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94
93화 天上天下 하늘 위,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내 손에서 아름다운 원을 그리며 허도진인과 합을 맞춰 맞물리던 검의 흐름도 잦아들었다.
한바탕 거대한 태풍이 몰아치고 난 다음처럼 고요해진 가운데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연스럽게 검을 회수해 납검했다.
옛이야기에 나오는 서사시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멋들어진 모습이다.
아마도 그랬을 거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악! 하악! 주, 죽는 줄 알았네…….’
목덜미의 털이 죄다 곤두섰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은 나를 배려하는 기색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색은 옅어졌다.
깨달음을 얻어 무아지경에 빠진 허도진인에게서 나에 대한 배려가 옅어지자 남아있는 것은 자연재해를 연상케 하는 무엇인가였다.
그나마 나와 합을 맞춰 흐름을 이어간다는 의식만큼은 남아있었기에 간신히 마지막까지 검을 나눌 수 있었다.
‘아니, 그게 나와 흐름을 맞춰 주는 거였다고 해도 눈앞에서 그런 게 꿈틀거리고 있으면 무서운 건 당연하다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벽력탄으로 농환(弄丸)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저 살아남을 생각만으로 나를 완전히 내려놓고 장삼풍 사부의 지시에만 따라서 움직였다.
검을 움직이는 형(形)이라면 뼛속 깊이 새겨졌지만, 그 안에 담긴 진수는 조금도 얻지 못했다.
흉내 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깨달음은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간다고 했다. 나는 아직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다.
반면 허도진인은 스스로 깨달아 검을 휘둘렀다.
그 차이는 크다.
‘지금은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언젠가 이것이 내게도 의미 있어지는 날이 있겠지.’
검법과 권법은 다르다. 간혹 상승 경지에 이르면 무기를 들어도 그저 손의 연장선이 된다느니 운운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내 수준에서는 특히.
검과 적수공권은 서로 길이가 다르니 운용이 다르고, 간격이 다르니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르다. 특유의 거리감에서 나오는 장단점과 잡고 꺾는 것의 유무도 다르다.
무림에서는 좌수검을 쓰는 자를 두고 독랄하다는 말을 한다. 그 작은 거리감의 차이만으로도 사도라 몰아세울 만큼 싫어하는데 검을 들고, 들지 않고의 거리감이 아무 의미가 없을 리 없다.
상승무공의 영역이라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애초에 상승무공의 영역에서 승패를 가르는 가장 큰 요소는 거리의 제압이다.
다만 특유의 흐름을 담는 정도라면 공유할 수 있다.
조금 전 나와 허도진인이 나누었던 원지교량의 이치처럼.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다른 생각도 떠올랐다.
‘검이라…….’
무당파 속가제자 시절에는 기초도 떼지 못했던 상황이라 권법에 매달렸었고, 무당파를 내려온 뒤로는 사부님들에게서 권법을 배웠기에 권법을 사용해 왔다.
세분 사부님들의 무공을 종합적으로 활용하는 것에는 적수공권이 가장 적합한 면도 있었다.
‘써도 되지 않으려나? 소림…… 달마 사부 무공 중에서도 검으로 유명한 것이 있었으니까.’
언제 한번 상담해 봐야겠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나름대로 정리를 하는 가운데, 기식을 다듬으며 깨달음을 수습하던 허도진인이 눈을 떴다.
눈을 뜬 허도진인의 눈동자는 조금 전보다 깊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 깊은 눈이 나를 직시했다.
“검을 배운 적은 없다고…… 했던 것 같다만…….”
“예, 없습니다.”
“그럼 지금 그것은…….”
“무당에서 배운 바를 검에 담아 봤을 뿐입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손으로 둥근 원을 그렸다.
[잘한다, 내 새끼!]허도진인의 성취를 두고 말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꿰뚫어 보고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장삼풍 사부도 신이 나셨다.
“허어…… 허허……허…….”
감탄인지 한숨인지.
서로 분리되었다가 합쳐지기도 하는 두 개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허도진인께서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보이지만, 하나로 통합해 본다면 아무래도 나를 엄청난 기재로 보시는 것 같다.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진짜 내 실력만으로 보인 검법이 아니라 내심 찔렸지만.
