 솔직하게 속내를 말했을 뿐인데.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뭐, 그렇기는 하다만.”
만약 백무호가 방금 내 모습에서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았다면, 그만큼 내 말에 이전에는 없었던 힘이 실린 것이리라.
그런 변화라면 싫지 않다.
“이제야 좀 솔직하게 행동해도 될 자격을 갖췄는데, 굳이 빌빌거리고 싶지 않아.”
“약간 진중한 면도 곁들이셔야지?”
백무호가 계속 놀려먹으려고 들었다.
“그럼 진중하게 맞아 볼래?”
“폭력 반대.”
백무호가 항복을 선언하며 두 팔을 높게 들었다.
간단하게 백무호를 진압한 나는 다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턴 혼자 들어가.”
“응? 너는?”
“어머니가 너 혼자 들여보내라고 했어.”
그런데 들어가기 전 백무호가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뭔가 찜찜한데.’
“그럼 설아 누나 빠질 때 같이 빠지지 그랬냐.”
“아니, 뭐 그냥…… 배웅?”
“…….”
이 자식, 놀리려는 거다. 내가 설아 누나랑 장소월 소저에게 한 일들로 주둥이를 털려고 남아 있었던 거다.
내가 지그시 노려보자 백무호가 너털웃음과 함께 도주했다.
***
‘조용하다.’
백가표국의 심처.
삼양현에서 움직이는 모든 물류의 중심에 있기에 백가표국은 언제나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허나 여기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조용함을 지나쳐 음습함이 느껴질 정도다.
축축하게 가라앉은 차가운 공기. 마치 오래전 잊힌 우물 속에 들어온 것 같다.
[기운이 가라앉아 있다고 느끼느냐?]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장삼풍 사부가 말씀하셨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장삼풍 사부의 말이 이어졌다.
[주변의 기운을 눌러 놓았기 때문이다. 의지로 제 주변을 통제하는 경지지. 제법이구나.]장상품 사부가 호평했다. 구파 장로급도 이 정도 호평은 받지 못했다.
한산월 아주머니가 그 정도 고수였다니.
상정 외의 무위에 놀라는 사이, 모습을 드러낸 한산월 아주머니가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
그때와 같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
몇 년이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전혀 변한 게 없는 자태다. 설아 누나를 닮은 아름다운 미부(美婦)가 조용히 시선을 고정한다.
과거 두려움을 주었던 시선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버텼다.
과거 그 당시로 돌아온 듯한 기시감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분명하게 다른 것이 있다.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흔들림 없는 내 모습에 한산월 아주머니가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헌양해졌구나.”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공을 제대로 배운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거로 아는데.”
목소리가 좋으시다. 혼자 듣기 아까울 정도다. 맑고 청아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설아 누나와 달리 내게 일말의 호감이 없음에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곤란하네.’
내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한다는 듯 이야기하신다.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내에 이뤄낼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거겠지.
솔직히 말하면 당사자인 나도 가끔 이게 꿈인가 싶을 정도니, 이해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다행히 재능이 있었나 봅니다.”
“재능, 재능이라…….”
대화가 이어질수록 분명해졌다.
한산월 아주머니는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불편해하고 있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 수위가 높아진다는 건 내가 한 말들 중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는 이야기다.
“과거에 너와 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었지. 그가 걸었던 길 역시 너와 비슷하기도 했고.”
“세상은 넓으니까요.”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그중에서 재능이 있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 일부의 수는 충분히 많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아무리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렇기에.
“서문대성이란 이름을 아느냐.”
“죄송합니다.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구대문파 모두가 주목했던 기재였었다.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며 천년은 회자할 이름이라 이야기했을 정도였지. 지금에 와서야 그저 신기루처럼 덧없이 흩어져 버렸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짧게나마 무당에서 수학하기도 했었으나 그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다음 이어진 한산월 아주머니의 말은 충격이었다.
“허면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의 인지를 넘어 공상의 영역에 있을 법한 자와 접촉한 바가 있느냐?”
“……!?!”
저기요? 사부님들?
‘저거 혹시 사부님들 이야기하는 겁니까?’
가능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지금 한산월 아주머니가 꺼낸 말은 내 속을 흔들었다.
한산월 아주머니의 말은 나의 특별함, 그 원천을 겨냥해 묻는 말처럼 들렸다.
[천상에서 따로 지상에 손을 내민 경우는 지금까지 없던 걸로 아는데.] [없는 일이 맞을 걸세.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 [하긴 인과율의 법칙이 그런 변수를 내버려뒀을 리 없지.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애당초 우리가 지금까지 미관말직으로 굴려지지도 않았을 거고.]내가 품은 의문에 장삼풍 사부와 달마 사부는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그 만약의 이야기를 부정했다.
있을 수 없다는 거다.
‘정말 그럴까?’
한 번 일어났던 일은 두 번 일어날 수 있다.
이런 특수한 경우가 이례적인 일이라곤 하지만, 정말 과거 단 한 번도 없었을까?
‘하지만, 정말 천상에서 지상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면 천상에 새로 올라가는 신선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해.’
사부님들이 격무에 시달리는 모습만 봐도 천상이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인과율이라는 것에 부과된 규정이 느슨했다면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해서 손을 쓰지 않았을까?
추론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한산월 아주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당시 사람들은 서문대성을 두고 불세출의 기재라 했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은 알고 있었다. 그의 재능은 선천적인 게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며,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현세를 벗어나 있는 힘이 개입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기억 한편에 접어 두었던 일이었는데 표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무호의 검에서 현세와 동떨어진 영역의 흔적이 보이더구나. 그런 가운데 네 소식을 들었다. 서문대성과 비슷한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는. 해서 확인을 해야 했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다. 서문대성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내 본가는 서문대성의 배후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존재와 깊은 은원(恩怨)이 있다. 그러니 이 일을 묵과할 수 없구나. 그도 그럴 것이 너는 이미 가문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짐작? 존재? 은원?’
한산월 아주머니는 지상에 실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듯 말했다.
‘그렇다면 사부님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지금 한산월 아주머니는 사부님들을, 천상의 존재들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다른 무언가다.
한산월 아주머니 정도의 무인조차 공상의 영역이라 치부하지만, 현실의 존재다.
덕분에 복잡하게 얽히던 문제 하나는 풀 수 있었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금제가 걸려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허나, 누구도 스스로의 근원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는 법. 나는 네 바닥을 봐야겠다.”
머릿속과 달리 현실은 여전히 꼬여 있었지만.
[조심해라.]장삼풍 사부가 드물게 경고를 하셨다.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장삼풍 사부가 경고할 만하다.
주변을 내리누르던 기운이 들썩인다.
한산월 아주머니에 호응하듯 주변의 기운들이 차가운 냉기를 흘렸다.
“후우!”
얼마나 기온이 내려갔는지 호흡에 하얀 김이 서렸다.
마음을 바꾼 것만으로도 세상의 시간을 바꾸는 존재.
“최선을 다하려무나.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될 테니.”
그런 존재가 내게 이빨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