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93
92화 원지교량(圓之較量)
허도진인의 반응은 격렬했다.
‘이러다 건물 박살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대충 이런 반응이 나올 거란 건 짐작했었다.
그래서 더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심봐뜨아아아아아아아아!!]‘……어쩔 수 없지.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그래도 장삼풍 사부가 저리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편안해졌다. 덕분에 잔뜩 달아오른 허도진인을 조금은 더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다.
‘가만. 그런데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러다가 문뜩 심각한 문제 하나를 발견했다.
신승 어르신의 경우에는 중토신공이라는 매개체가 있었다. 중토신공의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달마 사부의 무의를 전달할 수 있었다.
허도진인에게는 그런 매개체가 없다.
검이라곤 잡아 본 적도 없는 애송이가, 천하에서 검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분에게 한 수 보여 주겠다고 나대 봐야 좋은 소리 못 듣는다. 무당파에서 제적당한 일에 정당성이나 안 생기면 다행이다.
“그럼 무당파의 무공은 어디까지 배웠느냐?”
수행이 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금방 스스로를 다잡은 허도진인이 다행히도 방법을 마련해주셨다.
“무당파에서는 검을 잡지 못했습니다.”
“허어?! 네 자질로 말이냐?”
“여러 가지…… 사연들이 좀 있었습니다.”
허도진인의 말에 나는 은근슬쩍 무당파에서 있었던 일을 한 번 더 언급했다.
덕분에 허도진인의 미간이 한 번 더 꿈틀거렸다.
“그래…… 있긴 했겠지. 무당파에서 흔치 않은 제적 사건이 있었을 만큼……. 빠득!”
‘이분은 내 자질이 썩 괜찮다고 보셨구나.’
태극권도 제대로 떼지 못해 빌빌거렸던 점을 생각하면 뭔가 터무니없는 평가가 아닐까 싶었지만, 당장의 성취를 보면 못 써먹을 둔재도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천상의 사부님들을 통해 무공을 배우며 얻은 성취를 보면 내 자질이 아주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배울 마음이 있다면 가르침을 주마.”
허도진인은 선택의 여지를 내게 주었다.
이미 소림의 무공을 깊이 익히기도 했거니와 무당파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있어 거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배려가 있는 제안을 나는 덥석 물었다.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
“예, 무당의 검을 배우는 건…… 한때 제 꿈이기도 했으니까요.”
오랜만에 무당파 속가제자였을 당시의 감성을 되살려보고 있어서 그런지 내 안 깊숙한 곳에 묻어놓았던 말들이 알아서 줄줄 흘러나왔다.
“꿈이라……. 허허.”
그게 또 허도진인의 감성을 자극한 모양이다.
이미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 기재가 검을 배우고 싶었다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허도진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자꾸 찌르게 되네, 이거.’
자꾸 좋은 분의 아픈 곳을 찔러서 죄송하지만, 이게 다 무당파에 있을 두 똥 덩어리들에게 몇 곱절로 돌아갈 거라 생각하면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똥 덩어리들을 품고 있어 봐야 무당파에도 좋을 거 없다.
“따라오너라.”
도포 자락이 휘날릴 만큼 거세게 몸을 돌린 허도진인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
허도진인을 뒤따르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와아! 무당제일검이라니…… 이거 실화냐…….”
얼빠진 소리를 끊지 못하고 있는 백무호 녀석도 따라붙었다.
화산파 직전제자……까지는 아니고, 그냥저냥 연이 있는 데다가, 내 친구라는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같은 구파 사람이라며 따라와도 좋다고 허락하셨다.
[백무호 저 녀석이 동행해도 좋다고 허락한 걸 보면 일단 검의 기초를 잡아주는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나도 장삼풍 사부의 생각에 동의했다.
엄밀히 말해 현재 나는 문외의 사람이기에 무당파 비전을 가르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건 아닐 테니, 아마도 이후 내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범주까지만 가르치실 요량일 것이다.
[사실 그게 맞는 일이기는 하지. 기초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병아리에게 비전이랍시고 난해한 것을 가르쳐 봐야 의미가 없으니까.]‘그렇겠죠.’
과한 배경은 내 성장에 해가 될까 싶어 절대 드러나지 않게 손을 썼었다고 하셨는데, 변명이나 빈말이 아닌 것 같다.
한적한 장소에 다다르자 허도진인이 물었다.
“무당파 검법의 파지법은 아느냐?”
“아니요.”
“그럼 그것부터 시작하자꾸나. 검을 쥐는 방법인 파지법에 따라 검을 펼치는 방도가 바뀌기에 문파마다 조금씩은 다르단다.”
정말 기초부터 가르치실 요량인지 검을 쥐는 법부터 시작하셨다.
정말 꼼꼼하게 나를 살피며 가르침을 내리셨다.
그렇게 어느 정도 기초 준비가 갖춰지자 허도진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여셨다.
“아무래도 소림과 연이 깊어진 네게 무당의 검을 가르치는 일은 여러모로 폐가 될 일이다. 사적으로는 너와 싹이 나기도 전에 저버린 네 꿈에게. 공적으로는 소림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지.”
[성실하고 배려가 있구나.]장삼풍 사부가 허도진인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셨다.
[일을 맡기면 뭐든 우직하게 잘 해내겠어. 좋아, 아주 좋아. 흐흐흐.]‘…….’
칭찬이다. 칭찬인 거다.
이상한 오해하지 말자.
‘착한 생각. 착한 생각.’