“이런 아이를 자격이 없다 제적시켰단 말이지…….”
뿌드득!
나이가 지극하신 허도진인의 이 건강이 염려되는 소리가 신제현과 윤시후의 곡소리처럼 들렸다.
그렇게 몇 번이나 이빨을 가시던 허도진인이 나를 지그시 보시더니 뭔가 결심한 얼굴로 손을 내미셨다.
“받아라.”
“어어…….”
허도진인이 간곡히 부탁하며 내미신 것은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검이었다.
이분이 일생의 지기처럼 여기며 아껴 왔을 검.
본인의 송문고검을 내미셨다.
그 의미를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어르신…….”
“평생 오욕 한 점 없이 살고자 한 이 늙은이가 수치를 무릅쓰고 하는 일이다. 부디 받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사부가 제자에게 수여하는 것.
송문고검을 내린다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
다시 무당파의 제자가 되어라.
설령 무당파의 제자로서 도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더라도 무당파와의 인연을 다시 이어 나가자는 의미가 담겨 있음은 분명하다.
[그래! 그거쥐!]머릿속에서 장삼풍 사부가 좋아서 자지러지는 목소리가 울렸다.
[안 받고 뭐 하냐아아아!]머릿속이 짜릿할 만큼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는 장삼풍 사부의 반응을 보아하니, 말은 안 하셨지만 내가 제적당했던 일이 꽤나 마음에 걸려 왔던 것 같다.
‘나를 천마라 부르는 이화도 약간 영향이 있으려나?’
간곡하게 부탁하는 허도진인도 그렇고, 머릿속에서 무조건 받으라는 장삼풍 사부의 반응도 그렇고.
도저히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이걸 넙죽 받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작게 한 마디를 읊조렸다.
“……원시천존.”
“하하하하!”
내가 한 말은 도호(道號)였다.
불가에서 말하는 나무아미타불, 부처에게 귀의한다는 말을 도가 식으로 바꾸어 한 말에 허도진인께서 기쁨에 가득한 웃음을 터트리셨다.
만족스럽게 웃으시던 허도진인께서 내 손에 검을 쥐여 주시며 결의에 가득한 선언을 하셨다.
“걱정 말거라. 내 장문 사질 모가지를 비트는 한이 있더라도, 네가 다시 무당파에 돌아왔을 때는 네 앞길에 거치적거리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퍼뜩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 그러고 보니 이분 배분이…….’
내 기억이 맞다면 허도진인의 배분은 현 장문인보다 한 항렬이 높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문파의 대표인 장문인에게 예를 표하겠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장문인이 사백(師伯)이라 부르며 예를 표하는 분이다.
‘그럼 장문인을 사적인 자리에선 사형이라 불러야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장삼풍 사부와 달마 사부의 직계 제자인 내 배분은 이 세상 것이 아닌 수준이겠지만, 천상과의 관계를 밝힐 수 없다는 점에서 드러낼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드러낼 수 있는 부분도 어이없는 수준이긴 매한가지다.
뭔가 개족보가 되어 가는 느낌이다.
***
허도진인 같은 고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다.
그 여파가 작을 리 없다.
거대한 힘이 요동침을 느낀 사천당가의 가주 만독신군 당천기는 지붕 위에 올라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굉장하군.”
처음 나오는 것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기연이 닿아 상단전이 열리고 비로소 천지 소통의 기반을 막 갖춘 당천기의 무위는 사람을 벗어난 자의 경계라는 입신경의 초입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지금 느껴지는 것은 그 이상의 경지였다.
이전에도 자신보다 윗줄에 있던 고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 녀석이 뭔가를 전수한 걸로 보이는데…….”
감탄 다음에 이어진 것은 놀람이었다.
먼 거리였기에 명확하게 파악된 것은 아니지만, 앞뒤 정황을 보면 분명하다.
“허도진인, 천하십검의 필두에게 깨달음을 전한다? 이게 말이 되나?”
