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55
54화 우리 제자, 묘한 재주가 있었어
‘사부님들의 무공은 확실히 다르네.’
천마 사부의 무공은 공과 허. 손에 닿지 않는 영역, 공간을 장악하는 이능에 가까운 힘을 기초로 하고 있다.
달마 사부의 무공은, 담아 키운다. 스스로 크게 키워내는 힘이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얻는 정진의 무공이었다.
장삼풍 사부의 무공은 교류와 규합이다. 통하여 합한다. 다툼 없이 정리하여 한데 묶는다.
‘저마다의 영역이 있으시다.’
고작 나 정도 되는 수준의 무인에게도 보일 정도로 색이 뚜렷하다.
어쩌면 천상에 오르는 일종의 기준인지도 모르겠다.
궁극(窮極).
‘그럼 사부님들의 무공을 모두 받아들인 내가 이룰 극은 무얼까?’
무엇이 나올까?
‘사부님들은 어디까지 보고 계신 걸까?’
천외천의 눈높이를 가늠해 보고자 하지만 너무도 높기에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생각은 없다.
언젠가는 다다를 거다.
저 높은 천상에.
“어이! 나 왔다.”
다만, 지금은 이 하계의 생활을 만끽할 따름이다.
“딱히 이런 게 싫은 건 아니니까.”
“뭔데? 왜 사람을 보자마자 싫고 좋고를 따져?”
백무호가 잔뜩 찌푸린 띠꺼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백무호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
며칠간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바로 어제 만났던 것처럼 태연하게 백무호와 마주한 나는 픽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혀는 안 깨물었구나. 다행이다.”
“뭐래? 이 백무호가 그 정도 일로 혀를 물겠냐. 그리고 내가 범각인 줄 아냐? 혀 깨문다고 해서 사람 안 죽는다는 건 나도 알아.”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미쳐 날뛰던 일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운 모양이다.
정신줄을 놓아버려서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머리가 알아서 걸러낸 건지.
어느 쪽이든 취사선택이 참 좋은 머리다.
“하긴, 니가 그 정도로 여리진 않지.”
“시끄러.”
백무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영향 따윈 없다는 듯 강한 척했던 행동과는 달리 그간 눌러 놓았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모양이다.
[뭔 일 있었냐?]백무호와의 이야기가 뜬금없는지 장삼풍 사부가 궁금해하셨다.
달마 사부가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확실히 달마 사부도 한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였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 있냐?”
“응? 일?”
“날 이렇게 빨리 보러 올 줄 몰랐거든. 네 성격이면 적어도 사나흘은 더 있다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면 도망치듯 표행을 나가거나.”
“망할 놈. 넌 너무 날 잘 알아.”
백무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대로야. 어머니가 잠깐 보자고 하신다.”
“너희 어머님께서?”
백가표국에 놀러 갔을 때도 좀처럼 보지 못했던 분이 갑자기 왜?
“어머님이 왜?”
“내가 숭산이랑 화산에서 배운 무공을 보시더니 널 한번 보자고 하시더라고. 불가의 무공은 아닌 것 같다나.”
“그래?”
“어. 그래서 네 것도 한번 보자고 하시더라고.”
[호오?] [안목이 있구먼.]사부님들이 제법이라는 듯 말씀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겉으로 보이는 백무호의 무공은 그저 장중무도일 뿐이니까.
무거운 기질을 담은 무공이란 점만 보면 숭산 소림의 무공으로 볼 법도 한데, 그걸 한눈에 불가의 무공이 아니라 판정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안목이다.
‘그렇다는 건 그분이 대단한 고수라는 소리인데, 어디까지 파악하신 거지?’
생각 이상으로 깊이 파악하신 거라면 알아둬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백무호가 얻어 간 무공의 근원은 조심할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알았어. 가 보자.”
“좋았어! 그럼 저녁은 우리 집에서 먹는 거다?”
‘이 녀석, 너무 과하게 좋아하는데.’
[저놈이 저러는 거 보면 뭔가가 있네.] [허허허.]사부님들도 슬슬 백무호가 어떤 녀석인지 아시는 것 같다.