“무(武)는 거대한 웅덩이와 같다. 쌓아 가면 쌓아 갈수록 많은 것을 포용하지. 만류귀종(萬流歸宗)이란 말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러니 지금부터 보는 것도 훗날 네 성장에 양분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 말과 함께 허도진인은 하나의 검술을 펼쳐 보였다.
느리면서도 빠르다.
느릴 때 느리고, 빠를 때 빠르다.
허나 그 검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알겠다.
‘원?’
[호오?]원을 그리고, 또 원을 그린다.
오로지 원으로만 이루어진 무공.
‘원지교량(圓之較量).’
오롯이 원으로 겨룬다.
검의 투로가 말하고 있다.
온몸으로 그것을 외치고 있었다.
감히 내가 평할 수 없는 수준으로.
청경과 공감각으로 살피고 있음에도 그 안에 담긴 원의 흐름을 셀 수가 없었다.
[저 녀석은 무당의 무(武)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 알고 있구나.]‘어? 그럼…….’
[그렇기에 문제가 생겼어.]그럼 내(장삼풍 사부)가 나설 부분이 없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사부님이 누구인가!
[집착은 족쇄에 불과한 것을. 순(順)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녀석이라 완성을 앞에 두고 눈이 좁아졌구나.]내가 볼 땐 완벽하게만 보이는 무공이지만, 장삼풍 사부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장삼풍 사부가 묘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투로 수련 좀 해 볼까, 우리 제자?]“하하…….”
직접 무공을 펼치는 걸 보여 주지 못하는 천상의 사부님들은 말로 무공의 투로를 가르치셨다.
자연히 어긋남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숨을 고르는 순간이며, 손끝 발끝의 위치, 시선의 위치, 몸의 중심. 그것들 하나하나가 다 잔소리의 대상이었다. 오로지 말로써 어긋난 자세를 교정하셨다.
덕분에 이제는 사부님들의 지시만으로 몸 움직이는 법을 깨달았다.
물론 지금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검.]“옙!”
어차피 이런 흐름으로 이어질 거란 건 짐작하고 있었다.
“검 좀 빌리자.”
“어…….”
허도진인의 검이 서서히 멈춰 가는 시점에서, 나는 옆에 있는 백무호에게 검을 요구했다.
이 타고난 천재 놈은 허도진인의 검에서도 뭔가 얻어내고 있는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백무호는 시선이 못이 박힌 채 순순히 검을 내밀었다.
조금 전 배운 파지법대로 쥐어봤다.
익숙하지 않은 파지법의 감각에 손바닥이 간지럽다.
[좌 이 보. 중심은 낮추고 시선은 앞으로. 흐름, 운신은 자연스럽게. 검을 그 흐름에 싣는다 생각하면 자연스러울 것이다.]그리고 내려오는 장삼풍 사부의 지시에.
[원을 그려라.]검을 뿌렸다.
***
허도는 연청운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봐서일까. 오랜만에 본 연청운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무애, 그 친구가 떠오르는군.’
친구의 젊었던 시절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허도는 연청운을 보면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친숙함에 마음이 동했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기꺼웠고, 서운했으며, 아쉬웠다.
그리고 그런 존재였던 연청운이 무당파에서 핍박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꼴을 보이기도 했다.
‘부끄럽구나.’
염치불고한 채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 역시 그에 대한 발로였다.
다행히 허도가 뜻한 대로(?) 이야기가 풀려 조금이나마 자신의 실수를 갚을 기회가 생겼다.
‘으음? 벌써?’
한데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연청운이 다짜고짜 검을 들고 나섰다.
깨우침이라면 방해하지 않는 것이 도리. 허도는 연청운의 검을 살피며 그 흐름에 맞춰 주었다.
연청운을 보고, 살피고, 맞춘다.
흐름을 따라 맞물려 검을 나눈다.
‘이 무슨!’
그 과정에서 허도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원……. 원이구나…….’
무당의 무공은 원지교량.
원으로서 겨루는 무공이다.
한데 지금 무당파의 무공은 너무 각박하다.
원으로서 상대의 힘을 흘려내는 게 아니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곡류에 가깝다.
그런 무공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뛰어난 무공의 근간이자 철학이다.
허나 허도진인이 생각하는 무당파의 본질과는 분명 거리감이 있었다.
그에 이상함을 느껴 나름 원의 무공을 이루고자 했고, 그 결정체가 대원태극검이었다.
원을 그리고자 하는 무공.
하지만 연청운이 지금 펼치는 검을 보니 알겠다.
‘집착이었어!’
원으로 겨루기 위해 원을 표현하려 했다.
그것이 부자연스러움을 낳았다.
반면 연청운이 그리는 검의 궤적은 달랐다.
원 안에서도 원이고, 원 밖에서도 원이다. 그렇기에 원을 그리지 않아도 원이다.
스스로 원을 그리고자 하지 않아도 원의 흐름을 만든다.
날 것 그대로의 본연.
마치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 어디인지를 콕 집어 말하는 듯했다.
‘아아!’
자신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허도는 자신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 족쇄가 있음을 알았고, 그 족쇄의 풀어 던지는 순간 자신의 미진한 부분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부족한 부분들이 채워지는 순간.
허도의 검은 더 이상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
“미쳤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백무호는 알 수 있었다.
완전해지고 있다.
갑자기 검을 잡고 나선 연청운의 수준에 맞춰 주기 위함인지 허도진인의 검은 이전보다 한결 편안해졌다.
그렇기에 살필 수 있었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향하는 것을.
미숙함이 완전함으로.
부족함이 완벽함으로.
그 검이 말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보고만 있는 백무호의 가슴이 시릴 만큼.
“원지교량.”
두 개의 검.
두 개의 원.
맞물려 어울리는 두 개의 검이 아름다운 원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