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23
제23화 – 진아를 살려내라!
나는 제일 먼저 뇌리에 떠오른 질문부터 입 밖으로 내보냈다.
“어째서 어제 손을 쓰지 않았소?”
“그러려고 했네만, 그럴 수가 있어야지.”
“뭔 소리요?”
“자네에게 시비를 걸어 옥신각신하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격을 날려 청부를 완수하려 했는데 제대로 운을 떼기도 전에 자네가 살막의 살수들이 노리고 있다며 내게 호위를 부탁하고는 운공에 들지 않았던가? 기가 막히고 코도 막혔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를 죽이러 온 나한테 호위를 맡기다니. 그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네.”
“기가 막혀서 손을 못 썼단 말이오?”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다른 이유가 있었지.”
“그게 뭐요?”
“나는 그냥 자네가 콱 마음에 들었네. 아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닐세. 홀딱 반했다고나 할까. 그런 기분은 사십여 년 전 청주 양가장의 사부인(四婦人)을 본 이후 처음이었네. 아아, 그립구먼. 살아있다면 그녀는 이미 팔십 줄에 들어선 노파가 되었을 테지? 그래도 여전히 어여쁘리라 믿어 의심치 않네. 그녀의 입술은 내가 지금까지 맛본…….”
“적당히 하시지.”
“아! 미안하네. 고자인 자네 앞에서 무용담을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네만 말하다 보니…….”
“누구더러 고자래? 물건도 없는 주제에.”
“경우가 다르지 않나? 나는 원을 이룬 기념으로 스스로 잘라냈지만 자네는 애당초…….”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고자가 아니오.”
“그런가?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헛소문이오.”
“이보게. 고자는 부끄러운 게 아닐세. 오히려 수련을 방해하는 마귀를 접근조차 못 하게 만드니 무인에게는 축복이나 다름없는 재앙이라네. 내가 자네 같았으면 먼 길을 돌아올 필요 없이 진즉…….”
“아, 됐소. 하던 얘기나 합시다.”
“그럼세. 근데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이런 제길.
괜한 데 열을 올리다가 나도 까먹었다.
***
기억을 더듬은 나는 산으로 올라간 배를 다시 물에 내려놓았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의 살수는 없는 거요?”
“미안하지만 그건 아닐세. 살막은 청부 대상을 염왕전에 보낼 때까지는 절대로 살령을 철회하는 법이 없네.”
“당신이 일인자라면서?”
“그렇긴 하네만, 전권을 행사하는 주인과는 거리가 멀다네. 다만 내 직권을 이용해 자네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는 있네.”
“어떻게 말이오?”
“자네 건을 내가 전담하는 거지.”
흠, 묘안이군. 그리되면 사실상 종결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석진이 내 착각을 깨뜨렸다.
“방심하지는 말게나. 되도록 결행을 늦추겠지만 무한정 끌 수는 없네. 잔소리꾼들이 수시로 달달 볶을 테니까. 그리고 솔직히 나 자신도 나를 믿지 못하네. 워낙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위인이라서 말이지. 오늘처럼 자네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가도 언제 회까닥해서 자네 목을 노릴지 모르네. 그러니 경계를 늦추지 말게나.”
이래서야 말짱 꽝이 아닌가.
불시에 나를 죽이겠다고 해놓고는 석진이 태연스레 모순된 언사를 내뱉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가 무사해서 천만다행일세. 오는 내내 이미 끝났을 줄 알고 간을 졸였다네. 자네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고 있었네만 창천검을 상대로 버티다니, 실로 대단하이. 특히 신법은 참으로 경이로운 수준이더구먼. 그렇더라도 내가 아니었으면 결국은 그의 검에 걸려 비명횡사했을 걸세. 자네가 온전한 건 다 내 공일세.”
내가 구명지은에 대한 감사를 표하지 않고 침묵하자 눈살을 씰룩이더니 석진이 별안간 손을 달달 떨었다.
“그 흉험했던 검을 생각하니 아직도 식은땀이 나는구먼. 자네를 살리려다 골로 갈 뻔했지 뭔가.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헷갈렸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위장일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눈앞의 괴짜가 심히 마음에 들었다.
