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47
제147화 – 그래.
내가 요구했다면 재수 없는 늙은이는 틀림없이 지난번처럼 마물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등의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일축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안진에게는 그러지 못하고 장황스레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아이를 풀어놓는 건 경솔하고도 무책임한 처사다. 왜냐하면 여전히 위험한 종자이기 때문이다. 네 아비가 어째서 그런 마장에 빠졌는지 아느냐? 그 아이에게서 배어 나오는 요사스런 기운에 침탈당해서였다. 천마의 마령이 이놈에게 넘어갔다고 해도 그 마물이 깃들었던 후과는 여전하단 말이다. 장담컨대 현재 도원이 든 이들 중 누구도 그 아이의 요기(妖氣)에 저항하지 못할 게다. 속인들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그러니 어찌 그 아이를 밖에 내놓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 그녀는 영영 그곳에 갇혀있어야 한단 말이야? 사부의 도력으로도 그녀를 구제할 방법이 없어?”
늙은이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고 있던 내게로 눈을 돌렸다.
“통하리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름 생각해둔 방안이 있다. 이놈이 천마의 마령을 온전히 복구해 토해내면 내가 참회동에 갖고 들어갈 참이다. 마령은 다시 그 아이에게 달라붙으려 할 테지만 저지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의 나는 무기력하게 아이들을 악령에게 빼앗겨야 했던 그날의 내가 아니니까. 더욱이 선사들의 정령이 나를 보호할 터이고.
천마의 마령은 완전체가 되기 위해 그 아이의 몸에 남아있는 요기를 흡수하려 들 터, 그때 그 아이를 빼낼 참이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 아이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터, 그것이 그 아이를 구할 유일한 길이다.”
그럴듯했지만 나는 늙은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설령 그의 의도대로 된다고 해도 ‘유일’이란 단어를 쓰는 건 억지였다. 그가 가능하다면 나도 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천마의 마정을 원상 복구한다는 건 내가 천지조화지경에 들었다는 뜻이었다. 신선이 된 내가 늙은이처럼 하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는가.
나는 내심의 표출을 삼갔다. 구태여 늙은이를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아까 그녀가 진이를 낳고 일시적으로 정신을 차렸을 때 중요한 내용을 들었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었소?”
나를 쏘아보며 늙은이가 동문서답했다.
“네놈이 나를 속이지만 않았던들 이렇게 멀리 돌아올 일이 없었을 터, 다시는 나를 기만하지 마라. 내 인내심은 이미 바닥에 이르렀으니 한 번만 더 나를…….”
늙은이의 말을 자르며 안진이 내 역성을 들었다.
“왜 애꿎은 선을 겁박하고 그래? 선한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천마의 마령을 넘겨받은 걸 숨긴 것도 사부가 무서워서 그랬을 거야. 대체 무엇 때문에 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야? 사부답지 않게. 사부가 평소엔 한없이 인자하고 봄 햇살처럼 온화한 성품이라고 해도 선은 코딱지만큼도 안 믿어. 나라도 그러겠어. 매번 이렇게 살벌하게 구니. 그나저나 중요한 내용이란 건 뭐야? 그들이 천마의 마령을 취하게 된 과정일 테지? 제발 제마기(制魔氣)는 그만 뿜어내고 얘기나 해줘.”
늙은이가 마지못해 나에게 발했던 무시무시한 압기를 거두었다.
“그 아이들은 천마의 발원지라는 전설을 품은 고원으로 갔다. 연아 말로는 준아의 원이었다더구나. 마인들과의 충돌을 피해 광활한 고원을 배회하던 중 두 아이는 땅의 갈라진 틈에서 새어 나오는 기괴한 마기를 감지했다. 마치 꺼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아귀들 같았다더구나. 공포에 휩싸인 연아는 그만 돌아가자고 준아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준아는 말을 듣지 않았다. 연아에게 기다리라고 하고는 홀로 마기에 접근했다. 어쩔 수 없이 연아도 뒤를 따랐다. 그러다 한순간에 마기에 침습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간단해? 그냥 무지하게 재수가 없었던 거네?”