뭔가 필요 이상으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백가표국으로 가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지금 백가표국으로 갔을 때, 백무호 이 녀석이 좋아할 만한 사건 사고들이 뭐가 있을까?
딱히 짚이는 건 없었다.
그랬기에 바로 당면한 문제를 고민했다.
‘한산월…… 아주머니.’
자주 못 뵈었을 뿐이지 일면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머릿속에 백무호의 어머니, 한산월 아주머니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설아 누나가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아름다운 미부(美婦)의 자태가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자태보다 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시선.
내 뿌리 깊은 곳까지 헤아리려는 듯 조용히 주시해 오는 그 눈과 시선을 마주했을 때.
무섭다고 생각했었다.
‘고수셨다면 말이 되긴 해.’
백무호의 검을 보고 그 근본을 알아볼 정도라면 보통 고수가 아니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어떨까?
당시 느꼈던 두려움을 밀어내며 기억 속의 존재를 지그시 바라봤다.
‘안 되겠다…….’
왠지 설아 누나를 싸가지없이 노려보는 느낌이 든다.
그리 생각하니 한산월 아주머니와 기 싸움은 못할 것 같다.
‘답이 없네. 백기투항 해야겠다.’
현실을 깨달은 나는 저항 없이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이 자식이 희희낙락하는 게 그거 때문인가?’
필요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이 내가 한산월 아주머니과 만날 일 때문이라면 물어보긴 해야겠다.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내가 아주머니를 뵌 적이 별로 없잖아. 이전에 드문드문 뵙긴 했지만 편하게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고.”
“그랬지. 어머니는 가족 외에는 별로 얼굴을 보이시는 분이 아니니까.”
“맞아.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 너희 어머님, 대충 어떤 분이시냐?”
“우리 어머니……라. 흐음…….”
백무호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한 사람을 간단하게 정의해서 표현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란 원래 여러 가지 모습을 갖고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가족이기 때문인지 백무호는 그것을 빠르고 간단하게 정의해냈다.
“설아 누나가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될까 싶은 분이랄까?”
“그래?”
그럼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다.
나는 반색하며 활짝 웃었다.
“……갑자기 내가 제대로 설명한 게 맞나 싶어지는데. 뭐, 어쨌거나 나는 분명 제대로 대답해줬다.”
내 반응을 본 백무호가 뭐라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마음을 놓은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
백가표국으로 가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청우였다.
한동안 무공 수련에 전념하느라 같이 어울려 주지 못했었는데, 저녁은 백가표국에서 먹고 올 수도 있단 말을 듣고 시무룩해졌다.
밤에 돌아와서 그간 태극권 수련을 얼마나 잘했었나 봐주겠다고 하는 걸로 간신히 시무룩해 하는 청우를 달랠 수 있었다.
그런 나와 청우를 유심히 바라보던 백무호는 묘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우애가 좋은 형제자매는 현실이 아닌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일 건데.”
“편견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나와 청우 사이는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리고 몇 번을 말했다만, 널 살려 두고 있는 것만 봐도 설아 누님은 충분히 자애롭다 생각한다만.”
이전부터 느낀 부분이지만, 아무래도 백무호는 설아 누나에게 매우 삐뚤어진 시각을 가진 것 같다.
이것도 저 녀석이 말하는 핏속 깊이 박혀 있는 본능의 작용 때문인지.
청우와 나 사이의 관계만 봐도 그런 생각은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누님이 이 녀석을 특별대우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닌 녀석이 누님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건 이런 이유도 있는 거겠지.”
투덜거리며 작게 중얼거리는데, 내겐 불평 많은 동생의 넋두리일 뿐이다.
“넌 꼭 너 닮은 아들 낳아라.”
“그냥 욕을 해, 망할 놈아!”
본인도 그게 나쁜 말이라는 건 아는 모양이다.
자각이 있는 놈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모르겠다.
남들이 들으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백가표국에 도착했다.
며칠 만에 다시 찾은 백가표국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다.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사람들이 어색했다. 보기만 해도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는 저 어색한 웃음들은 대체…….
“하아…….”
답은 백무호의 짙은 한숨이 대신했다.
“아직 안 없어졌구나.”
“그게 며칠 만에 없어질 일이겠냐.”