창천검과 난전을 벌이던 중 타올랐던 청화 때문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단어로만 존재한다고 여겼던 감정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 가장 강렬하다는 전우애였다.
나는 이 사내가 살막의 인사라는 게 못내 아쉬웠다.
***
석진의 공치사를 듣기 싫어 작별을 고했다.
“이만 가보겠소.”
석진이 내 팔을 잡았다.
“어딜 말인가?”
“알아서 뭐 하게?”
“그야……, 그러니까…….”
“나를 따라와 죽이게?”
“결코 아닐세. 자네도 눈치챘을 테지만 나는 자네가 어딜 가든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네.”
“그럼 그러든지.”
“그러지 말고 알려주게나. 당분간은 제일살령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자네의 벗으로 지낼 작정이니. 물론 약속은 못 하네.”
기가 찼다. 대체 사족은 왜 다는 건가.
나는 석진이 물고 늘어지는 게 귀찮아 행선지를 밝혔다.
“보양으로 돌아갈 거요.”
석진이 도끼눈을 치떴다.
“뭐라고? 제정신인가? 정검문이 자리한 송천(松川)은 보양에서 지척이나 진배없네. 설령 그들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광마도가 자네를 찾아 보양에 들이닥칠 걸세. 열흘은 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네. 그 미친 칼잡이가 낮밤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을 했다면 사나흘 후에 당도할 수도 있네. 그러니 지금 보양으로 가는 건 자살행위일세.”
“내가 알아서 하겠소.”
“혹시 자네에게 우군이 있는가?”
“없소.”
“그렇다면 가지 말게.”
“싫소.”
“하아, 고집하고는. 그러면 나도 같이 감세.”
“어째서?”
“기껏 살렸는데 다시 죽는다면 나만 억울하지 않은가?”
괴상한 논리였지만 나는 반박하지 않고 진의를 물었다.
“정말로 나를 따라갈 거요?”
“남아일언중천금일세. 나는 한 번 내뱉은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는 사람일세.”
“진짜 이유가 뭐요?”
“자네를 죽여도 내가 죽일 걸세. 다른 자들에게 넘길 순 없네.”
괜히 물어봤다.
“따라다니든 말든 맘대로 하쇼. 하지만 기회는 한 번뿐임을 명심하쇼. 살수 노릇을 하려 드는 순간 가차 없이 오절도 꼴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찰나의 순간 석진의 눈동자에 살벌한 광기가 번들거렸다. 그러더니 히죽 웃었다.
나도 씩 웃어주었다. 우리는 죽이 잘 맞았다.
***
석진은 양 관주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녀가 알면 까무러칠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녀와는 무슨 사이요?”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일세.”
“그녀와 동침했소?”
“그러려고 했지. 하지만 춘심이는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였다네. 그렇더라도 내가 존경하는 이의 정인이 아니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찍었을 걸세. 지금이야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시들해졌지만 한창때의 춘심이는 굉장했다네. 내 평생 그렇게 승부욕을 발동시키는 여자는 다섯 손가락……, 아! 못 들은 걸로 하게나. 그리고 방금 들은 얘기는 절대로 춘심이, 아니 혜령이한테 고자질하면 안 되네. 그랬다간 내 털을 다 뽑아버리려 들 걸세.”
“그녀의 정인이 누구요?”
“말할 수 없네.”
“대체 뭔 비밀들이 그리 많소?”
“사돈 남 말 하는군. 자네야말로 비밀의 보고가 아닌가. 오죽하면 별호조차 신비공자인가 말이지. 내가 살행을 보류한 데는 그 부분도 큰 몫을 차지하네. 자네를 죽이고 나면 호기심을 해소할 방도도 사라질 터이니.”
“그러면 앞으로 나에 관해 입만 다물고 있으면 당신은 신경 쓸 필요가 없겠군.”
“어라? 얘기가 그렇게 되나? 방금 한 말 취소일세. 궁금증이 심해지면 강제 수단을 동원할 가능성이 농후하네. 그러니 그 지경에 이르기 전에 순순히 부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걸세.”
뭐라는 거야, 이 인간이.
석진과 흰소리를 주고받으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주태와 헤어졌던 보양 외곽의 주화산에 이르렀다. 해의 위치를 보니 정오 어림이었다. 잘만 하면 자시가 오기 전에 건곤기의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었다.