“그렇지 않다. 그 아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참극을 피할 수 있었단 말이다.”
“무슨 소리야?”
“마령에 씌었을 때 그 아이들은 둘 다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지 파악했다. 그리고 그때는 분리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연아는 마령을 떼어놓고 도원으로 돌아가 내게 알리자고 했다더구나. 하지만 준아가 반대했다. 자기가 처리할 수 있다면서. 그 아이의 고집을 꺾지 못한 연아는 하는 수 없이 마령을 받아들였다. 그 시점만 해도 도력으로 마기를 통제할 수 있었기에 위기의식이 크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도권이 바뀌었다. 그 시점에서도 마지막 기회는 있었다. 도력이 손상되겠지만 마령을 뿌리칠 수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준아는 끝내 파멸의 길을 택하고 말았다. 연아까지 끌고서.”
“그이가 왜 그랬대?”
“…….”
“그녀가 말 안 해줬어?”
“……돌이키기엔 늦었으니 악마가 되어서라도 나를 이겨 먹고 싶어 했다더구나. 나는 그 아이에게 그런 마음이 있음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
나는 비로소 나에 대한 늙은이의 적의의 원천을 알았다.
제자의 내밀한 욕망을 알게 된 늙은이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의 판박이인 나를 그와 동일시했을 것이었다. 안진의 말마따나 아무 잘못이 없는 나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처사였으나 아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물론 나는 늙은이의 전언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는 상당한 진실이 포함되어 있는듯하나 여전히 석연치 않은 점이 여럿이었다.
쌍둥이, 기실 이것도 확실치는 않지만 아무튼 두 사람은 어째서 도원 귀환을 앞두고 마원으로 갔을까.
거기서 천마의 마령을 발견했다는 것도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런 게 우연일 수 있을까.
늙은이의 진술 중에서 무엇보다 신뢰도가 떨어지는 건 내 어머니의 이지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는 그녀가 난산 끝에 안진을 낳고서 일시적으로 온 정신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것이 유일한 경우였다며.
틀렸다. 내 어머니는 그전에도 정신을 차린 적이 있었다. 적어도 한 번은.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특정한 장면이 아니라 꿈결에서 들리는 듯한 아련한 음성이었다.
음성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불문가지였다. 선친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유명을 달리했으니 천지간에 나를 아들이라 칭할 이는 한 명뿐이었다.
물론 환청일 수도 있었다. 노인네는 내가 갓난아이였을 때 나를 참회동에서 빼냈다고 했다. 말귀를 알아듣거나 기억에 담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내 심혼에 새겨진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라 실재했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저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내가 최단 시간 내에 천지조화지경에 이르러 신선이 되고자 하는 원을 세운 것도 하루빨리 참회동에 갇힌 이를 구출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제 그 원을 실현할 날이 머지않았다.
내 선력과 마력의 합은 곧 재수 없는 늙은이의 도력을 능가하게 될 터였다. 그날이 오면 늙은이는 더 이상 모자 상봉을 막지 못할 터였다.
안진은 재수 없는 늙은이가 털어놓은 비사를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모양이었으나 나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의구심이 점점 커졌다. 늙은이가 일부는 빠뜨리고 일부는 허위나 조작으로 때웠을 것 같은 느낌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렇더라도 큰 틀은 사실일 듯싶었다. 설마 늙은이와 내 부모가 그렇게나 밀접한 관련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충격도 상당했다.
나는 이 얽히고설킨 인연의 결말이 아직 나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 이야기의 끝을 내는 건 늙은이가 아니라 내 몫이었다.
***
늙은이는 마지막까지 참회동으로의 인도를 거부했다. 안진이 집요하게 졸라댔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우리 힘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하나는 안진이 참회동의 소재를 감지할 수준까지 도력을 키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가 늙은이의 저지를 뚫고 들어갈 만큼 강해지는 것이었다.