“하긴.”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 녀석이 날 부른 데는 뭔가 꿍꿍이가 있는 기색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그게 뭐든 한 번은 눈감아줘야겠다.
마음의 결심을 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체 발광이란 게 이런 건가.’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난다. 한 명만 있어도 눈길을 끌 사람이 둘이나 나란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설아 누나와 장소월 소저.
“수라장, 수라장, 수~라~~장.”
“…….”
‘뭔 수라장 운운이야, 이놈은.’
나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이죽거리는 백무호다.
설아 누나는 자체 발광 중인데, 이놈은 지랄발광이다.
일단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은 참고 넘어가기로 다짐한 것이 있으니 봐준다.
“왔네?”
속으로 참을 인(忍) 자를 새기는 가운데 설아 누나가 말을 걸어왔다.
“아주머님이 찾으신다고 하셔서요.”
“어머니가? 아, 무호가 익혀 온 검 때문이구나.”
“예.”
설아 누나도 알고 있었나 보다. 좀 더 정보를 모아 보아야 하는가 싶은데 장소월이 말을 걸어 왔다.
“다시 뵙네요, 연 소협.”
“아, 장 소저. 오랜만입니다.”
친분이 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같은 편이 되어 싸운 일도 있었던 사이였기에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방금 백 소협의 검과 관련된 일로 오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검에도 조예가 있으신가요?”
“검법이요?”
“사실 제가 무림에 나온 이유는 식견을 넓히기 위해서였거든요. 아버지의 절정검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무공을 겪고 경험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인지라.”
“아…….”
“얼마 전 백 소협의 검을 견식 할 기회가 있었어요. 화산의 검답게 유려하면서도, 무당의 검처럼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압도될 것 같은 장중함이 담겨 있더군요. ‘이런 검도 있구나’ 하고 무척 감동했어요. 헌데, 그 검을 익히는 데 연 소협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검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소월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대충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자의식 과잉이 맞았네.’
장소월 소저가 나를 찾아온 것은 맞다. 하지만, 내게 관심이 있기보다는 무공에 대한 호기심이었던 것이다.
하기야 장소월 앞에서 펼쳤던 극강격은 천상에서 달마 사부가 일천 번을 가다듬은 무공이다.
스스로의 무공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많은 무공을 견식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백가표국에 와서 백무호의 설매검을 견식 했다면 그 검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단번에 알아차릴 것인데, 그 검을 단련하는 데 내 도움이 있었다고 하니 더욱 흥미가 생길 것이다.
괜한 생각일랑 접게 되니 좀 더 편하게 장소월 소저를 대할 수 있었다.
“검법은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쪽으론 도움이 못 될 것 같네요.”
“아, 예…….”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전력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편히 이야기해 주세요.”
나는 선의를 담아 말했다.
장소월 소저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는 장래의 목표를 생각하면 내 편으로 만들어 두는 게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웃는 얼굴 좀 보여 주고 내 사람 만들 수 있으면 나야 이득이다.
내 말이 잘 먹혀들었는지 장소월 소저의 표정에 잠깐 파문이 일었다.
꾸밈없는 말에 반응을 보인 장소월 소저가 곧 어색하다는 듯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예, 잘 부탁드려요.”
***
“저 말, 제대로 먹힌 것 같지?”
“표정을 보니 가슴에 남을 말이 된 것 같긴 하구려.”
“예쁘겠다, 실력 좋겠다. 주변 사람들이 늘 떠받들어 주며 살아왔으니 저런 식의 말이야 질리게 들어 왔겠지만, 은근히 관심이 가는 상대가 기습적으로 꽂는 건 또 이야기가 다르니까.”
“게다가 저 여아는 청운이가 바로 자신을 찾아와 줄 줄 알고 기다렸던 것 같은데, 본의 아니게 쭉 방치까지 해두며 힘을 빼놓은 상태이기도 했고. 제대로 밀고 당긴 형국이구려.”
“수라장이네.”
“아수라장이구먼.”
“저기에 날붙이 좀 날아다니면 대환장이고.”
“우리 제자, 묘한 재주가 있었어.”
나란히 앉아 자오경을 바라보며 장삼풍과 달마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화를 나눴다.
왠지 하계에서 즐겼던 황주(黃酒)에 닭다리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