***
보양의 초입에서 석진과 갈라졌다.
그는 전서구를 날릴 수 있는 곳을 찾아 도처에 흩어진 친인들에게 긴급서신을 보낼 것이라 했다. 이르면 사나흘, 늦어도 대엿새 후면 든든한 방수들이 도착할 거라며 자신만만해하는 그에게 몇 명이나 올 것 같으냐고 물었다.
“글쎄, 다들 이런저런 사정들이 있을 터이니 숫자를 확언하긴 어렵구먼. 그러나 생사를 다투는 급한 일이 없고 내 서찰이 제대로만 전해진다면 열세 명 모두 올 거라 장담할 수 있네. 아무리 못해도 절반은 넘을 걸세. 나보단 못하지만 다들 나름 강호에 무명(武名)을 떨친 강자들이니 우리에겐 천군만마가 될 걸세.”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석진에게 위화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나와 더불어 광풍혈사대의 이리 떼와 맞서 싸우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
대로를 따라 걷던 나는 서서히 행인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저자에 이르렀을 때는 나를 주시하는 눈들이 수백 쌍에 달했다.
나는 일부러 혼잡한 번화가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협’이니 ‘여의공자’니 하며 내 별호를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귀를 간질였다. 얼마 가지 않아 일천에 육박하는 군중이 내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 수는 점점 더 불어났다. 입이 근질거렸으나 조금 더 기다렸다. 듣는 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벌써부터 자극이 왔다.
나에 대한 호감을 만면 가득 드러내는 이들은 주로 여인들이었다. 사내들 중에서도 호의적인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보양의 민초들에게 나는 혜성과 같이 등장한 무림의 신성이자 악당들을 징치하는 협객으로 보일 터였다.
한마디로 젊고 잘 생기고 정의로운 영웅인 셈이었다.
나는 군중이 발산하는 긍정적인 기운을 만끽했다. 아직 청화가 피어오르지는 않았으나 잠시 후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불러일으킬 연설을 시작하면 불이 붙을 터였다. 그러면 순식간에 부족했던 양을 채울 수 있을 것이었다.
건곤기가 균형을 이루면 창천검에게 일방적으로 밀릴 리가 없었다. 더욱이 내 기감은 팔 단계의 고지가 머지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사실 봇물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팔 단계에 올라서기만 하면 굳이 선령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창천검을 압도할 수 있을 터였다.
새벽에 확인한 그의 무위는 현재의 나보다 반 뼘 정도만 높을 뿐이었다. 새로운 경지로 도약한 나에겐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게 뻔했다.
돈이 돈을 부른다고 사람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상한 비유인가?
아무튼 내가 터를 잡은 후 일각도 지나지 않아 저자의 중심부라 할 삼거리엔 구름떼처럼 몰려든 군중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족히 오천 명은 될 듯싶었다.
허험!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은 나는 본격적인 연설에 앞서 내 소개부터 했다.
“나는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오선이라고 하오.”
환호성을 기다렸지만 모두들 숨을 죽이고 나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쩝.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오늘 내가 여러분 앞에 선 것은 강호에 나온 이유를 알리기 위함이오. 이미 짐작한 분들도 있을 터이지만 나는 선량한 이들을 괴롭히는 악인들을 잡아…….”
이 대목에서 나는 말을 끊어야 했다. 뜸을 들임으로써 효과를 높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내가 연설을 멈춘 건 방해를 받아서였다. 내 출사표를 막은 이는 절구통 같은 몸매의 중년 여인이었다.
“이 악적! 진아를 살려내라!”
나는 말리는 이들의 손을 뿌리치고 내게로 달려드는 여인의 낯짝이 전날 학관에서 끌고 왔던 네 악동 가운데 한 놈과 판박이인 것을 알아차렸다. 필히 그놈의 어미일 테지.
여인은 내게 닿지 못했다. 그녀의 동행으로 보이는 남녀에게 제지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만류하긴 했지만 그들의 눈초리도 사납기 그지없었다. 다른 놈들의 부모들이리라.
나는 미간을 모았다. 계획했던 바가 초장부터 어그러져서가 아니었다. 내 신경을 건드린 건 구경꾼들 속에 섞여 있던 노파였다.