안진은 몰라도 나는 두 달 내에 원하는 무위에 도달하리라 낙관했다. 다만 그때라도 어머니를 구출하는 건 어려울 터였다. 내 무력의 절반은 마력이기 때문이었다. 하여 참회동에서는 맥을 못 출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쩌면 안진의 선친처럼 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늙은이 말대로 광기에 젖은 폐인이라면 현실을 수용하고 완결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 내 기원대로 정신이 멀쩡하다면 완전히 다른 국면이 전개될 터였다.
천공에 갑자기 두툼한 먹구름들이 몰려왔다. 사막의 하늘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거침없이 일광을 뿌리며 모래 언덕들을 달구던 태양이 수줍음 타는 소년처럼 구름 뒤로 숨었다.
재수 없는 늙은이와 작별을 고한 안진과 나는 도원으로 다시 내려가지 않고 모처럼 그늘진 모래 바다 위를 내달렸다. 늙은이가 안진을 붙잡지 않은 건 다소 의외였다. 아직도 그녀가 내 감시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거라 믿는 걸까.
어쨌거나 나로서는 그가 그녀를 잡아두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 누이는 일이 잘못 풀릴 시엔 인질 노릇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였다. 솔직히 나는 그녀에 대한 내 정이 늙은이의 애정보다 진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실은 그 반대였다. 만약 염왕이 출현해 목숨을 바쳐야만 안진을 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늙은이는 서슴지 않고 제 심장을 내놓을 것 같지만 나는 선뜻 그러겠다고 할 성싶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안진의 목을 틀어쥐고 늙은이를 협박할 수는 있어도 늙은이가 그녀를 도구 삼아 그런 짓을 벌이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안진이 절대적으로 확신하는바, 그녀에 대한 늙은이의 애정은 진짜였다.
각자의 생각에 빠진 우리는 말없이 질주를 계속했다.
반 시진가량 이어진 무거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안진이 짐짓 밝은 목소리로 대화를 개시했다.
“네 성 말이야, 선. 이제 안(安)으로 바꿔야 하지 않아?”
내가 대꾸를 주지 않자 안진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나는 사부가 어머니 성을 붙여주었다지만, 너는 양쪽이 다 안(安)이니 당연히 안씨가 되어야 하잖아. 안 그래?”
“그냥 오(吳)가로 남으련다.”
“어째서? 마인지로를 택한 부친에 대한 불만 때문에? 하지만 그이의 유지를 받들어 마원을 사람 사는 땅으로 개혁하고 있다며?”
“그분과는 상관없다.”
“그러면 왜 그러는 건데?”
“할아버지와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뭐? 안 그래도 누구 걸 따랐는지 궁금했는데, 상선 어르신의 성이 오(吳)였어?”
“그래. 정확히 말하면 할아버지의 사부의 성이었지만. 사조는 또 그의 사부에게서 그 성을 물려받았을 테고.”
“그럼 공공문의 일맥은 전부 오가겠네?”
“확실치는 않다. 할아버지의 사부까지는 틀림없지만.”
“그렇다면 굳이 오씨를 고집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그러고 싶다.”
“왜?”
“…….”
“그래, 말하지 않아도 알겠어. 상선 어르신과는 정이 정말 깊었구나. 이해해. 나도 사부하고 그러니까. 실은 나, 사부가 자기 성을 물려주지 않아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진인의 본명이 뭐냐?”
“장삼(張三). 웃기지? 천하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잖아. 그래도 나는 장씨가 좋았어. 사부의 성이니까. 그래서 어릴 땐 안진이 아니라 장진이 되게 해달라고 시도 때도 없이 매달리곤 했어. 하지만 내 말이라면 깜박 죽는 사부가 그 청만은 한사코 물리쳤어. 따지고 보면 대단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완강하게 버텼는지 몰라. 지금도 모르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물어보는 건데. 다시 갈까?”
“싫다.”
“그렇게 정색할 것까진 없잖아. 사부, 너무 미워하지 마, 선.”
“미워하지 않는다.”
“정말?”
“그래.”
정말이었다. 오늘의 만남으로 늙은이에게 품고 있던 증오와 적의가 거짓말처럼 엷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경계심마저 거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더 강해졌다. 나는 어머니를 볼 때까지, 그리고 그녀에게서 진상을 직접 들을 때까지 결코 그를 믿지 않을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