경악이라는 표현으로 바꿔도 좋을 성싶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현 상황을 부정 내지는 합리화하는 불신 어린 생각들이 미친 듯이 솟구치고 있었다.
허나 당천기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부정할 정도로 어리석은 이가 아니었다.
분명히 보았다.
“확실히…… 데릴사위 같은 걸로 잡을 놈은 아니군.”
당천기는 연청운을 처음 봤을 때부터 어떤 강렬한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세력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으로서의 느낌.
흔히 시류라 부르는 것이다.
“……올라타지 않으면 뒤처지겠다.”
괜히 연청운을 두고 영웅 운운했던 것이 아니다.
시류(時流), 시대의 흐름을 이끄는 자.
그런 자를 세상은 영웅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영웅이 탄생했을 때 선택받지 못한 이들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높은 곳에서 사천당가를 굽어보던 당천기는 엉망이 된 세가를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 년 묵은 가법의 폐해가 이것이라면…… 그래, 바뀔 때도 되었지.”
담을 수 없다면 옆에 서기라도 해야 한다.
연청운이 허도진인의 송문고검을 받아드는 모습을 보며 당천기는 결심을 굳혔다.
***
“겁나 좋아하네, 장삼풍 저 양반.”
“뭐, 좋아할 만하지. 보아하니 저 허도라는 녀석이 신선의 경지까지 오를 확률이 저 만독신군인지 당천기인지 하는 놈보다 높잖소? 게다가 제자 놈 신분까지 제 뿌리와 다시 이어지는 상황이기도 하고.”
의가를 대표할 신선을 만들기 위해 수작을 부렸던 대가는 어마무시한 일거리가 되어 편작과 화타에게 떨어졌다. 이후 몇 날 며칠을 야근으로 지새워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다.
그나마 천마에게 구매한 보패를 통해 연청운의 하계 생활을 보는 낙으로 버틸 수 있었다.
“허으…… 이거 나만 억울한가? 누구는 그 염병을 해서 간신히 한 놈 건진 대가로 고생길이 활짝 열린 상황인데.”
“꼬우면 신선 되든가.”
“어째 자네는 나랑 같은 기분이 아닌가 보이?”
두 신의가 서로를 흘겨보며 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화타의 이어진 말이 컸다.
“그나마 우리는 양반이잖소.”
“응?”
“천상이 인력난에 시달린 것도 몇백 년 됐지 아마?”
“몇백 년이 뭔가. 아예 신입이 안 들어온 세월이 그 정도지. 봉신대결계가 쳐진 이후부터 꾸준히 줄어들었으니 인력난 문제는 거의 근 천 년 가까이……. 아?”
대답을 하던 편작이 한 가지를 깨닫고 다시 연청운이 비치는 기물을 바라봤다.
“저거 보면서 눈 뒤집혔을 작자들이 천상에 얼마일 것 같소?”
“하긴.”
고작 며칠 사이에 신선의 경지에 오를 가능성을 간직한 선근(仙根) 둘을 만들어 냈다.
둘이라고 하면 적은 숫자처럼 들리지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이들에게 일손 둘이 늘어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눈 돌아갈 일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지 않겠소.”
장삼풍의 협박 아닌 협박으로 명계에서 죽은 자들의 기억을 살펴보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렇긴 하네. 솔직히 자네나 나나 비전은 제자 준답시고 날뛰는 장삼풍 그 양반한테 빨린 처지니 뭐라도 있어야 더 교섭을…….”
한숨을 쉬며 서류를 뒤집던 편작이 돌연 말끝을 흐렸다.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한 편작의 반응에 화타도 시선을 돌렸다.
“이거…….”
“대박까진 아니지만…… 연청운 저 녀석이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관련이 있으니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운 좋게도 뭔가를 찾은 두 사람이다.
“이걸 어디에다 팔아먹어야 좋은 값을 받으려나?”
“금오도는 어떻소? 아니면…… 곤륜의 서왕모도 연청운 그 녀석에게 꽤나 관심이 있다는 것 같던데.”
음흉한 웃음을 주고받던 두 신의가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연청운이 모르는 자리에서, 천상은 천상대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천상천하. 하늘 위, 하늘 아래의 흐름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